"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러니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
1)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이며 실체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실체 하는 영적인 존재인가? 라는 토론이 교리적인 연구로 계속 되어 왔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죄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 하도록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지로 행하는 행동입니다. 라 하였으나 실지로 의지의 행위라고 볼 때 이것은 육체의 적극적인 행위이므로 악이라고 볼 수 있고, 반드시 행위로 드러난 것만을 죄라고 단정하는 것인가? 아직 행위를 드러내지 않고 죄를 행하기 위해 대기상태에 있는 마음은 죄라고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행위는 영혼으로부터나 육체로부터 의지가 마음반영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마음에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것은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가졌고, 육체에서는 어떤 자극에 의해 반사적으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감각으로 말미암은 의지가 반영되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존재하는 사람으로서 행위를 드러내는 구조입니다. 육체의 오감이나 영혼의 감성을 통해 지성에 반영된 표상을 선재 하는 지식이 조명하여 생성한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하여 의지를 일으켜 전인의 마음에 반영하여 마음에 대기한 상태에서, 마음의 결정에 의해 행위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행위를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행위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의지의 근원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이므로 의지의 본질은 곧 지각을 가진 지식이고, 이 지식이 곧 행위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는 지식이고 이 지식이 지각을 갖고 의지로 인하여 마음에 반영되어 인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이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간음이라는 구체적인 지식이 이미 마음에 자리를 잡았고, 그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어 감성에서 지각을 갖고 의지로 마음에 반영되어 아직 행동으로 드러낼 준비된 상태로서 전인으로 이미 인식된 상태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죄를 지을 생각만 지니고 있을 뿐이지 아직 육체의 행위로 악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지성에서 이미 죄를 생성하였고, 그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위로 드러내기 이전에 지성으로부터 생성하여 마음에 반영된 것으로도 죄를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죄는 의지를 일으키기 이전에 이미 영혼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으로 존재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죄 곧 그것을 행하여 악이 되는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었고, 그 죄를 감성에서 감각되어 지각을 가진 것이라면 죄는 영혼에서 충분히 경험된 것이고, 그 경험된 지식이 결과적으로 행동으로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심히 불평을 하였고 분노하였습니다.
안색이 변하여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얼굴은 떨어뜨리고 골똘히 생각하면 마음에 숨기고 있는 어떤 것을 행할 것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이 감성으로 지각을 갖고 마음에 반영된 지식으로 인해 어떻게 그 지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또 다른 지식을 찾는 지성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하여 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4:6~7)”라고 하시면서 가인의 마음에 있는 것을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고 악을 행하기 이전에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는 말은,(chatta'a 핫타아). 죄 sin, 죄가 되는 일 sinful thing.' rabats 라바츠). 눕다 lie down. (petach 페타흐). 문간 opening, 출입구 doorway.)로서 죄가 문에 누워서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가인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벨을 죽일 의지를 일으켜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이 “아벨에게 해를 끼치려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었으며, 마음은 의지를 일으켜 행위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무엇이 가인의 마음에는 분함 (하라) 을 일으켜 그의 몸이 달아올라 열을 내게 하여 안색이 변하였는지, 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시고 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은 원인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1. “아벨에게 해를 끼치려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지식”
사람은 지식으로 행동하지만 동물들은 감정에 의해 감각적으로 행동합니다. 사람도 감정에 의해 행동을 하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지식에 의해 조절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지식에 의해 행동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감정에 의해 행동을 하지만 그 감정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벨에 대한 악한 감정이 일어난 원인은 하나님께 드린 자기 제사를 받아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질투와 반발 의식이었습니다. 이런 의식은 가인의 자기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자기지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은 어떤 방법으로든 그 지식, 곧 아벨을 해치려는 구체적인 행위를 하려는 지식을 가질 수 있었는지,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해치려는 지식"이 그의 영혼에서 작용할때 아벨을 향한 질투와 하나님을 향한 강한 반발심이 솟구쳐 그를 흥분시켰고 이렇게 흥분시키는 가인안에서 일어나는내적 현상은 영혼의 지성에서 육체에 반영해주는 지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영혼의 지성에는 이미 그 지식이 생성되어 있었고 그 지식이 가인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적극적으로 육체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의 영혼은 이 지식을 어떻게 생성하여 가질 수있었는지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아벨에게 해를 끼지려는 지식"은 가인의 영혼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아무런 동기도없이 생성하여 가진 것은 아닙니다. 본래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지식이라도 그 지식을 조명 받은 일이 없이 스스로 생성하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가운데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어떤 지식이든지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없고 모든 지식은 직 간접적인 경험이 그에게 지식을 조명하여 줌으로 생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악한 감정을 드러내는 살의를 지각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경험을 가졌거나 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가인이 미워하는 마음에 의해 살인까지 했거나 죽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고 폭발한 미움을 억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우발적인 행동이 살인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행동의 근거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적용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경우에는 가인이 행한 그 행위에 대해서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경험되지 않은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그 행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사람에게 생겨났으며 그 행위 할 수 있는 동기에 관한 지식의 근거를 바탕으로 이해해야 하기때문입니다.
가인은 자기 안에 아벨을 죽이려는 구체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었고, 그때,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영혼 안에 새겨진 지식이 아벨을 죽이려는 살인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이라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가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살의에 관한 의지는 지식으로부터 얻어진 것인데 가인이 이런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나 경로를 통해서든지 직 간접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경험하지 않은 행동들이 자신에게서 생겨났다는 것은 사람이 피조물의 한계를 넘는 자율적 존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가진 지식은 “미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미움은 영혼의 지성에서 미움으로 말미암은 결과가 무엇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을 마음에 반영하여 나타난 의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의지가 어떻게 영혼으로부터 이처럼 상상할 수 없고 혐오스러우며 무책임한 결정을 마음에 반영 받게되었을까요?
타락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이 얼마나 빈약합니까?
경험하지 않은 수만은 일들, 알지 못하는 많은 지식들, 지식들 간의 오성 작용의 빈약함, 이 모두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어두운 상태인데, 이런 영혼의 상태에서 아벨을 해치려는 야수와 같은 잔혹한 지식을 어디에서 얻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은 당시 사람들이 두르고 있는 복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가인은 분명히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그들이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했을 때 짐승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 가죽옷을 얻기 위해 동물이 희생을 당해야 했고 , 동물을 죽이는 일은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많이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가인이 태어나서 한 두 번은 동물을 잡는 아담을 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사하는 아벨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가인이 본 것은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하며 잔인하게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죽음이라는 지식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생명이 끊어지고 피를 흘리며 잔인하게 죽어가는 처참한 것을 보았으며, 이런 고통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 생명으로부터 끊어져 썩어 흙속에 파묻혀 버리는 비참한 상태를 보았을 것입니다. 가인은 이 장면을 통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생명체의 고통을 경험하므로 지식을 얻었고, 그 지식은 미워하는 아벨에게 고통을 주려는 잔인한 의지로 마음에 반영되었으며, 그것을 실행하려고 기회를 살피며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라는 경고를 들은 것입니다.
2, 분노로 인하여 몸이 달아올라 몸에 열이 오르고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인체의 뇌를 연구한 생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은 사람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뇌 속에 있는 신경전달 물질의 영향에 의해 감각을 느낄 수 있고, 느껴지는 감각의 종류에 관한 지식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생물체의 본능적인 지식이라고 합니다. 언어도 이에 해당하여 사람은 본능적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진화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몸이 달아올라 안색을 분하게 할 정도의 표정을 드러내는 것은 미움과 질투의 생각이 몸을 달아오르게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죄를 행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3, 가인의 마음은 거절된 제사에 대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치아니하면”.
먼저는 하나님께 대하여 “선” 을 행치아니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토브)의 완료 시제로 쓰이는 말로 선하다, 즐겁다, 라는 의미입니다. (참고 : 그러나 이것은 "선"의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훗날 "선"에 관하여 설명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가인에게 있어서 즐겁지 않으며, 선한 것이 아니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이런 제사를 아주 많이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제사는 자주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불평과 투정을 부리며 예배를 즐겁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드리며, 주일을 마땅히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변폐스럽거나 혹은 자기의 일을 방해하는 번거러운 일로 생각하고 억지로 시간을 때우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제사였으므로 당연히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인이 바로 이런 마음으로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반대로 가인은 아주 열심히 성실을 다해 드렸을 가능성이 훨씬 더 가능합니다.
가인은 제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담이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목격했고,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을 잡는 장면도 목격했습니다. 그런 목격은 가인에게 있어서 간접 경험이었고, 그것이 지식으로 영혼의 지성에 정리되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가인은 아벨을 죽일 행동을 하기 이전에 죽일 마음이 있었고, 그 이전에 분노함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불경스런 예배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죄의 시작이 불경스런 예배를 드리기 이전에 그의 마음에서 벌써 하나님을 향한 적의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온전한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지 않았고, 불편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전혀 즐겁지 않았고,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하게 의무감에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의 선에 이르지 못함으로 하였고 그것이 죄를 유발하고 그 죄가 점점 자라 흉악한 악을 행하기에 이르는 것처럼 최초의 죄는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마음에서 죄가 일어나는 것을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의식의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살펴보면 그 근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나타난 죄악은 의지가 마음에 반영된 영혼의 지성의 판단에 의한 결론에 의해서 일어나고 영혼의 지성의 판단은 육체의 오감에 의한 감성에 의한 것이고 육체의 오감에 의한 감성은 육체가 필요로 한 어떤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사였습니다.
2) 죄와 제사
제사는 무엇이며 왜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가 필요했었는가? 제사도 역시 지식의 하나이며 아담이 하나님께 제사 한 것을 곁에서 보고 배운 것일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행동하는 모든 것은 먼저 아담으로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그들 스스로 개발한 행동일 것이므로 근원은 가인으로부터 온 것으로 모든 행위들을 영혼의 지성에 새겨 두었다가 그들 스스로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제사는 동물을 잡아 죽여 가죽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행하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물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동물이 자기의 생명을 다하여 죽었다가 어떤 환경에 의해서 가죽만 남게 되므로 그것을 의복으로 만들어 입었을 것인지 아니면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을 죽여 가죽을 만들어 입도록 허락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추측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이 불편하게 보시고 동물을 죽여서 잡아 가죽을 만들어 옷을 입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옷을 만들어 입기 위해 동물을 죽인 것이 계기가 되어 필요에 따라 동물을 잡을 때마다 아담은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든 아니면 어떤 은혜와 동물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하는 그 어떤 행위를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도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본 행위에 따라 제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동물을 잡아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목적은 아닌 그들의 산업을 시작하여 거둔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고 하나님 뜻대로 어느 것은 받고 어느 것은 안 받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며 가인의 상태가 제물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자면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동물의 피가 필요한 것일 것이지만1) 의복을 입혀 부끄러움을 가리운 것이므로 사도가 말한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지나친 억측으로 볼 수밖에 없고, “율법을 쫓아”라는 말을 앞세워 한 것으로 봐서 사도의 의중에는 아벨이 드리는 제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의 종합적인 면을 볼 때 죄 사함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아벨의 제사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피흘림이 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있으나 더 중요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말씀으로 가인의 상태를 말씀하심으로 가인의 마음 상태와 자세, 지극히 형식적인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드리는 제사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확실히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드린 제사의 의미가 더욱 분명히 이해될 때 죄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상한 심령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편 51:17”
아담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짐승의 가죽옷을 지어 주신 것을 제사로 바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아담은 자신이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그 놀라운 순간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 피조물들에 비친 하나님의 아름다움, 만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 삶을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에게 있어서 무한한 영광이었던 시간들이었을 것이지만 에덴동산을 떠나 삶의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생활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의 삶이었습니다.
타락한 우리의 생각으로는 아담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슬픔에 기쁨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가질지 모르지만 실지로 아담은 하나님과 누렸던 그 순간이 에덴동산에서 경험한 어떤 즐거움의 낙을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을 누렸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은 하나님을 그리워하였고 동물을 잡고 가죽옷을 지을 때마다 피를 쏟아내고 죽어가는 동물 때문에 가슴은 무너지고 찢어졌을 것이며, 하나님께 속죄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을 것입니다.
이런 아담의 모습을 가인과 아벨은 목격했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면서 에덴동산을 동경하며 살았습니다.
아벨에게서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던 아담의 모습이 드러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하는 아벨의 마음은 아버지의 아픔을 확실히 느낄 수는 없으나 하나님을 떠나 괴로운 아픔 가운데 살고 있는 슬픔이 베어 나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고 농사의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가져와서 제사를 합니다.
농사하는 사람이 처음 열매를 거둔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농사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마음은 기쁜 마음입니다.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곡식의 열매가 싱그럽게 익어 추수를 하게 된 마음은 풍성하여 부족함을 모르는 기쁨입니다. 가인의 마음은 상한 심령이나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풍성하고 기쁘고 즐거우며 제사를 드리는 제물을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그 마음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만족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뿌듯하고 기쁜 마음을 가졌을지, 아버지 품을 벗어나서 자신이 드리는 지나친 만족감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지나친 자기 과시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곡식의 열매는 자기의 수고와 땀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었고, 자기의 땀의 열매를 풍성하게 드린다는 자신감이 넘쳐 있는 마음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도 없고 왜 하나님께 제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하는 즐거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제사는 마음이 찢어지고 슬프며 고통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그토록 애지중지 기른 짐승의 첫 새끼를 잡아 생명을 끊어야 한다는 아픈 마음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아버지 아담이 짐승을 잡아 피를 내고 제사를 드릴 때, 왜 짐승을 죽이느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아담은 짐승을 잡게 된 동기가 자신들의 범죄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벨의 영혼에 새겨져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짐승을 잡을 때마다 인류의 죄로 말미암은 짐승이 희생을 당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그를 슬프고 괴롭게 했으며 동일하게 자기가 기른 짐승의 첫 새끼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하며 드리는 그 마음은 상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완악하고 단단한 자만심이 높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보다는 아벨의 상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제물이 제사의 가치를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도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율법을 인용하면서 말을 했을지라도 진정한 제사는 사람과 하나 되어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받아 들여지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마다 드리는 주일 헌금을 토요일 밤에 잘 준비하고, 시간에 맞추어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가 십일조와 각종 선교헌금과 함께 풍성한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며 죄인 된 자신을 보지 못하고 당당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보다, 아주 작은 물질 밖에 없어서 많이 드리지 못한 마음을 괴로워하고 범죄로 얼룩진 자신의 인생을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설수 없어 무릎을 꿇고 죄 많은 자신을 보이며 눈물로 호소하는 참으로 연약하고 깨어진 그 심령을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물질을 드리며 참으로 용서받기에 부적격한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면서 피를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서서 도움을 청하는 제사를 드리는 예배라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기뻐하고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시34:18:)” 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아벨의 제사는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있었고 가슴을 치며 아버지로 부터 에덴동산을 떠나 죄악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영혼의 지성으로 인식하고 깊이 깨닫는 것이며 아버지가 들려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어두운 영혼의 상태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했을 것이지만, 가인은 자신의 농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만족감이 가득 채워져 자기가 드린 제물과 제사는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제사를 드린 그런 풍성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3) 죄의 정의
죄라는 말은 af;j; 하타, '죄, 유죄, 죄의 형벌, 속죄제'이며 “표적을 빗나가다. 길을 잃다,” 라는 뜻과 "선의 결핍"이라는 의미를 말한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고, 경향성, 성향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법의적인 표현에서 순종하기에 부족한 것, 이라는 의미로 말합니다.
죄는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을 영혼이 판단하여 마음에 반영함으로 의지를 일으켜 행위언약을 멸시하게 하는 행위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여 생명을 떠난 사람들이 본유적 지식을 상실하고 육체의 오감에 의한 감성을 영혼으로 판단하여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켜 적극적인 행위로 드러내는 악으로서의 행위와 마음에서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영혼의 판단 곧 이성의 결과로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키거나 혹은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새로운 지식들을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본유적 지식의 판단을 받지 아니하고 육체의 오감으로 감성된 지식을 영혼의 지성의 판단된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육체라고 말했고, 육체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유혹함은 사람의 육체 오감을 자극하였고 오감에서 사단의 말을 들은 감성된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판단을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키게 되자 마음에는 두개의 의지가 충돌하여 갈등하게 됩니다.
이 갈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의지를 따라 행하게 되었는데 그 것이 행위언약을 멸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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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멸시를 받은 행위언약은 사람을 떠나고 하나님 형상에 있는 본유적 지식이 상실되어 사람의 영혼은 어두워졌고 지식은 일부 밖에 남겨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는 두 가지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지의 선택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을 영혼의 지성이 판단하여 마음에 반영함으로 의지를 일으키는 것이 죄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의 자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행위언약과 사단의 유혹을 오감으로 얻고 영혼의 지성이 판단하여 마음에 동일하게 반영하지만 그 선택에 관하여는 마음의 의지에 있습니다.
이때 영혼은 생명의 말씀인 행위 언약에 대해서는 순종을, 사단의 유혹에 대해서는 불순종을 판단하여 마음에 반영하지만 의지는 이것들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되는 것으로 자유의지라 하고 하와는 그 의지로 생명인 행위언약을 무시하고 사단의 유혹을 택한 것입니다. 둘째 죄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을 멸시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본유적 지식을 상실한 상태로 태어난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나타난 죄로 자연인의 모든 본성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감성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판단한 모든 지식을 죄로서 사람으로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지성에서 육체의 감성에의해 감성된 표상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이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하고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고 마음은 지식대로 의지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을 하게하는데 이때 의지는 죄와 선 사이를 선택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선택을 하는 그 어느것도 사람의 영혼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영혼에 본유적 지식이 없으므로 생성된 모든 지식은 죄의 본질뿐이고 그래서 사도는 육체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원수라 하고 이를 죄의 지배라고 말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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