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계시1
사람이 지음을 받고 세상을 향하여 일어서기 전에 영혼은 자신에 관한 존재를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된다. 눈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사람은 영혼의 활발한 작용에 의해 벌써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일어나 세상을 보게 된다.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활발한 교제를 나누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할 지라도 전인으로 그 인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구조의 독특성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해 주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적으로 인식능력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피조물인 사람에게 계시하는 일은 쓸모없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지식과 지식의 생성
사람의 영혼은 천사를 비유할 수 있고, 육체는 이성 없는 짐승과 같다. 이 둘이 하나로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는데 영혼에게는 천사를 지음과 같이 말씀으로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처럼 하나님 안에서 사람에게로 주입 되도록 독특하게 지으셨고2, 육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 사람이라는 완성된 작품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럴지라도 영혼은 인격적이어서 자기의 지성과 감성에 의해 지각하고 인식하여 영혼으로서 존재 나타내지만, 스스로 자기 지성에 객체와 사실들에 대한 감각된 표상을 반영하지 못함으로 전인으로서 사람과 구별된다. 이 신비에 관하여는 사람들이 타락한 이 세상으로 부터 저 완전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지만 영혼은 천사와 같이 이미 자신의 지성에 부여받은 지식의 한계에 의해서만 자기 감성으로 지각하고 인식하는 제한된 삶을 가지고 살게 된다. 하지만 천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는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서 천사와 분명히 구별되고, 영혼이 없는 짐승들이 감정으로만 살고 자기지식을 생성하지 못함으로 자기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것 처럼 사람도 영혼이 없는 육체만으로는 자기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와 같이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으심으로 실지로 육체의 인격과 영혼의 인격이 결합하여 사람이라는 전인을 구성한다.
영혼은 천지 만물들이나 다른 영혼을 가진 사람, 그리고 하나님과 교우를 할지라도 자기 지성에 부여되거나, 생성된 후 지성에 가진 지식 외의 사물이나, 객관적인 사실들이나 상황, 혹은 반드시 인식이 필요한 그 무엇에 관하여도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거나 자기 인식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영호의 지성에 생성되어 있지 않은 그 어떤 객체과 객관적 사실들의 상황에 대해서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기 지성에 존재하지 않은 지식에 대한 객체와 사실적인 상황에 대하여 스스로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기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안에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객체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식을 생성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어거스틴과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모든 빛은 태양에서 오는데 태양 외에 어떤 다른 빛이 스스로 발광하는 것처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Vantil 이 인용하여 (코넬리우스 반틸, 개혁신앙과 현대사상, 이승구역 2009,SFC 1쇄, 23)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피조물에 비추고 그 지식의 비추어 주므로서 객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태양은 빛을 발하지만 그 빛과 태양이 하나가 아닌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발산 되는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이고 그 지식이 피조물에 비추면 먼저 피조물이 객체로서 하나님께 인식되어 진다. 태양이 빛을 발함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식을 발하시고, 그 지식에 의해 유형과 무형의 객체들과 사실과 상태들을 하나님께서 인식하신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게도 동일한 현상으로 인식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같이 객체와 사실과 상황 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하여 대처하며 존재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지식”이다.
지금까지 사람의 지식이 어떻게 어디에서 발생하는지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사변들이 나타났고 형이상학적인 추론들이 있어왔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인식을 가질 수 있고 스스로 생성한다거나 일부 기독교 내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오래전 부터 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지식이 아닌 자기에게서 지식이 발산된다고 생각하고 이성으로 자기의 의식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찾으려하고 만나려고 한다.
현대 과학은 모든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된 것으로 사람이 발견하여 사용하는 지식에는 지극히 재한 된 한계만을 사용하여 이성의 판단으로부터 이루어진 지식 체계의 한 분야에 속한다. 이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 외에 자기 자체에서 발광하는 빛을 체계화한 한 분야의 학문이다.
만약 과학이 모든 지식의 총체라고 한다면 그 과학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지식의 내용을 밝혀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지로 과학은 사람의 지성에서 나온 자기 발광체와 같은 것인데 이 발광체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 자체마저도 아니고 그 빛에 의해 반사해서 드러나는 빛인 것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발산하신 지식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들어와 비추어주면 그 비췸에 의해 자기 지식을 생성하여 드러내는 지식이 과학인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사람의 사고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은 곧 바로 영혼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의 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지식을 받은 만큼에서 사고하고 생각하며 그 지식을 진보하고 발전시켜 과학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는데 이런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직접 사람의 영혼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명을 받을 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 생성하여 사람에게 작용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탁월성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신다고 할 때 자신과 자신에 관한 지식을 사람에게 특별하게 주신다. 사람은 이 특별한 계시와 지식의 조명에 의해 자기 지식을 생성하는데 이때 사람이 생성하는 지식이 어떤 상태의 지식이냐에 따라 사람의 본질의 상태를 밝혀준다.
성경 창세기 4장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인류 최초의 사람 가인과 아벨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그 기사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만나 제사를 요구받고 이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람의 상태와 그 결과를 묘사함으로 사람을 구별하여 계시하지 않고, 두 사람에게 공히 동일하게 주어진 특별계시가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제사를 드린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 기사에 있어서 사람에게 계시와 지식이 동일하게 주어졌으나 반응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동일한 계시가 주어졌고, 그 계시가 사람에게 직접 작용한다면, 두 사람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동일해야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다르면 결국 계시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증거대로라면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개별로 계시하셨고 그 계시의 내용은 달랐다고 말할 수 있는데, 계시로 인하여 요구하는 내용이 제사라는 하나의 과제였음을 볼 때, 그 계시는 각기 다른 내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이 계시는 사람이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각하면 이를 표상화 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고 반영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으로부터 자기의 지식을 생성하는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를 감각으로 목격 하였을지라도 사람으로부터 반응하는 지식은 일치하지 않다. 동일한 유대인일지라고 바리세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에게 나타난 반응과 일반 시만들, 정치적인 열망과 유대의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등, 자기의 생각과 추구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색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모든 계시의 중심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각각이지만,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계시에 대한 반응은 그 이전 제자들이 가졌던 반응과 확연히 달라졌다. 이는 계시를 수납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원계시가 사람에게 직접 반응하도록 작용하지 않는 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시를 반영을 받은 계시에 대한 지식을 생성함에 있어서도 사람이 스스로 계시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는데 있어서도 피조물인 사람의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양과 태양이 발하는 빛이 다르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발산하시는 지식이 다름과 같이 하나님과 지식은 분명 구별된 개체임이 분명하고 이로 인하여 빛을 받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요, 빛인 것처럼, 사람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드러낼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있어서는 사람을 직접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받은 사람이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발산함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완전히 객관적 개체이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이라는 존재가 드러나며,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이 분명히 구별되므로 피조물과 창조주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 피조물인 사람은 계시된 그 하나님을 감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영혼의 지성에 표상화 하고 그 표상을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감각한 사실이나 객체를 표상화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거나 다른 지식을 생성하는 경우가 가인과 아벨이나 오순절 이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었고, 오순절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된 대로 인식하게 된 사도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의 지성이 표상 자체를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으로부터 지식을 생성하도록 해주는 어떤 매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지성에 반영된 표상은 감각된 객체와 사실들이다. 이것은 사람의 눈이 각막과 동공, 수정체를 거처 망막에 상이 생기고 그 상이 시신경에 전달하여 물체를 인식하게 하는 것과 같다. 표상은 곧 망막에 생긴 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상이 시신경에 전달하여 그 물체에 대한 정보를 인식하게 하는데 곧 뇌에 그 지식이 있어야만 사람이 자기가 감각하거나 본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영혼에는 육체가 감각한 표상이 반영되어지고 그 표상에 대한 지식을 지성의 창고에서 꺼내와 표상을 조명함으로 지식을 생성하거나 혹은 일치한 지식에 의한 즉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된 것은 이전에는 사도들이 자기들의 의식으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인식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도들의 지성에 개입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조명을 새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지식을 가지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었다.
가인은 자기의 영혼의 지성에 가진 자기지식이 자기가 목격하고 감각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하였고 제사의 명령도 동일하게 이해했었다. 곧 가인은 자기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반면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있었을 때 자기 영혼에 하나님의 성령이 조명하여주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진리대로 지식을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타락 후 아벨이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이 지식을 생성함에 있어서 육체의 감각과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표상을 반영 받았을 때,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하여주는 역할을 하는 매개체라고 하는 지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 지식이 없을 경우 지성에 반영된 표상에 대하여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만 생성하여 가질 뿐이다.
최초 사람의 타락 후 스스로 지식을 발하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 빛은 태양에서만 발광하여 우리에게 비춰주고 우리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지식은 하나님으로 부터만 나오고 우리에게 조명되어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우리에게서 생성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 발산 할 수 있도록 하셨으나 그 지식은 반드시 하나님의 지식의 조명을 받을 때만 진리의 지식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영혼과 지식
지식은 육체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이 전인에 반영하는 유기적 작용에 의해 사람은 행동한다. 이 과정이 생물학적으로는 영혼에서 생성된 지식이 전인에 반영하면 전인에서는 의지의 발동에 의해 행위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해 육체의 감각으로 보내어지면 감각기관은 신비한 분류에 의해 호르몬이 분출되어 행동을 조절한다. 여기에서 사고하는 과정도 역시 육체의 감각에서 행하는 것으로 영혼의 지성과 전인의 감관을 오가며 사람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와 별개로 인격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 지음을 받은 것으로 사람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드러내준다. 첫째로는 사람이 지식으로 활동하고, 둘째로는 자기 존재를 인식하며, 셋째로는 전능자와 같이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는 점, 넷째로는 제한된 창조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은 지식이 없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영혼은 개별적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육체와 결합하여 완전한 전인을 이루고 사람을 완성시키지만, 사람이 육체의 수명을 다하면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상태는 극히 제한적인 시간에서만 겪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영혼의 지성에 남겨진 지식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사람의 상태는 현저하게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에 남겨진 영혼은 오직 이미 부여받았거나 생성된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더할 수도 없고 생성하지도 못하므로 부여받은 지식의 한계에서만 살게 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생을 마치고 영원으로 돌아가면, 그가 이생을 사는 날 동안 가졌고 생성했던, 그 지식으로 만 존재하고 육체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감각하여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3
또 하나의 특징은 영혼은 부여 받은 지식이 있고 감성을 가지고 있으나, 전인에서 벗어남으로 자신 안에서 지식들 간의 표상을 가지지 못함(사고 작용)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할 수 없고, 새로운 지식이 생성되지 않으므로 인하여 의지를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짐승이 육체뿐인 감정으로만 존재함으로 세상과 교통하며 살지 못하여 자기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것처럼, 사람도 영혼을 부여받았지만 육체만으로는 지식의 범위를 벗어난 새로운 지식을 가지거나 그 지식으로 세상과 교통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완전한 사람이 된 경우, 사람에게는 전인의 기관인 의지로 인하여 자기의 의사를 세상에 드러내며 뜻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만물과 구별되고 이 존재가 가진 인격적 능력이 하나님 형상의 모습의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선하고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에 대한 인식을 가지며, 인식된 그 지식을 전인의 기관인 의지로 세상을 향하여 드러내는 존재이다.
피조상태의 변화와 지식의 왜곡
사람이 감각된 표상(representation)을 조명 해주는 본유지식(innate knowledge) 에 의해서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게 한다. 본유지식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지식이기 때문에 왜곡되지 않은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지 않은 참된 지식이다. 하지만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어 더 이상 본유지식으로 감각된 표상을 조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사실상 지식을 생성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면 타락 후 사람들은 어떻게 지식을 생성하였는가?
사람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에게서 사라져버렸을지라도 사람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타락한 상태를 가지고 계속 남아 살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감각하고 생명활동을 유지함으로 지속적인 존재 활동을 하며, 객관적으로 객체들을 계속 인식하는 삶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은 본질의 상태가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방향으로 뒤바뀐 존재로 변화되고 만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 인류의 타락 이후 상태는 먼저 자기 부끄러움을 볼 수 있는 자기 인식과,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두려움, 자기 변명하는 모습을 드러냄으로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 사람에게 드러난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혼의 지성이 변화되어 어두움의 상태에서 왜곡된 지식을 드러냄으로 본질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최초 사람은 분명히 처음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을 받아 생성한 지식으로 활동하던 모습에서 두려움과 자기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하는 지식에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을 생성하여 그 지식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영혼의 작용은 이루어지고 지식을 생성하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영혼의 상태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을 갖는 것은 그들이 생성한 지식에 있는 무지에 대한 반응이다. 무지는 지적인 어두운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고 이 무지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은 어떤 상태를 지각하는데 그것이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무지를 조금이라도 지각되지 않으면 결코 두려움이 없다. 무지는 모든 지식과 별개로 어떤 상태를 생성한 지식이 아니라 감각된 표상을 어떤 지식으로 조명할 때 조명되지 아니한 어느 한 부분에 대하여 무지로 포함된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처음 상태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지식이 조명되어짐으로 모든 상세한 감정까지도 지각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게 했다. 그러나 타락이후 하나님을 만났을 때, 본유지식은 다시 조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이미 생성한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려 하지만 실지로 조건이 바뀐 상태에서 본유지식의 조명과 자기지식의 조명의 지적인 차로 인하여 알수 없는 어떤 부분이 무지로 생성되어짐으로 그 무지에 대한 지각이 사람에게 두려움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락한 사람에게 있어서 본유지식이 상실로 인한 지적인 어두운 사태에서 타락 이전에 이미 생성한 지식의 조명을 받아 지식을 생성한 지식은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된 지식일지라도 감각된 표상이 이미 가진 지식과 일 부분씩 다른 상태가 되는 부분으로 말미암아 무지와 결함을 조명함으로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 지식은 생성된 후 비슷한 상황에 대해 조명하여 계속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데 그렇게 생성된 지식에는 점차 무지와 결함을 폭넓게 함의하게 되어 계속되는 경험에 의해서 처음 상태보다 더 많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반복되는 지식의 생성에 의해 모든 지식들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는 지식이 되어 버렸고 필연적으로 진리로부터 왜곡되는 거짓된 지식이 되어 결국은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진리는 발견할 수 없고 거짓 지식만 가진 상태가 되었다.
지식의 시작
지식은 발생되는 개체이다.
이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과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이 구별된다.
최초 사람은 지음을 받았고 그 코에 생기가 넣어졌다.
사람은 아직 활동하지 않았고, 세상에 대한 감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영혼의 지성에는 작용 원인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활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준비단계에 있다.
성경이 말하는바 사람을 활동하게 하는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사람으로 움직이게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야만 했는데 그 말씀이 곧, 개혁교회에서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말씀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내가 온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체소와 씨가진 모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세기 1:28~29)”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자동적으로 지식을 생성하고 있는 상태에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았으나 아직 활동하지 않았고 이제 사람에게 활동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고, 말씀을 사람의 영혼에 부어 넣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의 감관에서 감각되고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되자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이 그 말씀을 조명하였고 지성은 즉시 자기 지식을 생성하여 그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고 육체의 감관에도 반영하여 생성된 지식대로 감각하여 움직이게 함으로 활동하는 존재로 살아있는 생령이 된다.
자신의 귀를 통해 들려진 이 말씀이 영혼의 지성에 규칙에 따라 표상으로 반영되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 지식의 조명으로 지각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는 이 신비는 하나님의 위대한 설계와 창조를 드러내주고 있다.
최초 사람은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분명한 인식에 의해 마음에서 의지가 일어나게 되었고, 일어서서 비로서 눈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눈을 열고 바라본 모든 세상에 있는 사물과 자연이 자기를 향하여 대열하여 섰고, 그것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의식을 가지고 다스려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고, 첫 눈을 열고 삶을 시작한 아담의 전 인격의 순조로운 활동으로 최초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고,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완성으로 인한 큰 기쁨을 얻게 됨으로 “심히 좋았다”라고 하심으로 창조의 완성을 기뻐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영혼에서 육체로 이어지는 규칙적인 인격적 활동은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된 세상에 관한 표상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빛이 표상을 조명함으로 순수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게 되고, 지각된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의지에서는 행위의 정도를 육체에 반영하여 반응을 나타내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심으로 지식을 주시기 전까지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활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말씀을 하셨어도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본유지식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식의 원리에 관한 주장들
Herman Bavinck 는 그의 개혁교의학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소유한 지식은 절대적이며, 순전하며, 무한한 것이어서 그 절대성으로 유한한 의식에 전달 될수 없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선재 지식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 지식과 모사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을 구별하였고, 그 방법을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계시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이성적인 피조물의 의식 가운데 이식된다고 했다. 학문의 원리들에서는 “경험론(Empiricism)에 관하여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고 완전 무전제인 서판인 인간의 정신에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자연의 해석, 순수 경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 경험이 감각적 인식만이 우리 지식의 근원이라는 원리이다.” 라고 했으며, 관념론에 대하여 “표상이 스스로 보여주는 표상을 수용하지 않고, 그 표상의 본질적 속성을 부인하며, 실제적으로 그 표상을, 내용적으로는 꿈속의 이미지와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결국 추론과 증거를 통해 주관에서 객관에 이르는 온갖 허무한 노력들을 시도한다.” 하고, 헤겔에 의한 합리론은 “우리의 생각은 심지어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조차, 우리 자신의 본질로부터 나오므로, 지식만이 아니라 존재 역시, 표상들만이 아니라 물자체 역시 오로지 사고 작용에서 산출 되므로 사고 작용과 존재는 동일하다고 생각 하였다.” 하면서 자신은 실재론으로 표상과 사물 사이에 있는 차이를 부인하지 않고 그 둘 사이에 뗄 수 없는 연관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실재적으로 대상은 인식할 때 즉각적으로 주어진 확신과 인식할 때 우리 안에 현존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Bavinck 의 말에 의하여 모든 인식론이 인간의 인식에 대한 구조적 기능을 간과해 왔고, 그 역할을 하는 기관에 대해서도 불분명하게 의견들이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의 몸속에 관념, 경험의 정보를 기록할 서판, 정신은 우리의 몸속에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표상과 사물을 지각하고 감각을 가지며 의지를 일으켜 행동을 하는가?
실재론의 인식 기관은 직관적인가?
John Calvin의 말을 빌려 “자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과 옛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말들이, 그들이 의미하는 바와는 일치한 주장을 아니지만 여기에 실체인 물질로 구성된 “너 자신부터 알라”라는 말을 존재론적인 인식을 다 같이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흔히들 인식론에 있어서 주관적이나 객관적 인식에 관하여 말할 때 인식작용의 주체인 사람에 대한 구성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서 소홀이 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한결같이 인식의 기관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정신으로, 혹은 마음으로,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실재론적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직관적인 인식과정과 그 기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언급을 하였다.
즉 외부에 있는 사물을 눈이라는 창을 통해 보게 되는데,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이 보는 것만으로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보는(오감의 감각) 그것을 인식하고 자기가 인식한 그것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참 사람이다. 보는 것(오감의 감각), 인식하는 것, 반응하는 것, 이 세 가지 사이에 감각이 유기적인 역할을 하여 서로를 연결하고, 모든 작용이 하나의 원인에서 반응으로, 드러내는 보이는 원인과 반응하는 결과로서 질서 있는 조직에 의해 움직여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가진다.
그러므로 보는 것만으로 사는 것을 동물이나 짐승에 해당하고, 보는 것(오감)이 없이 인식만으로 반응 하는 존재는 영적인 존재로서 천사와 사탄이며, 오감의 감각이나 인식하는 것이 없이 반응만 하는 것은 미성숙 된 존재이거나 존재가 아닐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작용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오감은 육체의 기관에서 작용하고, 인식은 영혼 곧 정신의 작용이고, 반응은 육체와 영혼의 작용적 결과의 의지에 이끌리며,이 모두가 하나의 전인적 인격체인 지성, 감성, 의지의 하나의 유기체적으로 작용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정을 가지고 어떤 인식론을 추종하든지 객관적으로 존재를 인식하려면 인간 내부에서 위의 세 가지의 구조적인 기능 작용을 통해 인식을 얻고 반응까지 나타낸다.
이제 이 기능으로 차례로 합리론, 경험론, 관념론, 실재론에서의 인격의 역할에 관하여 살펴 보려고 한다.
먼저, 합리론에서의 인격의 역할, ‘사고나 감각적인 역할, 그리고 지식뿐만 아니라 존재, 표상도 오로지 사고 작용에서 산출 된다’ 곧 모든 인식의 근원이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영육간의 모든 인격에서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인데, 모든 인격으로 인격적 작용을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작용인 감각까지도 그 근원을 이성이라고 말한다. 이성은 곧 지성적 작용을 의미하고, 인식에 있어서 지성의 작용은 사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사고는 지성 작용의 자체가 아니다. 분석 철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Wittgenstein(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사고는 언어로의 표현을 재외하면 모호하고 형태가 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 오늘 아주 큰 충격을 주고, 지성의 사고로부터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경험론에서의 인격의 역할, 이 입장은 경험에 의한 감각적 인식만이 지식의 근원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감성의 역할에 의해서 인식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식은 감각되지 않았으나 인식되는 지성적 역할들이 사람 내부에서 일어난다.
세 번째로 관념론에서의 인격의 역할4, 이 입장은 플라톤의 Idea론 처럼 어떤 종류의 관념을 정신과 개체를 초월한 참다운 실제로 보는 입장5으로 인격적 조직 이상에 또 다른 총괄 정신과 헤겔에 의한 절대 정신에 의한 인식으로 인간성의 자발성 곧 인간의 인식활동, 실천 활동으로 인간의 인식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구성 요소라고 보는 점에서 외부의 실재보다는 내부의 관념을 더 신뢰하게 되는 주장이므로 꿈 속의 이미지와 동일선상에 있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인격의 역할에 기대하는 자연적인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네 번째로, 실재론에서의 인격의 역할은, 주관과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실재로 인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입장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오감을 통해 감각을 가진 그것을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의 이해하기 난해한 내용은 객관적인 사물이나 사실이 인식되는 구체적인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눈을 열고 객관적인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을 곧 바로 인식하는가?
우리는 위의 모든 주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결함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결 같이 인간 안에 있는 구조적으로 인식을 얻는 과정에 대한 설명서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과정을 통한 물질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사람에게서 이성이나, 정신의 자리가 어느 부분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인식하는 기관의 명확한 위치 또한 정의 되지 않았으며, 인식을 하기 위한 사고 과정 등이 일체 언급되지 않고, 각 인격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모든 입장들에게서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을 갖기 위해서 사람에게는 어떤, 혹은 무엇이 역할을 하여 인식되도록 하는지 언급하기 위해서, 눈의 구조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과 망막에 생긴 상과 시신경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밝혀주는 태양빛에 의해 드러난 사물을 눈으로 보았을 때 수정체를 거쳐 망막에 상이 이뤄지고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정보가 전달되어 인식하는 물리적 구조의 역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간략한 설명이라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결 같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자연적 인식기능을 전제로 하고, 객관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인식하거나, 사고를 통한 합리적으로 인식, 정신이상의 이데아의 관념의 실재 정보로, 주관적으로 감각되는 사물이나 사실의 객관적 실재 정보는, 자신 안에 있는 인식에 의해 정보를 생성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외부의 존재에 대하여 인식을 가지는지, 어떤 역할을 통한 구조적 기능이 관여하여 인식을 이끌어 내는지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으로 볼 때 인간은 자연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의 내면에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지성의 역할을 통해서 인식이 가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눈을 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는 오감이 자연적 인식 기능을 가진 상태라고 주장하게 된다.
경험론 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깨끗한 도화지 같은 서판이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무엇을 그리느냐’ 라는 생각을 가졌고, 합리론 자들은 ‘사물을 판단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본질적인 개념들이 인간의 정신에서 생성되어 나온다.’고 하고, 관념론자들은 ‘정신에 관념으로 사물의 표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며, 실재론은 ‘사물은 사물 자체로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 한다.
계시를 설명하기 앞서 이처럼 인식에 관한 학문적 입장들을 살펴보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인식의 능력에 관하여 학문을 하는 자가 현재 자신이 어떤 학문적 방법에 있는지 살펴 이해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Bavinck 가 계시가 “주체의 성격에 따라 변화를 거치게 된다.”고 말한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의 일치성의 규칙
사람은 자기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독립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독립된 존재들에게 일치성을 부여하였으며,그것은 동일한 조건에서는 동일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소통이 불가능한 혼란스런 존재들의 집합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식이 가능한 동일한 규칙에 적용되도록 하셨다.이것은 바벨탑 사건인 ‘언어의 혼잡’으로 성경이 분명하게 입증하여 주셨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의견으로 객관적인 의사를 표현함에 있어서 소통이 가능한 지적 작용에 의해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피조하신 것이다.이는 존재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되지만 살아가는 것은 순전히 자기 의식으로 말미암아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으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피조세계 안에서 독립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와 같은 피조 된 존재에 의해서 생성된 객관적 지식으로 하나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영광스런 노래가 더 아름다운 것이지, 지적 작용까지도 하나님을 의지 한다면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로 꾸며진 영광의 노래라도 그것은 하나님 만들어내고 사람은 감정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의식적 삶, 곧 활동을 위해 사람은 스스로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하여, 의지를 일으키는 모든 전인적 인식 작용이 자의적 원인으로 말미암지만, 모든 인식의 원인이 되는 지식은 하나님 지식의 조명에 의해 객관적 일치성을 가지고 자기로부터 생성되어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지식을 생성하는데 있어서 일치한 규칙에 적용되는 Form에 의해 생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각자 다른 Form으로부터 지식이 생성 되어 진다면, 그 지식들이 일치하게 생성되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개개인으로부터 생성된 지식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혼란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재하면서 자연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는 자연론 자들이나 진화론자들, 그리고 인식방법이 전혀 다른 경험론이라 합리론, 관념론, 실재론들이 서로간의 방법을 개별적으로 적용함으로 인식에 관한 하나의 의견 마져도 일치한 결론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동일한 하나의 인식에서 출발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지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식을 갖기 위해 인식하는 것이므로 철저히 자의식의 발로에서 시작되고, 사람이 존재하면서 자연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므로 지식을 스스로 생성할 수 있다는 숨겨진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감각을 가지면 지성에서 이성이 감각된 대상을 자연적으로 인식하고,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감각된 대상은 실재 사물이 아니라 이데아 곧 또 다른 정신세계의 이상이 실제이고 보이는 실재는 환영이며, 합리론은 감각된 외부의 대상은 자신의 내부에서 지성적 사고를 통한 합당한 인식이며, 실재론은 눈에 감각된 사물이 실재 사물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자신도 실재 자신이 실재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실지로 이들의 지성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성적 규칙이 있고, 인격적 작용에 의해 객관적인 사물과 사실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지식에 있어서는 지성적 규칙의 적용에 따라서 하나의 공통된 지식으로 나아가지만 문제를 규칙에 적응시켜 답을 추론할 때 각각 자기들의 주장에 따른 지식들을 대입하여, 경험론은 감각으로, 합리론은 사고로, 관념론은 이데아에서, 실재론은 주관과 객관을 자연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대입하여 답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성 작용의 규칙을 부여하셔서 일치한 규칙에 의해 생성된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 되므로 객관적으로 생성된 지식일지라도 자기의 지성에 지식의 규칙이 작용함으로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하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소통이 가능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인식과 동일한 지성적 결과들이 나타나도록 하나의 계시를 주셨지만 일부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생성하거나 다르게 인식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별도로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시를 공통적으로 주셨지만 사람이 다른 인식의 결과를 드러낸 것은 그 계시를 인식하려는 조명하는 지식의 결과 때문이다. 실재론과 경험론, 합리론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자연인식 능력에 의한 지식으로 조명하고, 관념론은 실재의 객관적 사물이나 사실을 정신세계에 대한 인식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자연인식능력에 의해 생성된 지식으로 조명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시각이 확실하다면 자연적 인식능력을 가진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감각되는 대상이 정보인데 이 정보가 인식을 얻기 위해 지식체계에 대입되어 감각 대상만이 인식될 수 있는 근원이 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식능력을 가진다는 지식은 어떤 지식체계에 대입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적 도입에 있어서 대입되어 각각 다른 답을 얻는데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세변을 가진 삼각형을, 단순히 삼각형이라고 말만해도 변이 세 개라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가진 지식이다. 삼각형 안에는 세 변이라는 기본 개념이 항상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학문의 도입에 있어서 인식론은 그 기본에 자연인식 능력이라는 지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경험론이 감각을 인식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감각되었고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연인식 능력을 사람이 지니고 있다는 전제된 개념을 굳이 대입하지 않지만 이미 대입하고 자연적으로 인식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경험론에서 자연 인식능력을 대입하지 않고 논리를 전개해 보자. 실지로 성인이나 혹은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에게서 자연인식 능력을 배제하기를 쉽지 않다. 그래서 아직 지적인 능력을 가지지 않은 영아와 어린이를 상대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눈을 뜨고 보고 웃고 옹알이를 하고 엄마를 부르고, 생존에 관한 모든 활동을 하고 있으나 자기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외부의 세계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는 것이다. 어린이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 그 경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언급할 필요도 없이 경험이 그에게 인식을 주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이 어린이가 자연적 인식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누구든지 그를 영재라고 판단하고 영재 교육원에 보내 나라와 세계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식 능력은 잠재된 학문을 도입하려는 사람에게 전제된 지식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 인식능력은 지식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지식을 배제하고 자기에게 학문을 도입할 수 있다.
이 지식은 사람이 의식과 지성에 선재된 지식이 아니다. 하지만 학문에서는 이 지식을 배제할 수 있고, 대입도 할 수 있다. 경험론, 합리론, 관념론, 실재론 모두에게서 자연 인식능력을 배제하면 동일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인식 방법론의 답을 얻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자연인식능력을 전제한 모든 인식 방법론이 옳지 않고, 이 지식이 대입하여 각각 다른 결론에 이르기 때문에 이 지식은 진리가 아니고, 사람은 스스로 인식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어떤 목적에 이르도록 지으셨다. 그 목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람마다 주장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주장들도 역시 어떤 지식을 대비하여 인식을 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그러면 대비된 그 지식에서 얻어진 결론으로 진리의 여부를 확실하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지음 받았고, 지성으로 인식을 갖도록 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한 독립된 의식으로 하나님과 객관적인 소통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가 되도록 진리의 표준이 되는 지식을 부여하셔서 모든 인식에 그 지식을 대입하여 답을 얻도록 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하나님에 대한, 창조에 관한, 사람에 관한 지식으로 사람에게서 생성하지 않은 것이며, 사람에게서 지식을 생성하기 위한 역할을 하도록 부여해 주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 사람 아담에게 이 지식이 부여 되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후손들은 이 지식의 영향을 받지 못한 무지한체로 이 땅에 살게 됨으로 언제나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고,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거나 진리가 아닌 지식을 의지하여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계시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사람에게 가져온 것은 지성의 무지와 어두움이다. 육체의 오감에서 감각이 있어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언제나 하나님 면전에 있으나,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며, 이전의 경험 유무조차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어둡고 무지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타락 이전 최초 사람은 사람이 처음 눈을 열고 세상을 볼 때 자연과 모든 사물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 창조가 눈에 들어왔다. 최초 사람의 눈에 들어온 모든 사물과 자연을 보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을 했다는 것은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고 지각된 지식이 마음에 반영하여 육체의 감각으로 느낌을 가지므로 생물체의 반응에 따라 뇌에서 일어나는 생물적 작용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체의 작용이란 느낌에 따라 호르몬의 작용이 일어나 사람의 육체의 감성에 자극 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때 사람은 전인으로 느낌을 갖고 그 느낌에 대한 반응을 하는데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 가진 의식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와 같은 신비하기 이를대 없는 영혼의 기능들을 주신 것은 지혜로운신 하나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주신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와 같은 심오한 지혜를 통하여 지음을 받은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의 마음에 무한히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인 것이 분명하다. 초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영혼에서의 지성작용은 육체가 감각한 세상과 사물들의 표상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생성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감성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영혼의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물이 수정체를 거쳐 망막에 상이 생겼을 때 순간적 작용에 의해 육체가 반응하도록 영혼은 항상 깨어 있어서 육체에 지식을 내보내 마음에 반영 한다.
하지만 사람이 이런 인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육체의 오감과 영혼의 감성을 통하여 세상과 사물, 그리고 행동하는 사실을 표상화 하면 본유지식이 이를 조명하여 지각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관한 지식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로움으로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지고, 전인으로 느끼는 감각은 하나님과 그 지으신 세계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감동을 영혼의 기쁨으로 표현한다.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탁월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을 쫒아 이탈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불행한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선악과를 두신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은 그 길을 택하였고 그 결과 영혼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본유지식은 빛을 잃어 지성에 어두움이 밀려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지와 혼돈가운데 처한 것을 아시고,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나타내 보여주셔야 했다. 최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잃어버렸고, 그 형상으로 생성한 지식에 새겨진 하나님에 관한 희미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눈만 감아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었던 감각이 되살아나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통이 끊어진 상태된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주셔야만 했다.
Louis Berkhof 은 기독교교리 요약에서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지 않으셨다면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었으며, 인간 그대로 버려두신다면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10). 사람의 타락이 가까이 항상 면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했고,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며 돌아서게 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관한 무지에 빠지게 한 타락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 오셔서 하나님자신을 사람에게 보여 주셔야만 한 것이 계시이다.
계시와 인식
개혁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 누구나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만나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건들은 성경을 통해서 여러 선지자들이나 이스라엘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셨다면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목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 주신다는 점에서 종교적이고, 종교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인식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어두움에 처해있고 무지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빛을 비추셔서 지식을 생성하게하고 그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게 됨으로 시작된다.
개혁교회는 사람이 자연 인식능력을 가진 것으로 전제한 인식론에 관한 입장에서 사람에게 서 인식의 작용에 관한 구조적 연구를 소홀히 했다. 하지만 Calvin은 신 관념에 관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신 관념이 모든 사람에게 내제해 있다고 말하는 칼빈의 생각과는 달리 자연 인식능력을 전제한 생각들로 전개된 개혁주의 신학들을 보게 된다. Calvin 신 관념과 개혁주의 자들의 자연 인식능력은 현저한 구별을 갖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형상이 깨어지므로 신지식이 현저하게 파괴되어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서진 조각처럼 유지되고 있는 한조각의 신지식이 사람에게 남겨져 사람의 마음속에서 불명료한 신의식이 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한 반면, 관념이 아닌 감각을 통한 인식 능력을 전제하고 Calvin의 내제한 신의식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개혁교회를 향한 배타적인 시각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11) 적어도 개혁주의 입장을 게시함에 있어서 본질적이었다면 주관적인 논리들의 공격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개혁주의적인 인식방법을 추종하게 되었을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서두 첫마디에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시작한 것은 참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이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이해한다는 의미도 있으나 보다는 Calvin이 말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존재의 구조와 피조물로서의 사람을 이해하지 않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선언한 말이다12).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면 할수록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결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결론에 이를 때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구조적인 접근이 분명하지 않았던 개혁교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와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식의 문제에 관한 옳은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시의 정의
일반적으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지식이 아주 희미하게 지식들에 포함되어 남겨져 있다.(본서 종교의 씨앗 참조) 그래서 남겨져 있는 지식의 흔적들로 인해서 하나님에 관한 아주 희미한 감각을 가질 수 있지만, 분명하게 하나님에 관한 지각을 결코 가질 수 없다. 오히려 그 흔적이 왜곡된 신관을 갖게 하므로, 세상 어느 곳이나 사람이 있는 곳에는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종교를 갖게 되어, 사람은 종교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1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조물에게 직접 드러내 보이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일방적으로 계시하시지만 사람이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피조물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스스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게 별도의 기능을 부여하셔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피조물이 인식하지 않았다고 해서 계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유신론적 기독교 계시 주창자들은 계시를 하나님의 창조 자체로 본다. 이 논리는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로부터 인식되는 객관적 관점이다. 하나님은 자체로 완전하시고 부족함이 없으시다.
어떤 상태이든지 계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향하여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일방적 사역이지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계시를 감각하여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특징을 가진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연 상태의 세계에 형용할 수 없는 환영의 방식으로 자신을 나태내시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사람이 지각을 가질 수 있도록 영혼의 지성에 특별한 역사를 행하신후 한정된 시간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보이시고 뜻을 전하신다. 결국 계시는 인식할 수 있는 존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현현이므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육체의 오감이나 혹은 영혼의 감성으로 직접 감각하고, 그 감각에 의해 지성에는 표상을 갖게 된다. 지성은 이 표상에 대하여 자기 지식을 생성하는데 그 지식이 보여주시는 하나님과 감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인식과 동일한 느낌으로 감각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상대에게 한 가지를 더하여 주셔야 하셨는데 그것이 표상을 비춰주는 지식, 곧 본유지식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이 본유지식이 상실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시므로 본유지식을 잃어버린 사람,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타락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다. 이때 부여된 본유지식은 한정적으로 감각된 표상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계시하시는 범위에서만 자기 지식을 생성하게 되고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한 자기 지식으로 지각을 갖고 육체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그 계시에 관한 지식을 동반하여 사람의 지성에도 부어지는 것이므로 계시가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부어졌을 지라도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에게는 계시를 감각할 수 있는 반면, 선택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지에 처한 상태로 남겨진다. 그러므로 계시를 바르게 정의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피조물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지각하게 하시는 사역’이다. 특별히 사역이라고 할 때는 구속사에 계획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함으로 타락 후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의미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하나님을 지각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사역을 의미하므로 타락하지 않은 상태였던 아담이나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께는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타락 이전의 처음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지성에 본유지식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무엇을 준비하여 자기 스스로 계시를 수납하고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이나 영혼의 감성에 의해 감각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면 하나님께서 그 표상을 비춰주고 그때 지성은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의 지식(순수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을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고, 그 지각을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여 온몸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계시의 필요성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계시는 존재 조건이 상이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인식을 갖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지으신 것이다.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을 인식해야 하는 존재는 사람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인 천사와 사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요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의 요소는 지적이고, 물질의 존재의 요소는 감각이다. 천사와 짐승과의 차이점은 지성과 감성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지성과 감성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천사와 짐승과도 구별된다. 사람이 천사와 다른 것은 육체를 가진 것이요, 동물이나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영혼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적인 요소와 물질의 요소를 함께 포함한 존재로서 천사보다 낫고, 짐승보다는 뛰어난 존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천사보다 월등한 것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앞에서 많이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천사에 관하여는 육체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각을 얻지 못하고 지성에 표상을 갖지 못하므로 지식을 생성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신 지식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천사든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별도의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해 제한된 지식을 주시면 천사는 그 받은 지식에 관한 일을 수행하는 것을 성경에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1)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를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서 지식의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천사의 지성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지 못한 존재이고, 짐승은 감각적인 한계 내에서만 존재하는 피조물로 존재하도록 지으신 것이다.2) 성경이 천사에 관하여 언급한 것은 천사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천사가 사람의 구속사역에 등장하여 그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역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구속사역에 필요한 일을 수행하도록 지식을 그들의 영혼에 부어주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행한 사역은 자기의 지성에서 판단한 자기의 지식으로 구속사역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일을 하도록 넣어주신 지식에 의한 것이므로 이 일은 천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속한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특별한 사역을 부여하실 때에는 사람에게 드러내심과 같은 특별한 현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사는 이미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사명만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사람의 영혼이 구별된 것은 전자는 주어진 지식을 이용하는 자동적인 존재인 반면,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는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 현격하게 구별된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사람이 아닌 동식물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다. 이 고백은 천사들이 고백하거나 짐승들에게 지식을 주셔서 고백하는 것과 같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주고 그 조건들에 의해 자동적으로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생성된 지식으로 순수한 객관적인 고백이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유지식으로 모든 것을 지각하도록 하시지 않고, 육체의 오감이나 영혼의 감성에 감각된 표상을 본유지식이 조명하여 줄때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갖게 됨으로 비로서 지식을 완전하게 생성하게 되는데, 이렇게 생성된 지식에 의해서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행동은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을 감성에 의해 지각하고 지각된 지식을 의지를 통해 마음에 반영할 때 마음에서는 의지대로 행할지 아니면 행하지 않을지 판단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람의 행위는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에 의해 비롯됨으로 영혼의 지성이 올바르지 않으면 사람의 행위도 올바르지 못한 것이며 그 행위의 근원인 지식은 순수하게 자신의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영혼에서 지식을 생성하고 육체로 행위를 이끌어내도록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같이 완전성을 드러내고, 탁월성과 피조의 아름다움을 가진 가장 탁월한 존재이다. 이런 존재가 고백하는 증언은 하나님께서 계획에 의해 조작된 기계적인 증언이 아니라 완전한 객관적인 판단이며 참된 증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완전한 객관적 관계의 증언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 영광의 찬란함을 듣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이사야 43:7),”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의 타락은 사람에게 부여된 본유지식을 망실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 본유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천지 창조에 관하여, 하나님을 대하는 지식, 사람 자신에 관한 지식이었다. 이것을 잃어버림으로 하나님도 모르고, 사람 자신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해야하는지 예의도 모르고, 천지 창조에 관한 지식도 모르게 되었다. 다행이 첫 사람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에 본유지식이 밝혀주므로 생성된 지식은 이미 아담의 영혼의 지성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 지식을 통해 지식은 점차 증가 되어지게 되었다. 이 지식마저 망실해 버렸다면 사람은 아무런 지식을 갖지 못한 존재가 되고 말았을 터이지만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필경 범죄하고 타락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을 항구적으로 아담의 지성에 두신 것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범죄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하도록 부여하신 것이다. 범죄한 이후에는 아담의 지성에는 범죄 하기 이전에 본유지식으로 말미암아 조명을 받아 생성한 순수지식이 본유지식의 역할을 대신하여 사람으로 활동하며 존재하게 하신 것이다. 이 지식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지성에 반영된 표상을 본유지식의 조명하여 생성된 지식이므로 재차 반영된 동일한 표상은 지식을 생성하지 않고 지각을 갖게 되나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표상을 조명하면 지식과 표상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지성이 혼돈을 겪게 되고 이런 작용의 반응이 마음에 그대로 반영되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의 불안과 어두움, 공포, 혼란, 갈등이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내포하여 반영된 것이다. 이런 지식은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생성되어진 순수 지식과 같이 않으므로 불완전하거나 오염된 지식이 되어 사람의 육체로 하여금 왜곡된 행동을 하도록 한다.
실지로 아담의 타락이후 모든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왜곡된 지식에 의해 행동하고 사고하는 타락의 양상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분명히 비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구속사 가운데 역사하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보내셔서 참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다.
타락한 아담이 영혼의 지성 중심에서 육체의 감성 중심의 사람이 되어 육체의 사람이 되자, 아담의 감성에서 느껴지던 존재하는 자기 영혼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의 상태를 육체가 되었다(창 6:3)고 말하고, 오랜 후에 영혼이 죽었다(겔 18:4)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미처 얻지 못한 수많은 지식들은 순수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아 새로운 지식이 생성되게 되었는데, 이 지식이 동일한 표상을 조명할 때에는 완전하고 순수한 진리이지만, 상이한 순수 지식과 전혀 다른 표상을 조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결함과 무지가 순수 지식과 함께 조명하여 오류된 지식으로 획득지식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지식이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되었을 지라도 모든 표상을 완전하게 조명하지 못함으로 많은 부분에서 무지와 결함을 내포하는 지식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첫 사람 영혼의 지성에는 본래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과 생성된 순수지식이 있었으나, 범죄 후에는 순수지식과 순수지식의 조명으로 생성된 오염지식(획득지식)이 남겨지게 되었고, 두 지식은 사람이 생존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또 다른 오염된 지식(획득지식)을 생성하게 되면서 후손들은 오염된 지식 곧 획득지식을 받게 된다.
처음 사람이 순수지식이 표상을 조명할 때 조명하는 순수지식이 완전하고 흠이 없는 것일지라도 그 지식이 표상의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유지식은 표상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할 수 있으나 순수지식은 자신의 표상에 한하여만 완전하다. 그러므로 동일한 표상과 함께 동반한 또 다른 상황과 환경에 관하여는 순수 지식은 결함과 무지를 가진 상태이므로 순수지식의 단점은 무지를 동반한 상당한 결함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유지식은 표상에 관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하심을 동반한 지식을 함유한 지식을 가지지만 순수지식에는 하나님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만이 함유되어 획득지식에 하나님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을 함유하도록 하지 못하고 일부미약하게 함유된 지식만을 생성하게 한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나 영혼과 같은 물질이거나 영적인 존재가 아니시고 지음을 받은 존재와 구별되기 때문에 육체나 영혼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지지 못함으로 표상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하셨기 때문에 부여 된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영혼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할 수 있고, 영혼의 감성만이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함으로 본유지식이 상실하게 되므로 영혼의 지성에서 하나님에 관한 표상이 반영되었을지라도 지성이 하나님을 조명할 수 없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생성되지 못하여 감성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지각을 가지지 못하여 영혼이 감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함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지식이 전혀 반영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편만하게 계시고 언제든지 감각을 가질 수 있으나,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가 되었고 하나님에 관하여 무지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영혼의 지성이 순수지식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한 모든 지식에는 무지가 함유된 오염된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고.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천차만별로 해석되고, 지식의 혼란이 물밀듯이 피조 세계에 밀려와 창조 세계를 뒤덮어버린 것인데 그 정체가 바로 순수지식을 오염시키는 무지와 결함인 것이다.
사람은 영혼의 지성 작용에 관한 감각을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실지로 사람의 영혼에서는 지식을 생성하는 수많은 일들로 아주 분주하게 작용하여 사람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육체의 마음에 지식을 지속적으로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감각에 대해서 전혀 느낄 수 없다. 오직 육체의 오감으로 느껴지거나 마음에 반영된 지식만이 느껴질 수 있는데 이런 상태를 육체의 상태라고 앞에서 말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무지에 빠져버리고, 후손들은 영혼에 부여된 본유지식의 영향을 누릴 수 없게 되고, 경건하게 살려는 열의는 식어지고, 대를 거듭할수록 타락의 증상은 극에 달하여 완전히 무지의 측면으로 치우쳐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여 주셔서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드러내셔야 하는 부득이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시이며 무지의 어두움 가운데 빠진 사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때가 이르러 하나님 형상의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한분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시로 약속하셨고 충분히 인식 할 수 있도록 수차 말씀하시고 드러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처음 사람과 같이 본유지식을 가셨고, 당신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고3),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한복음 14:9)” 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자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지각을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었으며, 사도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지동하고 존재하느니라(행 17:28)” 라고 말한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동하며 살지라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과,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명백히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최초 사람에게는 계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본유지식 으로 완전한 지식1)을 주셨기 때문이다. 본유 지식이 가진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그리고 사람에 관한 모든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눈을 열어 세상을 보는 순간 보이는 사물의 감각이 표상으로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고, 영혼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을 감각할 수 있었고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여,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표에 관한 지식이 생성되는데, 지식이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이 육체의 감성에 반영될 때 사람의 두뇌에서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물학적인 반응을 갖게 됨으로 마음에서 전인으로 지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지적작용을 영적 감각에 의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세상을 보고 만물의 근원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각하며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창조의 근원에 관한 지식을 비추기 때문에 사람이 지각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의 지식을 생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Herman Bavinck 가 “창조 자체가 처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라고 말하였으나, 그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론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므로 그의 말은 옳은 것이나 의미는 전혀 다른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Charles Hodge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 이를 이성이 수납한다고 말한다.18) 이 말은 Herman Bavinck 가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묻게 한다. Bavinck의 기독교 유신론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종교철학에 근거하거나 모든 인식은 이성의 작용에 있다고 볼 수 있다.19) 이성에 근거한 인식은 Cornelius Van Til에 의하면 위에서 Chales Hodge의 말을 인용하여 “이성을 계시를 수납하는 기능”20)이라는 도구적 기능, 외에 판단자로서 이성으로 보았다고 했다. Van Til도 계시를 진리는 정신에 전달하는 것으로 본다.21) 여기 두 개혁주의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피조물의 의식에 관하여 전제하고 있다. Bavinck 나 Chales Hodge에 의하면 피조물이 계시를 자기의 의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Van Til은 이점에 있어서 Chales Hodge에 동의하며 중생한 의식과 중생하지 않은 의식으로 구별하여 기독교적인 인식론의 입장에 서서 Bavinck의 Tohmas Aquinas 영향을 받아 “우리의 이성 그 자체로는 신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에 참여하여, 하나님은 자신만이 본질 적으로 아시나, 우리는 참여를 통해서 안다.”22)라는 주장에 비판한다. 그럼에도 창조 자체가 처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계시인 것은 존재 자체가 자신의 근원을 말하고 있는 것을 동의한다. 하지만 피조물인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 의식하거나, 인식하는 작용이 영혼과 육체와의구조적인 역할에 관하여 분명하게 게시 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결코 면키 어렵다.
사람이 지음을 받았고 아직 세상에 관한 아무런 경험도 없었고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첫 사람이 일어나서 육체의 눈을 열고 세상을 본다고 하자. 모든 사물들이 보였고 자연과 대지를 데우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살펴보았다. 태양의 밝은 빛 아래 비취는 모든 사물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Bavinck 에 의하면 사람은 지음을 받을 때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자동적으로 인식을 한다고 했다. Chales Hodge에 의하면 진리인 계시가 사람의 정신에 잘 전달되었고, 타락하지 않았을 때 계시는 아주 정상적으로 작용을 하고, 계시로 인하여 의식을 갖게 된다. 한결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연적으로 의식 활동을 함으로 인식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개혁교회가 본질적으로 참된 인식론을 게시하지 못함으로 이교도들이나 복음적 이단자들 혹은 비본질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그들을 설득 할 수 있는 정확한 반론을 게시하지 못해왔다고 말하였다. 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에서 "사람에게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이 남아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 씨앗은 매우부패 하였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1)고 말하였다. Calvin 은 그의 책에서 마음과 영혼을 필요 따라 적용하여 언급하고 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기능적으로는 영혼을 전인으로는 마음을 표시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앗이 마음에 있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다방면의 민첩함.”2)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의 기능과 함께 병행하여 사용함으로 마음은 영혼의 탁월한 기능을 말한다. 이처럼 마음과 영혼의 구조적 기능에 관하여 불분명한 구분들이 주는 이해에 대한 혼돈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정통 기독교 입장에서 계시에 관한 입장은 감추어진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서 사람에게 인식하게 하는 존재론적 관점으로 이해해 왔다. 하나님은 무한한분이시고 피조물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이 유한에 인식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의 타락 유무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는 특별한 섭리에 의해 계시하시는 방법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존재론적인 구별은 분명하게 하지만 Bavinck 가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존재론적인 관점이 주는 혼돈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피조물인 사람은 유한하다. 무한과 유한은 존재부터 다르고 전혀 일치하지 않은 구조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고, 지식과 인식에서도 같을 수 없다. 사람의 의식구조와 하나님의 의식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쌍방이 서로에게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표현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드러내 주셔야만 한다. 이것이 존재론적인 논리로부터 자연적인 법칙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일반 계시와 초자연적인 구속사적인 섭리를 통해서 나타내는 특별계시로 구분된 하나님의 계시를 주장해온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수준으로 나타나셔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1) Herman Bavinck (1854~1921) Gereformeerde Dogmadick, 박태현 옮김, 6,63, 2011, 부흥과 개혁사, (이하 GD)
2) GD “모사 신학은 또한 다시금 주체의 성격에 따라 변화들을 거치게 된다. 모사 신학은 ‘실체와 근거’(Re et ralione)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정도와 방식’ Gradu et modo'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리스도안에서,(연합의 신학 Theologia Unionis), ‘천사들과 복받는 자들에게서’(직관의 신학, Theoloiia visionis),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서’(순례자들의 신학, 여정신학, 계시의 신학, Theologia viatorium, viee, revelationis), 그리고 다시금 사람들 가운데서 선지자들과 사도들, 신학자들과 평신도들 가운데서 차이가 난다,
3) GD 7,66
4) GD 7,67
5) GD 7,65
6) Cornelius Van Til(1929~1972)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이승구, 강웅산 공역, (코넬리우스 반틸의 조직신학 서론), 크리스챤, 2009,133p " Herman Bavinck 의 이런 입장을 C, Van Til 은 인간 지식의 확실성의 기독교적 근거와 비 기독교적 근거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7) 앞 ( ? p) “종교의 씨앗”
8) 창세기 11:1~9
9) Cornelius Van Til(1929~1972)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이승구, 강웅산 공역, (코넬리우스 반틸의 조직신학 서론), 크리스챤, 2009,173p
10) Louis Berkhof, 기독교교리요약, 박 수준 옮김, 소망사, 2010, 16p
11)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
12) Calvin, 기독교강요, 1,1,1, 김 종흡, 신 복윤, 이 종성, 한 철하 공역, 생명의 말씀사, 2010.
13)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새긴 돌판에 가장 먼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출20:3)”고 쓰신 말씀의 의미는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지니고 있는 지식에 배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인하여 자기 나름대로 왜곡된 하나님을 얼마든지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 누가복음 2:10,
15) 히브리서 1:7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셨느니라” 라는 의미는 바람은 수동적인 움직임을 갖는 의미로, 불꽃은 자기를 태워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사역자에 적용하였다.
16) 개역한글, 요한복음 10:38, 4:10, 11, 20, 17:21,
17)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헤르만 바빙크 박사가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라고 말한바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실지로 불가능 하다. 단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계시 해주신 것을 말한다
18) Chales Hodge, Systemic Theology, 3 Vol,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87-73: GrandRapids : Edrdmans, 1979), 1:34ff.
19) Cornelius Van Til(1929~1972)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이승구, 강웅산 공역, (코넬리우스 반틸의 조직신학 서론), 크리스챤, 2009,104p 에서 기독교 인식론을 “이성의 기능에 관한 논의”라고 언급하였다.
20) Chales Hodge 가 이성을 총칭하는 말이 아니라 “계시에 관하여 이성”을 말한 것이다.
21) Cornelius Van Til(1929~1972)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이승구, 강웅산 공역, (코넬리우스 반틸의 조직신학 서론), 크리스챤, 2009,104p.
22) Cornelius Van Til(1929~1972)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이승구, 강웅산 공역, (코넬리우스 반틸의 조직신학 서론), 크리스챤, 2009,134p.
'기독교교리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 믿음. (0) | 2012.02.25 |
---|---|
12,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죄의 본질, (0) | 2012.01.24 |
종교- 4) 종교의 씨앗 (0) | 2011.12.28 |
1. 종교 (0) | 2011.12.19 |
12,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0) | 201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