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이란?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일은 믿음뿐이라고 말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너희가 믿느냐(요 16:31),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6), 라고, 성경이 말하는 구절들뿐만 아니라
믿음이 아니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알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사람은 믿음으로서만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이해 할 수 있다(히 1:13),고 한다. 이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그의 지으신 창조에 관한 모든 지식들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믿음의 역할
사람이 자기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을 갖지 못함으로 자기 영혼에서 지식이 생성되고 그 지식에 의해 의식 활동을 하고 움직이며, 삶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 활동 지식으로부터 나오고 그 지식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며 존재자체에서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으며, 단순한 경험에 의해 지식을 얻거나 깨달아진다고 한다. 더 나아가 지식의 역할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연적으로 자기들의 의식 속에 생겨나는 것이어서, 철저하게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객관적인 증언과 변명할 수없는 진리 앞에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완고한 고집과 일관되게 대물림해 온 거짓된 지식의 유산과 전승으로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에 비춰진 객관적인 진리를 걷어내는 일에 진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는 세기의 전환점에 도달하여 줄기차게 달려왔던 길을 돌이켜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 BC가 AD로 전환되고, 집을 나간 탕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신 그 곳으로 돌아가는 아들처럼 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가고 있다. 사람은 진리를 거스르고 다른 길을 향하고 있었다고 역사가 몸부림으로 증거하고 이를 감각한 영혼이 마음에 아무런 반영을 주지 못함으로 역사의 증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육체와 영혼과의 단절로 사람이 육체가 된 결과이다.1) 육체가 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영혼에서 감각되는 모든 감각이 육체에 전달되지 않으므로 영혼의 감성으로만 감각될 수 있는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와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육체로 사는 사람에게 전혀 감각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역사의 증거에 대해서 전혀 감각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곧이어 만나게 될 피할 수 없는 두려운 심판 앞을 향하여 역사가 달려 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존재로서 영혼이 지식을 생성하여 감성으로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그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여 마음에서는 육체에 감각되도록 하여 의식 활동을 하지만, 지식은 사람의 본성에서 경험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람은 존재하고, 감각으로 사물을 인식하며, 관계를 가지며, 객관적인 판단도 가지며,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마 6:25, 10:28) 진화론자들이나 자연론자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구성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다. 영혼의 존재에 관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연의 산물인 존재하는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관심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은 공상과학에서나 필요한 초자연적인 세계일뿐 실제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가 회기 한다거나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이 생성된다는 것, 또는 초자연적인 영적세계의 존재와 천사들의 존재, 그리고 모든 영적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증언들은 그들의 정신에 조그마한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은 쉬지 않고 그들로 의식 활동을 하도록 지식을 생성하여 쏟아내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영혼의 존재를 부인한다 해도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들의 의식 활동을 위해 열심히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영혼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 활동을 위해 쏟아내는 지성의 활동을 멈춘다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무지와 어두움에 휩싸여 대낮에도 더듬고 감각적인 짐승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이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성 작용에 의해 지식을 생성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을 필요로 하고, 선재하는 지식에 따라서 생성되는 지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본유지식이 감각된 표상을 조명함으로 순수지식이 생성되었으나, 타락 후에는 본유지식이 상실되고 이미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생성된 순수지식이 있지만, 그 지식이 완전하고 포괄적인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결함과 무지를 더하여진 체로 표상을 조명하여 그로부터 생성되는 지식이 무지와 결함을 함유한 거짓된 곧 잘못된 오염지식이 된다. 물론 감각된 표상이 순수 지식과 일치한 경우에 있어서 오류일 수 없지만 감각된 표상이 항상 순수 지식과 일치한 상태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부가된 상황과 사실 등을 포함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순수지식과 일치한 표상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표상의 사실을 조명할 수 없는 부분에 있어서는 무지와 결함이 필연적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의 지성은 무지와 결합된 지식들로부터 조명을 받아 필연적으로 거짓과 오염된 지식을 생성하고, 사람은 그 지식에 의해 행동하고 활동하게 됨으로 사람의 모든 행동이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염된 지식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사람이 진리에 서지 못한 것이다.1)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주신 본유지식에는 4가지의 요소가 있고, 육체의 오감이나 혹은 영혼의 감성에서 감각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면 본유지식이 표상을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에 대한 감성에서 지각을 가지고 그 지각된 지식을 마음에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지각을 생성하는데 있어서 흠이 없이 완전하였다. 그 사실을 타락하지 아니하고 첫 사람의 상태를 가지신 아담의 형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고, 믿음을 가진 신자들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사람이 가진 결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느끼는 분이셨고,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성의 생성으로 인한 영혼의 지각을 자각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천지 창조,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최초에 주시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분명한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지셨다. 그 진리가 마음에 반영되어 육체의 입으로 나오고, 그 모든 말씀들이 진리이며, 모든 행위는 영혼의 지성에서 솟아나는 진리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육체를 입으셔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하나님을 아시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 거하셨고, 모든 말씀들이 진리를 말씀하심으로 사람과 같으면서 가지신 지식은 달랐던 것이다.
참 사람으로서 예수님과 아담의 후손인 타락한 사람과의 구별된 차이점은 영혼의 상태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영혼은 본유지식을 가지셨고,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사물과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그 지식을 세상에 드러내셨고, 또한 영혼과 육체의 소통에 대한 감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영혼의 감성과 육체의 감성을 느낄 수 있으나, 타락한 사람은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유지식을 상실하고, 타락이전 까지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한 적은 량의 순수지식의 조명에 의해 사물과 세상을 인식할 수 있거나 의식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는데, 순수지식이 무지와 결함을 함께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함으로 생성된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그 지식은 진리로부터 왜곡된 지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진리를 생성하거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혹 진리가 사람에게 게시되고 육체의 오감으로나 영혼의 감성으로 감각을 가졌다 할지라도, 감각은 그 진리를 표상 화하여 지성에 반영하여 이미 가진 순수 지식이나 지식들이 진리를 왜곡시켜 거짓된 것으로 변질시키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하실 수 있으실지라도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주어진 진리마저 왜곡시켜 더욱 더러운 지식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일밖에 할 수 없으므로 사람이 자기 지성으로 결코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진리를 깨우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
그래서 믿음이라는 방법을 주셨고, 믿음에 의해서만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인식을 갖도록 하신 것이다. 이 믿음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에 의한 의식 활동이 아니라.1) 사도가 말 한대로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로 와서 사람에게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며,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용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의 정체나, 형체 혹은 그 성질도 파악하지 못하고, 믿음에 관하여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더 큰 믿음을 갖기를 소원할 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눅 17:5)”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이 없다(눅 17:6)”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사람에게 믿음이 없음을 단적으로 증언하시는 말씀이었는데, 사람의 판단으로 볼 때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어떻게 제자들이 믿음을 갖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백부장이 나아와 고백하여 자기 집에 있는 중풍 걸린 하인이 낳기를 소원하였고,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어디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셨다”고 선언하시고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해 주셨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다고 하시고, 이방인이었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고 계셨고, 그 믿음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사람이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제자들은 자기를 부르시고 제자로 삼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함으로 자기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백부장은 제자들과 인종도 다르고 자란 성장 배경도 다르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관한 보고를 매일 듣고 그 안에서 믿음이 생겨났으나, 자신 안에 자기가 알지 못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예수께서는 그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고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마 8:10, 눅 7:9)”고 말씀하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던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없고, 백부장에게 있는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사람의 영혼에서 왜곡되고 거짓된 하나님 없는 지식을 생성하는 지성과 싸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을 생성하고 있었다. Calvin은 기독교 강요 3권 2장 2절에서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고.2) 요한복음 17:3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했다.3)
믿음과 의지
사도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고 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단계에 있어서 마음이 갈등과 숙고하는 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사람의 중심기관인 마음은 육체와 영혼의 의지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의지의 집이다. 두 개의 의지가 연합하였다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각기 인격적인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둘이 하나로 결합됨으로 하나의 전인격적인 완전한 사람의 의지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 영혼으로부터는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이 영혼의 감성을 통해 지각된 후 마음에 반영되는 것이고, 육체로부터는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된 표상이 의지를 통해 마음이 들어 온 다음 영혼의 지성에 감각된 표상을 반영하기 전에 마음을 통과할 때 반영되는 것이다.
영혼은 쉬지 않고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여 활동하는 사람으로 움직이게 하지만, 타락함으로 인해 쏟아내는 지식이 존재를 드러내는 지식을 제외하고 모두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을 생성하여 마음에 반영한다. 그러나 육체는 오감을 통해서 감각된 모든 사실을 마음에 반영하고 지식을 필요로 하는 표상은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지식을 생성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는 실재하는 사실을 감각할 지라도 타락한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그 표상은 지성에 선재한 지식이 무지와 결함을 연합하여 조명함으로 필연적으로 왜곡된 본질의 의미와 다른 지식을 생성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지성 곧 지식을 생성하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재의 표상과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에 의해 왜곡된 지식이 생성하는 일은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타락으로부터 회복하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할 때 표상대로 진리를 생성하도록 하시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필요까지 없지 않은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특별한 역사를 행하여서 모든 육체의 감각으로 생성된 표상을 진리대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신다면 사람은 자유를 가지지 못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결국 사람은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께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사람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의 근원이 하나님께로 돌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드러냄으로 모든 책임은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는 존재로서 영혼의 지성을 강제로 회복시키지 않으시고 특별한 섭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설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결국 사람이 본성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얻어진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고, 영혼은 지성에서 반영된 표상을 선재한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하여 지각된 지식을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로 행하여 활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영혼의 지성에서 선재한 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지 않아도 되는 지식이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마음에 반영하여 즉시 의지로 행하는 특별한 작용인데, 영혼의 지성에서 표상을 받지 않고 육체의 오감에 의해 감각된 지식을 의지가 반응하여 육체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으로 지식에 의해 마음에 드러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이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이 아니므로 외부의 지식인데 간접적인 교육과 하나님의 말씀, 선포되는 진리의 설교로부터 얻어진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식이므로 표상을 가지지 않고 곧바로 마음에서 받고 의지로 행하고, 영혼에는 지식을 생성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식으로 새겨 두는 것이다.
사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고 말함으로 믿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지의 행위임을 말하였다. 의지는 영혼으로부터 오는 지식과 육체의 오감으로 직접 반영되는 지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행한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사람은 그 의지가 행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의 정의
깊은 바다 가운데에서 심해에서 솟구쳐 밀려 올라오는 물이 포물선을 그리고 넓은 대양을 퍼져 나간다. 솟구쳐 올라오는 중심을 통과하는 배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솟구치는 힘에 의해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 무엇도 근접할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쉬지 않고 새로운 물을 솟구쳐 내면서 심해의 샘은 끊임없이 새로운 물을 솟구쳐 내듯이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와 믿음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사람의 중심 기관으로 영혼으로부터 지식이 들어오는 지식과 육체로부터 감각된 표상을 영혼에 반영하는 일을 하고 영혼에서 들어오는 지식을 떠받치는 의지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솟구치는 의지에 의해 육체의 감각을 자극하여 행동을 하게 한다. 미국의 부흥운동을 이끈 Jonathan Edward는 “인간은 사람이나 미움 갈망, 희망, 두려움 같은 감정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매우 소극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런 감정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며 무언가를 추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그런데 사람의 감정이 바로 이런 움직임의 원천인 것이다.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세상은 정지해 버리고 죽은 것 같이 될 것이다.”6)라고 했다. 믿음에 관하여도 “감정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말에 종교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7)”라고 했다. Edward 는 믿음이 감정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Calvin 이 말한바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다.” 라는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Edward 는 믿음을 여러 가지 다양한 감정 가운데 하나의 열매로 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감정에 이입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역할로 의해 믿음이라는 감정이 드러난 것으로 본 것이고8), Calvin 은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별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구분된 감정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고후 4:13절의 말로 “우리에게는 본래 없는 믿음의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라고 했다9). 사도가 말한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10)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감정에서 드러내는 또 다른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범죄에 빠진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말씀인 지식이 사람에게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도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 것은 사람이 최초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 곧 지식이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가고 그 말씀 곧 지식이 마음에서 작용하여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음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지식을 조명하심으로 믿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서 감각을 가지고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으로부터 감각되어 마음에 들어간 후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지는데, 지성에서는 지성에 선재한 지식11)에 의해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오염시켜 버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곡해하거나 믿음으로 받지 못하거나 고의로 싫어하는 등, 갖가지의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영혼의 지성에 선재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실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타락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 마음에 거하신 것처럼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으로 오셔서12)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된 하나님의 말씀인 지식을 곧 바로 의지로 행하도록 의지를 작용하시는 것이다.
영혼의 지성에서 수많은 지식은 마음으로 솟구쳐 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영혼의 지성에 선재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반영된 표상을 조명하므로 지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Calvin 은 이를 “우리는 인간 정신에 진리를 추구하려는 특정한 바램이 심기어져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이전에 진리를 맛본 일이 없이는 전혀 생겨 날 수 없는 생각”13) 이라고 한 말로부터 충분히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경험을 중시한 말로서 자신도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식 생성과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여, 지식을 “전혀 생겨날 수 없는 생각”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선재하는 본유지식과 순수지식을 말할 수 엇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의상을 벗어버린 상태라고 말한 Calvin의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상태 곧 본유지식을 잃어버린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말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지적인 행위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감각을 통해 전인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타락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육체의 오감을 통해 느끼고 감각 되도록 말씀을 통해 다가오신다. 선지자나 전도자, 혹은 지식이나 언어, 기록된 글을 통해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되어 느껴지는 지식으로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모든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마음에서 믿음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지식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가짐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도형화 하거나 형식적인 의미로 정의되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지식으로부터 일으켜 내신 열매인 것이다.
믿음의 본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상태를 이미 아시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대로 당신을 낮추셨고, 먼저 사람에게 말씀하셔서 자신을 드러내 주심으로 하나님이 육체에 감각 되도록 하셨으며, 바로 그 감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기보다 먼저 마음에서 의지로 지식을 전인에 감각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는 지식으로 생성되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가지므로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게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택함을 받은 사람의 영혼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생성되게 하셨으며, 그 지식이 마음에 반영하여 전인으로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때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음을 갖는 시기이다.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을 하실 때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셔서 영혼의 지성에서 하나님에 관한 감각된 표상을 조명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생성되도록 하고 감성으로 지각하여 전인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Calvin은 말하기를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14) 라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5)
a. 믿음의 본질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
Calvin 이 말한 대로 여기에서 성령의 조명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믿음을 바라보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씀으로 부터 정의를 찾으려 한다. Calvin Seminery 조직신학 교수였던 Louis Berkhof가 그의 책들에서 믿음을 ‘앞을 내다 보는 것’이라고16) 정의한 근거도 히브리서 11:1의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Calvin의 말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읽었다면 믿음에 관하여 얼마나 잘못된 접근을 시도하여 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Calvin은 믿음을 성령의 역사라고 분명히 말한다.17)
Calvin은 Schola 철학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지식에서 오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심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라고 책망하면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한다.18) “지식에 관한 단순한 동의”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사람 영혼의 지성작용과 영혼의 감성에서 얻어진 지각을 통한 동의이다.
각주
1) 이 말을 하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다른 부분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믿음을 언급해야 겠다. Calvin 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믿음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라고 말한 것은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 진리에 관한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관한 믿음을 말하면서 성령께서 조명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에서 믿음을 결코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믿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상은 마음에서 조명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적인 동의로부터 일어나는 반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Calvin이 말하는 의미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2) 요한복음 8:44. 3) Calvin 은 기독교 강요 3,2,36에서 “지성이 사상을 얻는 것 보다 마음이 확신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는 Calvin이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조명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해도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4)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3,2,2. 생명의 말씀사, 2010. 5)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3,2,6. 생명의 말씀사, 2010.6) Jonathan Edward, Religious Affections, The Work of Jonathan Edwards Volume 1, 부흥과 개혁사, 존 스미스 편집, 정성욱역, 2010, 156p. (이하 TWJE)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성향(inclination)” 이다.
7) TWJE, Volm 1, 157p. “그 사람의 심령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듭나지 못한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구원을 얻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수 없으며 지혜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 칠 수도 없다.”
8) TWJE, Volm1, 158p. "성경은 도처에서 믿음을 두려움과 소망, 사랑, 미움, 갈망, 기쁨, 슬픔, 감사, 불쌍히 여김 그리고 열정과 감정과 깊이 연관 시킨다“
9)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3,2,35. 생명의 말씀사, 2010. “사람이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10) 에베소서 2:8
11)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선재한 지식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에게는 “본유지식”, 아담의 타락 후 “순수지식 or 획득지식” 이고, 타락 후 아담과 모든 사람들의 지성에는 순수 지식 혹은 획득지식이 표상을 조명할 때는 무지와 결함을 동반하여 조명함으로 왜곡된 지식을 생성한다.
12) 사도는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함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에 거하신다고 했다(롬 1:28).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지 않는 다고 하셨는데 이는 함께, 혹은 같이 거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마음에 계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창 6:3) .
13) 기독교 강요 2.1.12
14) 기독교 강요 3,2,33
15) 기독교강요 3,2,33
16) A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 Louis Berkhof, 박수준 옮김, 소망사, 2010, 165p
17) 기독교 강요 3,1,4
18) Calvin 기도교 강요 3,2,33: 각주 NO 48, [CF. 1. 4. 9: 3. 2. 1. 8. 36: Augustine, Pre destination of the Saintas 2, 5(MPL 44, 963: tr, MPNF 4, 499) Cadier, Institution 3, 56, not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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