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경
1) 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적인 원리1)에 의해 존재되도록 지으셨다. 지적인 존재 상태가 아닌 다른 원리에 따르도록 얼마든지 충분한 지혜가 있으셨으나, 가장 적합한 최적의 상태로서 지적인 존재이어야만 하는 조건을 선택하심으로 가장 사람답고 완전한 존재로서 지적인 사람을 지으셨을 때 은혜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게 하는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계획을 가지신 것은 창세전이었으므로 모든 피조물들을 어떻게 지으셨고, 저들이 어떻게 관리는 받아야 하는지도 이미 계획하셨으며, 모든 피조물들이 자유롭게 존재하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지음을 받은 피조물들이 아름다움과 존재함으로 그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지적으로 증언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 형상은 겉모양으로 부터 내적 존재로서 영혼의 중심인 지성에 심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집이며 이 형상에는 사람이 존재로서 활동하는 근원적 요소인 본유지식을 가지고 있고, 지성은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순수한 사람의 지식을 생성하여, 육체가 지식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은 자기로부터 생성된 지식을 자기의 영혼의 감성에서 감각되어 지각을 가지지 않고는 활동하거나 감각된 표현을 드러내지 못하므로, 육체의 감각기관으로 사물이나 지식의 대상을 감각 후 표상화 하여 지성에 반영하면, 지성은 외부에서 들어온 표상을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지식으로 조명하여 감성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자기 지식을 생성한 후 자기 지식화 하였을 때 그 지식대로 행동하거나 육적 감성을 드러내므로, 자기로부터 생성하는 그 지식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고, 지식만큼 세상을 인식할 수 있으며, 지식에 따라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식을 주셔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는 것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독특한 요소이다. 이 요소는 하나님의 형상의 역할로 말미암은 것으로 피조물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사람만이 가진 지적인 기능을 더하여 지으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과 소통하는 존재로 지으셨으며, 사람이 철저한 독립적인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수 있도록 하셨으며, 그 지식에 의해 피조물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 하나님과 대하여 교제할 수 있어야 하며, 셋째, 하나님의 사역인 창조와 창조된 피조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넷째, 자기 자신인 사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의 지식이 본유지식이며 이 지식은 사람에게서 생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부여되신 지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결합하여 지으심으로 영혼의 역할을 지적인 기능에 부여하여 지성이라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두셨고, 육체로는 모든 피조된 물질적 감각세계와 접촉하여 느끼고 영혼에서 반영된 지각된 지식에 반응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감성을 두셨으며,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는 의지의 집인 마음을 두셔서 사람의 중심이 되게 하셨다. 이 세 기능들은 전인적인 조화와 각각의 기능에 따라 유기적이고 능동적으로 질서롭게 활동됨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높이며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불순종
첫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 자기 행위를 할 수 있고 자기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가 눈을 열고 세상을 보고 감각을 가지거나 혹은 자기 주위에 모든 환경과 자연들로부터 감각을 가졌다면 그 본 것들을 표상화해서 조명해주는 본유지식에 의해 자기가 지각할 수 있는 지식들을 생성하며, 천지자연과 우주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가까이서 대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타락하고 말았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며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은 상실되고 만 것이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감각된 표상을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하던 본유지식이 상실됨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지식은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순수지식인 것이다. 이 순수 지식은 본유지식이 표상을 포괄적으로 조명하여 완전한 생성될 수 있게 하지 않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사실상황과 환경, 사실적인 표현 등을 조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데, 그 부분을 무지와 결함이 대체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런 지식은 무지와 결함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 인해 왜곡된 지식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오염과 왜곡의 본성으로 곧 죄의 본성이 되고 이 지식대로 행동하는 모든 것은 죄의 본질이며 자연인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영혼에서 진리로부터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고, 육체는 왜곡된 지식에 의해 의식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구분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므로, 사람이 가진 모든 지식은 무지와 결함의 조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지에 오염된 지식일 뿐이다. 선지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소경같이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한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사59:10)”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8)”라고 말하는 것은 지적인 어두움에 휩싸여 있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8)”라고 선언한 것은 사람이 무지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지에 처해있고 무지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어두움에 휩싸여 있으며, 소경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아도 지성에 있는 지식조명으로 하나님을 알고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종교적인 지식이 영혼에서 지각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였으나, 불순종으로 인한 왜곡된 지식에 둘러싸인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왜곡된 종교를 만들고 사람과 창조에 관한 지식이 왜곡되어 심각한 오염에 빠져 치료할 방법이 없는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창조 시부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계시하시고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먼저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물을 불러내시는 창조하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 뿌리신 말씀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세계에 선포하심으로 만물이 있게 하시는 무에서 유를 부르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선포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말씀으로 선포하심으로 만물이 존재한다.
그래서 만물은 말씀에 의해 지음을 받았다고 사도가 말 한다2).
또 하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다가 오셔서 대화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선포가 아니고 대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며 나타내 주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내셔야만 하는 이유는 사람이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감각한 후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에 의해 인식이 가능한 지각될 지식을 생성한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이라도 이런 감각과 표상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사람이 인식하게 할 수 없다. 사람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기 지식을 생성하고, 영혼의 감성으로 지각되어야 하는데 자기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지성에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사실의 표상이 반영되고 선재한 지식이 조명되어야 지식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성되는 지식이 없으면 행동할 수 없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본유지식이 있어 조명할 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할 수 있었으나, 본유지식3)을 잃어버리게 되자 사람은 빈약한 순수지식과 무지와 결함이 표상을 조명함으로 왜곡된 지식대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본래의 목적을 이탈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육체가 됨이라.”4)고 말씀하셨다. 이로부터 사람은 진리와 멀어졌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무지와 왜곡된 지식으로 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계시하여 주실지라도 하나님을 사실대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고 자기가 가진 빈약한 지식과 무지에 의해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지게 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하나님대로 지식을 생성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드러내어 증언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각각의 개념들을 삽입하여 다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고 인식하는 범죄를 범하고 있다.
2) 성경의 필요성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최초로 지식을 주시되 처음 감각을 주신다. 그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의 오감 가운데 감각 되도록 하신 말씀이었고, 이 말씀은 사람들의 생명이 되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셔서 듣게 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가졌으며, 그 말씀이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되자 본유지식은 표상을 조명하여 사람의 지성에서 처음 지식을 생성하고, 질서에 따라 생성된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서 반영하여 지각을 갖게 된다. 이렇게 사람은 처음 자기의 지식을 생성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체에 감각되어지고 그것을 표상화 하여 지성에 반영함으로서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고, 이 지식을 지각함으로 비로서 사람은 지적인 감각으로 눈을 열고 세상과 사물을 직시하여 볼 수 있었으며, 육체를 움직이며, 의식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 8:3, 마4:4)”고 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 했고, 이 말씀이 곧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라고(요 1:3) 한 것이다.
대부분 철학자들이나 이 세상의 현자들, 진화론자들은 사람은 스스로 감각을 가지고 생각하고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적 본성을 가진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적 본성이라는 것은 인식하거나 지식을 생성하거나 혹은 움직임에 있어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경험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는 것과 언어를 사용하여 발전시키며 사회적으로 소통하고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등, 모든 것이 자연 환경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가지거나 생성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 되었거나 발전된 존재로 보았으며, 기본적으로 영혼의 존재에 관한 확신이 없다. 또한 사람의 영혼의 역할에 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본유지식에 관한 선재를 부인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상당 수 많은 신학자들이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거나 무지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Calvin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신적 의상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지식과 언어가 오랜 시간의 소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자면, 사람에게만 진화되었고, 고등한 존재로서 발전했다는 점에 있어서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고, 지적인 기능이 육체 안에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랜 시간과 환경에 의해 변화를 거듭하여 생겨난 자연 발생론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자연의 소산들은 반드시 사람과 같은 지적인 기능들을 얻게 될 것이고 현재는 그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자연 세계에 사람을 제외한 지적인 존재라든가 아직 과정에 있는 존재는 출현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식과 언어, 사람 이 세 가지의 역할에 관한 분명한 구분이 없는 존재론적인 의문은 끝이 없는 질문을 몰고 가고 있다.
사람의 의식 활동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의식 활동을 하며 지각하는 요소이고, 반드시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만의 지각을 가지며,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선재한 지식의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람이 타락하기 이전에 첫 사람 아담에게 있어서 선재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고, 이것은 영혼의 지성에 있다. 하지만 본유지식의 선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지음을 받은 사람은 자연적으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는 감각을 가졌으며, 지각을 가지고 반응하는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니 지음을 받은 사람도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곧 그들의 무지에 무릎을 꿇게 된다.
왜냐하면 첫 사람은 완전하였고 그러나 그는 타락했다. 이는 완전하게 지으신 분이 완전한자의 타락에 관하여 전혀 계산하지 않았거나, 반대로 완전한 자가 타락에 빠진 것은 혹시 그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산에 있었던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할 것을 아셨으며, 그 타락을 방관하시고, 그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과하셨어도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의 타락의 원인에 대해서 갖가지의 대립되는 의견들로 분부하게 노출되었고, 결국 사람들은 자기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타락의 책임이 어느 정도 하나님께 있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은 모든 조건에 의문을 남기지 않은 분명한 지식이 배경에 서 제공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스스로 타락에 이를 때는 조금도 결함이 없는 완전하게 자기의 지식에 의한 행위의 결과이어야 하고, 사람이 선과 악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든지, 그것은 완전한 자기의 지식에 의한 자기 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의 의무가 분명히 자기에게 있어야 한다.
규칙의 통일성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피조물인 사람이 자기의 지식으로 표현하는 의사표시를 하나님께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드러내시는 계시와 말씀을 사람이 순수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편리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식 Code 와 사람의 지식 Code가 서로 인식할 수 있도록 표현되든지 아니면, 서로가 같은 Code에 적용하여 인식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론 자들은 사람이 지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게 변화 과정을 겪어 왔는데, 사람은 지적이며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간 소통과정에서 동일한 Code가 형성되었으며, 이성5)이라는 판단 기능이 객관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들어오는 의견인 지적인 표현을 판단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예로 사람이 탄생 후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가족 간에 의사소통이라든가 넓게는 사회 구성 간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소통이 될 수 있도록 지적인 구조가 형성된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지식을 습득하는데 반드시 관계를 통한 경험을 전제한다. 사물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혹은 환경과 사실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고 습득된 지식에 의해 반응하고 행동하는 또 다른 피 관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만 관계되지 않으므로 인하여 존재를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을 관계하지 않으면 없는 사람으로 말할 수 있으므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한다고 가정하자, 사람의 구조의 어떤 부분이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할을 하는 구조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가? 또한 그것이 짐승이나 다른 자연적 존재들과 구별되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기능을 하는 어떤 성분이나 분여된 부분이 사람에게 구별되게 존재하는가? 만약 사회적 동물로서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지식을 생성할 수 없는 어떤 구조적인 기능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진보되어 왔으며, 그것이 오랫동안 사람의 구성 속에서 진화를 거듭하여 왔는가? 자연적으로 사회적 동물이 된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동물로 변화되어서 사회적 동물이 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인류가 존재하는 영원에 이르는 그날까지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정확하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거나 만물을 지으시는 그 행위는 하나님의 지식의 행위이다.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에 드러나고 드러난 만물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만물 가운데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지성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영혼을 육체에 부어주신 것이다. 그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형상에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지식을 주셨으며, 그 지식은 본유지식이고, 본유지식은 육체가 감각한 모든 것들을 조명하여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소통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가능하고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은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모든 지식이 일정한 본유지식이라는 Code뿐만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의 작용이 질서롭고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서 작용되도록 함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질서와 규칙이 영혼의 지성에 지식을 생성하는 규칙이므로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자연론 자들은 소통을 위해 일종의 동일한 지식 Code에 의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자연론 자들이나 진화론자들은 자연이나 과학이 일종의 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려 하지만 그들의 참된 신은 ‘이성’이고 그 이성은 사람 안에 있고, 사람은 이성이 담겨진 그릇이기 때문에 사람은 위대하고 고상하며 ‘만물의 척도가 된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배하거나 혹은 신성시하는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이 인격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이 변화무쌍한 자신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조절할 수 있다면 사람은 자연을 신으로 숭배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자신의 변화에 그 어떤 반응을 드러낼 수 없다. 자연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존재일 뿐으로 그 자연이 위대한 사람을 낳았고, 사람에게는 자연까지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성으로서의 절대적인 신이 생겨난 것이다. 이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 분여 되어 있으나, 결국은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나뉘어져 있어서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이성에 의해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를 낳은 절대적인 자연에 순응해야하고 모든 자연물이 궁극적으로 자연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의 영혼은 완전한 질서와 규칙에 의해 작용하도록 지으심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이 지성에서 지식 생성할 때 일정한 원칙과 질서에 의해 생성하는 Code 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지식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해서 넣어두신 규칙이므로 이 규칙에 의해 생성한 지식을 인식할 수 있고 사람들 끼리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사람이 지음을 받고 한 사람에 의해 모든 사람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에 의해 모든 사람이 동일한 Code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면 그 지식을 받는 사람은 지식에 관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여 자기의 선재하는 지식으로 표상을 조명하여 인식 가능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때 지성에서 적용되는 규칙과 질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의 지성과 동일한 규칙과 질서대로 적용함으로 지식의 의미가 다르지 않고, 전달자와 수납 자가 동일한 감성을 갖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람이 느끼는 지식에 대한 지각 감정이 하나님께도 동일하게 감각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이 동일한 규칙과 질서에 의해 적용되어지도록 생성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을 할 수 있고,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을 의지하며 종교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자연적으로 지적인 의식을 가지거나 지식을 생성하여 가진다면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소통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늘의 규칙을 따르는 분이시고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에 규칙을 따르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둘이 공통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이나 개념들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상이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곧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사람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으로 Code가 사라졌고, 그 결과로 사람은 지식의 규칙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일들에 대한 어떤 감정도 갖지 못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철저히 소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의식 활동의 원인자로서의 지식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지적인 역할의 두 기능을 지성의 역할로서 오성, 사고판단 능력으로 이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식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언급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지식이 생성된다고 말한다. 이미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지식은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생성되는 지식은 선재하는 지식과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로운 규칙과 아름다운 조화에 의해 지성에 지식을 생성하고 감성에서 지각을 갖고 전인으로 의식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사람의 의식[사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사물과 환경 그리고 사실을 시간적으로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활동의 원인으로 육체에는 심장에서 공급하는 혈액이 쉬지 않고 흘러 육체의 생명활동을 하는 것과 같이,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전인으로서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느끼는 의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지속적으로 뿜어내는 지식이 영혼의 지성과 감성을 거처 마음에 흘러 육체의 감관에 감성액(호르몬)을 분비하여 전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지식은 영혼과 육체에 쉬지 않고 흘러 회전하며 감관을 자극하여 육체에 느끼도록 하는 의식 활동의 원인자로서 지식이 없는 의식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순수한 객관적 지식
의식 활동의 원인자로서의 지식이 없으면 사람에게서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육체의 오감으로 보고 느끼고 감각을 가지고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었을 때, 지성은 자기가 가진 선재한 지식으로 표상을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데, 지성이 본질과 다른 지식이나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여 본질을 본질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사물 본질과 선재하는 지식 사이의 일치하는 지식 Code6)를 갖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상이 타락한 사람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왜곡하여 진화를 말하고, 하나님을 왜곡하여 왜곡된 거짓 신들을 지어내고, 창조를 왜곡하여 자연의 산물로 인식하고, 자연의 질서에 관한 철저한 무지로 인하여 재앙을 당하고, 삶에 뒤틀린 질서로 인해 고통과 고난에 처해 있으며, 자신의 존재에 관한 왜곡된 지식으로 인생을 알지 못하는 대 혼란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형편없는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하는 우를 범하고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심각한 왜곡으로 이성을 신격화 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물의 본질과 지성에 선재하는 지식의 Code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나타나는 결과인 것이다.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서의 본질이 왜곡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은바 그대로 이지만 그 사람을 왜곡되게 하는 것은 본질이 생성하는 지식인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지식이 없다면 그는 선이나 악을 행할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지식으로 의식 활동을 하는 그 순간 죄를 양산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에 관하여 왜곡된 지식을 양산하여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를 진노하실 수밖에 없으시지만 은혜를 베풀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특별한 역사를 행하셨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지식 Code는 이미 달라져 있는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타락한 사람에게 보여 주실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할 것이다.7)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으며 두렵고 떨었다.(출19:9~2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의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였다.(출 32:1~4). 여기에서 이스라엘에게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존재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려고 했던 사람들과 다른 한편은 그것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를 범하는 그들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왜곡된 지적인 작용이 출애굽 이전 애굽에서 경험한 종교적 신관이 그들의 지성을 선재하여 하나님에 관한 표상을 왜곡된 종교로 일치화 한 것이지만, 가담하지 않은 자의 지성의 지식은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담하지 않은 자와 가담한자, 이 두 종류의 의식 활동을 드러낸 사람들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식은 결코 다르지 않다. 전자는 의식된 지식을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긴 사람이지만 후자는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을 의식하기는 했으나 그 의식대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대 있어서 소극적인 상태였을 뿐이다.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과 후, 예수님에 관한 지성이 가진 지식은 일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이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항상 왜곡된 지식의 조명에 이끌렸다. 교회시대 이후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 결코 일치하지 않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항상 신관에 대한 왜곡된 지식에 의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나 거듭난 사람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신관은 하나님께서 계시한 본질을 인식하는 지식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지성에 선재하는 지식의 Code가 일치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의식 활동은 일치하는 지식의 Code를 요구한다. 그것은 오직 한 사람 타락하지 않은 아담만이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을 뿐, 타락한 그의 후손들은 결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거듭남은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 조건은 사람이 가진 모든 지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왜곡된 지식에 의해 그들의 지성이 점령을 당해 있고, 진리가 그들에게 주어져도 그들은 자기가 가진 왜곡된 지식으로 반드시 왜곡된 진리를 생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왜곡된 선재하는 지식을 가진 그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을 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조건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전에는 육체로 났으니 육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영혼의 지성이 육체의 감각이나 경험에 의해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으로 지식을 생성하였던 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8)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서 표상을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이르게 한다, 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을 꼭두각시나 범신론적으로 이끄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자기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말하여 천지 창조의 아름다음을 말하고 증거한다고 해도 그 증거들은 하나님에 의해 드러난 것이므로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완전히 객관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수함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비록 지음을 받았을 지라도 완전한 사람으로부터 생성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자기 스스로가 아닌 사람의 지식코드에 일치한 순수한 객관적인 증언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들으신 것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들으신 것
성령은 삼위 하나님 중 한분이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거하셔서 사람의 구원사역을 행하시고,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결정을 지켜보고 계신다. 성령께서 사람이 항상 자기의 결정으로 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은 영혼의 감성에서 감각을 가진 사람이 갖는 의식 활동에 의해서 참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말하게 된다.
타락한 사람에게서 성령께서는 사람의 행동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적으로 사역을 하시는데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선포하신 말씀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기의 인격적 의지를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기의 의지에 따라 사역하시지 않고 오직 들은 말씀으로만 역사하시는 데 들은 말씀이 곧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신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행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고 오직 이 성경에 있는 여자적 말씀과 그 뜻에 함유된 말씀이고 사도를 세워서 풀어서 말씀하신 성경을 근거로 한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내심을 받은 성령께서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고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사람으로 인식하고 의식 활동을 하도록 지식을 생성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드러내려 하시는 것이다. 자 의식적 활동 존재는 스스로 정보를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도덕적이고 이지적이며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거나 느낄 수 있는 복잡한 정보처리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사람에게 부여된 이런 능력은 38억년을 거슬러 자연과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물체의 적응 욕구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을 자연에 적응하며 변화하여 자신을 바꾸어 가는 자연을 뛰어넘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려는 사람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놀라운 주장은 수억년의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지식을 생성하고 그것을 담아두는 기능인 영혼이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변화를 가져 왔느냐고 묻는 다면, 지금 사람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사람을 자연을 초월하여 변화에 적응 할 수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들이 자신을 구성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결코 자기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삶은 잠시 안개와 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할 것이라고 믿지만 그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혼의 눈을 열고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시작할 때 자기의 어리석음을 느끼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지만 자기의 영혼에 존재하지 않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음으로 크게 두려워하고 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과 그들의 무가치한 인생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의 목적하신바와 전혀 관계없는 인생을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타락한 상태의 모습에 따라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충분히 인식 할 수 있는 모습을 계시하시고 말씀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깨우치고 회개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사도들에 의해 복음서에 기록하였다. 이런 말씀들을
삼위 하나님은 함께 계시고 하나이시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신 일을 모르시지 않는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행하시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그 말씀들을 기록하였고 그것이 구약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하실 때에는 “사람 영혼의 지성을 사용하셨다.” 라는 말씀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성으로 말씀을 하셨다면 사람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선지자와 모세가 인식이 되도록 사람의 수준으로 말씀하셔야만 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어록과 성령의 역사, 사도의 증언이 기록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낮아지셨다. 죄가 없으신 상태로서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과 같은 상태였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셔야만 했다. 비로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참 사람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셨고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다.
성령께서 들으신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로서의 본성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지신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말씀이셨다.
예수님 지성에서의 본유지식 조명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으로 피조세계에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목적은 사람의 죄의 대가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신성을 본체로 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과 같은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영혼의 지성에는 본유지식이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육체의 오감을 통해 피조물을 감각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여 그 지성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완전하고 순수한 지식을 생성하시고 그 지식을 영혼의 감성으로 지각하여 의식 활동을 하도록 마음에 반영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인 타락한 사람과 같이 영혼에서 오염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지식을 가지심으로 그 지식에 의해 행하시는 모든 언행은 진리의 표준이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이시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본유지식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행위에 대하여 모본을 보이신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종교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모본을 보이셨고 종교의 표준이 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행하신 하나님께 대한 행위의 본을 사람이 객관적으로 지식을 통하여 자기의 지식으로 가지도록 사도들을 통하여 기록에 남겨둔 복음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을 통하여 참사람에게서 생성된 지식이 객관적으로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 본유지식에 의해 얻어진 지식으로 진리가 되는 것이다.
4) 성경의 역할
성경은 모세, 선지자, 예수님과 사도가 기록한 것으로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지식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진리이며 사람의 삶의 표준이 된다.
만약 첫 사람 아담의 타락하지 아니했다면 성경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준에서 본유지식이 조명에 의해 생성되어진 지식이므로 타락한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의 객관적인 진리임을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도로 주어진 것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할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의 감각으로 표상화 하고 지성에 반영하였을 때, 지성이 선재한 자기의 지식으로 반영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할 수 있도록 지각되어 마음에 반영되어 육체의 감성에 감각되어진다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놀랍게도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각하여 듣고 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영혼의 지성에서는 그 말씀을 그대로 지식으로 받아들여 지각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으로 변환하여 생성한 다음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을 가지지 않으면 그 말씀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의미대로 인식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주어진 말씀이 오감에 감각을 가졌다는 것은 귀로 들었거나, 성경을 통해 본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감각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런 감각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위해 표상화 되고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 선재한 지식의 조명을 받으면 두 지식이 서로 다른 규칙에 의해 생성된 것이므로 조명을 받은 지식이 조명하는 지식에 의해 변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명을 받은 하나님의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새로운 인식 가능한 규칙에 적용을 받은 지식으로 생성되어 지각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롬1:25)”라고 사도가 말한바와 같다. 사람의 영혼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왜곡은 사람에게 있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 적용하는 규칙이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최초 사람에게 부여하신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 안에서 생성된 지식인 반면, 타락한 사람은 타락한 사람이 무지와 결함을 포함한 순수와 획득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지식이기 때문에 이 둘은 비록 지식의 모양으로 표현되는 문자는 일치할 지라도 뜻과 의미가 동일하게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단순한 탄생의 의미만은 아니라1) 사람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 적용하는 규칙에 의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차이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람이 이해 할 수 없는 지식일 경우 하나님은 쓸대 없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 최초 사람에서 부여하신 본유 지식에 의해 조명 받아 생성된 지식으로 주셨고 사람은 그 지식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게 지식의 말씀을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 당신을 사람에게 낮추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성자 하나님이 오시기 이전에 벌써 자신을 낮추셨고,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시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었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은 불타는 것과 같았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면 할 수 있고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으며, 새롭게 사람을 지으실 수도 있으였으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뜻이 일정하시니 뜻하신 것을 취소하시거나 버리실 수 없으시자. 그래서 끝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수많은 인내와 아픔을 겪으시고 배반을 수없이 당하셔도 계속해서 사랑의 물줄기를 내시고 계시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시고, 아들을 사람으로 모양으로 보내시고, 사람의 마음에 거하셔서 사람에게 객관적 지식을 가지시도록 직접 역사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대로 사람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신 것이다. 이 일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참사람의 본유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사람의 지성에서 생성되어질 지식이었는데 사람이 타락함으로 이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신 생성해 주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지식을 자신의 영혼의 지성에 새길 수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사람의 지성은 성경인 객관적 진리의 지식을 원상태 그대로 지성에 새겨 받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 원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셨으나 사람에게서는 결코 진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믿음”을 주셔서 진리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 믿음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서 조명하셔서 받게 하시고 의지로 조명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식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 믿음을 받기 이전에 사람은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한 자기 지식만을 의식 활동에 적용을 하였으나, 믿음에 의해 성경의 말씀에 따라 의식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은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강력한 조명으로 성경을 마음에 밝혀주셔서2). 영혼이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소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5) 성경의 권위
“성경은 내가 믿고 있는 일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이 내가 보지 못했던 일이며, 또 그 일이 일어날 때 내가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나이다. 곧 세계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 내가 보지 못했던 장소나 도시에 관련된 수많은 일들, 그리고 친구들이나 의사들, 그 밖의 수많은 이런 저런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서는 우리에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나이다. 또한 내가 어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너무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으나, 그것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해준 말을 믿지 않는다면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 이니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책인 성경을 믿는 자들이 잘못이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하셨으니 이는 당신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세상의 거의 모든 민족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음이니다. (Augustine, Confession. 6,8)"
정경형성
1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개신교는 그 특성 상 분파가 많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어느 누구도 어디까지라고 개신교라는 집단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개신교'에 속한다고 자처하는 모든 교파들을 관통하여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몇몇 원칙은 세울 수가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칙은 '오직 (66권의) 성경'이 될 것이다.
그러한 원칙을 운영하기 위해서라도 개신교는 가장 먼저 성경의 범위부터 명확하게 규정지어야만 했다. 일찌기 루터는 에크와의 논쟁에서 '마카비 2서는 성경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규정지음으로서 카르타고 공의회에서의 확정 이후 천년이 넘게 이어져 온 서방 가톨릭 교회의 성경.. 특히 구약의 목록을 부정할 뜻을 밝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필적할만한 잘 알려진 다른 권위가 필요했고, 그 대안은 '타나크', 즉 유대교 랍비 성서의 재조명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기계적으로 유대교 구약 39권의 정경 목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타나크의 외경에 해당하는 집회서와 마카비 1서의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또한 구약 성경 중에서도 특히 에스더서에 대해 사실상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고 외경으로 이해하는, 제롬 이전 시대의 좁은 성경 목록 지지 교부들의 입장에 더 가까웠다. 더 나아가 그는 신약 성경에서 특히 행위의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경전성)가치'라고 평가절하하였으며 유다서와 히브리서, 요한 계시록의 경전성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사견은 특히 신약에 한해서는 결코 개신교의 공식적 입장이 되지 못하였고, 결국 그는 'Kanon im Kanon'이라는 논리를 내세워서 인정된 정경들 사이에서도 경전적 가치에 대하여 차이를 두었으며, 이른바 '외경'으로 구분되는 책 전체에 대해서는 비록 '성경이 아니지만 읽어서 신앙에 유익한 책'이라는 과거 일부 교부들의 입장 정도만 인정하는 방식으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칼뱅은 앞 게시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경전이 초대교회의 성경 전통이었는데, 2세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의 이질적인 70인 역 전통이 초대교회 안으로 들어왔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단호한 기존 정경 목록의 재확인 결정이 내려지자, 이중에서도 특히 마카비 2서의 정경성 인정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더 나아가서 칼뱅은 성경은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결정해서 비로소 성경의 권위가 인정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감성이 스스로 정경으로 인정받도록 이끌었다는 성경의 자증성을 본격적으로 주장하면서 2세기 이후 본격화된 교회 내 경전 목록 확정 작업을 통해서 5세기 초 완성된 카르타고 공의회 성경 목록을 재선포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채택한 '역사적 전통의 계승'의 논거를 부정하였다.
2. 개신교의 성경 결정
개신교의 명문화된, 배타적인 성경 목록 결정은 주로 칼뱅파 계열에서 주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선 개신교의 또다른 한 축인 루터파는 성경 목록을 종교회의의 공식적인 결정으로서 열거하여 선언하지는 않았다. 개신교 안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헨리 8세의 성공회는 39조의 영국 국교회 신앙고백에서 정경 목록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 칼뱅신학의 영향력을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성공회의 경우 외경에 대해서는 " 교회에서 생활의 모범과 행동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지만, 어떤 교리를 만드는 데도 적용해서는 안 된다." 라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성공회 39조 신앙고백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의 감리회는 25개 신조에서 정경 목록을 제시하되, 외경에 대해서는 언급을 아예 생략하고 있다. 요컨대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총 66권 성경 목록은 개신교의 모든 교단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로서 카르타고 공의회의 정경 결정 시기에 가톨릭 교회 안팎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대교의) 외경을 정경으로서 여기거나 교회의 행사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라면서 꿋꿋하게 소신을 고집하였던 제롬의 소망은 무려 천여 년 이상 지난 뒤에서야 그가 몸 담았었던 가톨릭 교회의 바깥 영역에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2.1 벨직 신앙고백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16세기 중엽 신교가 활발히 유입되던 알프스 북부 - 베네룩스 지역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는 전형적인 가톨릭 군주로서 개신교 신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 지역의 귀족이었던 귀도 드 브레는 24세 때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깔뱅파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영국으로 추방된 이후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펠리페 2세에게 헌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벨직 신앙고백서'이다. 이는 엔트워프 공회, 베셀 공회 등에서 약간의 개정 작업을 거쳤으며, 마침내 도르트 공회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음으로서 유럽 대륙의 칼뱅파 개혁교회의 보편적인 교리로서 채택되었다.
Confessio Belgica - CE 1561
Article 4: 성경의 정경들 (Canonical Books of the Holy Scripture)
We include in the Holy Scripture the two volumes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They are canonical books with which there can be no quarrel at all.
구약에 속하는 책들은
모세 5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여호수아서, 룻기,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다윗의 시편들,
솔로몬의 세 책, 즉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의 대선지서,
그리고 12권의 소선지서라고 불리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입니다.
신약에 속하는 책들은 사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바울의 14권의 책들인 로마서, 고리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서신인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입니다.
Article 6: 정경과 외경의 차이 (The Difference Between Canonical and Apocryphal Books)
우리는 다음의 책들,
즉 에스드라 제 삼. 사권, 토비트, 유디드서, 지혜서, 벤 시락의 지혜, 바룩서, 에스더서의 부록, 불구덩이 속의 세 소년 찬미서, 수산나의 역사서,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의 두 책 등 소위 외경이라고 부른 것과 정경을 구별하는 바입니다.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정경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한계 내에서만 읽혀질 수 있고 교훈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면이라도 확증을 줄 수 있는 능력이나 효능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이 책들로 인해 정경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은 구약 38권, 신약 27권의 총 65권을 정경 목록으로 제시한다. 현대 성경과의 이러한 권 수의 차이는 당시의 성경 구분법에서는 아직 예레미야서로부터 애가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도는 소위 외경에 대하여 좁은 목록을 지지한 고대 동방교회 교부들의 주장을 재탕하는 온건적인 노선을 제시함으로서 설득의 대상이기도 했던 가톨릭 군주인 펠리페 2세와의 적극적인 대립을 회피한 것으로 생각된다.
2.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해 나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성 바돌로매 축일 학살 및 30년 전쟁의 마그데부르크 학살 등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탄압과 보복이 반복된 피비린내 나는 역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신교의 일부.. 특히 대 로마 강경 노선에 해당하는 칼뱅파의 상당수가 극단적인 반 가톨릭 성향을 띠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 일파인 영국의 장로파 교도들은 영국 국교회 39항 신조에서 나타난 성공회의 비아-메디아(via Media) 노선에 대해서 매우 불만이 컸다. 결국 이들은 1643년 장기의회를 소집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였고, 그러면서 새로운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국교회와는 별도로 준비하였다.
이들은 가톨릭 교회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재확립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아나테마 결정 이상의 강경한 어조로서 신랄하게 비난하였고(아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대놓고 규정할 정도), 특히 가톨릭 교회만의 경전으로 위상이 축소된 '외경'에 대하여 기존의 좁은 정경 목록을 지지한 고대 동방교회 교부들이나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도 다르게, 사실상 '위경'과도 비슷한 수준으로서 배척하여 교회 안에서 완전히 축출해 버렸다.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 CE 1646
CHAPTER I. Of the holy Scripture.
2. 성경, 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지금 신-구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모든 책들이 포함된다.
구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1, 2, 3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
3. 일반적으로 ‘외경’이라고 불리우는 책들은 신적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정경(正經)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가 없고, 또한 다른 인간적인 저작물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사용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2.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성경으로서 다음과 같다.구약 (39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솔로몬의 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 (27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며 믿음과 삶의 규칙이다.3. 보통 외경(外經, apocrypha)이라고 하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않았기에 정경(正經, cannon)에 포함되지 않고 성경의 규칙(rule of the Scripture)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외경은 교회에서 아무런 권위가 없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성경과 동등한 지위나 인간의 다른 저작물 이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