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요약

9 창조 2

생명있는 신앙 2012. 4. 8. 07:40

 2) 하나님의 창조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창조지식을 조명하여 주심으로 인하여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지각되었다고 볼 때, 지각된 창조에 관한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사람의 지성으로부터 완전한 지식에 관한 느낌을 갖지 않는다면 사람은 창조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창조란? 이 언어가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일까?

이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소리로 아니 글로 드러났으며, 사람들에게 감각되어 영혼의 지성에서 인식되게 하는데, 육체의 감각을 통해 언어로 귀로 들은 ‘창조’라는 언어 표상을 지성에 반영되자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조명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감성에서 지각을 가진 지식이다. 이렇게 분명히 지각된 지식을 인식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지성에 있는 선재한 지식이 창조라는 언어의 표상을 완전히 조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표상이 완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표상을 조명하는 선재하는 지식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성에 조명된 대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감각한 모든 사물과 지식에 관하여 완전하지 못한 조명에 의해 미완성이나 부족함, 무지가 함유된 지식을 생성하는 지성에 의해 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타락한 사람의 후손이며, 영혼의 지성은 어두워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쏟아 놓은 모든 지식은 피조물의 한계인 사람만이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지식의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진리라 할지라도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을 수는 있으나 지성이 생성한 대부분의 지식들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채로 영혼의 감성으로부터 지각되어 지성에 새겨짐으로 이 지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감각하고 지성에 반영한 표상되어 조명을 받을 때 필연적으로 무지와 결함으로 함의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최초에 주신 본유지식이 사람 영혼의 지성에 남아 있어서 언어나 문자를 통해 육체가 감각을 갖고 표상화하여 창조라는 표상을 지성에 반영한다면 그 본유지식이 조명함으로 단어에 함의하고 있는 창조의 의미를 완전하게 인식이 가능한 지식으로 생성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성하는 지식이 각 사람마다 다르게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음을 받은 영혼에게 주어진 지식을 생성하는 규칙과 존재의 조화로운 작용에 의해 모든 사람이 감각을 갖고 생성한 지식이 거의 같을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없이 쉽게 소통을 하고 더 분명한 진리의 지식을 소유함으로 진리로 인한 영혼의 감성이 즐거움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즐거움들로 인해 사람에게는 악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의 사회는 무한한 즐거움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실지로 타락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회는 즐거움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즐거움은 자신을 진리대로 인식함으로, 피조물인 존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거룩한 일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고,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무한한 지적인 감동이 사람의 영혼의 감성에서 샘솟듯이 솟아나는 지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지각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으로 말미암고, 이 지식은 감성을 가진 육체가 감각을 가지고 그 감각을 표상화 하여 지성에 방영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처음 창조라는 지식을 내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라는 언어에 의미를 분명히 함의한 채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하다. 아니면 창조라는 단어가 사람의 지성에서 생성되어진 말일지라도 단어는 지식으로서 반드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이성의 작용

 

지금 우리가 창조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헤매고 방황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감각으로 반영된 표상을 이미 알고 있는 지성에 선재한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함께 표상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된 다음 육체에 반영함으로 느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란? 어떤 것이다” 라는 각각의 지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느낌에는 항상 지적인 결함이 있고, 지식 자체에 무지가 함의하고 있어서 분명한 창조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반응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느낌이다. 이것을 지금까지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과 지적인 깨우침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성작용’이라고 불러 왔고, 그들의 말대로 ‘창조란?’ 이성에 의해 얻어진 어떤 느끼는 감각으로 ‘어떤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일어난 지적인 작용은 영혼의 작용이고 영혼의 감성에서 먼저 지각된 지식이 육체와 영혼에 연결된 감관에 의해 육체의 기관에 전달되어짐으로 육체에 반응되어 나타난 인식이라는 사실을 어거스틴이 오래전에 이미 깨달았고 분명히 말하여 왔으나,1) 우리는 그가 깨달은 바 이 지식을 등한히 해 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지식으로 새겨두어 모든 표상을 반영할 때 함께 반영되도록 하지 않고, 이성의 판단만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그를 추종해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성에 의해 현혹당하고 있고, 이성의 판단이 옳은 것이라고 했으나 이성이 판단한 모든 지식들은 무지와 결함을 대부분 함의하고 있어서 모든 지식에 있어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들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어지지 않으므로 감성은 즐거운 감각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영혼의 감성은 말 그대로 감각 작용을 하는 기관이다.

영혼이 감각 작용을 하는 것은 피조물인 존재가 가진 유일한 특징이다.

생물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감각은 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게도 고루 지니고 있다.2) 그러나 동물과 식물에게 있는 감각은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는 것이 아니다. 육체에서 직접 느끼는 물질적인 감각뿐이고 사람의 육체가 이와 같은 육체의 감성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음을 받을 때 동식물과는 달리 육체가 영혼과 결합된 피조물이다. 육체와 영혼이 각각의 독립적인 지정의의 인격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고 각각의 구성이 함께 결합되어 사람으로 작용을 하게 한다. 즉 육체의 지성과 영혼의 지성이 결합하여 대표적으로 영혼에서 지성의 작용을 하게하고, 영혼의 감성과 육체의 감성이 결합하여 대표적으로 육체에서 감성작용을 하게 한다. 그리고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결합하여 독특하게 마음을 형성하여 마음으로 전인을 표현하여 사람의 대표 기관이 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의 육체로 죽음을 당하면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가 결합되지 않으므로 사람에게서 마음이 사라져 버림으로 사람으로서 영혼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드러내거나 표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구원의 필요성을 함의한 채 영혼으로 구원을 기다리게 되는데 새로 지으심을 입은 육체를 덧입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일에 대해서 이미 성령의 조명을 받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니라(고후5:1)”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움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의 조명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로고스 곧 창조자와 피조물인 사람과의 지적인 상태로서의 조명이다. 만약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그대로 조명하신다면 사람은 결코 그 지식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모든 지식은 완전하게 사람에게 적용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결코 무지나 결함을 가지지 않는다.

사람의 감성에 답답함이나 무거움을 주지 않는다.

성령께서 조명하실 때 그런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조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은 최초 지음 받은 사람이 받은 본유지식으로 조명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동식물과 사람의 다른 점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람에 관한 지식을 설명해도 동의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렇게 설명한 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받아 보고, 듣고, 읽어서 육체의 감각기관으로 감각을 가진 후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하면 지성에서는 이미 선재한 지식과 사람에 관한 다양한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반영된 위의 지식의 표상을 조명하여 무지와 결함을 덧씌워 결국은 무겁고 답답한 지식을 생성하고, 감성은 그 지식을 지각함으로 사람이 육체로 진리에 대한 감각을 갖고도 영혼의 지성에서는 그 진리에 대한 옳은 지식을 자기 안에서 생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에 무지와 결함을 덧붙여 진리를 진리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의 죽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완전한 새사람을 덧입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물론 우리의 첫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필요치 않고 영원한 집을 덧입게 될 것이나 우리의 타락이 죽음을 통해 영원한 집을 덧입게 선택한 것이다.

이제 성령께서 본유지식으로 조명하여 주시는 지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었고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한 즐거움과 희락이 있는 진리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람에 의해 다른과정을 겪었으니 그것이 사람이 반드시 죽음을 만나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 창조에 관하여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성령께서 “창조”를 조명하셔서 우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지금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원의 공간 속에 홀로 덩그러히 존재하셨던 분은 아니라, 만물, 곧 심지어 공간과 시간, 아니 이를 뛰어넘어 ‘무’라고 표현되는 세계까지도 존재하지 않은, ‘곳’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 안에 무한한 영원과 시간 그리고 공간을 펼치셨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와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고, 충만하시는 그 충만이 홀로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우주가 아무리 넑고 광활해도, 자연이 아무리 신비하고 놀라운 변화를 가질지라도, 무수히 많은 비밀들과 신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자연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간직한 드넓은 우주가, 존재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만약 자연과 우주가 하나님 밖에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하나님 밖에 공간을 펼치셨다면 우리의 지식은 대 혼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밖에 공간이 계시고 그 공간은 무수히 넓고 광할하며 그곳에는 우리 편이신 하나님과 우리 편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 추론으로 혼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연과 우주가 하나님 밖에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하나님 박에 공간을 펼치셨다,”

는 이 지식을 면밀히 살펴보면 무지와 결함을 함의 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공간이라는 표상이 있고, 이 표상이 공간이라고 표현을 했으나, 그 공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한 표현을 발견 할 수 없는 결함을 함의하고 있다. 두 번째 그 공간의 범위와 크기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을 나타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간에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의 유무에 관한 아무런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지식이 생성될 때 무지와 결함이 함께 조명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왜곡된 지식이 생성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를 말하려는 우리에게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에서 창조를 하셨는지는 완전한 지식의 조명에 의해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곳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밖에 공간이 없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 위해 어떤 도움을 받으셔야하는 그런 상태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또한 왜 창조를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물을 수도 없다.

만약 창조하셔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완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논리가 하나님을 완전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 말은

첫째 하나님은 완전하셔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어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셔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자 충족적이셔야 한다.

넷째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셔야 한다.

라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그리거나 형성해 가는 것이라는 논리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위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지식으로 설명되어진다면 그 설명은 억지로 조합한 아니, 하나님을 완전함이라는 조건에 가두어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분명히 성령의 조명에 의해 설명되어진 논리적인 지식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위와 같은 완전한 조건에 의해 하나님을 설명할 이론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왜 창조를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뭣인가 모자라서 일을 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창조를 하셨는가?

여유를 채우시기 위해서 일을 하셨는가?

자신 안에 예술적 감각이 충만이 채워져서 그것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창조를 하셨는가?

창조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으로 충만함을 가지신 분이시다.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완전함이란? 어떤 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함의한 말이지만, 그 말이 지식을 함의한 진리대로 우리 영혼의 감성에 감각되어 지각을 갖게 되면, 그 때로부터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지성에 반영된 표상에 하나님의 완전함이라는 지식이 조명하여 표상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생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우리는 본유지식을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성에서는 무지와 결함이 함의된 지식만이 표상을 조명하기 때문에 생성된 모든 지식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게 된다. 그래서 완전함이란? 의미까지도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는 완전함이라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갖게 됨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완전함이라는 언어의 의미에는 반드시 무지와 결함이 함의되어 있는 지식만을 만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부여하신 본유지식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대로 지각을 갖고 육체에서 지각된 지식에 따라 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는 참 사람의 본질 곧 목적대로 살 수 있었으나, 첫 사람의 타락은 본유지식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영혼의 지성에서는 필연적으로 무지와 결함이 모든 감각된 표상을 조명하여 모든 지식에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그 지식대로 지각을 갖고 육체가 행하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위는 무지, 결함과 짝하여 삐뚤어진 행위로서 잘못되거나 거짓된 행위를 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이 보기에는 지극히 선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중심에서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죄를 행하는 것이 되고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본질상 저주를 받은 상태로 태어난 죄인일 뿐이다. 이런 죄인의 상태에서 삐뚤어진 지성으로 ‘창조’에 관한 지각을 가지려는 욕구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깨닫는 지식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지식일까? 지식을 둘러싸인 다양한 면에서의 무지 때문에 모든 이론들은 사람의 뇌를 억누르는 압박과 만족하지 못한 지식으로 인해 답답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사도는 자기가 깨달은 창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라고 했다. 여기에서 만물이라고 할 때, 어거스틴이 말한바 “무형의 질료에서부터 육체적인 감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3)”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요한이 말한바 태초에 계신 말씀에 관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언급한 것은 지극히 조화로운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태초’라는 때를 말하는 이 시기에 대해서 Augustine는 시편 104편 24절의 기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혜”라고 말하였다.4) 왜냐하면 만물이라는 존재는 시간이라는 재한적인 한계를 가지거나 아니면 시간에 매여 있지만,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 존재하시거나 시간에 매여 있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5) 즉 선포되어진 말씀이 시간에 놓여 한 음절이 앞에 말하여 “있”이라고 하고, 다음 음절이 이어서 말하여 “으”라고 할 때, 앞에 “있”이라고 말한 그 음절은 없어지고, 또 다음 음절이 말하여 “라”라고 말함으로 연속적으로 “있으라”라고 함으로, 그 선포된 말씀에 의해 만물이 발생했다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에 있으니 영원한 말씀이라 말할 수 없다. 그 말씀이 영원한 말씀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시간에 계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시간에 거하신다면 하나님보다 시간이 더 먼저 있게 됨으로 하나님은 유일하신분이라는 말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유일하지 않다면 그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성경이 말한바, 하나님은 홀로 유일하신 분이시며 어떤 것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6)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한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라는 선언은 홀로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있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아름다움이다.

Augustine이 마 17:5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할 때 그 소리는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그 소리의 음절들은 울렸다가 사라졌으니 첫 음절은 다음에는 둘째 음절, 그 다음에는 셋째 음절, 이런 식으로 모든 음절이 순서에 따라 울리고 결국 마지막 음절이 울린 다음에는 침묵이 왔나이다, 하오니 소리가 났던 것은 피조물의 진동 때문이 분명하니 이 진동은 비록 시간적인 것이었으나 당신의 영원한 뜻에 봉사하는 것이었나이다. 시간적으로 형성된 당신의 이같은 말씀은 외부의 청각을 통하여 이해력에 전달되니, 이 영혼 속에 있는 내부의 청각은 당신의 영원한 말씀을 향하나이다. 하온데 내부의 청각은 시간적으로 소리가 발하여진 이 말씀을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당신의 영원한 말씀과 비교한 다음 이같이 말하였나이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다르도다. 아주 다르도다. 시간적인 말씀은 아득히 내 아래 있으나 사실 존재하는 것도 아니도다. 이는 시간적인 말씀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마는 것임이라. 그러나 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계시는 도다.

하온즉 당신이 지나가고 마는 시간적인 말씀으로 천지가 있으라 말씀하사 천지를 지으셨다면 천지 이전에 이미 물질로 구성된 창조 세계가 있었을 것이며, 당신의 음성은 시간적으로 진동하는 그 세계 속으로 발하여졌을 것이니이다. 하오나 천지 창조 이전에는 어떠한 물질도 없었나이다. 만약 있었다 하여도 당신은 그 물질을 지나가버리는 음성으로 만드시지 않았음이 분명하나이다. 이는 당신이 천지를 [시간적인] 말씀으로 창조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적인 음성을 창조하셨어야 함이니이다. 하오나 시간적 음성이 생겨난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이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 같은 음성은 절대 존재할 수 없나이다. 하오면 시간적 음성이 발하여질 물질세계를 만드시는데 사용하신 당신의 그 말씀은 대체 어떠한 말씀이니이까?(고백록 11권6)

라고 말할 때까지, 우리는 태초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다. 성경은 성경의 저자들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천지 창조를 이해하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대표적으로 사도 요한의 언급은 분명하게 천지 창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었으나 독자들이 사도로 말미암아 쓰신 저자이신 성령의 의도를 인식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도 요한의 말씀에 관한 증언이 분명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나 사람들이 읽고 감각을 가질 때 영혼은 표상화된 읽은 말씀을 조명하여 인식할 수 있도록 감성에서 지각을 가질 수 있는 자기 지식을 생성하는데 있어서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함으로 읽고 들은 말씀에 대한 명료한 조명을 받지 못하여 진리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의미가 왜곡된 상태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 사람들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곳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한복음 1:1~2),

를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할 때 두 가지의 의미로서 together 즉 ‘함께’, ‘같이’ 라는 의미와 within 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전자 together는 하나님과 말씀을 각각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을 취하고, within은 주 존재의 내부에 존재함으로 하나님께서 의지를 드러내시기 이전에 마음에 품고 계시는 상태, 즉 예비적으로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말씀을 하지 않았을 때)로 해석하게 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각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사람이 이해하게 되는 의미는 로고스이시고 말씀이신 만물의 근원 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이런 결론도 아주 휼륭하다.

“만물의 근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이 말씀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휼륭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복음이다. 사람들은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종교적인 지식에 대한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신앙이란 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자가 연약한 짐승을 덤벼들어 잡아먹듯이 복음이 사람에게 덤벼들어 사로잡아 먹는 것을 신앙이라 한다. 이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이 사람의 지성을 점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으로서 요한복음 1:1~2의 말씀을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사람은 어떤 지식을 생성하게 될 것인가?

이런 일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에게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복음으로 점령을 받아 완전한 지식을 생성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최초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부여된 본유지식을 상실됨으로 무지와 결함이 함의된 자기지식에 의해서 모든 감각된 지식과 사물의 표상을 조명 받게 되고, 그 조명에 의해서 지식이 생성되지만 모든 지식에는 반드시 무지와 결함을 내포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진리에 이르지 못한 추한 지식만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7) 결국 지금 우리는 본문(요한복음 1:1~2)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 복음의 지식에 대한 이해를 얻으려고 마음으로 노력하지만 지성은 진정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하려는 감각된 말씀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우리의 지식들8)이 진리를 조명하는 어처구니없는 필연적인 과정 때문에 사람은 결코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는 것이다.9)

본유지식을 상실한 대가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는 결론 외에 다른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한다.

본유지식에는 4가지의 지식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하여, 둘째는 하나님에 대하여(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으로 종교), 셋째는 창조에 관하여, 넷째는 사람에 관하여, 지식이다. 이 지식은 사람이 지음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있다는 감각으로 자신 밖의 세상을 눈의 창으로 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 영혼의 지성이 활동을 시작하도록 생명을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의 지성에서 감각되어온 모든 표상들을 조명하여 지성이 사람의 지식을 생성하도록 했다.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 사람의 모든 지식은 사람이 인식을 가질 수 있는 진리이고 사람이 이 진리에 거할 때 비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 모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고, 예수께서는 타락의 성품을 가지지 아니한 참 사람으로서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세상에 대한 감각을 가지셨다.

 

요한복음의 첫 장을 읽을 때나 귀로 들을 때, 혹은 설명을 들음으로 육체로 감각을 갖게 될 때, 감각된 말씀에 대한 표상이 지성에 반영되고, 지성에서는 표상을 선재한 자기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한 다음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고 그 지식을 지성에 저장하여 다음에 동일한 지식이나 사물에 의한 표상이 지성에 반영될 때 그 지식이 조명하여 지각을 갖는다.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여러 가지 해석으로 성경을 주해하여 사람들에게 교육되도록 책에 기록하여 남겼다. 이렇게 남겨진 책들은 비록 그 내용들이 성경을 해석한 것들이지만 상당수는 자기지식으로 해석한 내용들이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개혁주의 신학을 중심에 두고 해석한 신실하다고 인정받아온 많은 신학자들의 주해들에서도 같은 내용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성경을 주해한 많은 신학자들이 신실한 신앙에서 자기가 깨달은 내용들이라 할지라도 그 글들에서 무지와 결함을 배제한 완전한 주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역할과 같은 진리를 쏟아내 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께서는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았으나 신학자들은 자기지식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많은 부분에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으므로 후배들은 선배들의 글에서 무지와 결함으로 잘 발견하여 그것을 보충해 감으로 선배의 기록을 보완하여 결국 주께서 이르는 그날에 주님이 말씀과 성경을 통하여 연구된 모든 사람들이 대대로 보충 보완해 온 성경해석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진리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어떤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분석하여 해설할 수 있는 기관이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진리를 해석할 때에도 진리의 의미를 진리대로 말하지 못하고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해석을 내 놓게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이 표상을 조명하는 선재하는 지식이 어디에 저장되어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철학자들이나 자연주의자들은 사람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중요성을 경시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이 단순이 육체로만 살 뿐만 아니라,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면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경험에 대한 지식들로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린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갖게 된 동기는 사람은 육체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타락은 영혼의 기능적인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육체 중심의 감각만 가지고 영혼의 가진 감각에 대해서는 무지한 결과이다. 이것이 분유지식의 4번째 지식인 사람 자신에 관한 것과, 3번째 지식인 창조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는지에 과한 지식이 사라져 없기 때문에, 자기가 느끼는 감각에 대한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함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형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의 지식에는 무지와 결함이 항상 함의되고 있어서 완전한 지식을 내놓지 못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식도 역시 무지와 결함이 항상 함의되고 있는 것이다.10)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대로11) 사람이 지식들을 육체의 어느 기관에 저장하고 이를 사용한다고 한다면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영혼은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인식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지식을 보관하고 있는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 경우 그 지식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사람에게 사후에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사람은 죽음이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며, 선악 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증언하고, 그때 사람이 자기의 삶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의 존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람은 사후에 반드시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12) 영혼이 육체로 생존하는 동안에 있었던 모든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자기의 삶에 대한 지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경험도 알고 느끼며 자기가 행한 일도 알고 있다.

육체는 영혼에서 반영하는 지각에 의해 활동하는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영혼이 어떤 지식을 가졌든지 그 지식에 의해 반응하는 행위로 알게 되고 사람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지적인 행위는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지식을 공급하여 육체의 감각으로 느낌을 갖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행위는 영혼의 지성에서 육체에 반영한 결과이므로 모든 행위의 책임이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행위를 드러내게 하는 영혼에 있고 육체는 영혼이 공급하는 지식에 대하여 무조건 행하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설명하는 말씀을 들을 때를 육체의 감각을 가진 것이라고 하고, 이 감각은 영혼의 지성에 표상화 하여 반영하면, 지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영된 표상을 이미 선재한 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고 영혼은 자기가 이해하기 위하여 표상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그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는다. 이 일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시차를 발견할 수 없는 육체의 감각과 함께 동시에 지각된 지식에 대하여 육체가 반응 하여 느낌을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영혼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지각을 가지려는 사고의 시간을 연장함으로 얼마든지 시차를 두고 지각을 가지도록 할 수 있다. 이를 사고나, 숙고라는 시간을 통해 가능하다. 하지만 존재는 사고와 숙고를 통해서 인식을 다소 지연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으나, 영혼은 이미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통해 육체에 반영하여 느끼도록 한 상태이다. 이것은 영혼의 지성이 반영된 표상을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하여 자기가 지각할 수 있는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할 수 밖에 없으나, 사고와 숙고는 자신이 표상에 대한 더 분명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타락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고뇌이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성경 말씀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하는 영혼의 수고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성경의 말씀이 들려질 필요가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사도의 글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을 가지면 본유지식이 이를 조명하여 지성에서 지식이 생성 되어지는데, 그 지식은 완전한 진리이기 때문에 성경과 같은 지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본유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아 생성된 지식이지만 지식을 생성하는 표상하는 대상이 타락한 사람이라는 점과, 타락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생성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 상태를 대상으로 생성된 순수지식이라는 점에서 구별 될 뿐 성경과 순수 지식은 동일한 진리이다.13) 그러므로 성경은 본유지식에 의해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면 그 지식은 진리가 된다.

하지만 타락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 일을 할 수 없다. 회개하고 중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성경과 같은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영혼이 심각하게 타락됨으로 빛이라고는 조금도 가질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이 진리를 만날 수 있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6:13에서 사도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증언한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의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만일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심이 되면”이라는 조건절로 말했다.


성령께서 사람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식을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하시는 일을 말한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접하고 들음으로 육체가 오감으로 복음에 관한 감각을 가질 때, 그 감각을 표상화 하여 지성에 반영하고 선재한 자기 지식이 조명하여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지각될 지식을 생성하는데 성령께서 함께 조명하심으로 성령의 조명에 의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물론 이때에는 선재한 자기 지식이 동시에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그 지식에 대한 월등한 감각에 의해 자기 지식의 지각이 약화되어 육체의 감각에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를 동일한 표상에 대한 두 가지의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는 경우를 말하는데 사도 바울이 이 경우는 로마서 7:21-23에서 아주 잘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의 증언은 요한복음 1:1~3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 주었다.

당연 어거스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창조주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자는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처음, 음성을 발하실 때 그 음성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의 울림이 있어 소리를 저장할만한 공간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공간 안에 계시는 분이므로 공간이 하나님보다 먼저 있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함으로, 우리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사도의 말을 해석해 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지는 공간과 그 안에서 말씀이 음성으로 들려지도록 진동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 울림이 없으면 감각을 받는 존재가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쓸 대 없이 말씀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상대인 사람이 지어져야 한다는 궁극적인 창조의 목적까지 묘사하게 된다. 이는 본유지식의 조명이 아니고서는 이런 지식이 생성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질 수 없다. 본유지식의 조명이라고 할 때 사람에게는 그 지식이 없으므로 결코 조명을 받을 수 없으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보냄을 받으신 성령께서 어거스틴에게 조명하셔서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신 것이 분명하다. 어거스틴은 그 지식을 글로 기록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지식으로 기록해두었으므로, 그 책을 만난 우리가 지식에 대한 감각을 가질 때 타락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의해 조명된 지식에 의해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어거스틴을 인도하셨다 할지라도 그의 모든 말을 성령의 인도에 의해 생성된 지식은 아니다. 그의 본성에서 영혼의 지성은 왜곡되고 타락한 지식의 조명을 받음으로 생성된 모든 지식이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었으나 자기지식의 조명이 많은 부분에서 오염된 인간 지식을 내게 한다.

천지 창조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의 기록에서 창조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창조 이전에 창조를 계획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도 없이 시작된 선언은 사람을 당혹하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창조에 관해서나, 아니면 창조가 아닌 다윈론자들의 진화나, 혹은 자연 발생론 자들의 자연론 등 이론들이 있다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사람의 지성에는 창조에 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팽배해 있다. 사람들의 지성은 하나님의 창조를 비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유 없이 거절하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 사상이 얽매인 구속감을 완강히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게 구속되고 제한을 받게 될 것으로 판단되는 정신적인 구속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드러내는 존재다.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지성에 본유지식의 조명이 없기 때문에 이런 지식들을 생성하여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영혼의 감성에서 감각되어 사람이 가진 모든 지식에 묻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무지와 결함 감성으로 배타성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조상 아담의 타락 이후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외면과 거부에 관한 지식을 분출하는 광기를 드러내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나면서 불행을 물려받고, 어두움과 무지로 인하여 방황하며 인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비참의 함정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전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지성의 무지 때문이고, 영혼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식을 버리고 왜면 함으로 부터 스스로 무지의 어두움에 빠져버렸고, 지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어두움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지성이 쉬지 않고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하여 지성에 반영한 표상을 무지로 조명하여 왜곡된 지식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본유지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상태는 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 뿐이다.14) 만약 하나님 밖으로 발출되거나 유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둘러싼 외부가 있다는 말이 되거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외부를 만드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발출한다거나 혹은 유출한다는 현재까지 신학적으로 적용되는 모든 말들은 신학자들에게 신학을 이끌고 가는 충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발출이나 유출이라는 언어가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커다란 공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몸 밖으로 내 보내는 모습으로 표상되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하나님 밖, 혹은 하나님 외부로부터 갇혀버린 상태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표상이 영혼의 지성 안에서 생성한 지식은 언어 그대로 발출과 유출로 나타내는데 그것은 피조물을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하는 지식으로 굳어지고, 피조물들은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져 가는 상태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 구조가 가진 한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이런 한계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분명한 지식을 주셨으나 그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상실하여 다시는 지식의 빛을 누리지 못하게 됨으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존재적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주셨던 본유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하나님과 사람의 존재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는 획득적 지식을 갖게 될 것이고, 획득 지식으로서 명료한 설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천억 광년의 거리를 넘어 광활한 우주가 지금도 계속해서 팽창을 거듭하고, 광활한 우주를 넓혀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끝에서는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시공의 고차원적인 존재의 원리도 결코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지구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 끝을 만날지라도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하나님뿐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해의 지식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이런 회괴한 인식을 갖게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간의 확장은 하나님의 확장을 피할 수 없고, 하나님은 존재하는 우주와 그리고 모든 세상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의 영광을 표현하시기 위해 부득이 창조하셨거나 아니면, 자신 안에 충만이 창조를 이끌어 냈다고 한다. 이 지식은 우리를 얼마나 박장대소하게 하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의 무지와 결함이 이런 우수운 결론을 지금 주었을 지라도 우리의 후대가 이를 보완할 것이니 지금은 이로 만족하려고 한다.

결론,

창조는 하나님의 자충족적인 상태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상의 그 어떤 크고 놀라운 일을 하시고 계시지만 사람에게는 창조만을 계시하셨다. 물론 그 이상의 계시를 주실지라도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주시지 않았고 사람은 그 일들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일어난 한 사역이 우리가 속한 일이었고 그 사역이 창조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고, 또한 그에게서 생명을 부여 받았다.

사람들은 피조물이고, 그 피조물은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선하였다. 그들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고, 실지로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노래하였다.15)

하나님은, 이 작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 안에 있으나, 밖에 있는 타인에게서 들리는 객관적인 증언을 듣게 되셨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라는 고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감성으로 이 작은 소리를 느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외쳐 올리는 고백이었다.

그 고백은 하나님의 마음에 울렸고 하나님의 기쁨은 끝이 없는 영원한 자기 안에 펴졌다.

희열과 환의,

기쁨과 감동,

하나님의 웃으심,

하나님 안에 피조의 세계가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것은 아주 작은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드리는 영광의 고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아직까지 그 무엇도 스스로 무엇을 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나님께 대하여 관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관계를 했다.

객관적으로 관계를 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하였고, 하나님만 아시는 그런 기쁨을 솟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셨다.

만물을 지으셨고,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렇게 되되록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이상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

바로 그 이상이 한편으로는 타락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타락은 사람에게 슬픔을 가져 왔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 왔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의 가장 완전함을 드러내는 놀라운 기능적 결과를 보였다. 그 기능은 곳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객관적인 지식을 드러내는 완전한 자율적 존재라는 것이다.

 

각주 

1) Augustine, Confession, 김광채역, CLC, 12, 28~31. 2005.

2) Augustine, Confession, 김광채역, CLC, 12, 28. 2005.

3)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에는 이와 같은 철학적인 사변을 요구하셔서 진리의 분명한 선에 이르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믿음을 가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 이는 모든 진리는 예수로부터 나오고 예수 안에 있고 예수께서 그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데 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4) 출애굽기 3:14.

5) 고후 5:10, 딤후 4:1, 히 9:27, 요 5:29, 계 11:18, 20:12,

6) 아담이 타락 이전에 가진 모든 지식과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는 모두 진리이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에 의해 조명되어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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