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보인 성도의 얼굴 :십일조
하나님 앞에 나아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축복된 선물인 것이다.
피조물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의지를 전하고, 자기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으셨고, 그 십일조를 드림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 도덕의 정체성을 하나님께 보이는 증거인 것이다.
십일조는 단순하게 드리는 제물로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인의 얼굴이며, 하나님께 드러내는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글을 기록하는 나는 십일조에 관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오랫동안 그 의미를 알고자 많은 시간을 보내 왔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신 분도 아니고, 다른 수단을 사용하셔서 얼마든지 교회를 운영하실 수도 있고, 물질을 만드실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십일조를 통하여 일을 하시고 이 십일조를 성도들로 하여금 내도록 하셨을까?
그 결과 나는 성도들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여러분이 드리는 헌물을 잘 살펴보십시오."
"혹시 그 드리는 헌물에 오물이 묻어 있지 않은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헌금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모습입니다."
"만약 그 모습이 지저분하거나 흠이 있거나 더러우면 하나님께 드릴 헌물이 아니라 버려야할 헌물인 것입니다." 라고 말하곤 한다.
구약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더럽고 오염된 제물을 성전으로 가져와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오늘 교회에서도 그런 추악한 모습들이 교회 내에 가득하다.
성도들이 정성을 다해 드리는 헌물에 구린내가 풍기고, 똥과 썩은 시체 같은 제물로 가득하다.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이런 제물로 생활을 하였더니 그들도 썩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가 이런 예물에 복을 빌고 있다.
단순히 비는 것이 아니라 30배 60십배 백배의 축복을 더하게 해달라고 축복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지각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질타하고 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느니,
세상보다 더 패쇄적이고 불법이 난무한 곳이니,
오직 성공 지향적인 곳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개혁 되어져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성도가 드리는 헌금을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에게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교육하지 않는다.
그런 교육을 하면 교회의 수익이 당장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창녀가 몸판 돈,
일하지 않고도 힘들게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는 돈,
가난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국가가 허용하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하여 더 많은 수익을 얻은 돈,
도둑질 하며 부정한 돈,
이런 갖가지의 흠이 있고 더러운 돈이 아니면 결코 드릴 수 없는 많은 돈들을 교회에 들여서는 안된다고 하면 교회는 당장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헌금에 관하여 교육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래 전에 일본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서 3박 4일 동안 집회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해서 쾌히 승낙을 하고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랬더니 그 교회에서 각종 여비를 제공한다고 해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여비를 교회가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그러면 일단 나더러 여비를 준비하시고 일본에 오시면 계산해서 주겠다고 하여서 그렇게 하자고 대화를 마치고 일단락 지었다. 이것은 체면 때문에 사양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 마음은 그들이 지불한다는 그 여비가 어떤 얼굴을 가진 돈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고 단순히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일본으로 갈 수 있는 여비가 준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어떤 일을 위해서 나의 삶에 대한 예비 된 물질이 여유롭게 준비된 상태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항상 부끄러움이었고 나의 게으름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조건들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을 챙겨 주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지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나의 필요한 자금을 하나님께서 직접 챙겨 주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이든지 마구잡이로 일을 하거나 그렇지는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절약을 하고 협력자들의 도움을 통해 집회일정에 맞춰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을 가기 전에 이 일에 협력한 동역자들을 모아 함께 감사기도를 하면서 물질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 가서 전해야 할 중요한 신앙의 간증이었기 때문에 알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자기들이 협조할 수 있는 헌금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으니 한결 같이 어려운 생활가운데 생활비를 쪼개고 아껴서 여비를 마련한 것들이었다. 어떤 이는 이들의 헌금은 정말로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헌금으로 인하여 준비된 여정은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일본에서 은혜를 끼치기 위해 오직 복음만을 전한다는 마음으로 일본을 갔다.
공항에서 내려서 교회에 들어가 일정에 따라 지정된 숙소에 짐을 풀고 함께 처음 만난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다음 그날을 쉬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집회의 일정에 성령의 간구를 위해 기도하고 은혜를 끼치려는 나의 욕구가 집회를 망치고 있었다.
너무 과도한 욕심이 오히려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의 말은 혼란스럽고 뒤죽 박죽 되고 말씀은 체계가 없이 앞뒤가 맞지 않은 설교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 온 목사의 인도로 인한 집회라고 몇몇 성도들이 흰 봉투에 깨알 같은 감사 내용이 기록된 헌금을 강대상에 올려져서 의식적으로 감사와 축복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아무 의심이 없이 감사와 축복을 하였고 당일 저녁집회에 50여명의 성도들에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은혜를 끼쳤다. 그날도 역시 헌금은 순서에 따라 드려졌고 매 집회 때 마다 헌금이 드려졌다.
그때 나의 마음은 이래도 되는가?
이렇게 매시간 헌금을 드리려면 저들의 한 달 급료를 몽땅 헌금으로 쏟아낼 탠데 하고 은근히 걱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였습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고 있었고, 약 절반의 신자들이 여성들이었는데 이중에는 상당수 매춘과 안마시술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다1. 한 집사라는 직함을 가진 교회에서 중요하게 중심이 되어 봉사하고 있는 신자는 이들을 소개하는 전문적인 직업소개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나 중국에서 오는 여성들을 안마 시술소나 혹은 술집에 소개하고 돈을 받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직장을 다니고 정당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실을 하루가 지난 다음 날에야 알게 되었다.
너무 큰 충격과 놀람!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대성통곡을 하고 발길을 돌려 일정한 기간 동안의 집회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교회를 이끌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성전 세를 지불하는 것부터 목사의 생활비 그리고 교회의 운영비, 각종 행사에 사용되는 비용을 포함한다면 월 족히 60~70만엔의 물질이 필요한데 이중의 대부분은 바로 매춘여성들과 직업소개소 사람이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많은 여성을 업소에 소개하는 것이 축복이고 많은 남성들을 상대해서 어서 빨리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축복이었다. 물론 그들의 마음에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복을 구하는 것이다. 목사는 이들의 이런 예물로 생활을 해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첫날 직업소개소를 운영하는 교회에 중심인 집사가 저녁을 대접해서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나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그 먹은 음식이 독이 되어 다시는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거부감을 겪어야만 했다.
식음을 전패하고 돌아오는 비행일정까지 다른 숙소로 피하여 기다렸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물론 집회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매춘녀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녀들을 위해 헌신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그들이 복음을 전해 들어야 회개의 시간이 있는 것이지 죄인인 그들을 무조건 거부한다고 해서 어떻게 선교를 하겠는가?
하지만 집회기간 동안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돌이키라고 외쳐야 하는 입장인데 분노의 감정으로는 결코 회개의 복음을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을 열지 못한 우리들의 커다란 실수가 아니겠는가?
이런 결벽증 같은 정신적인 압박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큰 장 애물이 된다. 이런 결벽증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범죄의 삶에서 돌이키는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고, 아픈 마음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결벽증 때문은 아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떻게든 기회가 주어지면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생기고 돌이키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집회를 마치지 않고 돌아선 것은 분노가 가득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십일조는 무엇이며 왜 드리라고 했으며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구약성경에 의하면 최초에 십일조를 드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4:20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의 조카 롯이 아브람과 해어져 소돔에 살고 있는 동안에 여러 부족들 간에 전쟁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조카 롯이 소돔에서 잡혀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집에서 길리운 군인들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해오면서 함께 빼앗겼던 재물과 양식을 다 되찾아오는 길에 소동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사웨 골짜기 왕곡에 나와 영접하게 되었다. 아마도 소돔 왕과 살렘 왕은 이미 견고한 우호적인 관계이며 살렘 왕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하나님을 섬기는 부족 종교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살렘 왕은 이름 자체로 평화의 왕이라는 말이므로 이 부족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외치는 힘이 없는 작은 부족으로 소돔왕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족을 유지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에는 아브람이 왜 십의 일을 살렘왕 멜기세덱에서 드렸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십분의 일을 내라고 말하시지도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소돔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부족들이 살렘을 연합 단체의 왕으로하고 연합을 목적으로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위한 일종의 협의체제의 지불금등으로 볼수 있다.
그렇다면 평화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정체는 종교적 지식에 관하여 월등한 지식의 소유자였거나 아니면 당시 부족들에게서 충족하지 못한 어떤 무엇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애굽이라는 지역적인 연합체들이 있었다. 이들 연합체들은 나름대로 종교적인 문제에 관하여 중심적인 일을 맡은 연합대표 부족이 있었을 것이고 힘을 가진 대표 연합에서 군대와 혹은 힘을 공여하는 목적으로 일부 정해진 헌금등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실에 관한 자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찾을 수 없으므로 어떻게 표현할 없다.
그러나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점에서는 아마 당시 공통적인 어떤 조건이나 혹은 관습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유대인과 교회에서는 율법따라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성전 봉사와 제사장 직무를 맡은 자들의 몫으로 레위 족속의 것으로 바칠 것을 명하셨고 레위 족속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을 때 자기 몫을 지분으로 받지 않고 제사장 직무와 성전 봉사 직무를 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에게 생활을 위하여 양식과 재물을 주실 때 항상 십분의 일을 포함하여 그에게 주시고 그에게 그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수고하여 얻은 제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것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양식을 주실 때 십분의 일을 더하여 주심으로 그 사람에게 충족하는 양의 양식을 더해 주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지 그 양식을 자기의 노력이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양식이 모두 하나님의 허락 안에 있게 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양식을 위한 정당한 수익이 아닌 다른 수익도 하나님의 것이 들어 있는가?
물론 모든 수익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어떤 경작지에서 얻어지는 모든 양식과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도가 드리는 재물에 대한 그 근거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재물은 일본의 교회의 여신자와 같이 자기 몸을 팔아 얻은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죄의 온상에 소개해주고 얻은 재물일수도 있다. 이는 마치 저는 짐승과 더럽고 오염된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행위에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사람의 정신의 추악함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드리는 예물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수익에 대하여 십분의 일을 드리지 말라.
두 번째, 십분의 일도 드릴 수 없는 재물을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재물의 가치와 자기가 일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재물의 종류 대로 평가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돌아보고 그 사용하는 그 재물과 자신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지각을 가져라.
세 번째, 자기에게 결코 십의 일을 드릴 수 없는 부정한 재물이 들어오는 것은 곧 자신에게 위기와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라.
이 세상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고,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고, 비정상적인 과정이 아닌 도박이나 혹은 불법적인 상태에서 재물을 끌어들이는 사업을 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네 번째는 십분의 일을 드릴 수 없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은 수익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부자가 되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성격과 저축하는 습성에 의해 부자가 된 사람이 무수히 많다. 이런 부자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성실한 부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자를 원하시는 것이다.
다섯 번째, 십분의 일을 내지 못하는 삶은 결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경험이 아니고는 자기의 고통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자기에게 당하는 고통을 겪게 된 상태에 대해서 지식으로 확실한 깨우침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고통을 더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있다는 두려움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십분의 일은 하나님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그 죄에 대한 대가가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여섯 번째, 하나님께서는 그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
결국 십분의 일을 드릴수 없는 돈을 벌거나 가지는 것, 성실하게 일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거짓되고 더러운 재물을 십일조로 드리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런 제물이 포함된 곳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에 있어서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날이 있게 된다.
지금까지 십분의 일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를 말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십분의 일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이 십분의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서만 얻어지는 것이지 하늘에서 금을 내리는 듯한 초자연적인 역사는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십분의 일이 포함되지 않은 많은 부적절한 돈들을 만들어 낸다. 이는 사람이 자기의 욕구를 위해 십의 일이 들어 있는 돈을 불의하게 사용하여 돈을 더럽게 만들어 버리고 십의 일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재물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들은 그런 재물에 눈이 어두워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십의 일은 성도의 도덕의 기준이고, 하나님께서 드려야 할 돈과 드려서는 안 되는 돈을 구별 짓는 결정적 기준을 갖게 한다. 그로 인해 성도가 돈을 통하여 정직한 삶과 정직하지 않은 삶을 스스로 구별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한 돈에 대해서는 가지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가지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돈을 사용하는 자신이 그 돈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라면 그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마음에 부끄러움과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같게 된다. 만약 이런 기본적인 개념이 없다면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감이 넘치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자랑스럽고 우쭐거리며, 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 인하여 큰 즐거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십의 일을 구별하고 드리지 못한 돈은 성도가 사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성도는 결코 돈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현대인들은 금전에 관하여 심각한 노예 상태가 되어 있다. 돈이 없으면 사람으로서의 가치 마져 상실 당하는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심지어는 인격과는 무관하게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돈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서슴치 않으며, 돈 때문에 자신의 본성의 삶을 완전히 포기한 체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회의 구조는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온 사람은 누구나 돈을 벌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라는 구분이 있고, 부자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말하고 가난한 사람은 넉넉하게 자기 필요의 자금 마져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항상 돈을 벌기 위해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 구분은 영구적이 아니다. 부자라 할지라도 항상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가난해질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고 저축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진 독특한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많은 대가를 받게 됨으로 인하여 부자가 될 수도 있다.
돈은 사람에게 모든 면에 있어서 다양한 만족을 부여한다. 실지로 사람의 인격이나 지적 능력과는 상관이 없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기대 이상의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고급스런 삶의 환경과 값비싼 음식, 아름다운 여인과 위엄,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서도 종종 누릴 수 있는 사회적인 존경심,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고급스런 대우를 받게 되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보다 많은 지식과 아름다움, 온전한 인격과 높은 이상,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는 고매한 철학과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언제든지 부자가 누리는 것보다 형편없는 사회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사회가 사람에게 주어지는 처우는 얼마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가 없는 것은 아니라 보편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우선시 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시 되어야 하는 것은 돈의 종류이다.
돈의 얼굴은 다 같다.
가치를 드러내고 가치에 걸 맞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사회에서 돈은 곧 힘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돈은 힘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 필요한 단순한 재화에 불과하다. 그 돈이 무슨 돈이냐에 따라 진정한 도덕이 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어느 날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걸리게 하여 넘어뜨리려고 시험하였다.
세금에 관하여 질문을 함으로 로마 식민지로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온당한지에 관한 의도를 묻는 질문을 한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은 이스라엘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데 현재 로마 식민지가 되어 통치를 받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세금을 내고 있는데 자기들은 엄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니까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답을 듣기를 기대하고 질문을 한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말하는 돈을 보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한 사람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라고 물으셨다. 그때 질문자들이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 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분명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의 주머니에 있는 돈이 누구의 것인가?
내 것인가?
그러면 십의 일을 낼 필요가 전혀 없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인가?
그러면 십의 일을 구별하여 드려라.
이 질문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진리가 있다.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에 부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예 이 돈은 제 것이고 제가 번 돈입니다. 그리고 제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신다.
“그래 그러면 십일조 내지 말라,” 하나님은 사람의 돈을 빼앗는 분이 아니시다.
강제로 십의 일을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결코 의의를 제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번 돈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자기 중심에 놓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삶이 온전히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인정을 하지 않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로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성경은 말한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고 결국은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르시는데......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는 그의 기르신 양이다.
우리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삶의 내용들을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이미 다 아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주셨고, 그 돈이 우리가 일하여 얻은 소득이다.
우리는 이 소득의 십의 일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 드려 “그가 우리의 삶을 주관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돈의 주인에 대한 기준이 하나님에게서 자기에게로 돌아온 이 세상에서 언제나 사람들은 이 돈으로 인해 자기 신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돈이 어디에서 어떻게 얻어진 것인지에 관한 정체 보다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관념으로 인해 도덕의 기준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성도라 하면 자기가 가진 돈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돈이 어떻게 왜 내개 있으며 내가 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은지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뇌물이나 부정직한 돈이거나 도둑질하였거나 훔친, 결국 십의 일을 드릴 수 없는 부도덕한 돈을 가지고 있다면 성도로서 죄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현대교회는 아니 이전부터 교회가 존재한 그 순간부터 참된 믿음을 보는 것이 기대하는 만큼 흔한 일이 아니었다.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에 불과했다. 금전과 관계해서 더욱 그러했다. 대부분의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돈에 관하여 비도덕적이고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았고, 부정직한 행위로 사는 것에 대한 각성이나 회개하려는 흐느낌조차 없었다. 그들의 판단은 흐려졌고, 진리의 잣대로 돈을 저울질하여 판단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돈이든지 많이 내는 사람은 능력이 있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보았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아 졌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인하여 돈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믿었고, 적게 내고 고난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논리의 설교들이 진리의 강단이라고 명명된 설교 단 위에서 쏟아져 나왔다.
어떤 설교자도 “여러분이 드리는 십의 일이 정말로 하나님께 드려도 되는 돈인지 다시 한번 살펴보고 추하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은 돈을 드림으로 인해 자신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것”이라는 심판의 경고를 전하는 메시지를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소리 높여 책망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이라고 하면 많이 내라고 외쳐대고 있다.
- 신명기 23:18 창기가 번돈과 개같은자의 소득은 어떤 소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랑 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