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요약

12,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생명있는 신앙 2011. 12. 19. 10:30

12.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죄의 기원 

  죄가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창세기 3장에서 모세가 자세히 적었다. 이 사실에 관하여 아담이 명료하게 후손들에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잘 전승 되었다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명확하게 죄가 들어온 것을 성령의 감동에 의해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범죄하여 죄의 노예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떠나 유리하는 상태가 된 것이 죄의 결과라고 모세가 분명히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정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계시 되지 않음으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실지로 죄는 자신의 정체를 사람의 의식에 감추고 드러내 보이지 않고, 법을 도구로하여 사람들의 지성에 압력을 행사하여(롬3:20)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왜곡된 지식으로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죄의 정체를 밝혀 보려는 신학자들은 안개 속에 헤매는 듯한 흐릿한 의식 상태에서 파악하려고 하지만 결코 발견하지 못하고, 심지어 가장 성경적 신앙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개혁교회와 청교도 신학자들에게서 조차도 명료한 신학적 설명을 듣지 못한다. 

 

  죄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빗나감,” “목적을 어긋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 “목표를 벗어난 빗나간 화살,”로 불리어지는 것 이상 어떤 언급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1) 이러므로 일부 신학자들은 죄를 형체는 없고 존재하지 않은 경향성이라고 하거나, 형체는 없으나 존재하는 실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먼저 Calvin은 기독교 강요 제1 장에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2) “자신을 안다”는 말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존재적 의미를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참한 세계에 처한 인생, 자기 존재의 근원에 관한 무지, 절대자에 대한 의존적3)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전혀 무관심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마치 자신을 자연적 잉여의 존재 곧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한 존재로 여기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마치 무뇌아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고, 부모 없이 태어난 사생아에게 강제로 부모를 엮어주려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지지 않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을 진리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결국은 죄에 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죄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행한 행위이다. 그 행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필연적으로 사람의 삶의 조건에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 생명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창 2:17, 겔 18:20)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의 상태에 관한 지식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시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 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지으셨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정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모든 행위는 죄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는가? 

이성 없는 짐승들은 본래 지음을 받은바 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지식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사람과 비슷한 존재라도 짐승에 불가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그 지식을 후손들에게 전수하여 발전시키거나 개발하여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야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지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은 야수와 같은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다. 지식을 가지며 생각하여 지식을 생성할 수 있고, 그 지식을 후손들에게 전달시켜 알게 하고 깨닫게 하며, 비록 야수와 같이 물질로 구성된 육체를 가졌으나, 그 이상 영혼을 부여받아 생령의 존재로 삶을 살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곧 표현상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지으신 것은 육체에 속한 물질세계와 영혼의 세계를 하나로 결합하여 한 존재로 하여금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되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려는 뜻으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음을 받은 피조 된 상태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의 존재라는 독립적 생태를 가질 수 없고, 외적으로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대표자이고, 자신의 내면으로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피조세계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만이 생존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만약 이에서 벗어난 어떤 행위를 스스로 행위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은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독립적 존재로서 면책의 특권을 가질 수 없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함에 있어서 단독자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상대적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어떤 존재의 상태로 부여하여 상대적 존재가 되도록 하실 수 없기 때문에4)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상대가 되게 하셨고, 그가 그 형상에 의해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에 대한 마땅한 형벌을 부여하심에 있어서 전혀 부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편 8편의 기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이 영광스럽게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로운 기능들이 온전하게 유지 되었을 때 사람은 피조물로서 영화로우며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참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빌립을 책망하셨던 것이다.5)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창조자와 피조물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대적인 관계로 사람을 지으심으로 그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어 주셨으며, 사람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존재적 위치에 두신 것이다. 

 

Calvin이 말한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 현재 자신의 상태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깨어 자신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이 문제에 이르러 또 다시 자연적 잉여의 존재 상태, 곧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적 존재로부터 답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곧 자기 수련을 통한 자기 깨우침으로 인류가 쏟아낸 철학이며, 궁극적인 이탈 곧 자기 사색을 통한 종교들이다. 전자는 결코 정답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 없는 지식들 간의 연산 작업의 결과물이고, 후자는 자기의 한계로 인간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하다는 의존감정인 궁극적인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며, 전자가 비록 지식들 간의 연산 작용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영혼의 직접적인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성의 요구를 영혼의 지성이 답을 제공하는 자연인의 상태이다.6) 

 

타락한 상태에서는 죄를 알 수 없음,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기가 인식할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에 의해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다.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기를 활동하게 하는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던 선재한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된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떤 지식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지식을 생성할 수 없다. 그 지식이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되며, 마음을 거쳐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면, 육체에서는 감성에 따라 생리적인 물질작용에 의해 온몸에 느낌을 갖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이성 곧 정신의 작용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을 정확한 의미로서 영혼의 작용이라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나타난 범죄의 결과가 영혼의 존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함으로 철저히 육체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정신은 육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기 때문에 이를 영혼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구조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최초 사람은 육체가 느낌을 갖는 것과 같이 영혼 느낌을 갖는다. 이것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에게서 분명히 드러나는 감각에 대한 증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는 일반 사람이 언급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조우에 관한 말씀을 자주 하신다. 특히 빌립에게 하시 말씀은 더욱 놀라게 하는 말씀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 이런 말씀들로 인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법정에서 직접 증거 하시는 증언 때문에 사형 판결을 받으셔야 했다.2)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후손들은 영혼의 감각을 느끼지 못함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 존재함과 같이 자신들도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혼의 감각을 상실하여 하나님과 조우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또한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 죽은 몸에서 육체의 옷을 벗고 나온 영혼이 깨어나 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죽음이후에 천국에 이른다는 성경의 증거는 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 사람 아담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활동을 감각으로 느끼셨을 것이 분명하다. 이 느낌은 육체로 살던 사람이 죽어 천국이나 지옥에 이를 때 느끼는 감각을 가진 것처럼 선명하게 영혼의 감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타락한 사람들이 육체의 지적인 감각 곧 정신작용을 영혼의 감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최초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타락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영혼의 존재와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됨으로 오직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육체의 정신과 이성작용일 뿐이다. 그러나 영혼이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곧 영혼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존재하면서 일하며 지성의 작용을 수행하지만 다만 육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기능을 잃고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이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함으로 육체뿐인 사람은 짐승처럼 되거나 사회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느낌과 감각을 육체에서는 느낄 수 없으나, 영혼이 지성과 감성에서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하며 의지를 통해 육체에 반영하여 모든 지식을 육체로 느끼고, 지식에 의해 활동하게하며, 육체의 정신으로 이성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이 수행함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에서 얻어진 지각을 육체의 감성에 반영을 받지 아니하고, 육체의 오감의 감각으로 스스로 반응하거나 활동하는 존재를 비이성적 존재로서 짐승이나 동물이다.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만 지식의해 행동하고, 지식은 지성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고, 지성의 작용은 지식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여 육체로 행동하게 하는 근원을 얻는다. 결국 사람의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혼에 의해 움직여지고 영혼은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가지며 지각을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여 감각을 갖게 함으로 육체를 움직이게 하고, 사람의 영혼이 의지를 일으켜 행동을 하도록 함에 있어서, 지성에서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지성작용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감각된 표상을 본유지식이나 순수지식의 조명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을 영혼의 감성이 지각하여 의지의 반응으로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여 육체로 행동여부를 의지인 마음에 맡겨지므로 영혼이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하여 의지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드러내는 최종의 판단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람으로서의 전인적인 표현은 마음에서 하며 모든 행동의 책임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

 

예수께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을 일컬어 이미 간음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3). 이는 아직 행위로 드러내지 않았고, 단순히 마음에 구체적인 죄의 행위를 품은 것만으로도 정죄 받은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혼이 이미 죄를 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일 마음을 마음에 가진 상태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판단을 잘하여 범죄한 영혼의 의지를 따르는데 있어서 신중할 것을 말씀하셨다.4)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는 생명을 가진 피조물이 감각적으로 행동하는 결과가 아니다. 구조적인 본성에 따라 구체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영혼의 지성이 죄의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을 감각하여 지각을 가지고, 의지를 일으켜, 마음에 반영하여 육체로 행위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죄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행하려는 의지가 마음에 있는 것이고, 그 마음은 영혼의 의지와 육체의 의지의 결합이고, 죄를 행하려는 의지는 영혼의 지성에서 시작하여 지각을 가진 다음 지각된 지식이 의지로서 마음에 반영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를 지각된 지식이 육체의 감성에 반영되어 전인으로 느낌을 갖게 하는 동일한 인격의 개별적 기능의 작용이다.

 

죄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지성을 살펴야만 한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영혼의 활동이나 작용을 느끼거나 알 수 없으므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지식의 생성 과정이나 영혼의 감성을 느끼지 못하므로 죄의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Calvin 이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 “이제 우리가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기들의 허물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을 물러가도록 하라. 아담의 상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작품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부패상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5)”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말하는바 죄에 관한 정체의 비밀은 죄가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가 결코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최초로 온 인류에게 죄를 들여온 아담과, 무죄한 상태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파악될 수 있다. 결국 죄는 본유 지식에 정의되어 있으므로 본유지식을 상실한 아담의 후손들은 결코 죄의 본질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담과 예수그리스도께서 진리를 말하여 죄의 본질을 말한다 할지라도 타락한 사람은 자기 영혼의 지성에 선재한 왜곡된 지식의 조명으로 죄에 대한 정의를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이것이 Calvin 이 말하는바 “자기의 부패된 본성으로부터 죄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하기 때문이다.6)

 

지성의 역할과 인식

 

사람은 자기 안에서 지식을 생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의 조명이 있어야 하고, 만약 이 조명이 없으면 감각을 통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여도 표상에 관하여 올바른 지식을 생성하지 못함으로 영혼의 감성의 작용이 없어 무지 감각만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지성에 반영된 표상을 선재한 지식의 조명으로 표상과 일치한 지식을 발견하지 못할 때 영혼의 감성은 혼란한 상태가 된다. 영혼은 무지에 대하여 가장 크게 반응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아주 미세한 존재에 대한 표상이라도 일단 선재한 지식으로 일치되는 지식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은 두려움에 떨고 그 반응이 즉시 육체의 오감에 반영되어 육체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반응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나타난 두려움에 관한 반응은 영혼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여 감성이 느끼는 감각이다.

 

사람이 피조물간의 소통을 위해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된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면 이를 비추어 밝힐 수 있는 선재한 지식이 표상을 조명하면 지성은 표상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이 감성에 의해 지각되고 의지에 반영하여 행동으로 드러내고 표현함으로 상호간에 교제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아무리 영혼을 뛰어나게 지음을 받았으며 조직적이고 완전한 존재로서 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사람의 영혼에 선재하여야 하고, 선재한 지식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적절한 행위로 반응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지식을 사람에게 부여하심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을 때, 지성에 지니고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표상을 밝혀 사물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고 이 지식이 감성에 의해 지각됨으로 전인으로 인식 감각을 가지는 것처럼, 하나님RP 대하여도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사람이 반응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피조물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별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유지식 안에 하나님과 관계하는 지식을 부여하실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결코 관계를 가질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 부여하신 본유지식은 피조물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도록 표상을 조명하여 주고,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순수한 지식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에 거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에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을 가지고 표상을 반영할 수 없기 때문에 영혼의 감성이 감각하여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표상을 반영하면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을 지각하여 의지로 마음을 통해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여 전인의 감각을 느끼게 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인식기능의 자연적 산물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이나 철학, 혹은 과학자들까지도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한 존재라고 보고 자연적으로 지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7) 이것은 마치 아마존 밀림의 정글에 사는 원주민이 우연히 하늘의 떨어진 콜라병을 발견하고 ‘이것은 콜라병이다’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생전 처음 콜라병을 접한 원주민이 그것에 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문명인이 다가가서 콜라병을 설명하고, 콜라를 먹여주고, 그것이 콜라라고 설명하며 갈증이 있거나 혹은 뜨거운 더위에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라는 지식을 주지 않은 이상, 원주민이 ‘이것은 콜라이며 콜라병’이라고 정확하게 지각할 확률은 0%에 불과하다. 이미 경험을 가진 문명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즉시 그 병의 정체를 즉시 알고 지각할 수 있으나 원주민은 그 병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신비하게 생각하거나 종교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추측으로 왜곡된 판단을 가지며 지식을 생성하거나,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억지로 판단하거나 추측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획득지식(경험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정도 지적인 능력을 가진 추장에게 그것을 가져다주었더니, 추장이 병의 표면에 씌어진 글을 보고 놀라며 판단하기를 ‘이는 신이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말’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자, 그들은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을 행하라는 명령으로 잘못 판단하여, 혹 자녀를 불살라 제물로 바치는 제사 행위를 하든지, 그 이상의 어떤 행위도  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문명인의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어리석은 것이며, 범죄행위에 해당할 수 있으나, 추장의 자의적으로 해석이 자신에게나 부족에게 옳은 판단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원주민이 우연히 또 하나의 콜라병을 주었을 때는 예전에 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신이 선포하는 두려운 경고의 감성을 가지고 반복적인 종교 의식을 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자연적 존재라고 주장하게 되면,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원주민이 스스로 문명인과 같이 경험을 통해 완전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얼마간은 콜라병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으나 어떤 계기가 되면 그들이 콜라병의 정체를 충분히 깨우쳐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일정한 조건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이지 어떤 조건에 이르면 반드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자율적 존재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활동하는 존재로 지으셨다고 한다. 활동하는 존재는 지식을 생성하거나 가지며, 타자와 객관적 관계를 가지고 교제하며, 자기 지식과 상대방 지식에 대응하여 반응하며, 스스로 판단과 행동을 위한 의지를 가진 자율적 의지로 행동하는 존재를 말한다.

 

자율적 의지는 자기 자신의 지식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선택하고, 그 선택은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되는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행위의 책임은 순전히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행동을 하게하는 지식이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에 의한다면, 그 행위의 책임은 피조물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행동하게 하는 지식으로서 본유지식에 있기 때문에 책임을 부과할 수 없다. 이런 논쟁은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 왔고 사람들이 가볍게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미리 막으셨다면”이라는 불평을 털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8)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에 의해 활동하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스스로 존재하도록 지으시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지식을 스스로 생성함으로 자기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을 지각함으로 분명히 자기의 것임을 확신하고, 그 지식에 따라 행동할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 까지도 자기 자신에 의하여 결정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율적인 존재임이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자율적 존재인 사람이 드러내는 고백들9)은 하나님의 판단이 아닌 완전한 객관적 판단으로 하나님께 더없는 영광과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한 자신의 증언으로 영광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자화자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스스로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찬양한다면 그 감각은 당연한 기쁨일 것이나 객관적인 판단인 사람의 판단은 더욱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선, 존재의 기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사람은 존재로서 선한 상태이다. 선한 상태에 있는 존재인 사람에게 자율이 있으며, 자율의 결과는 행위로서 책임을 부과하게 된다.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자기의 자율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 행동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4)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사람을 더욱 완전한 존재로 지으셨으므로 그들의 자율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의와 죄로 구분하여 부과하신다고5)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자신이 친히 모본을 h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었는데, 그 목적을 완전히 성취하시므로 지음을 받은 기준으로부터 삶을 시작하여 의를 성취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수 있었다.(요한복음 16:10)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선에 대한 부족함(요한복음 16:9)으로 죄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애는 완전한 선 자체였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만 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의를 이루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실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결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높은 경지의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순전한 사람으로서 보통 이상으로 초월적인 삶을 산 것은 뛰어난 정신력을 소유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일반인이나 보통 사람이 다다를 수 없는 고도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인 삶이라고 평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성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그 기준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의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정의하셨고 그 기준은 선한 상태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반하여 죄가 분명하게 나타나 보인다. “죄는” 아버지께서 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는 것인데 그 기준은 “선에 이탈하는 것”으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아담과 하와)에게도 동일한 적용을 할 수 있는가?

죄 האטה에서 유래된 말로 אטה[하타]ָ “표적을 빗나가다, 길을 잃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기준인 선의 상태로 사람으로 지으셨다. 이는 선에 이르도록 과제를 부여한 상태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람은 지음을 받았을 때부터 이미 완전하게 ‘선의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다. 여기에서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곧 טרׂת[토브] ‘선’이다. 그러므로 최초에 지음을 받은 사람은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그의 행위가 의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그 ‘선의 상태에서 이탈’하고 만 것이다. 그 행위는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다.

 

전도자는 자기의 깨달음을 성경에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전도서7:29)”고,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고 말하였다. 하였다. 죄는 “선으로부터의 이탈”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최초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는 지식이다. 선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또한 지식으로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되고 지각된 지식으로 반복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의 지식인 것이다. 이 지식을 순수지식이라고 한다. 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에 최초 사람이 선의 상태에서 이탈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죄의 정체가 뚜렷하게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밝혀진다.

 

죄의 정체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존재로 뱀을 등장시켰다.

어느 날 하와는 뱀을 만났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뱀은 하와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이르시더냐?”

이 말을 다양하게 적용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가. 말하는 뱀,

뱀과 대화하는 여자,

최초 사람은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말인가?

동물과 대화한다는 것은 사람이 동물의 수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동물이 사람수준이 되는 것일까?

동물이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분절음을 드러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여.................................,

우리는 성경을 믿지 못할 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의 책이다.

성경이 말하는 증거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성경이 하와의 말을 인용하여 뱀과 하와와의 데이트를 했다는 이 증언을 지극히 여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정당성을 인식하는 것, 특히 뱀이 여자에게 구술적인 언어를 구사한 것으로 묘사하고 뱀이 지적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사람과 같은 존재로서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뱀은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더욱이 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는 더욱 아니기 때문에 뱀이 구술을 통해 언어를 구사했다는 말은 상징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경은 요한계시록 12:9에서 뱀에 관한 정체를 설명한다. “큰 용이 내 쫒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하고 처음 하와와 대화했던 그 존재를 지칭한다. 여기에 뱀은 큰 용이라고 하는 생물체인 뱀이 아니라 사탄이며 마귀이다. 

 

가, 피조물로서 뱀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성경이 말하는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는데 대화를 통해 하와의 마음에 의혹을 불어 넣어 하와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을 통해 의혹에 따라 의지를 일으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했다.

사람에게는 영혼과 육체를 서로를 연결하는 것이 지식이다. 이 지식에 의해 지각하고 의지가 일어나며 육체로 하여금 행동하게도 한다. 언어도 지식을 육체의 조직으로 지식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래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표상으로부터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고 그 지식을 자기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의지를 일으켜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뱀이 말하였다는 것은 지적인 동물이고, 지식을 가지고 의지를 일으킬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졌으며 사람과 같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뱀은 사람과 같이 영혼과 육체로 된 존재가 아니다. 뱀은 단순한 생물이고 지적인 존재가 아니며 문화를 창조할 수도 없는 생물체에 불과하다.

 

나, 사탄이 뱀에게로 들어가 뱀을 이용하여 말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해석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편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해석에도 난제가 있고 오히려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 책으로 전략시키는 결과들을 가져온다.

우선 뱀에게 들어가 하와를 유혹하는 사탄이라는 존재에 관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선을 이탈한 범죄인의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혹 사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는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사탄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만 하지만 사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의 오감에 감각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영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영성을 통하여 사탄을 지각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들이 가진 오류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탄의 존재에 관하여 49절에 걸쳐 언급을 하셨으나 사탄의 정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식을 주시면서 숨기시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완전하고 질서로우신 분이시며 최종 선을 향하여 온전한 목적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급에는 결코 하자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존재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실 때에는 사람의 눈으로 천사를 보고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분명히 계시하셨으나 사탄에 관해서는 감각되도록 계시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사탄에 관한 배타성이 작용한다는 이유를 발견하는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하여 배타성을 적용하는 생각은 지극히 하나님을 배격하는 비판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은 결코 배타성을 가지실 수 없다. 오히려 영적인 존재인 천사와 사탄도 역시 피조물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존재에 관한 지식을 본유적 지식에 이미 계시하셨으므로 다시 설명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첫 사람 아담이 선으로부터 이탈한 범죄의 상태가 아니라면 사탄의 정체를 분명히 감각할 수 있을 것이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본유적 지식을 거두어 가심으로 인하여 지식이 없는 무지의 어두움에 처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탄에 관한 무지6)는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단순한 개념을 넘어 전적으로 사탄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본래의 지식을 상실하였으므로 감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감각이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유 지식을 상실하지 아니한 아담의 상태에서는 사탄을 인식할 수 없었을까? 이점이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사탄이 뱀에게 들어가 하와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문제가 된다.

 

성경은 오랜 시기를 거슬러 계시된 진리에 대한 왜곡된 사람의 지성의 체계에 대해서 증명이라도 하듯이 또 다시 하와를 유혹하던 뱀의 정체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2:9은 최초의 뱀의 정체를 사탄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 기술은 상징적이며 의인화된 표현이 너무 많아 해석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분명하고 또렷하게 “옛 뱀 곧 온 천하를 꾀는 자”라는 말은 최초 사람을 유혹하는 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탄은 유혹자 혹은 옛 뱀, 용으로서 최초 사람에게 감각되어졌으며, 사람은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탄을 직접 언급하셨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칭하는지 물으셨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담대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대답하자. 제자들을 칭찬하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께 일어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자 곧바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 보다 주님의 판단으로부터 언급된 사실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사탄인가? 아니면 베드로에게 사탄이 들어갔는가?

 

분명히 뒤를 이어 언급하시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말을 통해 판단하시는 초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일, 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셨다. 분명 베드로가 간한 내용은 인간적의미에서 주님을 판단하고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을 막고 자기들이 지켜 낼 것이라고 호언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나님의 뜻인 사람들이 구원하는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을 사탄이라고 하신 것이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칭한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그 행위를 사탄이라고 칭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를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오감으로 영적 존재를 감각함

 

성경에는 선지자들이나 예언자,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물질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 상태의 존재를 환상에서 육체가 오감으로 감각을 가졌으며, 이것을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하여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표상에 빛을 비추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였으며, 생성된 이 지식을 감성으로 감각을 가지고 지각을 가지게 될 때 전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다시 선포함으로 진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천사를 만난 사실, 천군, 그리고 이상 현상으로 영적 존재와 소통, 실재 사물을 본 것이 아니라 시간의 환경을 뛰어넘은 초 현상의 환경으로 이끌림을 받음 등이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을 가지고 표상을 가지는 영적인 존재와 교감이 분명히 이루어진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 본 환상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까지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사도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별도로 감각으로 느낌을 가진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하고 감각된 그 환영을 표상으로 지성에 반영한 정상적인 상태 가운데 열린 계시를 경험한 것이다. 이 경험이 제한된 지식으로 인해 더 상세한 증거로 계시 되지는 않았으나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읽게하여 의미를 해석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으나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코 부족함이 없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게시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는데, 영적 세계는 물질세계를 뛰어넘은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며, 영적 세계와 물질세계가 하나의 목적에 의해 섭리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질세계에 속한 사람이 영적 세계에도 등장하고, 세계의 역사가 영적인 세계와 함께 운영되어지고,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데, 비로서 하나님의 어린양 곧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하나로 통치하시므로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시간적 과정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통합 세계를 보는 것이다. 물질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고난과 아픔, 고통과 죄, 슬픔과 비참한 모든 일의 마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영적인 세계, 곧 사도요한에게 게시한 그 환상의 세계에서도 성취된 것이다.

 

창조자로부터 독립된 피조물인 사람

 

저 아름다운 하늘의 태양과 별들을 담고 있는 광할한 우주의 세계가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리며,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셔서 그 얼굴에서 비취는 빛이 목적하신대로 창조된 세계에 무한하게 비춰지는 그 영원한 세계에 완전하고 흠이 없는 피조물들에게 비춰지며 영원한 영광과 평화, 슬픔과 다시는 눈물이 없는 즐거움에 참여하는 기쁨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지금의 세계는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사도요한에게 게시한 메시지이다.

 

놀랍게도 사람은 하나님 마음에 가진 일부 계획과 뜻, 그리고, 창조세계에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으며, 우주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일들을 지식으로 이해하여 지성에 담을 수 있는 신비하고 놀라운 계산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고, 사람은 자의로 하나님 앞에 서며, 스스로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이해하고, 그 지성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에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도록, 타자로서 하나님과 관계 하면서 조금도 하나님 역할이 개입되지 않은 철저한 자율적 존재로 지으심으로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도록 지으신 것이다. 뱀이 하와에게 말한바와 같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라는 말은 거짓이나 꾸며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마음에 두셨던 그 목적을 훔친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훔친 이 뜻은 본래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었고, 최초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하실 때 이 지식도 함께 부여하심으로 사람에게 알려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지만 언제나 피조물 상태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의 능력이나 존재의 가치에 있어서 탁월한 존재이며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난 존재임은 분명하다.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 하나님과 절대적인 타자로서 손색이 없는 존재이다.

 

그 존재의 탁월함은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 분명히 드러내 보였는데 문화를 창조하고 우주를 이해하는 지식을 생성하고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를 지식으로 정리하는 과학학문의 발달과 사상의 진보 등은 피조물이라기 보다는 신적 존재와 같은 우수한 존재임을 입증하고 있다.

 

형용하기조차 두려운 드넓고 광대한 우주에 비하여, 먼지와도 같은 미세한 존재이면서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겨루는 유일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제 멋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깡그리 망가뜨리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냉정하게 거역할 수 있는 존재이다. 흙으로 지어진 존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셨다는 것은 타락한 자체로도 완전을 표현하는데 부족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록 타락하기는 하였으나 짐승과 같은 삶을 살기도 하고 천사와 같이 선한 모습을 가지기도 하며, 각양각색의 성격으로 조화를 이루고 세상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며 양심을 가지고 악한 생활을 향하여 치닫지도 않는 조절이 가능한 존재가 됨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완전하다.

 

세상, 사람의 영혼이 의지하는 터전

 

이 탁월한 존재인 사람이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그 생성된 지식들이 영혼의 지성에 머물지 아니하고 연합된 세계를 형성하여 세상을 이루었는데, 그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으로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을 영혼의 고향으로 삼아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서는 살수 없고, 세상을 벗어나면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며,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고통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이 의지할 세상을 찾아 나그네처럼 살다가 어떤 터전에 정착하게 되면 그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세상에 자신을 물들이며 머물게 된다. 세상은 작은 터전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전체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데 그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 곧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선 세상인 것이다. 이 세상의 뿌리는 마음이고 마음에는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을 흘러 보내 세상의 자양분이 된다. 세상에 지식이라는 자양분을 흘러 보내지 않으면 세상은 피폐해지고 영양실조에 허덕이며 결국은 사람이 의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창조적인 사역들이 사람의 지성에 지식으로 생성되어 지각하고 의지로 드러내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강제로 주입시켜 이해 되도록 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질서로운 규칙7)에 의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게 지으셨으며,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는 것 자체가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주고,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삶의 세계에 활용하여 더욱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한 조건으로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어떤 역할이 필요한 존재로 지으셨다면, 비록 사람이 자기의 지성으로 지식을 생성했고, 그 지식으로 판단하여 존재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 어떤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역할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그 개입에 의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완전한 독립적인 관계로서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행위자와 행위 교사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 사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욕심에 미혹되어 금하신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하여 세상에 죄를 가져왔다. 물론 이 사건의 발단은 사탄의 유혹에 의해 넘어진 것이지만, 지음을 받은 하와가 자유 의지를 가진 흠이 없는 완전한 존재인 이상 그녀가 스스로 판단에 의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하와 자신에게 있고,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Transistor 등장 이전 사람들은 태엽 시계를 보물로 여기는 시대가 있었다. 이 시계는 사람이 하루에 한번 혹은 2~3일에 한번 꼴로 태엽을 감아 줘야만 시계가 작동한다. 이 시계가 아무리 미려하고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작동 되지 않거나 작동이 되더라도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제값을 받을 수 없다. 만약 이 시계의 태엽은 열 바퀴를 돌렸을 때 하루 종일 작동한다고 가정한다면 한 바뀌 감아 놓고 하루 종일 시계가 작동하지 못한 책임을 시계에게 지우고 가치를 하락시킬 수는 없다. 책임을 묻는 다면 태엽을 감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시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열 바퀴를 감을 경우 영원히 멈추지 않은 결함을 발견할 수 없는 완전한 시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시계의 태엽을 열 바퀴를 돌려 영원히 돌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나 이틀 움직이더니 시간을 제 마음대로 하거나 혹 정지한다면 그 시계의 자체 결함 유무와는 상관없이 폐기처분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함이 없도록 제조한 사람이나 태엽을 감아 작동하도록 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계 자체에 있는 것이다. 하와의 경우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한상태로 완전하게 지으셨다.

 

선하고 완전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자기 책임에 대한 부담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객관적이며 모든 행위는 순전히 자신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으로 의지를 일으켜 행동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요구하시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자기의 지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어떻게 행할 것인지 먼저 지식을 갖고, 그 생성된 지식을 지각하여 의지를 일으켜 행동하는 것이다. 처음 하와는 얼마간 금지하신 나무 앞에 이르렀을 때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하와에게 또 다른 지식이 지성에 반영되었다. 그것은 사탄에 하와에게 다가왔고 약간의 만남 시간을 가지는 동안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대 되는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 불순종의 지식은 사탄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음으로 그녀의 영혼의 지성에서 시작되었다.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처음 가졌던 순종하는 지식과 사탄에 의해 가진 두 개의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 두 개의 지식중 어느 것을 순종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은 두 개의 지식이 하와의 마음에 반영되어 갈등할 때 자신의 판단이 필요하다.

 

아담의 고백

 

창세기 3장에서는 최초 사람의 타락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다. 이 증거의 자료는 아담으로부터 인류에게 구전으로 전승된 자료로서.8) 자신이 범죄하기 이전 생활과 범죄후의 생활을 비교하면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슬픔을 경험한 것이 분명하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 영혼의 기쁨가운데 한없는 만족을 느끼며 살았던 반면, 타락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여 주시지 않은한 만날 수도 없었고, 후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게다가 서로 죽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욕심을 가지고 살며, 자기만 살겠다고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자신이 지은 범죄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를 알고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자주 했을 것이다.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이야기에 관하여 하와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과를 먹고 자신에게도 건네주어 먹게 된 사실을 고백하였다. 성경에 기록한 고백의 내용으로는 그가 사탄을 직접 목격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지식이 있었으므로 그가 사탄을 목격하면 사탄의 정체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 지식을 지니고 있는 상태로 사탄이라는 존재를 목격하였을 때 그의 지성에서 나타나는 표상을 본유지식이 판단하게 될 때, 영혼의 지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지식을 생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사람으로 보냄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본이 되셔서 죄가 없는 참 사람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 최초 아담의 상태와 같은 동일하게 본유지식을 지니셨던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최초 사람과 같은 상태가 아니시라면 최초 사람의 범죄의 대가를 치르는 속죄의 제물이 되실 수 없을 것이다. 속죄의 제물은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러주는 것이므로 처음 사람의 상태와 같거나 보다 더 나은 상태의 존재일 때 속죄의 대가가 치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어렸을 때 행하시는 지혜로운 행하심과 베우지 아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 그들보다 더 하나님에 관하여 뛰어는 지식과 감각을 가지셨다는 것9)은 본유지식을 지니신 참 사람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공생애가 시작된 처음 예수께서 사탄을 만나셨다. 사탄은 예수님께 3번의 시험을 하였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마4장1~11)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타락한 사람이 지니지 아니한 본유지식을 지니신 최초 지음을 받은 아담과 같은 상태의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으신 것을 입증하여 주셨고, 사탄을 이기심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당신편으로 이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날부터 예수께서는 최초 사람에게 명하신 “땅을 정목하고 다스리는 일”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시게 되었다. 자연을 다스리고 굽은 것을 곧게 하고, 병든 질병을 고치시며, 절망에 처한 사람을 소망으로 인도하시며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아 사탄을 물리치시므로 그동안 멸망을 향하여 내리 치닫던 피조 세계와 인류의 비참함이 180도 방향을 바꾸어 다시 최초의 창조 목적을 향하여 돌이키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달려온 타락의 시간은 돌아온 만큼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누구나 타락에서 선의 기준인 상태에까지 돌아가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이 목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여전히 본유지식을 가지지 않은 타락한 죄인의 상태에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완전히 성화된 부모와 또는 신앙의 환경에서 자란다면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체계 안에서 삶을 살게 됨으로 그의 영혼의 지성에는 경험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득 채워진 그 사람은 언어나 행동이 마치 본유지식을 가진 사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성화되어 거룩하게 된 사람은 찾아 볼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표상은 타락의 잔재들로 가득 채워지게 되고 비로서 글을 알고 지식을 쌓아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려고 해도 타락의 지식들이 영혼의 지성에 생성되어 견고하게 타락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이기셨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영향력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행사되고 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없는 지식의 체계를 경험에 의해 획득하고 그 지식으로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롬3:28으로 말한바와 같이 사람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시는 모습을 볼 때,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본유지식을 가졌으므로 사탄을 만나게 될 때 사탄에게 시험을 받아 넘어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 아담은 직접 사탄을 만나지 않았고, 사탄은 하와에게 다가가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한 다음 이미 넘어진 하와를 통해 아담이 넘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타락의 실상을 말할 때마다 하와가 사탄에게 넘어졌고 자신은 하와가 건내준 금과를 범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 고백이 모세시대나 곧 현재와 같은 언어의 의미를 가지고 말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의 타락과 하나님을 떠나버린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류가 비참한 상황에 처하였고, 자신과 후손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태를 자주 고백한 것이고, 이 고백들이 후손들의 구전을 통해서 모세에게 까지 전승되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 ‘선의 상태로부터 이탈’한 인류가 처한 상태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지으신 뜻에 어긋난 상태가 되었고, 사람은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선으로부터의 이탈 상태”가 되었으며,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짖으시는 간섭과 사람이 왜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고난과 인생의 아픔에 빠져 버렸는지에 관한 지극히 분명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창조역사에 일어난 인류의 타락과 불순종의 생생한 역사를 재구성하듯이 그 진실을 파헤쳐 보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으나, 많은 시도들이 본질로부터 벗어난 왜곡되거나 혹은 자기 사상중심으로 구성하여 해석함으로 많은 오류들을 이끌어왔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죄의 정체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과연 죄가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행위가 선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죄이다. 그 원인은 육체로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 의지가 생성되는 감성의 작용인 지식을 느끼는 감성에서 얻어진 지각, 지각을 얻기 위해 생성된 지식, 생성된 지식을 생성하는 지성에 이미 있는 지식, 지성에 이미 있는 지식을 갖게 하는 지식의 순으로 살펴보면 영혼과 육체의 하나 된 실체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이르는 감각으로부터 생성된 지식과 지각 그리고 그 지각이 일으키는 의지로부터 의지를 선택한 마음을 살펴본다면 사람에게서 일어난 행위의 근본을 살펴 볼 수 있다. 

 

죄는 단순히 행위를 한하여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라고 말씀하심으로 행위로 드러나기 전에 이미 마음이 죄를 품고 있으며 실행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 문장을 통해 행위의 순서를 말하자면 마음에 이미 음욕을 가지고 눈을 들어 여자를 본다면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로 행하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미 그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은 죄가 실행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죄는 이미 마음에 있고 그것이 육체로 실행되지 않았을 뿐 마음에 움크리고 실행되기를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나타나 죄를 경고하셨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창 4:7)”

이 말씀에 의하면 가인의 마음에 이미 죄가 있고 대기 상태에 있음으로 죄를 다스려 행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죄는 육체로 행하기 이전에 아래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죄는 사람에게서 지식으로 생성되고 마음에 의지로 반영되어 행위를 위하여 대기 상태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음욕을 품은사람”,  가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기관 육체 영혼 마음
육체 지성 감성 의지 마음
사람 육체가 감각 감각의 
표상을 지성에 반영
지식으로 표상 조명 새로운
지식 생성
지식을 감성에 반영 지식을 지각 의지생성 마음에 의지 반영
(행위대기)
결과 사물을 오감으로 감각함 감각된 사물을 표상화 이미 있는 지식으로 조명 사물에 대한 지식 생성 혹은 인식 인식 혹은 새로운 지식을 감성에 반영 지각을 가짐 의지 생성 마음에 반영
(행위대기) 
아담의 범죄 죄를 일으키는 존재를 감각 감각된 존재를 표상으로 지성에 반영 지식으로 표상을 조명 판단된 표상에 의한 지식 생성 생성된 지식을 감성에 반영 반영된 지식을 지각함 지각하여 의지를 생성 의지를 마음에 반영
(행위대기)
결과 * 영혼감각1 참조 사탄을 표상하여 지성에 반영 지식으로 사탄의 표상을 조명 판단된 표상에 대한 지식 생성 1. 사탄을 감각함
2. 생성된 지식을 감성에 반영
반영된 사탄을 지각함 사탄을 느낀대로 의지를 생성 의지를 마음에 반영
(행위대기)

위의 표를 살펴보면 죄는 외부에서 육체의 오감을 통해 감각되어 생성되고 의지를 마음에 반영하여 드러나는 것이지만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감각되지 않음에도 죄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어 행위를 일으키는 대부분의 경우가 있다. 그 지식들은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된 표상들을 지식으로 비추어 생성한 많은 지식들이다. 이 지식들은 서로간의 연산과 결합 혹은 분석과 이해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는데 이렇게 생성된 지식들이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다. 이 지식들은 진리를 모태로 하지 않으므로 진리의 지식이 아니고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거짓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사람의 지성에서 오성작용에 의해 생성된 모든 지식은 참이 될 수 없다. 참이 되지 않은 지식은 하나님의 선으로부터 이탈한 지식으로 분명히 죄가 된다. 그러므로 죄는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되지 아니한 지식으로부터 생성된 모든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라고 꾸짖으실 때 베드로의 본성을 향하여 꾸짖으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순수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께서 본유지식에 의해 이해되고 판단된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 판단한 생각을 거침없이 내 밷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생각이었으므로 베드로 자신의 생각이지만 그 생각의 주인은 이미 베드로의 지성에 자리잡고 있는 사탄의 지식에 의해 지각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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