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롬 3:19)
우리는 긴 터널을 지나 왔습니다.
그 터널 이름은 죄의 터널이었습니다.
선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이 흙탕물이 뒤범벅이고 시커먼 공기로 가득찬 숨쉴 수 없는 공간으로, 마치 넓은 강을 헤엄치는 고기가 먹잇감을 발견하고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어항으로 들어가 사로잡힘과 같이 사람은 이렇게 죄의 터널에 들어감으로 죄에게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그 길은 다시 돌아나 올 수 없었습니다.
어항으로 들어간 고기가 자기가 들어간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터널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가 들어간 그 길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환경이 어두워서 그럴 수도 있었으나 실지로는 자기의 영혼 안에 길을 인도하던 빛이 터널 입구에 들어가자 사라져 버림으로 영혼이 길을 인도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깊고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길에는 사람의 몰골을 흉측하게 바꿔놓는 무서운 것들이 자기를 선하게 가장하고 동물이나 식물들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숙주처럼 사람의 영혼에 심기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지고 더듬과 경험하는 동안 기생할 숙주들은 하나씩 영혼에 심기워졌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눈을 열고 세상을 접하면서 얻은 경험들로 인한 지식들이 영혼의 지성에 심기우는 것처럼 타락의 터널에 들어간 사람의 영혼에는 터널의 질서와 세계가 영혼에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빛이 있는 세상과 한점 빛도 없는 어두운 세상의 터널에서의 삶은 달랐습니다.
빛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세상과 객체들을 육체의 눈으로 밝게 비춰주므로 분명히 볼 수 있으나 어두움의 세상은 앞에 사물이 있어서도 그 사물을 인지할 수 있도록 밝혀주는 조명이 없으므로 자기 영혼 안에 있는 지식만으로 판단하여 객체를 인식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 없는 터널안에서의 사람들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명정(明正)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라는 터널 안에 있는 사람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체가 사물을 바르게 보고 있다고 진리대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먼저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영혼이 어두움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상태를 인식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어두운 터널 안에서 해매고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세상을 비취지 않으므로 인해 접하는 객체의 정체들에 대한 지식을 받지 못하여 진리대로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되고 비뚤어진 지식으로 혼란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세를 세워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나 혹은 신앙의 단체에 가입한 삶으로도 영혼의 구원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고 3년 동안이나 주님을 따랐던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하고도 아진 온전한 믿음의 반석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어두움이 싸인 자기 영혼으로 살고 있을 때 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날이 이르러 다락방에서 다른 제자들과 일심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의 영혼에 하감하신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비로서 자기가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지식이 비춰지기 시작했고, 그 조명으로 세상을 향하여 볼 수 있는 지식들이 영혼에서 밝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어두운 죄의 터널을 벗어나 빛의 조명을 받은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찬란한 태양이 대지위에 내리고 있는 것처럼 성령은 온 세상을 비춰 조명하여 영혼에서 모든 객체에 대한 지식을 조명해주어 진리대로 지식을 얻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강림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대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회가 한국에 세워졌고, 그 교단의 명칭을 오순절 교단이라 하였으며, 실지로 이 교단이 지향하는 교리는 초대교회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상이라고 하였으나 이름과 사상은 그럴싸하지만 실지로는 전혀 초대교회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교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교회를 이룬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죄의 터널을 벗어나 성령의 조명이 있는 밝은 세상에 나아온 사람들은 진리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진리 의 조명으로 인하여 영혼이 가진 지식들은 진리의 지식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졌고 그 새겨진 말씀에 의해 영혼의 지성이 작용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사람을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믿음이라고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을 일컬어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믿음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정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심지어 개혁주의 신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조치 동일하게 믿음을 정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 생활을 하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종교생활’은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종교 생활이란?’ 자기의 영혼 안에 조명되지 않은 상태, 곧 진리의 말씀이 새겨지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이나 다른 종교의 대상에게 마음을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대부분 기독교가 바로 이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에 ‘믿는 것’은 사람의 영혼 안에 의를 행하도록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지식이 들어온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에 따라 움직여 나아가는 상태입니다.
본래 아브라함은 우상을 팔아 장사하는 데라 부족 족장의 차자였습니다. 데라는 세 아들이 있는데 아브람(아브라함의 이전이름)과 나홀과 하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성경에 데라의 후손으로 먼저 기록되는 것으로 봐서 장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 족장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희 고향과 너의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들려졌고, 그 말씀이 그의 영혼에 심겨졌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영혼에서 육체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움직이도록 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것”이란?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하고 그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정의하자면,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고 그 새겨진 말씀에 의해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심기우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살게 하는 종교로서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종교를 말합니다.
이렇게 종교와 기독교와의 분명한 구별은 “대상을 향하여 움직이려는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에 따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의 눈으로 사도가 말하는 율법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인식하고 있었던 율법의 개념과 성경이 말하고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시는 율법의 개념의 차이점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놀라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설명되는 율법에 관한 분명한 조명을 통해 여러분의 영혼에 진리의 지식이 차곡차곡 채워짐으로 여러분의 지성에서 진리의 지식만을 육체에 보내줌으로 진리의 사람으로 살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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