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롬3:19)
그러면 율법에 관하여 말해 보겠습니다.
율법은 타락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고 말한다면. 여러 가지를 살펴 볼 것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조화시켜 살펴야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더 지각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개혁교회와 다른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이점을 간과하여 율법을 이해함으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도는 사람에게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롬5:20)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의미만을 단정하여 말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율법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의미를 말하였으나 가장 이해하기 쉬운 구절을 언급한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에는 “율법이 사람에게 온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구절에서는 율법을 사람의 양심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롬2:14~15)
성경은 롬2:14~15을 괄호로 묶어 의미를 불분명하게 했습니다. 이 구절이 본래의 의미와 어떤 관계인지 신학자들마다 의미가 다릅니다. Calvin 은 그의 주석에 이 괄호에 대해서 아무런 해석을 덧붙이거나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본문이 성경의 의미에서 결코 약화되거나 별도로 이해해야할 어떤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본문을 성경에서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려는 생각을 배제합니다. 동일한 성경의 본문으로 여기고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율법에 관하여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롬 2:12절에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라고 말함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 관하여 심판을 거부할 수 없는 유대인과 동일한 처우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심판을 받는 데는 하등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이 없을 뿐 그들이 죄인인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예들인 이 세상에 존재라는 모든 사람은 범죄한 인류의 후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전혀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는 이미 정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그 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율법을 주셔서 알게하셨고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그들이 죄와 관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7:7)”라고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이미 율법에 대해서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의미하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그들로 하여금 특별한 은혜를 더함으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한바와 같이 그 율법이 이방인에게는 양심으로,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죄를 정하고 깨닫게 하는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율법의 본질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심이나 율법은 동일하게 죄와 관계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의 삶의 행위를 조명하였을 때 합당한 행위라면 정죄 받지 않지만 합당하지 않으면 정죄하여 죄인이 되게 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어떤 하나라도 율법의 저명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하나가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모든 규례를 지켜 온전하게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드러날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은 그 수가 몇 개가 되든지 사람의 행위를 비추어 정죄하는 일을 합니다.
이방인에게 드러난 양심은 어떻습니까?
먼저 양심이 무엇입니까“
양심은 자기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 의식입니다.
사람이 누워 자기의 가슴에 손을 얹어놓고 자기의 행위를 판단한다면 스스로 자기의 행위가 선하다고 판단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약 자기의 행위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타락한 본성으로 자기를 판단한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은 그 본성의 질서에 따라 자기행위를 판단하여 비춰보기 때문에 자기 행위와 타락한 본성이 일치함으로 자기의 행위를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의 타락한 본성을 안다면 자기의 행위를 결코 옳은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아직 타락한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본성으로 자기의 행위를 판단한 결과 자기의 행위를 옳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곧 양심은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의식이라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바 선악과를 범하고 난 이후 사라에게 주어진 결과로 “선악을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3:22)”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참으로 하나님의 선을 아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은 기능적인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처럼 자기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선을 아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이 가진 ‘선악을 아는 일’에 은 타락한 사람의 도덕의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옳다’ 라고 판단하는 것과 ‘그르다’는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며 이런 기준은 왜 발생하였을까요?
우리는 항상 피조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이란 주어진 것이 없이 자기 스스로 어떤 것을 발명해 내거나 생산하여 자기에게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기능은 반드시 주어져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은 자기에게서 나오고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지성이 모든 지식을 자연적으로 생성한다면 그 존재는 피조물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지식까지고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지은자에게 받아야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지식이 있습니다.
다윈론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라 수억년 동안 시간을 통해 변화를 가져 사람이 된 존재가 지식을 생성한다면 그 존재가 스스로 생성한 지식이 동일하게 수납이 가능한 인식구조를 가지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포의 구조가 같기 때문에 서로 인식이 가능한 지식을 사용한다고 그럴싸하게 말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주장이 자기들에게 커다란 실수임을 자연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과 구조가 비슷한 짐슴들이나 혹은 동물들의 지적인 수분에 대해서 결코 설명하지 못합니다.
“동일한 구조에서는 동일한 기능을 한다” 이 말처럼 혼란스러운 말은 없습니다.
사람은 세포의 구조가 다 동일하지만 생각하는 지적 기능은 다릅니다. 그렇지만 소통하고 관계하는 인식기능은 지식의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이 동일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주어진 지식이란 최초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고 그 형상에 모든 지식을 가진 본유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육체로 감각을 가지면 본유지식이 조명하여 감각을 지식으로 생성하여 가질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의 행위를 조명하는 기능을 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언제 주어졌느냐?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을 지으셨을 때 본유 지식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이 말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율법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여도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본래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 안에 주어져 있었습니다.
죄인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에게 주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율법의 요구를 행하셨다(롬 8:3~4)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행하심으로 타락한 사람이 행하지 못한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하려 왔노라(마5: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의 조명을 받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항상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지식으로 행위를 절제하고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고, 이를 곧 사랑이라고 했으며, 이 사랑은 곧 선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 적용하여 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선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랑이고, 사랑은 사람으로 살도록 부여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율법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최초 사람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게 살게 하는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지식에 비춰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선에 이르지 못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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