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3:21) 2.

생명있는 신앙 2013. 11. 10. 18:21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사도 또한 변화의 큰 도화선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복음적 사건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주 말해 온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멸시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커다란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시는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 바꿈이라는 놀라운 사역을 창조 세계에 행하십니다.

물론 이 사역은 창세전에 계획되었거나 아니면, 미리 아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선이 자녀인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적용하시는 표준으로 하나님의 기준이고 이 선으로부터 행하여지는 모든 행위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선과 사랑에 제약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기준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선으로 판단하시고 선으로 행하심으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에게 분에 넘치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을 부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강림과 하나님 자녀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으심,

이 놀라운 사랑은 하나님 자녀들인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넘쳐 왔습니다.

요단을 넘어 이방인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은 들어왔습니다.

가나안의 여섯부족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큰 사랑을 그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도 짐승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이스라엘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을 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4:19)

저는 여리고 성안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여리고의 왕은 요단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결투를 벌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전쟁의 상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상대는 하나님이었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그들은 자기들의 신으로하여금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도록 돕는데 온 정신을 쏟았고, 혼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여리고 사람들은 어떤 상태가 되었습니까?

종교에 억눌린 그들의 상태는 극도로 예민하고 민감하며 제한된 행동과 정신적인 억압으로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마음에 맞도록 행동하여야만 그들 신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을 노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상할 수 없는 정신의 억압과 행동의 제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 말로 사람들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 철저한 규범 속에 갇혀 숨도 재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상상할 수 없는 혐오스런 일들이 그들의 종교의 신에게 행하여 졌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들을 산채로 바치는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1  

이런 가운데 자기들의 신을 노엽게 하는 사람들의 무참한 처형들이 행하여 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군대를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기를 들고 여리고성을 돌게 했습니다.

이 작전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작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작전이 아니라 패하자는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연약한 여인이나 노인, 그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는 유 소아는 길갈 진에 머물게 하고, 군대는 기를 들고 여리고 성을 도는 것입니다.

성을 돌 때 큰 소리도 내지 말고 숨을 죽이며 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리고 군대에게 발견되지 않게 돌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에서 대항하지 말고 성을 돌기만 하되 7일 동안 돌라고 하신 것입니다.

7일은 완전 수 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여리고 백성들에게 완전히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여리고 성에 제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이를 몰랐겠습니까?
세상에 이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높은 성에서 이를 잘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으며, 전투를 벌이면 충분히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안에서는 자기들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신이 하나님과 싸우는데 있어서 자기들이 신을 노엽게 하거나, 혹은 신의 전쟁에 힘을 돋구워 주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방인들에게 모두 제물로 주고 이방인들에게 화해를 청하셨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마음으로 만든 신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죽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타락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죽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대신해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냄을 받았고 그가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본래 이방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복음을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거절이라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말 앞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하여야 합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지음을 받은 존재가 어떻게 지으신 분의 의견을 거절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까?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부터 질서롭게 이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에 입각한 질서로운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래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질서로운 관계를 원하십니다. ‘

하나님은 창조주,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하들을 보내 십자가에 죽으셨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뜻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과의 질서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거절입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당연한 질서로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타락하게 되자 이들의 탄생을 허락하셨을 뿐이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피조자의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에서 이방인은 버림을 받는 것이 질서입니다.

사도의 생각에서 발견된 비밀은 바로 이 질서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버림을 받고 이방인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이 나타난 것을 본 것입니다.

복음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인대, 놀랍게 이방인에게 옮겨져 버린 것입니다.

사도가 발견한 이 복음의 비밀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율법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발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새로운 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받아들이는 양자 지원서를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지원서는 바로 하나님의 율법 외에 한 의를 믿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1. 당시 가나안의 부족들 가운데 이런일은 종종 있엇던 일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