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과 아이사이
세겜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를 향하여 제단을 쌓고 그곳을 떠나 벧엘과 아이사이로 옮겨간 후에 그곳에서 제단을 다시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람이 가진 특별한 점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자신을 밝히시기는 아브람에게 처음입니다. 이때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난 신의 이름을 “여호와”라하고 불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최초로 하나님을 호칭하고 불렀습니다.
그동안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겜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난 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그 신에 대한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신인지 아니면 사람을 지으신 신이라는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신을 향하여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아브람과 하나님사이에 아직 구체적인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셨고 말씀하신 것 뿐입니다. 그 말씀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독립하게한 갈대아 우르에서의 나타남과, 세겜에서 약속하신 신으로 나타남 뿐입니다. 이때까지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벧엘과 아이사이에 이르러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 시내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백성이 애굽 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듣고 그들을 건지기 위해 너를 보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소개하셨습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
이런 소개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구체적으로 당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말을 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분명히 설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면서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셨는데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호칭하는 소리의 표현이었다면, 이 호칭에 의미를 부여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고,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한 의미 부여되지 않은 상태로 아브람으로부터 모세에게 까지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부터 자신에 관하여 호칭된 “여호와”라는 말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의미를 부여하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이스라엘에게 드러내시기 까지 거의 1천년동안의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러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밝혀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기 까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지식에 있어서 구체화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와는 이질적인 의식이었고, 사회 구성에 있어서 커다란 구별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아브람은 당시 부족 사회구성의 중심이 되는 종교에 있어서 일반 부족들이 가진 종교와 다른 종교적 형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실지로 그가 가나안에 이르기 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 사회의 구성을 살펴 볼 때 우상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세겜에서 드리는 제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
실지로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로 부터 독립할 때 어떤 우상을 가지고 나왔고 그 우상을 중심으로 부족을 구성하는 중심 요소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 신에게 무수히 많은 제사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겜에 이르렀을 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약속하신 여호와를 만났고, 여호와를 향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의미는 제의적인 형태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는 의미의 제사였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 신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상태이든지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전승되었으나 하나님을 선택하여 자기의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함으로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어떤 상태이든지 왜곡된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족의 신으로 섬기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모세에게 계시한 것과 같이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계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평화의 왕 살렘이 있기는 했을 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의식을 가졌을지라도 왜곡된 지식에 의한 신앙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당시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 되었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당시는 다신 사상이 주를 이루었고, 신들이 각자 자기의 영역을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신은 자기를 대리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지역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한다는 지역지배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대표적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신들과 신은 서로 경쟁하여 자기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고 조약을 통해 화합과 평화를 유지하거나 침략을 통해 신의 지배권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자기의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하여 통치권을 강화하는 정치적 체계를 가졌을 것입니다. 이런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부족사회에서 아브람이 자기의 가족을 이끌고 독립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종교를 자기 부족의 정치적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말하기에는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스스로 어떤 우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거나 정치적인 부족의 사상이 되는 종교가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화로 볼 때 아브람이 아무런 종교도 없이 자기의 부족을 정치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어떤 우상을 자기 부족의 통치의 중심에 두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두 번째 만나심으로 아브람은 자기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이르기 까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지나친 억측이나 사변적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반문하는 분들에게 뭐라고 대꾸할 의도를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의 이런 주장이 사변이든지 아니면 억측이든지 오직 목표는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추측해 봅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세겜에서 제사를 드리고 곧바로 벧엘과 아이사이로 이동 했는지 묵상해 봅니다.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아브람이 세겜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그 땅의 주인이 가나안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의 땅에 침입하였거나 발을 들였습니다. 일반적 절차로 보았을 때 가나안 사람들은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한 땅에 아브람이 들어온 것을 환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브람이 자기 땅을 차지하거나 전쟁을 하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평화적으로 그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땅에 들어온 이상 아브람이 자기들에게 위협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 이 땅을 자신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할 때 그의 마음에 결코 안정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큰 두려움이 됩니다.
신이 나타나 자기의 의식에 분명히 인식 되도록 약속한 것은 의식을 가진 사람의 상태에서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 땅은 가나안 사람이 지배하고 있고 그들의 신이 가나안을 선택하여 자기를 대리하고 있는데 자기에게 신이 나타나 이 땅을 자기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이를 듣고 평온한 마음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견고한 가나안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연약한 자신에게 다가온 이 엄청난 신의 계시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은 후 곧바로 그곳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벧엘과 아이사이에 이르렀을 때 그곳 주변의 환경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게 되자 진을 치고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고 드디어 자기와 함께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브람의 마음은 안정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고 신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안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자기로부터 성취되기 위해 부족 간의 전쟁이 필연적인 상황에 이른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러 그곳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고 그 신을 명명하여 여호와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의 마음에 비취진 신 여호와에 관하여 우리는 분명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에 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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