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신중하게 살펴야 할 내용들은 산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수 많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아브람은 아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신앙의 터전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산재한 인생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다고 해서 순간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생명을 가지고 이세상에 태어났으나 아직 의식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의 삶을 살며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동시에 살며 성장해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자기와 관계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마음에 확신이 자리 잡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자기안에는 우상이 있고, 아버지 데라에게서 가지고 나온 어떤 신들이 산재해 있을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의 의식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그려졌고, 그 신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점차 분명하게 자기와 관계를 가진 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신에 대하여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 3장에 이어 4장에서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말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생소한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의 조상 아브람에게서 이미 있었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참된 의라고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처음 믿음의 조상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율법을 주어 그가 율법을 다 행하므로 그를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은 아직 이스라엘에 속한 이스라엘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소명에 이끌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온 것 뿐입니다.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을 당시를 상황을 살펴보면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상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런 상황을 접하고 갈라디아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어 고린도 전서(2차 서신)을 기록하고 이어서 로마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서와 갈라디아, 로마서를 기록한 시기에 있어서는 시간상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2차 에베소 방문이후에 집중된 기간에 기록된 것이므로 이 3 서신의 교리적인 사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3 서신에서 볼 때 바울의 이신 칭의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이암은 의에 관하여 집중된 서신으로 창세기 15 장 6절에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로마서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매”라고 말하는 본문은 아브람의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사람에게 훔쳐진 것인데, 누가 어떻게 이것을 직감 할 수 있었습니까?
이 말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의 사상이 아닙니다.
모세가 자기의 생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게다가 모세는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현장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모세는 약 4백 30년 전의 사건을 전승으로 듣고 믿은 것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을 처음 낸 사람에 관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소는 창세기 15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대화를 하십니다.
아브람도 처음 가나안에 거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받은 후 애굽을 거쳐 한 바뀌 돌아 다시 가나안에 정착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브람은 재산이 많이 불어났고 함께하던 조카 롯과 해어져 완전한 독립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후 소돔 살고 있는 조카 롯이 전쟁에 잡혀갔고 이를 건져내오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을 때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이제 세상에 드러났고 그의 강함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명실 공히 세상의 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당당히 자기의 부족으로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아브람에게 크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왕들 간의 세력 다툼이 빈번한 상황에서 자기의 등장은 많은 견제를 받을 것이 너무 분명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그에게 더욱 확신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상으로 보아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어떤 증거들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자기가 신뢰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살벌한 세상에서 견고한 터전을 세우고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으로 믿는 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지나치게 종교적인 편향성에 치우쳐 성경을 해석하지만 당시 아브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냐 아니면 가나안의 신이나 여러 부족의 신중에 하나, 아니면 아버지 데라가 섬기는 신을 택하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있었던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실지로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관, 모든 신에 대한 부정적인 신관, 이런 사상은 기대하기 이릅니다. 물론 탈무드의 전승은 아브람의 유일 신관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들이 있으나 아무리 살펴봐도 당시 종교적 사상에서 아브람의 유일 신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 이를 아브람이 인식할 때 가질 수 있는 신관이지, 아직 신앙이 어린 상태어서는 절대적 유일신관을 가지지 못한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소통이 그의 삶에 절대적인 중심이 되었습니다.
벧엘과 아이에서 부르기 시작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르켜 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세에게 새롭게 준 것도 아닙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의 처음 아들들에게도 있었고, 그 후손들 가운데 믿음의 자손들에게도 있었으며, 그 이름이 전승으로 전해 오다가 아브람의 영혼에 조명되어 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이름은 전승으로만 내려온 위대한 창조주의 하나님이하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은 이 이름을 자기에게 와서 만나주고 약속까지 해주신 그 신에게 호칭하여 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이 전쟁으로 잡혀간 것을 다시 구해왔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냄으로 온 세상의 견제를 받게 되는 상태에 있을 때 실지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아브람이 혼자 살기에 너무 무서운 곳이고 험란하며 잠시라도 마음을 편하게 쉼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애굽을 돌아오면서 불려진 재물과 많은 재산 있습니다.
주위에 크고 작은 부족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노리고 시시 때때로 침략해 올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전쟁에 개입하여 실질적인 적으로 대립된 상황에서 아브람은 결코 안전한 삶을 유지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고, 자신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이땅을 주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람은 지난 날 자신을 이끌어온 삶과 그 삶속에 힘이 되어 이끌려온 자신의 삶이 지근 자신이 만난 여호와 하나님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게 하시려는 여호와의 뜻과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아브람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절대적 의지의 마음이 일어났고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믿음으로 보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라는 위대한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는 삶을 가질 것입니다.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자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그저 안개와 같은 인생의 한 정점을 지난 시간 속에 스쳐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로 잉여의 자식, 정욕의 아들,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한 후 끓어오르는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잉태로 생명을 얻게된 죄의 열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자기 안에서 쇠를 녹이는 뜨거운 불꽃처럼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증오의 삶으로 세상을 더럽히며 살고 있는 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고는 구원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증오를 퍼 붙고 잔인하게 십자가에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인식되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을 죽인 죄를 쏟아놓기 전까지는 결코 믿음의 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두려움에 휩싸이고 자기의 힘으로 결코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고 있는 절대적인 신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상황에서 의지하는 믿음이 곧 거짓이 없는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이처럼 긴박한 위기에 둘러 싸여 있는 존재가 절대적인 존재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 구원을 청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는 아무런 때도 묻어 있지 않습니다. 어떠한 술수와 속임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으려고 내밀고 도움을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고는 절대의존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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