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롬다 함을 얻었으면(롬4:2) 1,

생명있는 신앙 2014. 2. 5. 06:17

아브람이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4:2)

 

아브람은 결코 자기스스로 안전을 확보할 수 없는 두려운 시간 안에 접어들었습니다. 세상은 자기를 주시하고 자기에게는 세상의 노림이 되는 노략질 할 수 있는 많은 재물들이 있으며, 자기의 행위가 지극히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이 정당함이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도전적인 위협을 가하는 행위로서의 전쟁에 이미 참여함으로 원수관계를 만들었고, 사방에 부족들의 경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부족들의 편에서 볼 때 어린 싹을 불쌍하다고 가만이 두고 있었더니 안보이는 사이에 자기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부족간의 연맹들은 더욱 강화되고 살기 위한 생존의 싸움은 치열해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지 아브람의 세상과의 삶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와의 연관 관계를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리스도를 개입시켜 문제의 중심에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십시오.

아브람은 자기의 삶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환경에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삶은 자기가 충실히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별개로 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삶은 자기의 삶으로 이해하고 이 삶의 너머에 자기의 노력으로 안되는 그것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사 자기를 이곳으로 인도해 내셨으나 실지로 아브람은 자기의 삶을 충실히 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가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패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아브람의 삶에서 성공적인 삶과 실패의 삶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람은 가난할 수도 있고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아브람에 대한 목표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라고 해서 아브람에 대한 목표의 가능성을 한층 더 신뢰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계획한 목표를 성취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있는 아브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가난해도 못 이기고, 부자여도 못 이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그 순간 세상을 모두 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우리의 노력의 결과만큼 열매인 것입니다.

노력이 없는 삶은 여름 실과와 같은 가치의 결과를 맺을 것입니다.

반면에 최선을 다하는 삶은 풍성한 결과의 가치를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여 하나님을 아들을 향한 편애를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이런 삶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자기의 의지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의 의지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기의 삶에 들어와 자기 최선의 노력으로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어떤 삶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있는 그 어떤 삶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자기 삶이 깨닫고 자기 이상의 존재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는데 그 부가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부는 자기를 위태한 곳으로 내몰고, 언제나 우글거리는 시랑이들의 노략거리 표적이 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해오는 강한 힘은 자기보다 더 강한 적들을 생산하는 매개가 되어 아브람보다 연약한 부족들의 강한 동맹을 이끌어내는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의 세상은 자기의 강함만큼 더 강한 세계가 언제든지 재편되고 뒤바뀌며 자기의 현 상태에 대한 경계의 세력들이 동시에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필연적 존재 구조 인데 고정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 가변적이어서, 현 상태에 따라 구조가 바뀌므로 자기의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는 큰 부자가 아닌 연약한 소수의 무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르고 남방에서 얻은 재물을 더하여 한 바뀌 돌고 자기를 살펴보니 자기의 위상과 환경이 세상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뀌고 세력을 가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목축업을 하고 떠돌아다니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안전한 터전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브람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찾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너무도 잘압니다.

자기들도 아브람 같은 상황이라면 떠돌이 목축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세상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언제든지 그 강함으로 어느 부족을 쳐서 공격하여 피를 흘리고 빼앗는 전쟁에 돌입할 상황에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브람보다 더 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아브람을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두려워 떨고 있는 그 시간,

잡혀간 조카 롯을 다시 찾아오는 전쟁의 승리에 도취해 있을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

바로 큰 두려움과 위협을 느끼고 있는 위기의 순간과 같은 그때,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아브람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셔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큰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아브람이 믿음을 위해 무언가 행위를 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시기 위해 무엇을 했나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목표를 위해 아브람이 기여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자기의 삶을 살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생명 걸고 살았습니다.

사방에 시랑이와 이리가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한발을 숨쉬고 움직일 수 없는 위기의 순간순간을 넘어 결코 마음놓고 숨을 쉴 수 없는 긴박한 삶의 연속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온 것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약육강식의 동물세계 속에서 사람의 삶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그런 연약한 신앙관계에서, 아브람은 절대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의지할 신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종교는 가져야 하기 때문에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자기의 안녕과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 신을 불러와 마음에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사람이 신보다 위에 있어서 신으로 하여금 자기의 시야에 보이지 않은 삶의 한 부분을 맡아 자기를 위해 헌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필요하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는 종교는 무가치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브람에게 이런 것은 없을 까요?

아직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자기와 자기의 삶에 필요한 신이라고 믿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른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당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창세기 15:7절의 말씀입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

아브람은 이 말씀이 자기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에게 여러번 만나고 위기에서 건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여러 환난과 고통 속에서 건재하게 지금까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이런 목적과 뜻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함께하시므로 자기를 지켜 오셨구나,’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영혼에 믿음이 생기고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아브람과 같은 사건이 없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고, 그 복음은 우리를 새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복음에 있고, 복음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바로 복음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어 그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으로 복음에 이르게 하는 삶을 위해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