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롬4:8)
우리는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생의 터전인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인생의 삶의 양태와 하나님의 사역과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원받은 신자들의 하나님 아들의 삶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복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주님께서 행하시는 이적과 기적적인 사건을 현실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접근으로 심각하게 복음을 왜곡시켜 왔습니다. 게다가 개혁교회 마져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들에 관하여 개혁교회를 포함한 개신교 전체의 복음 체계에 대해서 신학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오히려 이질적인 복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배척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의 교회에서 복음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이 주관적 신앙상태를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양태까지도 말씀으로 역사해 주시고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고 우리의 삶의 양태는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기록된 구약의 역사적 사건들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는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그것은 우리에게 온전히 맡겨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몫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려면 객관적으로도 충분한 조건이 만족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 후 우리의 삶을 마무리 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최선을 다하고 살았던 삶을 회개하여 계산한 후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 우리의 삶에 질이 달라질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최선을 다하여 하루를 마감한다면 내일 우리의 삶은 달라지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삶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음을 받았고 삶을 허락 받았습니다. 우리가 존재와 삶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면 존재와 삶이 자연적인 진화의 결과로 말미암은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그리고 허락 속에 있는 일이라면 모든 존재와 삶의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존재의 원인이 되셔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존재는 영광입니다.
존재의 영광은 우리가 삶을 누리면서 당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절망의 아픔이 존재의 영광을 가리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슬픔이 있어서 그 슬픔이 우리의 삶을 좌절하게 한다고 해도, 존재함, 그 영광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픔을 겪고 질병과 삶의 절망에 처해 슬퍼하더라도 이 세상에 숨을 쉬고 생각하는 존재의 영광을 조금도 흐리게 하지 못합니다.
존재는 그 자체가 무한한 영광입니다.
존재는 우리의 삶의 모든 것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으로도 흐려지지 않은 존재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셔서 존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인 요한계시록 4:11의 24 장로들이 보좌에 둘러서 자기의 면류관을 드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과 존귀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나를 지으셔서 존재하게하신 하나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늘을 향하여 박수를 치는 그런 유치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것을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던지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곧 면류관을 벗어드리는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박수를 치고 영광을 돌려드린다고 하는 그런 경망스런 행위는 크게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영광은 모든 것을 그분의 소유로 하고 크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음을 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그런데 우리의 이기주의를 살펴 보십시오.
우리는 존재의 영광을 잊어버리고 오만하게도 우리가 행한 성실한 삶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후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선하게 살았으니 삶에 대한 대가를 주십시오! 라고 요구할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게 하시고 존재를 허락해주신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빚을 진 자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셨고 삶을 가지고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고 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우리의 생명이라도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힘들고 지쳤으며, 삶을 원망하며 기적과 이적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몰상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존재를 허락하셨으니 요구하실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양태에 대해서 아무런 요구를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렵게 살든지 많은 노력을 해서 부자로 살든지, 아니면 무진장 가난하여 남보기에 부끄럽게 살든지, 그것에 관하여 아무런 간섭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세속주의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성경에는 온통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입니다.
사회운동을 외치를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성경은 온통 정의와 희생이 눈에 보입니다.
기적과 이적을 삶의 신조로 여기고 사는 신앙인들이 성경을 보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기적만 보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바다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모습만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싫어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런 일은 주님께서 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거지로 살고 어렵게 살며 죄를 짓고 도적질을 한다한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혹은 손해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님의 소중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생명을 가치없이 사용한 것에 대한 징계만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잘살고 현명하게 최선을 다하여 살아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잘살았다고 상급을 주셔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아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삶이 마치 하나님을 위해 살아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도록 하셨고, 우리의 삶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지혜롭게 해서 더 많은 유익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철저히 잠시 존재하고 사라질 안개와 같은 우리의 삶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또 다른 우리 후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들은 우리 뒤를 이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 세상에서 삶을 살도록 그들 눈에 볼 수 있도록 살아야 하고 그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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