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인쳤다는 것은 먼저 의롭다함을 받았고 그 받음을 전제로 할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세상에서의 구별에 관한 중요한 교리적 관점으로부터 신학적인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의 표시이며 하나님께 속한 징표입니다.
이 할례는 남자에게만 있고 여자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들에게는 할례로 부터의 소속이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여자에게도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여 있고 본래 남자와 한 몸입니다.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할례를 받은 남자에게 속하는 것이 여자의 소속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할례의 본질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우리에게 제시하여 밝혀주고 있습니다.
할례의 본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표징입니다.
이 할례를 몸에 지니고 있으므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할례를 받은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자부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단순한 소속감으로 변질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개개인으로 적용해 볼 때 실지로 그들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무와는 전혀 관계없이 할례의 표를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율법에 따라 주어진 할례는 그 받는 사람의 개인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아브라함 한사람의 믿음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실지로 이스라엘은 자기 개인의 믿음 때문에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해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믿음은 아브라함의 영혼의 지성에 있고 그 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후손들에게 수여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실까?
개개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 따라 적절한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그로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몸에 할례를 지닌 것으로 자부심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할례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의미를 배워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왜 내가 할례를 받았고 이 할례로 인하여 이방인과 구별되었으며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인식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할례의 의미보다는 할례로 인한 그들의 자부심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할례의 의미보다 더 주요한 지식으로 생각했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게 된 것입니다.
실지로 이스라엘에게는 믿음 보다는 율법을 더 중요시하는 절대적 사상이 되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유대교 안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지난날들을 살펴보아도, 믿음의 의미에 대한 지식을 보다는 율법의 내용을 배우고 익히며, 그것들의 의미를 찾고 실행하는 것과, 그것들을 읽고 외우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을 것입니다.
율법은 마치 그들의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율법 자체를 잃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그들과 하나님을 연합시키는 유일한 매개체로 알았고 그들의 삶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지시하는데 까지 가고, 율법이 말하는데 까지 행동했습니다.
율법이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율법에 담겨져 있지 않은 문화는 발전시키거나 창조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삶이고 정신이며, 지표였습니다.
율법만 바라보았고, 율법 외에는 보는 것 자체를 죄로 여겼습니다.
율법이 의미하지 않은 모든 삶은 철저히 부정했으며, 그것들이 자기들의 삶에 유입되는 것은 마치 거룩한 하나님이 침해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까지, 정신과 삶과 행동이 율법과 하나가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율법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교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종교적 계율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과 같았습니다.
종교적 계율들은 사람의 삶을 제약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계율 안에 제한합니다.
종교는 이런 계율들로 인하여 사람을 가두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할례와 믿음을 정확하게 구분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직도 그 구분이 안 된다면 위의 내용을 자세히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것은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결코 믿음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이 자기의 감정과 종교적인 의지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스스로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전하는 자의 전도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서 최대한 감동적이고 정확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성공과 행복을 선물하는 것처럼 왜곡된 복음에는 결코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이런 것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하나님과 사람 자신을 알려주는 조명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어두움을 밝히는 조명으로서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빛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이 가장 효과적으로 밝혀주도록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총 동원하여 복음에 밝은 빛이 더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믿음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할례를 받았고, 나중에 믿음에 관한 지식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할례는 자기들의 주관적 믿음과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님께서 이미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선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알고 자기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율법에 매달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람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라고 사도가 로마서 서두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조명되고 있고, 그 조명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믿음에 이르게 된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받아들이면 받아들이는 그 지식에 의해 그 사람이 믿음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일 때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집을 나와 홀연 단신으로 한 부족을 이루며 가나안과 애굽을 방황하였으나 10년 동안이나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이 그의 지성에 뿌리내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커다란 위기에 처하고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비로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도 없고 보호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두려워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보호를 확실히 약속하고 또한 미래의 희망까지 약속하였을 때, 그의 영혼에 믿음이 일어났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그에게 일어난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드러내 보인 것이지, 아브람의 본성에서 지식과 지혜로 지어내거나 만들어 표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지식의 조명을 받아 드러낸 믿음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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