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음으로 된 의(롬4:11)

생명있는 신앙 2014. 6. 4. 19:55

 

앞에서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을 들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잡혀간 조카 롯을 구조해서 대리고 왔을 때 주위의 많은 왕들로부터 환영과 용맹함의 칭찬을 들을 때 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자기들 처소로 돌아가도 아브람도 자기 처소로 돌아왔습니다.

아브람은 아무도 없고 자기만 있는 처소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일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행위가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처소에 돌아와서 곰곰이 살펴보니 이 일이 자신을 커다란 위험에 빠뜨리는 일임을 느낀것입니다.

주위의 부족들은 견고한 성읍과 잘 훈련된 군대가 있으며 다른 부족들을 거느리며 속박할 수 있을 만큼 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로 연합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여 더 견고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용감하게 적군의 진속을 뛰어들어 적들을 파하고 조카 롯을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공격하여 넘어뜨린 적군들은 큰 성과 강한 무기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브람을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람혼자서는 결코 당해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신이 그들을 공격하고 조카를 구해왔는데 오히려 그 일이 자신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 조차 못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이전 까지 아브람에게는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어디에 가서든지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어느 편으로 치우쳤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원하지 않았던 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생은 이처럼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 펼쳐집니다.

원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게 되기도 하고 아브람처럼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고도 장막 뒤에서 불안에 떨어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결코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승리 뒤에 밀려오는 두려움은 승리는 원망스럽게 하는 상황으로 반전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영원한 승리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본 아브람은 자신의 처서의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은 천막으로 덮여진 진에 있고 군대의 수도 작습니다. 견고한 성읍도 없는 야외 간이 무대 같은 상태라서 언제라도 주위의 부족들이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공격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하기 이를 대 없는 상태입니다. 반면에 적들은 견고한 성읍에 강한 군대를 가지고 연합전선을 펼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힘을 모아 공격해 온다면 아브람은 결코 안전 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마음 하나로 조카 롯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전후 상황을 살피지 않고 뛰어들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엄청난 위험에 빠뜨리게 된 것을 안 것입니다.

 

그날 밤 아브람은 온전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고, 한없이 초라하고 작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보았으며,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봐도 아무도 의지 할 수 없는 외톨이 인생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엄습해오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광야의 땅!

무덥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이는 열기가 있는 곳!

잠시라도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놓기만 하면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 시랑이들의 밥이 될 수 밖에 없는 생존 현장에서 천막 하나에 기대어 살기는 너무도 위험스런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부족국가 시대에서의 전쟁은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불안의 연속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환경과 자기가 처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직시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우리의 삶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지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우리의 삶에 조명하여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을 말하라 한다면 바로 창세기 15장에서 두려운 밤에 만난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밤은 아브람이 믿음을 해산하는 날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날까지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오직 성공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성공은 이 땅 위에 견고한 성을 가진 부족을 세우는 일이었고 그와 함께 강한 세력을 가진 연합 세력과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직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까지 아브라함은 아직 믿음의 싸움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절대적인 믿음을 드러낼 만큼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카를 구해오는 전쟁이 후에 자신의 위치와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저는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사로잡혀 글을 쓰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세월호 이후 정말 로마서 연재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중동 지역의 여러 나라와 현재 머물고 있는 캐나다에서 조국의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를 인터넷으로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인 혼란한 상황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아픔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 나라를 이렇게 버리시는지 슬픈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교회를 이끄는 사역자들의 세속화와, 상상하기 어려운 정치적 편향성들 때문에 슬픔이 더 컸습니다.

아직도 건져 내지 못한 16명의 우리 아들 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어른들이 너무 큰 죄를 저질럿다는 괴로움에 젊은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기 무거울 뿐입니다.

물론 시대가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이방인의 때가 끝나가기 때 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형제들과 우리 후손들의 아픔을 어떻게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정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근대 우리는 시작부터 정의와는 상관이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 조국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유린하고 착취하고 빼앗은 일본군들의 앞잡이 역할을 해온 친일파들이 아직 이 땅에서 군림하며 백성들의 위에서 권위를 누리고 있는 한 이땅에 정의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유린당한 조국의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들이 아직도 선량한 백성들과 우리 민족과 조국을 위해 피흘린 명예조차 멸시하는 혈실에서 어떤 정의가 발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우리의 형제들이 물속에 수장되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기들의 부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 모든 사태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이상하게도 우리의 조국 한반도는 오천년의 역사 동안 자기를 위해 정의를 위해 부르짖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부여된 생을 온전히 살도록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인 진리보다는 진리 비슷한 적그리스도적인 색을 가진 성경적 해석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부정과 비 도덕이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진리보다는 혈연과 지연이 더 우선이고,

그리스도의 사랑보다는 경제적인 헌신과 봉사에 눈을 돌리고 점수를 매기는 기현상이 교회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왕국도 아닌데 미개한 국가나 독제 국가에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세습이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흑세 무민하게도 성도들은 진리아닌 것에 생명을 바치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잘살게 하는 성공적 신앙, 안개처럼 희미한 세상으로 이끌어가는 신비주의, 기적과 초자연주의 현상을 기대하는 마술적 현상들, 이런 것들이 종교와 함께 혼합하여 사람들을 사로잡아 옳아 매고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조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기독교인입니까?”

 

이제 그만해야죠?

안하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글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말씀드리고 여러분의 지금 현 상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혀 드리고 아브람이 자기의 처소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상황과 그가 믿음을 갖게 된 그 현장을 조명하는데 집중하겠습니다.

아브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의 장막에서 서성거릴 수 밖에 업습니다.

자기가 공격했던 적들이 연합군을 펴고 자기를 공격해 온다면 자기는 이 밤에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브람이 믿음을 가진 그 장면들을 창세기 15장에서 읽으면 얼마나 다급한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크고 두려운 밤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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