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음으로 된 의(로4:11)

생명있는 신앙 2014. 5. 11. 04:07

믿음으로 된 의(4:11)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돔 땅에 거하는 조카의 가족들이 전쟁에서 사로잡혀 끌려간 것을 구해온 행위라든가, 아니면 그의 삶의 행위 중 어떤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일 때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의로운 행위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고, 영혼에서는 무지와 결함으로 함의된 지식들만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영혼으로부터 나온 그 어떤 지식도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행위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가인이나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 술사 발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적을 만났을 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피조물입니다. 영혼을 살아있는 존재로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육체 안에 제한적으로 활동합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활동을 드러내는 것은 지식을 육체에 반영함으로 영혼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육체에 반영하는 지식은 영혼 스스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에 어떤 지식이 담겨져 있느냐에 따라 육체에 반영되는 지식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육체로 활동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동은 선한 지식의 반영으로 말미암고, 악한 지식은 악한 지식의 반영으로 말미암습니다. 사람이 영혼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스스로 지식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고, 지식을 생성할 때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으로 말미암은데, 그 지식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행위가 선악으로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보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에서 선한 지식이 육체에 반영하여 행한 것을 선하게 보기 때문에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이 선한 것인지 여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 이전에 행위를 하게하는 지식을 살피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의 반응이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인식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의식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의 구별된 의식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가 아브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데라의 집에 있을 때 만난 하나님은 가나안의 땅에 거할 때 만난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1세기 개혁교회에 아주 큰 업적을 남긴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친 성경신학의 저자 G, Vos 박사입니다. 그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는 위대한 신학체계를 계혁주의 신학에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 신학을 배우고 그를 모토로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애석하게도 이 점진적 계시가 주,객관의 관점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론적인 의미에서 이해되고 있는 안타까운 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주관적 인식과, 객관적 인식의 차이점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떤 모양이나 형태에 비유하고 그것이 점차 선명하게 사람에게 드러나 보임으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양태론적인 것을말합니다. 기독교는 이런 양태론적으로 매우 위험한 계시관을 속히 벗어나야 하고 이것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셨다가 점차 밝아져 분명하게 보이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는데 있어서 그 결과적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게 됩니다. 즉 양태론적인 해석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아시고 스스로 점진적을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결과적인 책임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왔으니 그 결과도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분명하게 자신을 보이시지 않은 결과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희미하게 보이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가 만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보여주시는 분의 책임이지 사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희미하게 보이고 그렇게 보인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다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확하게 보이시지 않으셨으면서 보지 못한 책임을 사람에게 물으시는 것은 너무 일방적이고 독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태론적인 점진적 계시는 분명히 신학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설교자들이 아브람의 경우를 설명하면서 갈대아 우르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설명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인정한때를 소돔 땅에 거하는 롯이 전쟁에 잡혀간 위기에서 구해오고 난 다음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큰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있을 때, 자기에게 다가와 보호를 약속하시고 미래의 희망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낼 때 드디어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가나안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신앙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브람에게 아직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아브람에게 분명하게 자신을 보여주셨고, 아브람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점진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서 다가오십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혼에 들어와 지성에 자리를 잡고 심겨집니다.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고 일을 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게 되면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 되고 영혼 안에 뿌리를 내린 복음이 우리가 듣거나 읽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조명하여 지성으로 지식을 생성하게 합니다. 이렇게 생성한 지식이 육체에 반영되어 행동하게 할 때 우리가 비로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인식을 갖게 되고 비로서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바로 행동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행동하게 하는 지식은 사람의 자기지식과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지식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도는 이를 아브람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 아브람이 믿음을 가진 때 비로서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인식을 가진 때를 말하고, 그 전에는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자신을 분명히 계시하셨고 드러내 보이셨으나 가인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므로 아벨과 현저하게 구별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양태론적인 점진적 계시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당신의 무소부재와 전지전능하심을 아직 보이시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가인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변명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결과적으로 가인이 하나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점진적 계시는 양태론적 점진적 계시와 전혀 다릅니다.    .

인식하는 사람에 관점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 노아, 아브람 등을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자 하나님께서 계시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로부터 교회시대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하나님께서 나타나주셨습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시간의 적용을 받으셔서 시대에 따른 계시를 점진적 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는 하나님께서 손을 먼저 들어내 보이시고 얼마 후 몸의 반쯤 보이신 다음 이후에 점차로 전신을 보이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셨다거나 구원을 위해 지정하신 사람에게 점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온전히 인식되게 하신다는 의미는 기독교의 주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