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의 조상(롬4:11)
기독교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에 있어서 사실을 중시하고 그 진위를 증명하여 복음을 밝히려고 합니다. 이렇게 밝혀진 사실을 듣는 이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내에서 복음은 2천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지금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는 것은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옷을 입혀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치루었다는 사실의 수납여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받아들이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과거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수납 여부에 믿음과 결부하였고, 이 믿음에 결부된 사람들이 별도로 집합적으로 모임으로 또 하나의 의무적인 삶을 더하여 살아가는 것이 교회 생활입니다.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구별은 산업혁명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문학비평의 도입과 성경의 본문의 비평적 적용으로 해석 되어진 또 하나의 현대적인 주장이 교회에서 일어남으로, 수천년 동안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온 성경의 절대 무오성이 비평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뽑혀져 버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평은 소위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게다가 성경을 기록한 저자에 관한 진실성까지 의문시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사본들의 발견이 고고학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합리주의적인 영향으로 성경은 저자가 독자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양한 자료들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당시 사회에 공통적으로 인식되었고 통용된 사건들을 편집한 하나의 자료일 뿐 사실을 중시하지 않은 편집된 자료에 불과함으로 그 권위는 여지없이 땅에 내동댕이쳐지고, 결과적으로 사실 까지도 의문시 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안에서 새로운 주장의 등장하여 복음의 사실은 믿음을 갖기에 적절하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이율 배반적으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을 갖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대는 복음적인 것을 하나의 사실에 근거하고 그 사실이 분명하지 않은 역사적인 증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기형적인 사고 구조 속에서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모래위에 지은 건축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가 그 사실의 부정확한 증거들을 발견한다면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땅에 내동댕이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는 복음적 사실 마져도 무너질 수 현실 앞에서 언제든지 이 복음적 사실을 버리고 다른 사실의 체계를 세워 신앙의 재료로 삼기 위한 준비들을 해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복음적 사실을 우리의 영혼의 지성이 받아들임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드러내는 지식을 전인으로 반영해 믿게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의 그런 믿음이 유리의 영혼에 새로운 시각에서 제시된 복음적 지식들을 받아들이고, 이미 가진 복음의 지식에 의한 믿음을 깨뜨리고 수정하여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사실에 입각한 복음으로 믿음을 가진 우리의 신앙은 언제든지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적인 사실은 역사에 국한될 뿐이지 그것이 변하지 않은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는 신앙은 온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천주교의 부패가 개혁으로 인하여 개신교를 일으켰고, 개혁적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비롯된 것 같이 신앙은 여러 가지의 사실들에 의해 예상되지 않은 방향으로 일탈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를 견고하게 세워주는 뿌리가 잘려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의 발견을 두려워하고 발견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신앙으로부터 흔들리는 두려움을 앉고 있으면서 2천년전의 복음적 사실을 견고하게 매달리는 것을 신앙을 보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도 이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에게 있을 때가 더 안전했다고 믿게 되는 순간적 후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행한 전쟁으로 위험을 초래했다는 사실로 인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인생의 절대적인 위험의 순간에 다다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런 일은 만나지 않았을 것인데’라는 후회는 지난날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 사실이 만들어낸 결과를 매우 부정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 사실이 만들어낸 오늘은 그토록 확고하게 믿어온 신앙이 흔들려 버린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닥쳐온 절망적인 상황은 결과적으로 자기가 경험한 사실들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앙의 변절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자기에게 다가온 또 하나의 사실 때문에 신앙을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들의 진위를 파악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들이 다양하고 역사적이며 혹은 현실적일 수 있는 많은 모양을 가지고 있고, 실재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실들이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은 참과 거짓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무형이나 유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이 사실들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로하는 견고한 지식들을 파괴하여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아주 위험한 극약들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면서 진리에 이르지 못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로 인하여 견고한 영혼의 지성이 여지없이 흔들리고 새로운 사실들이 영혼의 지성에 들어옴으로 거짓을 생성한 지성이 그 거짓을 우리의 전인에 반응하여 행동함으로 믿음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우리의 신앙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까지도 무너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위험 속에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신앙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도는 디모데에게 경고의 말을 남겼습니다. 그 글에서 어떤 이들이 자기들의 지식으로 새로운 지식을 말하기를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딤후 2:18)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은 예전 사건이고 하나의 사실이다."
"이제 그 부활은 없어 우리에게 오지 않는 하나의 환상이고 꿈이야." 라고
이 말은 그들에게 사실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이후에 무덤에서 잠자던 자들이 일어난 사건이 있었습니다.(마 27:52~53)
그러나 그들의 세계와 오늘 까지도 부활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후에는 결코 부활이 없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그 부활은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계에서 전혀 증거 되지 않은 일들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새로운 사실을 말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활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는 것이고 지금은 없는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에 휩쓸려 믿음에서 떠나게 되었는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 후메네오와 빌래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역사적 사실은 우리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증언 앞에 우리가 서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보고 듣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실지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도 하지만, 그 사실이 외려 믿음을 무너뜨려 보린가는 지식을 지금 만나고 그 증언을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사실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이 순간, 이 공간이 여러분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증언은 이글을 기록한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입니다.
이공간은 제가 지금 증언하고 있으나 실재로는 이글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현재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자신을 이끌어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기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그 순간이 아니라 이전의 만남이 있었으나, 지금 또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의 역할에 관한 증언을 듣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그 믿음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해서 믿음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오늘 현재를 있게 한 분명한 확증을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공간을 통해서 복음을 만나고 있고, 그 복음을 받은 시간은 사실로 지난 날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복음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복음을 만나는 이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실적인 복음으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지탱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가 아닌 이미 있었던 사실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끌려 한다면 여러분은 흔들리고 지쳐 근원을 잃고 불 신앙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내어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현재 죄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바로 이 복음이 우리 앞에 드러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원죄와 자범죄가 뭣인지도 모르지만 복음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도 우리의 소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앞에 복음은 항상 우리의 면전에 있었고, 그 복음이 우리를 보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복음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보내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었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과 원수였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원수였던 마음을 드러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 이방인은 바로 지금 여러분과 저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실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죽인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정죄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우리가 죽인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이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는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복음을 만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언재나 지금 우리에게 말합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
하나님을 죽인 죄인,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십니다.
“이제 시원하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여러분이 이방인의 정체성에 관하여 명확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신다면 여러분이 누구라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여러분의 신분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복음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었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이방인,
바로 우리의 정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왜 이방인에게 내어주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대신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라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자기는 죽일 수 없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나 실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면 이방인에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왜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이려고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여 정욕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지 않은 자신들을 낳았기 때문에 죽이려고 합니다.
이방인인 우리의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여 정욕을 일으키는 그정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의 자식들, 곧 죄의 열매들입니다.
이방인은 이 땅에 태어났지만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버림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출생은 처음부터 버림을 받았고 구원의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지옥 뿐인 사람들입니다.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증언하기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의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엡2:3)
이처럼, 우리의 정체가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여 죄를 짓고 정욕을 일으켜 잉태하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불행한 존재입니다.
우리 전인이 이 사실을 알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미 이 땅에서 씨가 말라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영혼과 육체의 소통을 단절시켜 버린 것입니다(창 6: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이유를 이제 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본질적으로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고는 우리를 지옥에 가도록 버렸기 때문에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원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보장도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우리를 무책임하게 낳았고, 범죄하여 자기들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정욕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우리를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방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원수 관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분노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미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보낸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우리에게 내어주자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분을 쏟아냈고 가장 극악한 처형으로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제 시원하니?”라고 말씀 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의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오히려 화목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는데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아들로 받아들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요3:16)
아브람은 바로 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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