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할례시 가졌던 믿음의 자취(롬4:12)
믿음이 할례보다 앞섰다는 사도의 말은 당시 로마뿐만 아니라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로 인한 구별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실재적인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실재를 강조한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신앙은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신앙은 지금 현재 과거의 사실이 아닌 복음과 정면으로 만나고 그 복음 앞에 순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복음이 사실(fact)이면 여러분의 신앙에 대한 결과적 책임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천년 전에 그 사실을 세워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지금 여러분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 자기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고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 아브람은 아직 믿음이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번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과 대화도 하였고,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도 드렸으며,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댁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신앙적인 모습도 보였으나, 그것이 그의 믿음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실재가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과 실재는 다릅니다. 실재는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재는 과거에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2천년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실에 대한 실재입니다.
사실은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 고난중에 계시고, 그 고난이 사실을 경험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살펴 보겠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와 영웅대접을 받은 아브람은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대화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제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에 처해지자 아브람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시기는 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아비멜랙과의 위기순간에서 구원을 받은 기적적인 사건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내를 잃지 않고 간신히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실지로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두려운 밤에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계자를 세어두고 차분히 일어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수히 많이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가 아브람이 전쟁에서 돌아와 자기의 장막에서 자기를 돌아본 초라하기 이를 대 없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 한 때와 같다는 사실을 볼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자신이 이런 두려움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찾아서, 아니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아브람이 아직 까지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꿈의 성취를 위해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작은 부족의 왕국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어느 한 구석에서든지 전쟁하지 않고 자기의 성을 건축하여 영원히 자기의 후손으로 부족 왕국을 이어가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참으로 성실하고 좋은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전쟁에서 조카 롯을 건저내고 승리하고 돌아와 주위의 부족장들에게 환영을 받고난 다음에는 완전히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평화는 깨어지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그동안 정확하게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기를 만나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삶의 힘이 되어준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에게 이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믿음은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또한 아브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처럼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을 다해 뛰고 있습니다 .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아브람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사실적입니다.
아브람에게 믿음도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을 도와주신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려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놀랍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서 한 가지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그 일을 성취하시려고 아브람을 만나셨고 아브람에게 전적으로 가까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빨리 깨닫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삶에 성취되도록 내어주었으면 좋았을 탠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람이 하나님도 잘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몰랐으며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에게 왜 가까이 하시고 만나주시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종교적인 지식에 따라 수많은 신들 중에 한 신이 자기에게 나타나 부족을 세워가는 줄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아브람이 완전히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자기 영혼에 가져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전쟁 후 자기의 장막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한 가지 명확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아브람과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까요?
너무도 당연합니다.
성경이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믿음을 알기를 원하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의 삶은 곧 우리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우리의 허울뿐인 믿음을 보여줍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만나주시고 그 만남을 통해 아브람의 믿음은 더욱 진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할 때 까지 아브람의 믿음의 자취는 우리에게 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만나지 않으면 아브람의 믿음의 진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진보된 믿음에 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한번 복음을 들음으로 그 다음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맞겨져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매사 잘못하고 실수하고 부족하고 그렇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매순간 시시 때때로 만나 주십니다.
그것이 아브람의 믿음의 자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실까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와 만나 주십니다.
아브람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시는 것을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믿음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우리는 한 사실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훈련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쳐 알게하는 것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그 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 말씀을 드립니다만, 우리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실재,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어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나는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믿으라고 수없이 많이 강조하지만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교회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철학도 있고, 소설도 있으며, 강의도 있고, 행정과 조직도 있지만 정작 복음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 믿음 등 반드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것 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저는 오늘날 교회는 아브람이 두려워 떨고 있는 자기정체성을 발견한 그 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나아가야 하는 것'은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믿음을 가지고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아브람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성경이 말한바 믿음의 본을 보인 아브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을 드러내는 그 사건 앞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아브람은 어떤 상태였는지를 말씀드리고, 믿음이 어떻게 아브람에게 일어났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두려워 떨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인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가 복음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복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행한 엄청난 죄의 행위가 드러난 지금, 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복음 하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오셨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 앞에 복음이 선명하게 서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고, 우리는 복음을 만났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듣고 인식하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남과 복음의 만남이 신앙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복음 앞에 서십시오.
복음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분명한 지적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복사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믿음과 복음을 만나는 믿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계약을 맺으십니다.
복음을 만난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목을 선물로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말로만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확실한 믿음의 조상이고, 선명하게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말합니다.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너희에게 찾아오시고 너희에게 약속하시는 현재의 실재'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우리가 복음을 만나고 복음 앞에 서서 복음이 주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하나님께 순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복음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 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 믿음은 아브람이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떤 일을 행하고 믿음의 조건을 갖춘 다음에 믿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는 행위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히브리인들의 신앙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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