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4:13)

생명있는 신앙 2014. 6. 16. 06:03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믿음의 의는 앞에서 충분히 설명을 드린대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이 전인에 반영하여 반응하게 하는 지식의 행동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뭣이 이렇게 어려운지 좀 쉬운 말로 설명을 해줬으면 하고 반문하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지식으로 행동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아니 알지 못하면 행동할 수도 없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지성이 있는데 이 지성은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행동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행위는 곧 영혼의 지성에 지식을 전인의 반영하여 행동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의를 대입해 보겠습니다.

믿음을 말할 때 항상 어려운 정의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쉬운 설명은 이렇습니다.

믿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믿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영혼에 없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하여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로서 믿음에 대하여 강요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드러내는 믿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두 번째로, 또 다른 의미에서 믿지 못한다고 말 할 때에는 이는 사람이 믿음에 대해서 요구나 강요를 받았지만 이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경우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적용해보면 문제가 간단합니다.

첫 번째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 어떤 지식도 그에게 게시되거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듣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이방의 여러 선교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아직까지 한번도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믿지 않은 사람은 선교사나 혹은 가까운 지인들, 그리고 종교적인 매체들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지식이라도 듣고 접하였으나 이를 거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지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영혼 안에 지식이 반영되어질 수 없으나 두 번째의 경우는 선교사나 많은 종교적인 매체들을 통해서 복음이나 혹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전파를 통해 사람의 영혼에 들어와 반영되었으나 이 지식을 본성의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거부함으로 영혼이 이 지식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반응하여 사람이 믿지 않은 행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복음에 관한 지식을 듣거나, 보거나, 경험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 인식할 수 있도록 지식이 유입된 상태에서 영혼의 지성이 전인에 반영하는 지식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성에 유입된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과 긍정적으로 융합된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행위로 드러내는 것과 반대로 전혀 융합되지 못하고 거부되는 지식을 반영하여 행위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사람 가인과 아벨에게서 아주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영혼에 하나님의 지식이 유입되었으나 그는 본성의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여 불순종하는 행위를 드러낸 반면, 아벨은 그 반대의 경우로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를 드러낸 경우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 지식을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복음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받아들여지고 자리하고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이 유입되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자기 본성의 지식으로 받아들여 반응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영혼의 지성에 유입되어 받아들여지고 그 복음이 반응하는 지식을 가질 때 반응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보든 지식이 왜곡되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진리가 영혼의 지성에 유입되어도 그 진리 마져도 왜곡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진리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혼의 지성에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이 진리를 조명함으로 진리대로 받아들일 때 믿음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행위가 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람의 영혼에는 본성의 타락된 지식과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만남을 시작한 하나님과 그에게 말해주시는 말씀의 지식이 영혼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어느 정도의 지식이 아브람의 영혼의 지성에 있었지만 아브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그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타락의 본성이 하나님에 관한 많은 지식을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지로 종교에 관해서도 이방인들의 종교관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파는 장사였다면 아브람은 70여년 동안 아버지 안에서 종교관을 배웠습니다. 그 종교관은 당연히 다신론 사상이었고 이로서 하나님에 관해서도 여러 신들중에 자기를 택하신 신으로 이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과 아브람이라는 유일한 관계서 인식된 지식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해석으로 다신론적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유일한 신관을 가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다신론 관점에서 가장 월등하신 주변의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하나님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인식을 가지게 하는 지식들은 영혼의 지성에 있습니다.

지성이 어떤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행동하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성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은 아브람의 영혼 지성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인에 반응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행동하게 한 그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반응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의 지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진리의 지식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은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생성하여 가진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과 구별됩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의 본질에 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지식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생성하여가진 사람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은 코드가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진리이기 때문에 바르가 참입니다. 반면 사람의 지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입니다.

참과 거짓,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모든 사람이 거짓의 아비의 아들들이고 본성이 거짓되어 진리에 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8:44)

그러므로 참과 거짓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받은 아브람은 그 진리의 지식으로 즉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믿음을 드러내기 까지 숱한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자기 안에서 자기영혼의 갈등을 격고 인생의 위기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그날까지 진리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비춰진 바에 의하면 아브람에게는 이날이 왔습니다.

소돔 땅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장군으로 귀환하였으나 자기의 정체성을 보게 된 그날 밤 그의 영혼은 자신의 비참과 연약함을 진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각을 아브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지식이 아브람 자기를 조명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지식은 결코 자기 자신을 진리대로 조명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게하고 왜곡 되게 하여 자신을 스스로 속여 하나님의 진리에 서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리의 지식은 자기의 정체를 분명하게 보여 자기를 진리로 이끄는 일을 할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정체를 진리대로 볼 수 있었고 이 진리의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드러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의롭다고 보셨기 때문에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는 믿음에 대한 상속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복음이 자리하여 진리의 말씀을 조명하여 우리가 진리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 그리고 의,

 

우리가 이것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면 우리의 영혼은 견고하여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반복적으로 생각하여 우리의 영혼에 믿음의 견고한 터전이 자리를 잡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도는 그 방법을 복음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1:17)

믿음은 우리의 영혼 안에 유입된 복음이 영혼의 지성에서 반응하여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그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반응하는 행위를 하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만을 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는 이것을 상속자는 곧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사람들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