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죄도 없느니라(롬4:15)

생명있는 신앙 2014. 8. 1. 06:06
 

가인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가인이 하나님을 만나 대면하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면 가인이 하나님의 질문에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과의 대화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가인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뭔가 성경이 말하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행위를 숨길수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을 벗어나 별도로 자기의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고 인식합니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에 있는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그를 조명한다면 그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도 쉬운 답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지식이 지성을 조명하여 모든 객관적 사실이나 객체 그리고 지식을 진리대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영혼에 반영된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하면 우리의 지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에 죄에 대하여 죽으시려 보내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는 이를 조명해주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혜사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에 관하여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에 있던 지식이라 한다면 사람이 자기의 행위를 할 때 마다 율법이 그 행위의 선 여부를 조명해주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것이 죄라고 조명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에서는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혐오스러워 함으로 죄의 행위를 자제하고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져 버렸으니 그들의 지성에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선 여부를 판단하는 조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지성에서는 율법이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이때 율법은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여 선 여부를 결정하는데 지성에서는 자기들의 행위가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점을 일컬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7:7)”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본래 사람에게 주어진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판단을 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사람이 행하려고 하는 지식에 대해서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행위의 적절성 여부를 조명해줌으로 행위에 대해서 지각하고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됨으로 사람에게서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성문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다시 보냄을 받게 되었고 사람은 그 율법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이 그들의 지성에서 작용하여 모든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말씀을 읽고 보고 들으며, 심지어 문지방이나 문설주, 이마에 붙이고 다니라고 하셨으며, 그 말씀이 영혼에서 작용되어지도록 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두 사람 이상만 모여도 서로 상관관계에 속하여 약속하고, 계약하며,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인지 규범을 가집니다.

이것들이 사람이 생존하는 사회에서 행동의 한계를 규정하여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를 이루고 행복한 삶의 환경을 이루며 살도록 하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행동의 규범을 영혼에서 상실했고 이로 인하여 행동에 제약이 없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사고를 할 때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람의 지성에서 어떤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든지 그 지식으로 나는 지음을 받은 존재다라는 의미가 함의 되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으로도, 과학에서도, 모든 지식의 기저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이라는 지식을 지각할 수 있다면

이것이 없으면 사람의 생존환경에서 안전하게 질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삶의 환경에서 사회적인 관계를 위하여 필요한 규범 들이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준비하신 것이 율법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 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율법은 지음을 받을 때부터 본래 주어진 것으로 영혼의 지성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지 조명해줌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은 이를 상실하였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사람은 마땅히 행할 어떤 규범을 상실하고 무한자유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객관적 관계에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의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행위든지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객관적인 재재가 필요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소처럼 코가 뚤려야 하고 말처럼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사람은 재어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적 관계에 속한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을 주셨고 이 율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 율법의 구체적인 기능은 무엇일까요?

율법은 어떤 행위는 하고 어떤 행위는 하지 말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행위를 하거나 하라고 하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행한다면 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하지 않으므로 사람은 자기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고, 그 명령에 거부함으로 인하여 그 명령을 준 사람에 대하여 소원해지는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명령이 없으면 소원해지는 관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은 율법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관계 해 주시지 않았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동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관심 밖의 사람으로 취급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대우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합니다.

사도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알지 못하느니라

죄를 알지 못하면 정죄하는 존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 없음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주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외면으로 봐야 합니다.

율법 없는 자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라고,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 말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칭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성경의 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타락한 사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셨지 이방인들에게 다가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 이방인들에게 소망이 없고 미래가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죄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로마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한 가지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어디에도 나가 개입될 말한 근거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우리 타락의 결과적인 열매들에게 주는 희망이 무엇인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한 사람들이 사회적 구성을 위하여 규정한 각종 법률과 율법과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서 죄를 범하지 않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규정한 모든 법률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타락이라는 기본적인 토대 위에서 사회적 구성을 위하여 규정한 법률인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신학적으로 원죄와 자범 죄를 구별하여 죄를 규정해 왔습니다.

원죄는 아담이 타락의 행위를 말하고 자범 죄는 죄인으로 살면서 지은 사회적인 규범을 어긴 죄를 의미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죄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율법의 규정을 범하는 것도 원죄가 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특별한 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명령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존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관계에서 온 것입니다. 일종의 교제형식에서 상호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관계로부터 주어진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법이 항상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 같았으면 하나님의 형상에 부어주셨고, 그 빛이 항상 조명하도록 하여 누구에게나 사람으로 그 명령을 이행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율법과 같은 의미의 규정이 아닌 존재인식에 관한 것이므로 한번 주어졌고, 최초 사람은 이 명령을 어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여 태어나게한 타락의 열매들인 우리들과의 무한한 이질적인 존재 관계를 보게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너무도 구별되게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도록 계획에 속한 사람인 반면 우리 이방인은 하나님의 계획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나안 여섯부족의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으나 가나안의 여섯부족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라 하셨을 때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멸망을 받아야 하는지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전혀 관계없는 온갖 행위를 배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하나님을 모르는 삶의 행위입니다. 그들이 온갖 규범과 법률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중심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의미와 전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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