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환란을 당하셨으나 죽기까지 참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인내의 의미를 생각할 때 언제나 결과적으로 어떤 고난과 역경을 참고 이겨내는 것, 어두움을 해쳐 나아가 마침내 밝은 빛을 맞이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즉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는 좋은 결과를 얻은 삶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내는 반드시 성공만을 지향하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닙니다. 인내는 목적한 바를 이루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런 언어라기 보다는 주어진 어떤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함에 있어서 성패와는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여 견디어 나가며 목적을 이루기까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드러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가 성공이 아니고 기대할 만큼 커다란 만족을 주는 것도 아닌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아니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결과일지라도 그 일을 성공하기 위해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묵묵히 실천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환란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참으시는 인내는 실패와 성공을 따지기 전에 당신이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시는지 분명히 아셨고 그것에 승복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복하신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죄에 대하여 자기 희생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지로 주님은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신을 죄인과 같이 동등하게 여기시고 죄인으로 취급받으시면서 죄에게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여자에게서 낳았기 때문에 자신을 모든 죄인들과 아니 최초 인류의 사람 아담과 동등한 사람이라는 공동 책임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에게 드리시기를 기뻐하시고 보통 사람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라도 스스로 자진하셔서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의 내용에 관하여 이렇게 적나라하게 설명되어진 복음을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복음에 명확하게 증거된 예수 죽음의 비밀이 낡은 천 조각을 십자로 묶어 먼지만 쌓여가는 다른 책들과 같이 하나님 진리의 서고에 깊숙이 박혀 있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깊이 사고하면 닿을 수 있는 이 진리를 우리는 굳이 왜면하고 집어들어 책장을 열고 읽으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진리가 가르쳐 주는 복음은 우리가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디베랴 광야의 산상수훈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산상수훈을 나무판에 새기고 글자에 금색을 입히고 벽에 걸어두고 소중히 여기는 실천하지 않은 장식품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 순종하는 주의 제자라고 말하지만 실지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은 장식품으로 전락시키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혹은 자기가 가장 실천하기 좋은 성경의 말씀만을 자기마음대로 취하지만 실지로 주님의 가르침과는 매우 멀리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감람산에서의 기도로부터 대제사장의 뜰에서의 조롱과 희롱 고난,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까지, 예수께서 그 엄청난 고난과 아픔을 당하시고 계실 때 그 고난이 당신에게 함당하다고 생각하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 의미들을 선포하기 까지 이생을 마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비밀의 고난을 매일 숙고하고 반복적으로 삶에서 경험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주께서 가르치신 그 산상 수훈의 삶을 실천해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까지 나의 영혼의 지성이 지속적으로 전인에 진리의 지식을 반영하여 깨어있게 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을 행하였는지 숙고해야하는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로 인한 정욕에 이끌려 하나님의 선보다는 자기의 욕구가 강요하는 경향에 치우쳐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사람으로 하여금 작정된 순리대로 자녀를 낳도록 합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정욕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생식 문제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지각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고 욕구를 채우게 됩니다. 실지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 이런 정욕이 자기의 육체에서 밀려와 자기를 엄습했을 때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정욕을 체우는데 치우쳐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지 않은 가인을 잉태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심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가인의 삶은 아담과 하와의 행위가 드러내는 정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그 원뿌리가 육체로서는 아담과 하와 일지라도 실지로는 하나님의 선으로부터 이탈되어 출생한 정욕의 아들이므로 작정과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출생을 허락하심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정확하게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원수가 되어 이 세상을 온통 더럽히는 잔인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질서가 없고 이 세상과 조화되지 않은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처음 가인을 낳았을 때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없는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게서 작용하지 못함으로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서 조명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은 자기들 생각대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서 잉태하게 하였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의 죄가 자기를 죽이는 저들을 낳았다는 책임감을 인지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조명해주는 하나님의 지식이 없으므로 자기의 모든 행위를 진리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으로밖에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 사람들(아담의 후손들)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이미 이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보시고 알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나타나면 세상으로부터 당연히 왜면을 당하고 미움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고 세상의 사람들은 거짓으로서 구별됩니다.
세상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진리를 가진 두 사람 이상이 세상을 만들면 진리의 세상이 되고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태어난 불행한 존재인 거짓된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면 이세상은 거짓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진리를 망실하고 거짓뿐인 사람이 되었고 세상을 거짓되게 했습니다.
진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원형대로 보존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거짓된 이 세상은 고통과 고난이 떠나지 않고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공포가 먹구름 같이 두껍께 내리 드리워있어 잠시고 마음을 놓고 숨을 쉬며 살 수 없는 참혹한 형장과 같습니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구원이 요구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채찍과 몽둥이와 발길질로 주님을 짓밟고 잔인하게 고통을 주지만 주님은 바로 그들을 존재하게 한 그 책임 의식에 자신에게 퍼붓는 분노를 고스란히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비밀 속에서 주님의 영혼과 고통을 가하는 정욕의 아들들의 영혼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채찍을 휘두르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인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왜 우리를 낳아 지옥에 가게 하느냐” 라고 소리를 지르며 분을 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존재의 비참함과 미래에 처하게 될 운명적인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정욕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비참한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지 않았고, 영원한 고통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이 논리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실지로 이방인은 죄의 정욕이 아니면 이 땅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혼 안에서 지성을 조명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죄로 말미암은 정욕을 일으켜 우리를 낳았으므로 우리가 당신에게 고통을 가하며 미워하고 죽이기 까지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아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죄의 정욕을 일으킨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치 자기가 그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기까지 순순히 당하는 것입니다. 그 죄는 당신에게 전혀 없었으나 예전에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었던 것을 자신에게 있다는 인식에 의해 죄에게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품은 분을 땅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바위를 가르고 품어내는 폭발하는 화산과 같이 예수님을 향하여 퍼 붓습니다. 모든 것을 녹여내고 솟구치는 뜨거운 용암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온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집어삼키듯이 태워버리는 무자비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죄의 본질인 우리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에 속한 죄 자체이면서 죄를 미워한 까닭이며, 우리의 불확실한 운명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강렬한 욕구에서 솟아난 미움과 분노,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원망에서 적대적인 원수 관계로 진전되어 버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각인 시켜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다르다는 것과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를 대항할 수 있으며 우리를 간단하게 불로 소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권리를 조금도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이유와 원인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본성과 그분의 인내하심을 통해 우리는 충격적인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터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였고 실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바람직 한 존재입니다. 실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면 결코 정욕을 일을키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정욕을 일으켜 탄생한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탄생은 하나님께 아무런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에 손해나 흠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탄생은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기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닮은 사람들을 낳은 것으로 인한 일시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가인이 아벨을 쳐 죽임으로 슬픔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의 미래에 영원하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비참과 영원한 고통의 멸망에 처해져야 하는 필연적인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 무지하며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 더 슬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들을 깊은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전에 사람을 지으시려고 작정하실 때 첫 사람인 아담으로 인하여 이 땅에 태어나기로 작정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 안에 작정된 사람들에게 보내어진 것이지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죄의 열매들인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명확하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요,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지음을 받은 아들들이 범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이방인들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이 하나님의 사역을 이방에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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