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무신론 기자가 크리스쳔 과학자에게 따지다. 라는 책을 읽고 "과신대" 페이스 북에 가입하게 되어 저자를 만났다. 대화중 무크따에 관하여 소개를 들으면서 진화론과 과학을 지도받고 매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에서 무크따에 등장하는 믿음과, 일반 계시, 그리고 죄의 대표성이 관하여 수정하면 매우 좋겠다고 의견을 드렸으나 이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무득이 무크따가 가진 위의 3가지의 신학적인 다른 입장에 관하여 블로그에 올려본다.
첫째는 믿음에 관한 의미에 있어서 개정된다면 매우 좋은 내용이 될 것입니다.
믿음 :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을 권위에 근거하여 진리를 받아들이는 행위 즉 은혜의 충동을 받은 의지의 활동.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가 이것을 수용하고 있고 이것은 스콜라적인 개념으로 기독교 전통에 뿌리내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창세기 15장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곧 칭의를 근거하며 설명하면 아주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그 믿음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면 그것이 과연 믿음인가? 할 정도로 의아스러운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신학자들은 "창세기15 장은 칭의를 주장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믿음을 설명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으니라(롬10:17),"
이는 스콜라 철학의 의미에서 이성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맥그래서 알리스터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서 "감정의 느낌과 권위에 의한 은혜로 말미암은 이성의 동의에 의한 반응"이라는 의미로 말하였지만 이는 진정한 믿음의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이라 할 때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이 말씀을 들음이란? 그리스도의 지식이 사람의 지성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억지 주장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신학이 입니다.
결국 믿음은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그리스도의 지식이 들어오고 그 지식에 의해 행위로 드러내는 반응을 의미합니다.다른 말로 이미 가진 자연상태의 지식으로 믿음을 표하는 지적인 동의로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사람의 지성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반응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크따의 한교수가 가진 의미로서의 자연인의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사람의 지성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반응하게하는 행위의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일반 계시에 관하여 개념을 확인해야 할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화론과 관계 있으므로 매우 신중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계시란? 드러내 보여 주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객체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드러내 주심으로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별도의 방법으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유는, 사람이 본래의 상태에서 이탈하여 타락함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상실하였거나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진화론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적용하기 매우 곤란한 부분이 있지만 실지로 "계시"의 의미가 이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생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지중에 하나님을 보거나 대화 할 지라도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합니다. 설령 그가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인식은 참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신에 대한 개념일 뿐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만능 지성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만유와 모든 객체들을 스스로 이해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곧 사람은 절대적인 인식의 주체가 아닙니다.(진화론의 입장에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만유들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만유에 관한 지식이 사람의 지성에 주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피조물이기 때문에 조건적 인식 주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큰 키를 가졌으며, 일반보다 몇배 큰 두뇌를 가졌다 할지라도 자기안에 만유에 대한 모든 지식이 들어 있지않다면 결코 만유를 인식하거나 이해하고 반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의 지성이 지식을 생성함에 있어서 반드시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까지 한번도 경험하거나 접촉하여 보지 못한 어떤 사물을 처음 보았을때 그로 그 사물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거나 그 용도를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사물 자체가 자신에 대한 메뉴얼을 제공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든 객체에 대해서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지능를 가지고 태어 났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야기는 다르고 계시를 적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타당하지 않습니다.
"계시"라고 할때 수납자가 계시를 수납하였을 때를 의미로, 계시자가 피 존재에게 인식이 가능하도록 드러내주는 것이고, 피 계시자에게는 드러낸 계시를 인식하도록 조건을 부어주시는 것인데 이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부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인식능력에 대해서는 자기의 생활 환경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객체와 객관적 사실들에 관한 모든 정보들을 접촉하고 본 그대로 모두 인식하고 이해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접촉하는 환경의 대부분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자기의 지성에 남기지도 않은 채, 기억조차 못합니다.
실지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편재하시고 만유안에 만유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시며, 사람이 눈을 열면 자기 앞에 있는 세상에 어떻게 보이든지 가장 먼저 인식하며,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신을 어떤 방법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만유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자기안에 이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눈을 열고 세상을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유는 지식을 드러내고 있으나 자기안에 지식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계시하심으로 보여주실때 조차도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그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함으로 본질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특별한 조건에 의해 피조물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으로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심에 있어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인데, 어떤 매개를 사용하시지 않고 자신을 직접 열어보이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특별계시와 같이 직접 보이시지 않아도 존재하는 만유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 계시 혹은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과 방법을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만유 그 자체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사람이 계시를 말할때는 계시가 지식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별계시에 있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열어 보이셨을 때, 그 감각된 하나님은 지식에 의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지식의 조건이 없이도 사람의 지성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그 격차를 발견할 수 없고, 사람의 지성이 마치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이 두 관계는 서로 다른 구별이 있고 지식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을 직접 받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직접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든지 스스로 아무 조건없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스스로 생성하여 가질 수 없습니다.
계시를 지식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 코드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충분히 감각되도록 만나셨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함으로 왜곡되게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의 지식으로 결코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지식조차도 지식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곧 하나님의 지식코드와 사람의 지식 코드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을 인식하고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을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합니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지식을 보내셔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드러내 주셔서 사람으로 알도록 하셨고,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졌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계시는 만유에 편만하게 드러나 있고 사람이 충분히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이후의 자기지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일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계시 곧 자연계시는 타락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연인은 누구든지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류입니다. 타락은 모든 지식의 왜곡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나타난 심각한 문제는 곧 지식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일반 계시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인식하는 것이지 아무나 자연적으로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무크따에 등장하는 한교수는 이 점에 대해서 마치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있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죄의 대표성에 관하여.
무크따 한교수의 주장은 매우 도전적이고 신앙인들에게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주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나 세번째로 수정하였으면 하는 신학적인 아니 성경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죄의 해결에 관한 문제로 대표성입니다.
대표적인 보수교단에서의 죄의 대표성에 관한 문제는 신학적 주장으로 폭넓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구원의 조건을 인간의 책임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교단에서는 구원의 조건을 비록 인간의 책임에 둘지라도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면은 그 책임도 무의미 하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죄의 대표성을 볼때 결과적 구원의 조건을 인간의 책임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이 무의미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표성이라 할 때" 한 클래스의 학생 집단 모두가 한꺼번에 동시에 죄를 범하여 모두 죄에 대한 심각한 심판을 받게 되었고,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클래스 대표가 죄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였고 이로 인하여 클래스 전체에게 부담되어진 죄가 해소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클래스 대표가 죄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담당하였다면, 클래스 소속원 개개인에게 대표가 책임을 지고 죄의 문제가 해제 되었다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요구인것입니다.
죄의 대표성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클래스 소속원들의 믿음의 여부와 상관이 없이 죄로부터 자유가 주어진 진정한 대표성이 이어야 합니다.
죄의 대표성 입장으로 볼때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은 사실을 개개인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대표성 자체를 불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속원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조건지워지는 것은 명확한 대표 일 수 없고, 믿음을 요구하지 않고 죄에 대한 처벌을 개인들에게 묻지 않는 것을 대표성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는 이런 대표성으로 말하여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표성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사람이 용서 받지 않으면 안되는 죄를 가진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범한 것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아담안에서 죄를 함께 범한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죄의 대표성을 주장합니다. 같은 논리로 아담이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대표가 되셔서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시므로 죄는 사하여 졌다고 선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하여 졌다, 그러나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후에 모든 사람은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으나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멸망의 지옥으로 보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러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으로 길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가 사하여 졌습니까?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하지 않아도 죄는 사하여 졌고, 죄는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불교나 이슬람이나 천주교나 사머니즘을 가진 사람들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 졌느냐? 이것이 죄를 사하는 방법이고 그 말을 믿음으로 죄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얻는 것입니까?
그러면 전도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죄는 사하여 졌습니다" 와 "주예수를 믿으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하여 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중 어느것이 맞습니까?
전도는 죄에 속하여 있는 사람을 부르는 "소명"입니다.
그들이 부름을 받았고 그 부름에 반응할 지라도 여전히 죄는 그들에게 있습니다.
집단으로 죄를 범한 한 클래스 개개인들에게 죄 사함이 적용되는 것은, 그들의 대표가 자기들의 죄에대해서 벌을 받았으므로 자기의 죄도 사함을 받았습니다. 대표가 벌을 받은 그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자기의 마음으로 확신할 때는 자기안에서 대표성의 지식이 인지 작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죽으심은 '제한된 속죄'를 의미하고, 그 적용은 그 지식이 지성에 반영되어 심겨질때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예수의 대속행위가 자기지성에서 인지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으로 반응하여 믿음을 나타내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적용은 성령의 사역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지식으로 인식하여 반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그 구원은 수에 있고, 대속의 적용은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교수나 일반적 개신교회에서 말하는 대표는 결코 아니고, 매우 실질적인 적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성경적으로 바르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내가 죽임으로 죄가 죽고 더이상 죄는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나타내 보일 수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죽인 살인자입니다.
이로 인하여 본래 하나님의 원수로 태어난 근본 보다 더 큰 원수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더이상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는 대적자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적 요건의 과제였던 것이고, 성경은 시간을 초월하여 골고다의 십자가의 저주를 지금 개개인에게 실제가 되게 하는 것 입니다.
대표는 이미 이루어진 한 사건이 개개인에게 적용되므로 그 사건에 대한 결과가 적용되어지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개개인에게 일어난 사실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시간의 적용을 받지 않은 항상 현재입니다. "그때", "그 당시" 라는 시간적 용어의 적용이 안됩니다
두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에 처형하는 당사자는 항상 "나"라는 것입니다.
저는 무크따의 한교수님이 위의 3가지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들을 바르게 적용하여 수정하여 언급하였다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좋은 교훈이 되는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진호와 창조에 관해서는 말은 할 수 있으나 위의 3가지의 의미를 잘 파악하면 진화론과 신앙에 관한 의미들이 잘 조화되지 않은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일반계시를 오해함으로 억지로 과학과 신학을 혼합하여 적용하려는 점은 일반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잘못된 이해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의견을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진화론은 사람이 자연을 관찰하여 정의한 결과로서의 지식입니다.
결과로서의 지식이란? 정의한 자가 자기의 지식안에 내재한 지식들의 유기적인 작용에 의해 도출해낸 결정된 지식입니다. 만약 정의한자의 지성에 있는 지식은 성장과정을 통해 경험되어진 학문의 배경이나 혹은 교육의 과정을 통해 배운 지식들이라면 그 지식은 항상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일 뿐입니다. 그 지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의 현재성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성경을 왜곡하거나, 진실됨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역사적 가치의 결함이나 부족으로 터부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안에 나타난 초월적 시간의 사실에 적용되는 실재를 결코 인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험이나 교육과정을 통해 지성에 들어온 지식의 근원이 어디에서 부터 온 것인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지식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얻어진 것이라면 반드시 진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이 아니라 자기의 경험이나 혹은 자기안에 있는 이지식과 저지식이 서로 유기적 작용에 의한 결과적으로 얻어진 지식이기 때문에 항상 무지와 결함이 함의 되어 있으며 사실과 다른 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 부족한 지식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진화론은 성령의 조명으로 얻어진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식에는 항상 결함이 있고 무지가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항상 진보되어져 가야합니다. 그래서 결함되는 부분과 무지가 가려져 완전한 지식에 까지 나아가고 왜곡되거나 잘못된 지식들은 떨쳐내 수술되어져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한 지식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고 결함이 없으며 완전합니다. 이 지식은 시간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지금 실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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