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는가?
요한복음 18:36~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데(37)
1, 신의를 벗어버린 인간의 모습
인간의 사상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옷을 의미합니다.
이 사상사를 통해 인간의 변모하는 과정을 보면서 마침내 인간이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후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주인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이 시대는 개성, 다양성, 자율성, 대중성을 중시하는 탈 이념이라는 이 시대의 정치 문화를 낳았고, 종교가 사회전반을 지배하던 중세 암흑시기를 거쳐,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시대의 합리주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상체계를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은 불가능합니다.
“소인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임금에게 보고하고,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군사들에게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훈령으로 독려한후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쳐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과 같이 강한 리더자의 힘을 발휘한 성공의 역사는 쉽지 않은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시대에 등장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리더자들은 개별적 문화에 대한 창조적인 생각을 가진 것의 평가이거나, 언론이라는 메스 커뮤니케이션이 생산해낸 리더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창조적 경제시대라고 부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 사람들의 지적체계와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에 영향을 끼쳐왔으며, 새로운 행동과 예전에 없는 더 나은 문화에 적응하는 지적 생산물을 창조해 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지식이 사람의 생활, 환경과 문화, 과학, 지식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런 변화가 사람의 본질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고, 삶의 환경만 바뀌어 방식이 달라진 것뿐이고, 지식의 내용이 보다 진보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용어가 세분화되고 과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상당히 명확해졌을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지성에 있는 사상들이 역사적 시간에 따라 변화되는 것을 고찰하는 학문을 사상사라고 하고, 사상사 마다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대표적 리더가 있었는데, 중세는 종교가, 중세이후 계몽시대는 이성이, 현대 합리주의 모더니즘은 이성이 과학의 힘을 빌어 권위를 지켜보려고 했으며, 이들의 지나친 맹신으로 제국주의와, 환경파괴, 1~2차 세계 대전을 낳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감성과 대중성을 중시하는 시대가 되었고, 우리는 이 시대 시상사의 출구를 찾고 있는 정점에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글로벌 환경에 적합한 4차 산업1의 세 시대가 이미 발을 딛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이미 다른 사상의 바다에 발바닥부터 침수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성과 권위를 앞세워 세계를 지배하던 이성이 감성과 대중성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이제는 그것마저 발가벗겨진 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벗을 것이 없는 전라의 상태가 드러나기 직전이며, 그동안 사람 안에서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진보해 온 사탄이 서서히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고, 사람 밖으로 나와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눈앞에 이르렀습니다.
4차 산업은 2030년을 기점으로 보편화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2 Cloud computing, Big data, mobil, 시대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람의 내면을 벗어난 지식이 인간을 지배하는 표면화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의 역할이 무엇일지 매우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인간의 사상을 생산하고 변화하여 흐르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이었고, 이 지식의 무한한 진보와 발전을 통해서 마침내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반복되어 갈수록 사람에게서 인간의 타락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초 지음을 받은 인간의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는 수 천년의 역사동안 인간은 조금씩 자기의 정체를 밝혀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하나님께서 성경에 밝혀 주신바와 같은 신의를 벗어버린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혀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읽지 못하고,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읽은 나머지, 진리의 실체이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했었습니다.
수 천년의 사상사속에 드리워진 인간에게 입혀진 가죽옷의 의미는 세월이 갈수록 변천을 거듭하면서 사상이라는 새로운 옷들을 갈아입었지만 그런 의미를 모르고 정욕이라는 수치를 덮는 도구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인간 사상사의 옷이란 인간이 만들어내는 옷을 의미합니다.
처음에 사람은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렸습니다.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입히셨고, 이에 사람의 사상이 진보하여 섬유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나중에는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꾸며주는 새로운 미의 본채로 변한 것입니다.
이 옷들이 문화와 사상을 대표하게 되었고, 현대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은 오늘 우리의 사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옷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상이고, 이 사상은 사람의 영혼에 있는 지식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었습니다.
2, 진리와 거짓
이제 마침내 이 지식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고, 사람의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상사를 살펴보면 최근시대는 사람 안에 있던 지식이 4차 산업을 이용하여 사람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생성된 지식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람 안에서 진보하여 스스로 독립하는 그 최종목표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든지, 아니면 최초 사람을 타락시킨 거짓의 본체가 드러난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아무튼 사상사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있던 지식은 사람을 이용하여 이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사람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4
이것으로 사람에게서 생성된 진리가 아닌 거짓된 지식과 하나님으로부터 생성된 진리의 지식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과 심판자의 자리에 앉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고소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고소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분노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으니, 이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도 고소하는 대제사장들의 의견만으로 사형에 처하고 더군다나 그 모진 고통의 십자가형틀에 처형한다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러싼 민중들의 광기는 자기의 권위를 흔들만한 대 혼란이 야기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실지로 예수님을 풀어주려는 빌라도의 의도였습니다.
로마는 피지배국의 백성들에게 사람의 인명을 살해하는 사형판결의 권리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피지배국의 백성들 간에 가벼운 범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함으로 마치 로마의 지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 나라에 속한 백성인 것처럼 느끼며 자유롭게 살 수 있으나, 다만 세금과 국가에 대한 징집의 의무만은 로마의 권한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질문한 의도는 예수께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할 경우 예수를 유대인에게 판단하게 넘겨주고 자신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를 피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네가 말하였도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느니라.”
빌라도는 사형판결을 할 권리가 없는 유대의 대 제사장에게 예수를 돌려주어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빌라도를 향하여 자신이 온 목적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진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재판하는 사람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보이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지식이 됩니다.
이 진리에 적용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진리로 판단합니다.
진리는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지식으로 판단합니다.
“진리”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에 빌라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게 됩니다.
지금 손가락 표시 하나만으로 생명이 오고가는 처절한 입장에 처한 사람의 입에서 진리 어쩌고 하는 것은 우스운 것이고, 빌라도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앞에서 진리를 증거 하셔야 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거짓의 대표자가 진리를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이시고 자신이 얼마나 큰 더러운 거짓에 빠져 있는지를 거울로 볼 수 있는 것 같이 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3, 사람은 지식을 어떻게 얻는가?
지난 주 우리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정체성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지식으로 파악하는데 그 지식은 어떻게 얻는가?
빌라도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본체이시고 진리의 거울이신 예수를 보고 진리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는 방법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만 얻게 됩니다. 사람이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람은 지식을 얻게 되고 육체가 죽어 사망에 이르면 다시는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에 간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이 육체로 살아 있을 동안에 얻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천국을 누립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 영혼은 천국에 있지 못합니다.
사람이 천국에 이르렀을 때 자기 자신을 구별할 수 있는 명확한 요소는 자기 영혼으로 생성한 자기지식입니다.
물론 천국에 이르면 육체를 입을 것은 당연하지만5 새롭게 입은 썩지 않은 육체가 자기를 표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육체도 영혼에 있는 지식이 우리를 증거 하는 것이지 고깃덩이인 이 육체가 우리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지식이 자기를 증거하고,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지식은 자기가 생성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생성한 지식은 그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그 사람을 증거 할 것입니다.
왜 천국에 가는 영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되나요?
먼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자는 어떤 상태에서든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부정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생성되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긍정하는 지식이 없고, 이미 있는 부정하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에도 영혼이 천국에 이르렀을 때, 이 세상에서 이해하는 지식대로 하나님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를 잘못 이해하거나, 혹은 신앙의 형태가 다르거나, 하는 것은 용서가 될 수 있지만,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왜곡되게 이해하는 지식을 가진 영혼이 하나님이 나라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으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7
이 두 계명은 하나님에 관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생명적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계명에 있어서 중요하리만큼 두 계명을 할애하셔서 명하셨을까요?
이것은 사람을 위하여 주신 계명입니다.8
사람이 우상을 새겨 만든 다음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게 되면, 그 우상이 하나님이라는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게 됩니다.
이 지식이 구체적으로 굳어지면 그 영혼이 천국에 이르렀다고 가정할 때,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화상을 그린 사람이 중세로부터 지금까지 여기저기에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돈독해 보이고 뛰어난다 할지라고 이미 우상을 만든 우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 화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잘 못 이해하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자 다가와서 화상에 나타난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이면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게 되고, 천국에 이르렀다고 가정할 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혼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육체를 벗어나 신령한 새로운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이미 얻은 지식을 수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만 예수를 인정하려고 할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천국에서 있을 수 없는 갈등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갈등으로 인하여 그 영혼은 천국에 머물 수 없게 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났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앞에 고소당한 죄인의 신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영혼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의 대제사장들에게 고소 받은 죄인이라는 지식이 새겨져 버렸을 것입니다.
만약 가정한다면, 빌라도가 천국에 이르렀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보면 고소 받은 죄인이라고 멸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곳에 결코 머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지 않았던 불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런 존재는 천국에서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지식을 넣어줄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야만 하는 그 명확한 이유로서, 자신을 사람에게 보여주셔서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도록 새겨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4, 사람의 죄값을 대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와야 하는 조건은 충분히 적용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는 것은 동정녀 탄생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또 하나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이 세상에 죄가 퍼지고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대가를 치르고 죽어야 죄가 끊어지고 더 이상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들여온 장본이고, 직접 죄를 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죄를 남기고 죽는 결과일 뿐입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자기의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어떤 능력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활을 얻지 못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니, 아담이 지은 죄를 끊을 자도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 이어야하고, 죄에 의하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죄에 의하여 죽고 다시 살지 못하면 그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 수 있어야 하는데, 다시 살려면 죄가 없어야 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원상대로 유지된 상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서는 이런 사람이 결코 태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는 사람에게 대를 이어 유전되므로 모든 사람이 죄에 속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지 못합니다.9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구원하려면 반드시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유전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의 유전은 타락한 죄인의 씨앗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시는 것은 분명하게 정혼한 요셉과 동침하기 이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우리의 과학과 실질적인 사람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태어나야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의 증거로 확증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증거 해주셔야 합니다.
이 증거는 주님의 제자들이 증거하고 복음서에 나타납니다.
1)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증언해 주셨을 것으로 봅니다.
마가복음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요한복음 1:32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물렀더라.”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3:22 “성령이 형체로 그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저를 기뻐하노라”
물론 복음서마다 이 증언이 나타나는데 내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나타납니다.
2) 변화 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가복음 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7:5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지라”
누가복음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증언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의 형상은 곧 사람으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사람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복음을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게 합니다. 이렇게 새겨진 복음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이 지식이 자기에게서 생성하였으니 자기를 증명하는 자기 정체성을 확증하는 본질이 되도록 드러내 주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같은 사람을 또 다시 만들면 되지 않느냐?
만들되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새롭게 지으시면 될 것이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의 선의 원칙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다시 만드신다는 것은 처음 사람을 잘못 만드셨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처음 사람으로 인하여 지옥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완전하시지 않다.” 이런 말이 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완전성을 인정하시는 결과가 되어서 하나님의 선이 허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다시 창조된 사람이 처음 사람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는 다는 확실한 보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지으시면 그 사람을 완전한 독립체로 지으셔야 하는데 반드시 선악간의 두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두 번째 지음을 받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로 지으시는 것은 오히려 꼭두각시처럼 죄를 짓지 않은 존재로 지으시는 것인데, 이는 독립성을 해치고 결국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만 하는 매우 수동적 존재가 되므로, 이런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찬양하도록 지었기 때문에 찬양만 한 것으로 기쁨도, 만족함도 없게 됩니다. 이것 또한 역시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난을 받게 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같은 사람을 다시 지으셔서 죄가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체인 아담이 범죄한 죄값을 치를 완전한 하나님 자신을 아들로 보내어서 죄를 해결하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므로 완전한 진리의 사람으로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 hyperconnectivity (초연결) superintelligence(초지능) “넓은 범위(Scope)에 빠른 속도로(velocity) 크게 영향(impact)을 미친다. 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본문으로]
-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정보를 주고받는 것, [본문으로]
- 창세기 3:7. [본문으로]
- AI, Big data, Deep Learning, [본문으로]
- 고린도후서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처서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린도전서 15:12~21, 15:42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본문으로]
- 출애굽기 20:3 [본문으로]
- 충애굽기20:4~5 [본문으로]
- 모든 신학자들은 이 계명들을 하나님을 위한 계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이 계명들을 사람을 위하여 특별하게 자세히 명령하셔서 사람이 지켜 유익이 되게 하신 것이다. [본문으로]
- 로마서 3:28 [본문으로]
-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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