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예배

인생의 노정에서 (마9:9)

생명있는 신앙 2017. 6. 21. 21:03

마태복음 9:9

 

인생 노정에서

현재 자신의 위치를 평가한다면 누구라도 긍정과 부정적인 둘 중에 한가지의 평가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온 삶에 대해서 평가를 하라면 마땅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다르게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죄스런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지라도 저의 삶이 평탄하고 안전한 평지를 걷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고 합니다.
실지로 저의 삶은 가난이 동무였고,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것이 운명처럼 여겨야 하는 슬픔이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온전한 인간관계를 할 수 없을 만큼 여유를 가지지 못한 삶을 살았으며,

한시라도 마음을 놓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웃음을 잃어버린 날들이 지나온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괴로운 문제들이 산적하여 고민하고 아파했던 날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고,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하게도 행복한 척 해야 했던 두 얼굴을 가졌고,
수없는 좌절로 가족들 까지도 함께 고생했었어야 했습니다.

남들이 누리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남들보다 더 좋은 옷을 걸쳐 보지 못했으며,

남들보다 값진 음식으로 저희 가족이 웃으며 둘러 앉아본 적이 없을 만큼 고통스런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기도와 도움을 구하는 수없는 눈물과 아픔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에 감사하며,

나의 죄를 씻으시려고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저는 매우 긍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수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할 일이 있고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며,

혹시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면 그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사망의 음치만 골짜기를 걷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며,
나의 생명은 생명으로 여기지 않고 헌신할 마음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괴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감사로 돌리고,
인내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루어야 할일들이 지체되고,

인생이 굴러가지 않고,

문제에 봉착하고,

삐그덕 거리는 상황에서,

마음의 기쁨이 사라지고,

괴로워하는 삶이 내 삶에 차지하는 비율이 많아지며,

죽고 싶을 정도로 혼돈하고 괴로운 상황에 직면하며,

가슴이 찢어질듯 몰려오는 슬픔 때문에 미어지는 아픔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소원이라면,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해쳐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생명을 공급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꺼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찬란한,
존경스런 영예를 결코 기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런 일보다는
천대를 받는 한이 있더라고 진리와 함께 가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제 삶속에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저를 지키시고 도와주신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지 않은 그런 인생을 추구했습니다.
결과는 빈깡통 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얻은 없는 헛수고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저의 마음에 담겨진 진리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넘치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보내신 사명을 다하여 영화의 단계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제가 아느느 깊이와 넓이와 충만함으로 더욱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그 하나의 신념이 주님을 깊이 알아가려는 사유를 끊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에도 하나님은 저를 결코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가지므로 이제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빈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삶이 된 것 같은 생각을 더욱 가져 모든 환경을 이겨나가는데 힘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산적한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시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여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씨앗을 심거나, 아니면 이미 심겨진 그 씨앗이 더욱 견고하게 자라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씨앗이 자라 우리 영혼의 쉼과 안식처가 되며,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작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리패어하시는 수리공입니다.
영혼을 수술하고,
필요한 것을 채워넣으시며,
위 각자 앞에 계획된 인생을 살도록 우리는 잘 맞춰 주시려고 여기에 모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운동력이 있어 영혼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의 검을 들고 우리 영혼의 추악한 것들을 도려내시려고 합니다.
우리속에 새로운 운동력을 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계획된 인생의 패이지를 실수 없이 적용하셔서,
설계도에 따라 우리를 고치시고 보충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란 신명기 28장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1~14절 까지 결과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15~부터 68절 까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9:9 한절입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입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후 예루살렘에서 주의 교회를 맡아 주의 백성들에게 신앙을 돕고 로마 티토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직전에 마태복음 25장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주님의 예언의 시기를 눈으로 목격하고 모든 교회에 속한 신앙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피하여 나오게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로 부름을 받기 이전까지는 가난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몹시 괴로워하다가, 로마의 세리가 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 던지고 과감하게 인생의 항로를 개척하여 가정의 궁핍을 해결하였습니다.
마태가 세리가 됨으로 인하여 가족들에게 날아온 결과는 비난과 멸시였습니다.

저는 저자 마태가 가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택한 희생은 오히려 가난 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나 가족을 평탄한 삶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하나만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마태는 그 선택으로 인한 너무나도 큰 절망의 아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동족들의 배척이나 민족의 배반자라는 낙인으로 말미암은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즐거움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몰려온 커다란 슬픔이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통적인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메시아 도래 사상입니다.

메시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건설하시고 왕이 될 것입니다.

다윗의 후예이며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이스라엘의 눈물을 닦아 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나라는 천국이 될 것이고,

왕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 위에 우뚝 솟아 만민이 우러러 볼 것입니다.

마태는 어려서 부터 그의 어머니에게 유대인의 교육을 받았고,

유대의 선생들로 부터 지혜서와 모세5경 그리고 각종 선지서들을 읽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유난히 이사야 선지서를 많이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인생의 역경 속에서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나 기적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생각이 메시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게 되어 선지서들을 많이 읽고 탐독한 것 같습니다.

그중에 이사야 선지서를 많이 읽고 메시아가 속히 도래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헤롯의 시기로 베들레햄의 우린이 살해 사건을 너무도 잘 아는 사건이었을 것이며,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이야기들이 동방박사들로 인하여 몇몇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리가 되어 민족의 배반자가 된 것은 곧 도래하시는 메시아로부터 받을 심판이 두려워지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에게 한없는 슬픔이고 절망이엇던 것입니다.

머지않아 메시아 앞에 유대를 배반한 죄인으로 서게될 두려운 날이 다가오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선지서를 더욱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마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만약 이때 메시아가 도래한다면 죄인으로 서 있는 자신을 원상태로 돌이키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때 요단강에서 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가버나움과 요단강의 거리는 갈릴리 해변을 따라 당시 건장한 사람이 걷기에 3시간 거리정도입니다.
아침 일찍 나서면 오정쯤에 도착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거의 하루는 다 보내는 샘입니다.
세례 요한의 소식을 들은 마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서 자주 내려가 봤을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목격했을 것이고 저가 선지서에 나타난 메시아 인가 하는 의문을 하면서 자주 봤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바리세인과 사두개인과 세리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통하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가슴이 뜨끔하고 섬칫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곧이어 요단강에 나타난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신

또 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소개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나타남으로 마태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벼개를 적실만큼 눈물을 흘렸습니다.

몸을 뒤척이며 광야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환영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생수와 같은 메시지는 그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듣고 난 이후부터는 더욱 그의 마음은 죽음을 향하여 조여저가는 아픔을 느낄 만큼 크나큰 슬픔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1~7:29절까지 산상수훈과 제자들에게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마태의 가슴에 큰 대못이 박혀지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하여 외치는 말씀 같았습니다.

 

이제 그는 심령이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애통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하기 보다는 기회주의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민족의 배반자입니다.

아무도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같은 유대 형제들은 도와주기 위해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뿌리치고 침 뱉고 그렇습니다.

자신은 도무지 예수님과 관계없는 민족의 배반자인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고기 잡고 있는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등 마태가 알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마태가 아주 잘 아는 가난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이기며 견디내고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베드로와 함께한 친구들과 같지 않습니다.

평범하지 않습니다.

세리이고 죄인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이고 정통 유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세리를 보면 침을 뱉기까지 할 정도로 갈릴리에서 미움의 대상입니다.

 

가족의 가난을 극복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만 합니다.

 

누군가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담보로 인생을 바꾸는 것은 아주 위험한 짖 이라는 것을 마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에게서는 가난이 메시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가버렸고,

메시아의 발 앞에 앉아서 하늘로부터 흘러나오는 새로운 지식의 말씀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권리,

가슴을 펴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자유,

민족의 공통의 희망과 비젼,

민족의 소망인 로마로부터의 자유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유,

멸시와 배척,

따가운 눈총과 서슴치 않은 돌팔매,

어린이들이라도 마태를 보면 침 뱉고 놀려댑니다.

거지라도 온전한 유대인이라면 침을 뱉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난을 내주고 대신 받은 것들입니다.

민족의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가난은 마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충분한 돈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가족은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은 버림받음뿐입니다.

 

그가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권리를 잃어버렸고,

유대인의 유일한 행복인 하나님을 찾아가는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친구와 가족을 잃어버렸고,

그의 전 가족이 유대 명절이 되면 가족 수대로 양과 비둘기를 사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갔으나 마태만은 혼자 집에 머물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태의 부모는 마태의 몫으로 양을 사서 하나님의 전에 가지고 갔을 것이지만.

마음의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꿈을 잃어 버렸습니다.

유대의 최고의 학생이 되고 싶은 생각 마져 버리고 유대인으로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친구들은 만나도 오래 동안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주위에 눈치를 살피고 친구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속히 해어지는 것이 도리입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꺼려할 것입니다.

세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 친구에게 불편함이고 이야기하는 것도 거절당할 수 있으며 얼굴을 피하고 한자리에 좌석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주고 가져온 것은 가난보다 더 고통스런 것이고 치루는 대가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도중에 자기 앞에 지금 메시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유대의 희망인 메시아가 자기시대에는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말하고, 들리는 소문이 심상치 않아 이사야서를 자주 읽고 투영해 보았습니다.

메시아는 요단강으로부터 와서 유대광야에 나타나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언제 저분이 왕이 되어 자신을 심판할 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가왔습니다.

 

마태는 정말 예수가 메시아일까 하는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으로 자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 봤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나는 다양한 기적들과 가르침은 이사야 선지서에 나타난 메시아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이제 마태는 유대의 왕 앞에 나아가 재판을 받는 두려운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다가가 봐도 너무도 분명하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나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그 모습의 위력에 감히 고개를 들고 설수 없을 만큼 강렬했습니다.

 

당시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록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제 앞에 다가와 서는 것만으로도 내가 여기 왔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동안 나는 이 비범한 사람을 존경과 두려움으로 응시하였습니다. 그는 신들과 영웅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이 아직 그려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도 두렵고 떨려서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의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온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보고 느낀 내용이었습니다.

화가들이 영웅을 그릴 때 인간으로서 최고의 형상으로 묘사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빌라도는 그런 영웅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한 형상을 지닌 분이 예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최대의 소원이 한 가지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강렬할 욕구가 발생합니다.

사춘기 소녀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버린 마음을 가진 것처럼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태는 그런 마음으로 먼발치에서 여러 번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께서 마태가 앉아 있는 세관으로 다가오시는 장면을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군중들과 함께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리는 이미 마태에게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세관을 향하여 걸어 오셨습니다.

 

세리가 된 마태는 이미 대인기피증 같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우울증 같은 증상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뭔가 어두움을 나타내는 듯한 감이 있습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예수님의 책망이 이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던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세리에게 쏟아질 책망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긴장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무도 느끼지 못했지만 마태에게 만은 긴장으로 인해 가슴이 통닥거렸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마태자신도 이 장면을 부드럽지 않게 표현했습니다.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만약 이 장면이 부드러웠다면 본문의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마태 자신이 예수님 앞에 떳떳했다거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거나 정상적인 유대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으로 묘사된다면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제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라는 조금 부드러운 느낌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라 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을 표현하는 어법으로는 약간 현재의 자신보다 더 격하시키는 비하 같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임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저는 지금도 가난함 삶을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마태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가끔 그렇습니다.

그럴 때 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의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지만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난을 팔아 다른 것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흔히 범하기 쉬운 삯군이 되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일입니다.

목회를 직업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사명을 상실한 직무로 보는 분들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목구멍을 해결하기 위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보면 수년전에 먹은 산해 진미라고 토해 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오라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생의 평안과 안일을 위한 환경의 변화한다는 것은 결코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를 하게 됩니다.

제가 설자리와 앉을 자리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태를 세관에 앉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비밀을 누구라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후 오늘 까지 우리에게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이것을 계획하셨고, 이일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때의 사건으로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야기로 전달되어지고 우리의 삶에 교훈이 되도록 전달 되어지게 하셨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외면하는 마태를 보십시오.

주님과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애써 외면하면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마음으로 억누르고 삼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따라오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 요한을 봅니다.

마태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속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의 생각에는 왕이 되셔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형벌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신다는 생각이 유대인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음에 심겨진 그 아픔을 상태를 읽고 그를 어떻게 건지실 것도 아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획까지도 아시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마태를 바라 보셨습니다.

그는 디베랴 광야나 혹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금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사역노트에는 마태를 부르셔야하는 계획이 있었고 지금 성령께서는 마태의 마음을 다 기경해 놓으셨습니다.

 

간절한 소망과 높은 기대감

다른 제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애끓는 마음

미래에 대한 저주의 두려움

간절한 용서와 기대 높은 사랑

이런 마음이 성령께서 마태의 마음을 이미 기경해 놓으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던지시던지 그것을 밭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것은 하나도 옳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가 비틀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를 향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그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태풍 같은 회오리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회복입니다.

비뚤어진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가난을 주고 얻어 왔던 모든 것이 일시에 날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지긋지긋한 끈을 버린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 차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과 함께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 것입니다.

이제 그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려놓고 일어나 좇으면 가난이 괴롭히지 못합니다.

저주가 괴롭히지 못합니다.

문제들이 친구 되지 않습니다.

오직 새로운 세계만이 여러분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는 새로운 나라가 우리의 삶이 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가 새로운 날을 가져오고 우리의 삶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개의치 말고 주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을 바꿔주시는 하나님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