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요한일서 4:10 (4장전체)
“내어주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는 내용이 가장 구체적인 설명이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지으신자요, 세상에 함께 계셨으며, 자기 땅에 오매 자기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옷을 입고 자기 백성들에게 임하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오셨습니다.
복음서 안에는 이에 대한 다양한 증거들이 있고. 구약성경에도 미리 예언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야 하는가? 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내보내시는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비밀들을 찾아,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들을 때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사상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보다 아들을 보내셔서 죄를 사하셔야만 하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환경적으로 죄를 몰아내고 최초 아담 같은 정결한 사람만 살도록 한다거나, 공간적 조건으로 죄가 없는 지역으로 사람을 옮겨 살도록 하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해결하실 수 없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해결하시는 방법에는 반드시 아들을 보내셔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지난 두 번에 걸쳐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한 독립체로 지으셨고, 모든 자기의 행위는 자기 책임에 있으며, 모든 행위의 근원은 철저히 자기에게서 비롯된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입니다.
둘째는 모든 존재 가운데 ‘자기 인식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사람에게 주신 것으로 사람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인식능력’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가 있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함으로 모든 지적능력이 혼돈되고 뒤엉켜서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타락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됨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감각되도록 오셔야만 사람의 지성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어떻게 보내셨는가?
사람은 본성이 완전히 변한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외형적이나 생물학적인 형태에 의하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은 입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전신으로 완전히 거듭나야 하는데 이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점차적으로 거듭나게 되고 거듭난 이것들이 영혼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 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가 거듭나기 이전에 반드시 속사람이 거듭나서 뒤에 거듭날 새 옷을 입어야 한다며,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나며,1라고 했습니다.
70년대 초반에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석유를 사용한 건조기가 농촌 마을마다 보급되었습니다. 농민들이 추수한 곡식을 건조하는데 매우 재래식 방법으로 땅 바닥에 멍석을 깔고 건조하다 보니 비가 오는 날이면 건조하려고 펼쳐놓은 곡식들이 비를 피하게 하지 못함으로 이 비에 젖고 결국은 썩는 일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또한 인력의 한계 때문에 건조해서 보관해야 할 곡식들이 너무 많아 건조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건조기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종종 아이러니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추수기에 다음해 농사를 위해 별도로 씨앗을 준비할 때, 좋고 실한 부분의 곡식을 별도로 구별하여 썩지 않도록 열풍에 잘 말려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시원한 곳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다음해 씨앗을 꺼내 싹을 틔우려고 물에 불린 다음 모판에 뿌리고 싹이 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몇 날이 지나도 씨가 개갑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농민이 씨를 살펴보니 까맣게 썩어 있습니다. 가을 추수기에 씨앗을 별도로 잘 말린다고 열풍에 말렸더니 그 씨앗이 모두 익어서 새싹을 틔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께서도 이런 일을 당하여 안절 부절하신 것을 보았고 이웃의 아저씨도 같은 고생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씨앗이 개갑하지 않고 싹을 내지 못하면 그 씨앗은 죽은 씨앗입니다.
그 싹에 새로운 생명이 있는 배아가 심겨지지 않으면 결코 다시 싹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사람이 사탄에 의해 죽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음 해에 싹을 내지 못한 열풍에 익어버린 씨앗처럼 다음 세상에서 싹을 내지 못함으로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2
싹을 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배아입니다.
씨앗 속에 있는 생명체 배아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혼이고, 그 영혼에 지식이 있으며, 지식의 종류에 따라 썩지 않을 옷을 입고 들어가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지식은 두 종류인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알지 못한 지식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태어난 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으로 성장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지식을 생성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조명하셔서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새겨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 본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은 것은 육체로 생존한 기간에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사람의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영혼에 들어온 표상을 성령께서 조명하시거나 아니면 자기지식의 조명으로 생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자기지식이 되고 천국에 이를 때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복음은 사람의 자기 정체성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이 사유를 지난주에 이어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를 감각을 통해 목격한 사람이 자기지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목격한 것만으로도 감각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혀 모를 수는 없습니다.
만났다는 것은 명확하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정하려면 자기 영혼에 있는 자기지식의 반항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목격한 그리스도를 부정하려는 강한 자기의식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지식으로 비롯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성령이나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조명되어진다 하더라도 자기 안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씨앗으로 자기지식으로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 관한 왜곡된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3 결국은 자기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이기고 자기를 우위 두며, 가인이 하나님을 경험한 때도 마찬가지로 자기의식으로 하나님을 적절한 이유로 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4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자기 정체성은 전체적으로 성령의 조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기지식의 본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왜곡되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받음으로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이 지식에 의해 자기를 알았을 때, 자신의 타락된 상태를 알고 구원의 필요성이 인식되며, 우리를 구원하려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구체적인 인식이 없이 기독교를 접한다면 필연적으로 왜곡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신앙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길을 따르거나 혹은 왜곡된 신앙으로 삐뚤어지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 계획한 이스라엘과 같은 그릅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증오를 뿜어내는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만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이방인은 하나님 관심밖에 있었던 것입니다.5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영혼이 쏟아내는 일들은 어쩌면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분노를 쏟아내는 것으로 죄의 열매로 허락받은 존재의 운명이 바꿔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 세상에 있는 죄도 변화되어 정화되게 해야 합니다.
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죄를 들어오게 한 장본인에게서 죄의 통로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본인은 이미 죄의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가 죄의 통로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죄에 속한 사람이 되어 스스로 죄를 제거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면 필연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을 다시 보내 죄를 막아내고 이미 세상에 죄가 들어와 가득 체워진 죄의 세상과 화목하시는 방법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셔서 해결하시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6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실 분은 함께 거하시는 지식이신 말씀이 오시는 길입니다.7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함께 만유를 지으시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것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정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계획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8
내어주심,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아담 안에 계획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에 속한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들을 자기백성이라고 했고, 그들을 따로 구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이곳저곳을 방황하거나 이방인의 분노의 대상으로 모진 박해와 핍박 가운데 민족을 말살하려는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져가면서 민족 전체가 흔적 없이 사라질 처지에 놓였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남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결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오래 참으사 그들을 다시 고토로 돌려보내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지금 최종 역사를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25에서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이스라엘은 조상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임에도 복음을 거절함으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11:30)
그러나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롬11:15)
사도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고, 나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 관계를 원수 관계라고 했고,9 하나님의 아들은 이 원수 관계를 해소하고 화목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10
이를 관계도로 보면,
이방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해서 원수 관계이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있어서 죄의 결과적 관계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있어서 자식관계 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원수가 되지 않았다면, 이방인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파악을 했습니다.
파악된 시각으로 성경에 나타난 복음적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야 하는 이유를 사도바울이 말하는 비밀들을 더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1~3에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17에 보면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를 비유로 이스라엘과 이방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6;18과 골로새서 1:13 에는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라고 말함으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방인은 철저히 이스라엘과 분리 되어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특징은 인류 최초의 조상 가인과 아벨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드리는 제사를 보시고 아벨의 것을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에 어떻게 두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 제사에는 두 사람의 지적 구별이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마도 경건한 마음을 다해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편기자가 노래하기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11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10장에 보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에 대해서 잘 설명해 두었습니다.
매년 드리는 제사는 영원하지 않고,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역시 없으며, 예물을 드림과 같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치 아니하며 율법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는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12 고 했습니다.
여기에 가인과 아벨이 드리는 제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사도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이었습니다.
분명히 예물이 아닌 희생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분명히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가인은 예물을 드렸고 아벨은 희생을 드렸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가?
그는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곧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동일한 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에 자기의 생각대로 예물을 가져다가 드린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왜 제사를 원하시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희생의 제사를 드렸고 양의 첫 새끼를 드린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두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에 투영해보니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제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이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이 조명하여 주셨고, 아벨의 행위는 성령의 뜻을 행한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에게서는 성령의 마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하고13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14 결국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에녹 땅으로 도망가서 자기 나라를 세우고 살았습니다.15
여기에 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벨의 위치를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났으나 분명히 구분되고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별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게 되자, 마음에서 질투와 분노가 솟구쳐 올라와 아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16 하나님은 가인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경고하십니다.17 그럼에도 가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아벨을 처참하게 때려죽입니다.
이 그림을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해 보세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아벨은 순수하게 형이 부르는 대로 따라갔다가 기습공격에 맞아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아벨이 이를 몰랐을까요?
성령께서 아벨에게 적용하지 않았을까요?
아벨은 알 수밖에 없습니다.
형 가인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벨은 자신을 형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형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자기를 아낌없이 희생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벨이 흘릴 양의 피는 곧 자신이 흘릴 피를 예표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피흘리며 죽을 것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아벨은 형의 분노를 잠재우고, 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어줌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모세에게 이끌려 시내산에 이르러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방황하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요단강을 건넜고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
이제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기를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여호수아 5:2) 하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내렸던 만나가 마침내 그쳤습니다. 이제 그들은 먹을 것을 직접 해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나타나 여리고 성을 점령할 계책을 말합니다.18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돌되 엿새 동안 그리하라. 제사장을 일곱은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은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자 앞으로 올라갈 찌니라 하시매”
여러분들은 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심에 관한 주제로 설명하려면 마땅히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하여 기록한 복음서 본문 중에서 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여리고성의 전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면서 의아해하실 분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려면 가장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이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나 이벤트로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훔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벤트를 훔쳐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훔치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사단의 마음을 훔치려면 사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하시므로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계셨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들을 쓸어버리려고 하셧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을 다 알고 계시니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깊은 것이라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려고 성경을 아주 깊이 숙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을 훔쳐왔습니다.
지금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훔쳐온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분에 넘치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을 부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림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심,
이 놀라운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넘쳐 왔습니다.
요단을 넘어 이방인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이 들어왔습니다.
이방은 이것을 잘 이용하면 역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열 부족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고, 완고하게 대적했습니다.
완고하기는 애굽의 왕 바로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를 보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수히 승복할 수 없었습니다.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죽음의 골짜기가지 쫒아와 이스라엘을 해하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홍해바다에 수장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문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사람도 짐승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사막을 통과하고, 마침내 요단강까지 건너 길갈에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40년 동안 귀로 들은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었습니다.
여리고에는 기생 라합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소식을 매일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듣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일어난 신비한 사건으로부터 홍해가 갈라지고, 곡식 한톨 얻을 수 없는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을 지나온 이스라엘에게 있는 이야기를 아주 상세히 들었습니다.
매일 소식을 듣고 있노라니,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매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세요,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을 매일 말하세요,
여러분이 전하는 하나님에 관한 일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은 기생 라합과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반드시 구원을 얻게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생라합은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출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에 가입되었습니다.
성의 망루에서 파수하는 군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켜보고 동태를 살피고 있었으며, 고요한 적막이 흐릅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을 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여호수아4:19)
저는 여리고 성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여리고의 왕은 요단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부딪힐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전쟁의 상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고,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그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고 혼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종교에 억눌린 그들의 상태는 극도로 예민하고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태양으로 인하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으며, 가중되는 억압 속에서 정신적인 고통은 한층 더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 길갈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간담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 신들의 마음에 맞도록 행동하여야만 이스라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을 노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되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억압이 있었고 행동에 제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계엄상태와 같은 특별한 규정으로 철저한 규범 속에 갇혀 숨도 재대로 쉴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상상할 수 없는 혐오스런 일들이 그들의 신에게 행하여졌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들을 산채로 바치는 일이 없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절제 절명의 시간 앞에 그들은 무엇이든 자기들의 신을 강하게 하는 온갖 행위들로 광란의 도가니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의 세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부지중에 실수하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신을 노엽게 하거나 부정을 이유로 무참한 처형들이 행하여졌을 것입니다.
온 성 사람들이 제사에 푹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활을 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으로 오히려 부정 타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반강제적 질서가 유지 되어야 했으며, 짐승이라도 함부로 방치되지 않도록 했을 것이며, 모종의 법령이 반포되어 숨막히는 통제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부족장은 수 십번 목욕 제게를 하고, 쉬지 않고 자기의 신에게 제사를 했을 것이며, 온통 종교의식에 빠져 자기의 신의 힘을 복 돋우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군대를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기를 들고 여리고성을 돌게 하라.
이스라엘 군대는 연약한 여인이나 노인, 그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는 유. 소아는 길갈 진에 머물게 하고, 군대는 기를 들고 여리고 성을 밖을 도는 것입니다.
성을 돌 때 큰소리도 내지 말고 숨을 죽이며 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리고 군대에게 발견되지 않게 돌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에서 대항하지 말고 성을 돌기만 하되 6일 동안 돌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작전의 비밀을 이해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제목으로 하는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분도 본문의 실지 의미를 말씀하시는 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여리고 성에 제물로 주는 것이었지만 이를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빼앗아온 제가 볼 때 이 작전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작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작전이 아니라 패하자는 작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여리고에게 넘겨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들은 높은 성에서 이스라엘이 군대가 성 주위를 도는 것을 자세히 보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격해 오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반면 여리고 안에서는 자기들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신이 하나님과 싸우는데 있어서 신을 노엽게 하거나, 혹은 신의 전쟁에 힘을 실어 주도록 최선을 다해서 정성을 드리고 있습니다. 짐승타는 냄세와 또 다른 자식들이 태워지는 냄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생각입니다.
실상은 이 작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방인들에게 모두 제물로 주고 이방인들에게 화해를 청하셨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마음으로 만든 신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중을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식이 없었고, 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항복하는 백기를 들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 앞에 나아갔더라면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에베소서에 나타난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역사가 이미 나타났을 것입니다.19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첫날부터 6일간은 매일 하루에 한번 돌았습니다.
하지만 성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여리고 성은 어떻게 건설되었을까요?
우리나라 대구와 같이 사방에 분지로 형성되어 있고 분지 중앙에 약간 높은 동산과 같은 곳에 돌로 기반을 잡고 축조하였습니다.
외벽은 기초부터 돌을 쌓았고, 그 위에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 성벽을 세웠습니다. 외성벽과 내 성벽사이를 두어 1차 방어막으로 사이에 공간을 두었고, 외성 둘래에 도로를 조성했고, 성벽 위에는 파수가 가능하고 전투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얼마든지 화살이나 창을 던져 성 가까이 침입하는 적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형태에서 이스라엘 모든 군대가 성 주위를 한 바퀴 씩 6일 동안 돈다는 것은 자멸하자는 계획 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를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맨 마지막 7일에는 7 바퀴를 돌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완전하게 이스라엘을 여리고에게 제물로 줬다는 의미로 해석 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침공에 대비해 왔습니다. 창과 칼 방패 등, 찬란한 청동문화를 가진 살벌한 병기들이 이스라엘을 압도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을 준비헤 왔기 때문에 일당백의 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의 신은 만든 신이요.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게서 사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족장이 오래전에 종교 장사에게 사온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성 주위를 돌고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얼마간 희생을 얻었다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수도 있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명하시기를 “여리고를 돌 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곧 여리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하시는 것 같으나 실지로 4만명 가량이라고 했는데20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군대가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숨기고 할 수 있는 작전이 결코 아닙니다.
게다가 양각 나팔가지 불어 댔으니 여리고 성에 있는 파수꾼들은 환히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와 이스라엘을 공격은 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었고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작전에 대한 원망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이 명령은 싸우지 말고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냥 맞아 죽으라 이런 명령입니다. 이런 명령은 마태가 산상수훈을 선포하시던 팔복산에서 주님께서도 하셨습니다.21
물론 모든 계획에 완전하신 하나님이 여리고의 공격을 대비한 또 다른 작전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성을 돌게 하는 작전은 어느 누가 봐도 이스라엘을 여리고에게 내어준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의 첫 전투입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며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인도하신 땅입니다.
이 사건을 신약성경에 비춰보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어주고 여리고와 화친이 하는 것을 기대하셨습니다.22
그러나 이방인인 여리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고 끝내는 멸망을 당하는 비극을 맞고 만 것입니다.
여리고는 40여년 전부터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 반도를 거쳐 가나안의 10부족23이 있는 곳을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을 위해 잘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게 된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은 그들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신의 협력이 있다는 것과 불가사이한 일들이 이스라엘에게 함께한다는 점에서 매우 두려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다가온 이스라엘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40년 동안 들은 가나안의 10부족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화친을 청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오히려 대적하고 전쟁을 택한 것이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저들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몸을 불사르는 전쟁을 통해 장렬하게 죽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여리고를 돌라고 하신 의미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가나안의 화친을 위해 이스라엘을 내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가나안 여리고는 소통이 되지 않았고, 여리고는 가인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거절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타락하게 되자 이들의 정욕으로 탄생이 허락된 생명일 뿐이지, 그들이 아담 안에 계획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피조자의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24
나면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한 비극적인 존재입니다.25
그들에게 쏟아져 들어온 죄를 단절하려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를 끊는다고 그들의 본성이 바꿔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면 죄는 단절될지라도 자신들의 정체가 죄이기 때문에 거듭나기 위하여 생명을 얻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26 이방인의 영혼에 심겨져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들의 영혼이 새 사람으로 살고 죄로부터 단절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태어난 그 근원을 사정없이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죽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타락한 모든 행위에 대한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본래 이방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복음을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거절이라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말 앞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하여야 합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지음을 받은 존재가 어떻게 지으신 분의 의견을 거절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까?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부터 질서롭게 이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에 입각한 질서로운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래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질서로운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 죽으셨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뜻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15:42~45 [본문으로]
- 썩는 다는 것을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불멸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결코 없어지지 않으므로 썩은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비참한 상태가 된다. [본문으로]
-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으나 끝내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 로마서 1:21 [본문으로]
- 마태복음 15:27 “개들도 제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본문으로]
- 하나님께서 새사람을 지으시는 것은 반복적인 일을 배제할 수 없고, 강제적으로 사람을 고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선의 원칙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립적 존재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서 결과를 얻는 것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요한계시록 19:13 [본문으로]
- 에베소서1:4,11 [본문으로]
- 에베소서2:14,16, 골로새서 1:20~22 [본문으로]
- 골로새서1:20, 고린도전서5:18,19. 로마서 5;11, 요한1서 2:2, 요일서 4:10, 에베소서2;16. 롬11;15. 롬3:25. [본문으로]
- 시편 51:17 [본문으로]
- 히브리서10:5 [본문으로]
- 창세기4:9 [본문으로]
- 창세기4:7 [본문으로]
- 창세기4:16~24 [본문으로]
- 창세기4:5 [본문으로]
- 창세기4:6 [본문으로]
- 여호수아 6:2~5 [본문으로]
- 에베소서2:14~15 [본문으로]
- 요호수아 4:13 [본문으로]
- 마태복음 5:38~42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본문으로]
- 에베소서2:14~16 [본문으로]
- 창세기 15:19~21 [본문으로]
- 에베소서 2:3 [본문으로]
- 창세기 6:5, 시편 58:3 [본문으로]
- 요한복음 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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