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예배

복음4 -부활

생명있는 신앙 2017. 7. 9. 14:43

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내어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십니다.

갈라디아 2:21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세상의 소요와 골고다 언덕에서의 여인들의 슬픈 통곡의 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의 슬픈 울음 소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에 박혀 하늘을 향하여 걸렸고,

하늘이 슬퍼하여 어두움이 뒤덮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 군인들이 어두움이 내리 깔린 골고다 언덕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었고,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곧 유대인의 왕으로 인하여 심판이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마져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때 성전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가장 안쪽에 있는 지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대 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사하는 피 뿌리는 제사를 드리게 위해 들어가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는데 이 휘장이 찢어짐으로 다시는 대제사장의 제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지성소는 죄가 있는 사람이 이곳을 범할 경우 소리 없이 죽임을 당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마태는 성전에서 일어난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태복음 27:51~54)

이렇게 예수께서는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소란이 그치고 온 세상은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죽임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을 이겨낼 수 없었고,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 남긴 말들이 그들에게 걸림이 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사흘에 다시 세우리라.”
번뜩이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스치지 않습니까?
성전 되신 몸

자신을 성전이라고 했으며, 사흘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예루살렘성이라고 이해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체이심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철저하게 닫혀진 그들의 영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능한 사람이고, 율법에 정통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아니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능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6:9 “이 백성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돌이켜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의 눈을 어둡게 하고 귀를 듣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버리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담 안에 계획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시고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비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선이 전혀 반대되는 일을 허용하시는가?
도무지 저의 사유로는 용서할 수 없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한때 개신교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는 매우 큰 허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바로 하나님의 선에 대한 불변하는 진리가 깨어지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께서도 적용을 받으시고 스스로 그 선을 무너뜨리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선의 원칙은 하나님과 온 우주를 지탱하는 원칙이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이 원칙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모든 교리가 무너지고 심지어 창조까지도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단숨에 해결하는 사도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더 나아가 리브가가 우리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사,” 라고 말한 것에서 문제가 해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이방인의 상태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품에 안으시는 것은 이삭의 후예라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하셨으나, 분명히 리브가를 통해서 한 태에서 에서와 야곱이라는 전혀 다른 사람이 태어났고, 에서는 이방인으로 가고 야곱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게 됨으로, 이삭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명확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밝혀준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왜 어두워지게 되었습니까?
이는 그들은 이스라엘이면서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선이 이미 구별하였고, 성령의 역사가 적용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엄청난 유대인의 반발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을 싫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유대인을 명확하게 둘로 나누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을 눈이 감긴 소경으로 보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원 이삭의 씨앗인 약속의 후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은 실상은 하나님의 선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으나, 그 지식은 자기지식으로 이해하는 왜곡된 지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에 근거한 메시아에 관하여 눈이 열린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도덕적 관점으로 예수를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이 왜곡되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쉽게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영혼에 있는 지식은 이미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 왜곡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였습니다.
그 들이 저술한 책들이 성경을 해석한 랍비들의 문서인 미쉬나, 탈무드, 등입니다.
이 책들은 하나님의 선의 적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선의 적용을 철저히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경 해석에 감동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이방인의 부류에 속한 에서와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속해 있을 뿐이고, 그 안에 소수의 그루터기와 같은 고집스런 사람들이 남아 이스라엘의 명목을 이어 오다가 오늘의 이스라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령을 이스라엘 안에서 참 태를 닿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표만 이스라엘인 실상은 죄의 정욕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창조시 아담 안에 계획된 아벨과 같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예수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저들은 이삭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씨가 아니라 에서와 같은 이방인의 씨앗일 수 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이제 새롭게 이스라엘의 수가 증가되고 있으며, 나중에 그들이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분노하고 증오를 드러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영혼의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않은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을 가졌으며,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 타락된 자기 지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으니, 그들의 눈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4번의 설교를 통해서 일반인의 관점으로 볼 수 없는 무궁한 세계를 모두 보았습니다. 물론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도식 같은 것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많은 반복된 부분에서 부활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씀드렸고,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명확한 의미들로 미래의 삶이 무엇인지 몇 번에 걸쳐 설명했으며,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의미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1, 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는가? 복음의 씨앗

2, 왜 아들이 아니면 안 되는가? 진리의 사람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하여

3, 어떻게 보내시는가? 내어주심

4, 왜 죽으셔야 했는가? 죄를 죽이고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

 

저는 두 번에 걸쳐 사람이 지식을 얻는 방법은 육체로 살아서 보고 듣고 감각을 체험함으로 얻는 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육체가 없는 상태나 이미 벌써 천국에 올라가 새 옷을 입은 영혼은 더 이상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영혼의 지성에 심기우게 하고,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게 함으로 예수와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을 통해서 볼수 있는 것은 모두 육체로 있는동안 봐야 합니다.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

공생애를 사심,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심,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시고 수난을 당하심,

사람들에게 죽으심,

또한 무덤속으로 장사지내심,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부활되심,

이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셔서 진리가 되게 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보게 된 우리는 자기의 영혼 안에 자기지식으로 생성하여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자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자기인식의 주체가 됩니다. 자기가 생성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자기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영혼은 천국에서 남아 있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생성한 지식을 자기지식처럼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는 것을 사람이 보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하려고 하신 것이고, 보지 않고 이 지식을 받음으로만 자기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도 동일한 효과로 천국에 이를 때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공생에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본 사람들은 모두 한결 같이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지식을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상당수는 예수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하고 예수를 부정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그들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을 알면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 곧 랍비라 하는 사람들의 교훈에 있는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못 받아들입니다.

이는 미국의 코네티컷에서 영적 부흥의 대각성 운동을 발화시킨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 것처럼 자연적인 수단으로 획득하는 그런 지식 으로 예수를 알기 때문에 너무 많이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사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성령의 사람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처럼 말한다.’ 고 말하는 것을 아주 많이 듣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습니다.
아니 복음이 심겨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복음이 자신에게 주는 유익을 생각하거나, 혹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많은 사회적인 이점을 생각하고 받아들인 결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지식에 관심이 없고, 오직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사도는 자기가 알고 있었던 모든 율법이나 세상지식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며,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왜 제가 이처럼 복음에 관한 내용들을 복잡하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는지 이제 아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전해드렸던 복음이 매우 중요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에 관하여 생명과 같이 전하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대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지난주간에 말씀의 끝에 남긴 말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다 기억하시 것입니다.

갈라디아를 들어 말했습니다.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도는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데, 예전에 유대의 대제사장이며 권력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고 한 것을 실천된 사람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새로운 말씀의 지식을 담았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이 지식은 이 세상의 지혜자나 현자들에게 얻을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의 조명하심만 얻을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부활을 꽃으로 합니다.

모든 복음서가 주님의 부활로 결말을 내고 고린도전서 15장이 부활의 의미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따로 어떤 설명을 드리는 것이 무의미 합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오셨고, 죄의 본질인 사람에게 죽으시고 죄가 요구하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이 죽음의 확실한 증거로 무덤에 장사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 생전에 이런 사건은 마 9:23~25, 8:49~55. 5:35~41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누가복음 7:11~15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요한복음11:1~44 에는 무덤에 장사지낸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 세 가지 사건으로 죽음을 해결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분명히 장사를 지냈거나 지내로 가는 길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들은 확실히 부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지 않습니다.

이들의 부활은 삶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삶을 다시 회복하여 살게 하였다가 결국은 다시 죽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은 이들의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그 기간 동안에 죽었던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사건 경험으로 통해서 뭔가 듣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지만, 이들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고, 오직 예수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 기록된 것입니다.

부활은 위의 세 사람 같이 다시 무덤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다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능력으로 위의 세 사람을 다시 살리셨으나, ‘이것이 부활이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11:23~26에서 마르다와 대화에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다시 사는 것을 말씀하셨으나, 마르다는 그것을 부활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의는 죽은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주께서 부르실 때 홀연히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밝히시고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성령의 보호하심이 만물 위에 덮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놀라운 일들을 보십시오.

주께서 주의 백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실 날,

그 음성을 들은 이미 흙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영혼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잠자던 자 나사로를 향하여 부르시는 주님의 일은 이미 썩어 흙이 되어버린 영혼을 부르는 것보다 쉬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잠들어 있는 나사로의 무덤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저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나사로가 몸을 동인체로 세마포를 입고 나오는 그림을 스케치화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스케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서는 묶여진 온몸을 뒤뚱거리며 무덤을 나오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세하게 색을 입혀 표정을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감각되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나사로를 부르시는 주님이라는 강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도 재림하시는 그 주님이 우리의 무덤을 아니 자연에 흩어져 흙이 되어버린 우리를 향하여 부르실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이름을 불러 다시 살리실 것인데, 그 대 부르심은 나사로를 부르시는 그런 부르심이 아니라 영원에로의 부르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르심은 미래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죽음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분명하게 보이시고 각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부르심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시고 우리를 부르실 예수께서 살아있는 상태로 천국에 오르셔야 합니다.

만약 죽음으로 끝나고 그의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지지 아니하시고 가셨을 것이다는 추측으로는 우리에게 명확한 확신을 주지 못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고, 또 보여주심으로 영생에 들어갈 지식을 얻으므로 자기 안에서 확신을 가지는 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의 잔인한 분노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본질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분노를 드러냈으나 주님은 그의 사랑의 본성으로 우리에게 자기를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어 음부로 내려가셨습니다.

안식일을 보내고 아침 일찍 아직 동이 트기전에 향유를 가지고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열려있고, 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울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보이셨고,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말했더니 그들이 달려와서 무덤을 살펴보고는 세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이 따로 개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고도 제자들은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

결론

이렇게 복음에 대한 비밀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비밀을 명확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보았던 십자가의 비밀이었고, 우리는 이 비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으며, 우리의 영혼에 찾아오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중생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분명하게 정해졌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정통적인 신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들은 복음을 토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여 궁극적으로 교회의 개혁의 깃발을 높이 치켜 들 것입니다.

우리의 등불은 이제 높이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이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성취하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은 우리가 올려놓은 복음의 빛을 보고 달려 올 것입니다.

우리더러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맡아달라고 부탁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조직을 갖추어 나아가며, 우리와 함께한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함께 세상을 섬길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알게 된 복음을 조직화하고 이것을 알릴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한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세상에 있는 우리 형제들이 이 복음을 듣지 아니함으로 당하는 고통의 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작업들이 우리에게 놓여 있습니다.

15세기부터 교회 교황들의 탐욕과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려는 뜻있는 개혁자들의 메시지가 우리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교회의 말할 수 없는 탐욕을 보았고,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무도덕한 행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메신져들은 주님이라면 그런 교회에 오시지 않을 것을 천명했고, 직접적인 글로서, 그림으로, 음악으로 무수히 많은 비판과 조소를 우리에게 남겨두고 우리를 각성하게 합니다.

그것이 지금교회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수선하라고 명령하실지 모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이미 전쟁으로 나타났고, 교회에 뒤집어 쓰어진 왜곡된 지식들을 걷어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우리의 신학에서 제거하려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교회는 이미 교회의 순수한 사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아니 개신교가 일어나기 이전에 개신교의 영향을 세속이 지식에 기울도록 유도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트 성당 문에 29개 조항을 내걸기 이전에 벌써 루터의 생각을 사로잡았습니다.
간악한 마귀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누가 순수한 신앙의 뿌리를 드러내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그 사람의 사상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육체 안에 갇혀 있으면서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하는 이성적 존재로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을 정의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가 지극히 플라톤의 사상에서 비롯된 철학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 마 없을 것입니다.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사상의 뿌리는 인간을 두 개의 지체로 구분하는 이원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 인간은 육체 안에 있는 한 이성적 지체가 육체를 지배하다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성적인 지체가 별도로 구분되어 육체를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사상은 상상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육체를 벗어날 수도 있고, 다른 육체에 들어갈 수도 있는 존재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월적인 인간의 환경을 탄생시키는 매우 비성경적인 주장임에도 이 주장을 교회에 옷을 입혀 진리인양 가르쳐 왔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하는 존재로 구별하되 이것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개별적 판단능력을 가진 비물질적이며 비형식적인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 안에 있는 한 지체처럼 보는 것이 지극히 타당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혼에서 내 뿜는 무서움과 두려움의 표현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영을 거두어 가심으로 영혼의 소리에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거울이나 나 아닌 다른 상대가 없으면 순수한 주관으로 자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지극히 의존적 성향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거울을 보고 자기의 내면을 보지 못하므로 겉으로 드러난 형체만 볼 뿐이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미워하며, 증오하고, 분노하며, 현대에는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고 질투하며 시기하고, 탐욕으로 빼앗고 죽이며 살인하는 등 세상을 악의 소굴로 만들고, 인간 스스로에게 까지 거짓을 행하고, 나아가 세상을 향하여 거짓을 내뿜는 거짓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는 그들과 싸울 수 없으며, 그 악들은 우리를 점령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므로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은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거울에 비춰 나타나지 않습니다.
악은 철저히 우리의 본모습 뒤에 숨어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리가 아닌 결과에 주로 관심을 보입니다.

그들은 오직 효과 있느냐?”를 물으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광적으로 찾아다닙니다.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설교자 죠셉 얼라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혁파와 국교 가운데 치열한 전쟁이 있던 160년경 올리버 크롬웰이 3년을 통치하고 죽자 왕당파가 통치를 잡게 되어 개혁파 설교자들을 향한 대대적인 핍박이 자행되었습니다.

2000여명의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쫒겨났고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존 번연과 얼라인도 같은 사람으로 포함되었습니다. 그래도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비밀리에 설교하다가 붙잡혀 투옥되었고 1668111734세의 젊은 나이로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영원히 악이 없는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 돌이켜 회개하라천국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 책으로 인하여 설교의 황태자 스펄젼과 영국의 부흥사 조지 휘필드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얼라인은 돌이켜 회개하라에서 실제로 회개하지 않았으면서도 회개한 것처럼 생각하는 치명적인 오류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는 영혼을 깨우고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설교자 였습니다.
그의 청중들은 영혼으로 파고드는 생명을 경험하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구름 때와 같이 모여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교회에 주시는 축복은 큰 교회당이나, 수십만이 운집하는 대규모를 자랑하는 교회나, 많은 헌금이나, 성도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생명력이 넘치는 살아있는 말씀을 보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웅장한 교회가 건축되며, 사람이 구름 때 같이 모여들어도, 사람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가 진리로 가득 채워진 생명의 말씀이 쉬지 않고 넘쳐흘러, 여러분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역사가 있다면 여기가 축복의 장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이 일을 가장 중요시하는 살아있는 공동체이어야 하고, 쉬지 않고 흐르는 생명수로 인하여 진리로 충만케 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주님의 몸이어야 하고 이것이 문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문화가 위선되거나 혹은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나 예술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노래함으로 사람의 영혼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신앙의 스토리가 있고,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감이 새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은 감성과 개성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성의 문화가 이성이 붙잡은 과학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다음, 세상을 지배하는 그 영광이 영원히 갈 것처럼 치달아 달렸으나, 결국은 최고의 봉우리를 찍고 이제 막 내리막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이후의 우리의 세계는 용왕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명약을 가지고 있는 토끼가 간을 육지의 소나무에 걸어 놓은 것처럼, 지성을 꺼내어 한 곳에 모아놓고 공동으로 공유하는 초 현실 시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본다 하더라도 왜곡되게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에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처럼 기존의 교회들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었고, 우리는 좌절했습니다.

우리는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교회로부터 외면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이렇게 자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부르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아는 분명한 하나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문화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할 것입니다.

다시 이 땅에 오시는 우리 주님을 만날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