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새벽기도

새벽기도13-시편13편

생명있는 신앙 2017. 6. 28. 06:42

시편 13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기자는 또 영혼의 침체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이 시는 시편 42~43편 고라자손의 두편의 시와 내용에 있어서 거의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 시를 영혼의 침체의 시라고 말하는데, 신앙인들 누구나가 이런 반복된 삶에서 여러번 경험하게 되고 상당수는 이런 침체기를 통해 신앙이 성장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어떤 분들은 이런 침체기에 완전히 좌절하고 낙심하여 심각한 상황에 처하여 낙심하기도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난 신자는 성령이 도우심으로 반드시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이 영원히 자기를 보증하기 때문에 결코 낙심에 빠지지 않고 회복할 때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깊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혼의 침체를 겪는 다는 것을 역으로 매우 행복한 삶에 속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침체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오히려 축하해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깊에 들어가게 된 것을 환영해주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은 것입니다.
사무엘 상하에 나타난 다윗의 삶을 살펴보면 여러 면에서 침체를 경험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영척인 침체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는 두 가지의 원인에 서 비롯됩니다.


1, 영혼의 지성에는 당면한 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지식의 부재로 영혼의 지성이 마비 상태와 같은 막힘이 지속될 때 침체가 옵니다. 예술가에게 비유하자면, 어떤 작품을 해야 하는데 영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왜 영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작품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채워지지 않아서 감각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작가는 매우 Depress 상태가 되고 날카로워지며, 시간이 다다를수록 더욱 이해 안돼는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어떤 일에 대하여 치밀하고도 주도 면밀하게 계획하여 부여된 일을 잘 처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혼은 자기가 생성한 자기지식의 한계 내에서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없는 지식을 만들어 처리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지식의 한계라고 합니다.

이 한계에 다다를 때 영혼은 침체를 경험하게 되고 이때는 강력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면 데이터 부재로 인하여 영혼이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어두움에 처할 때입니다.

기도하고 때를 기다리면 그 문제에 대해서 성령께서 조명하시므로 통전적 지식에 의해길이 보일 때,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이 떠오를 때 침체는 사라지고 기쁨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말을 종종 드릴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여러분의 영혼의 침체에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복음이 새겨져 있다면 결코 여러분은 멸망의 길을 가지 않고, 좌절하여 나락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침체에 빠진 것이라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천국에서의 경험을 미리 맛볼 수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너무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영혼이 죄의 유혹에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자면 영혼이 주도권을 죄에게 빼앗겼다는 것인데 이때는 기도의 의미를 약화하는 생각이 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거나 의심이 들 때입니다. 이런 경험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을 원하는데 그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7:17)
알고 보니 그것은 죄내 내 안에서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19)

그래서 사도는 통곡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영혼의 침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변해버린 영혼의 지성이 온전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고,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만을 생성함으로 사람은 언제나 지적인 결함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타락이란? 온전한 지식의 왜곡에서 온 것이고 온전하지 않은 지식을 우리의 영혼이 지각함으로 부족하고 해결이 안 되며,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영감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이르게 되면 자칫 불신으로 치우쳐 오래 동안 침체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죄의 유혹에 미혹되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왜곡된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만과 혹은 지나친 자신감등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신뢰가 깨어짐으로 죄가 주도하는 생활을 하는데 매우 자신감이 넘치거나 혹은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시편기자에게 임하는 침체는 영혼의 어두움에 처하는 것으로 인내하고 기다림으로 기도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편기자는 영혼의 침체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것 같은 괴로움,

수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안정된 터전이 없어서 헤매야 했고,

목자 잃은 둥지를 떠난 양처럼

먹잇감을 보고 달려드는 사나운 이리 앞에서 두려워 떨며,

발자국 마다 감추어진 함정에는 심장을 향한 뽀족한 창들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고,

생명을 낚아 체는 올무는 한발을 앞으로 내딛지 못하게 하며,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길고긴 날들이,

머리위에 내려앉은 뜨거운 태양빛의 찌름으로 발끝으로 생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영혼의 침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앙인들을 보지 못하셨나요?

자유를 잃은 갇힌 신앙을 보지 못하였나요?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상 날카롭습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마냥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줄 공간이 없습니다.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 안절부절하는 모습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어딘가 무거운 짊을 지고 있는 고통받는 영혼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를 잡으려고 들어가는 것을 뿌리치는 안타까움을 볼 수있습니다.
어떤 위로와 권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마음이 닫혀버린 심정으로 피골이 상접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형제들이나 자매들을 우리 주위에서 아주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결코 벗길 수 없습니다.

그 어두움이 인위적인 평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평화스런 가면 속에 감춰진 문제의 시련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가죽옷을 겹겹이 덮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의 부끄러움은 옷을 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죽옷을 입고 자기의 내면을 감추려고 하는 숨김 때문인 것입니다.

기자는 자신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기자는 자신의 어두운 상태를 인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어두움에 짓눌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문제의 해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상황을 직시하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신의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눈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문제와 환란의 근심걱정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기자는 눈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길을 보여 달라고,

위기에 빠지지 않고,

적들이 아무리 많은 올무를 놓아도 그것을 볼 수 있고, 피하여 발 디딜 곳을 볼 수 있다면, 아무리 많은 올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보지 못한 소경 상태가 우리를 더욱 어두움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육체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으로 보는 것은 인생의 길을 보는 것이고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영혼의 눈은 영혼의 지성에 진리의 말씀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생성되어지는 놀라운 해안을 같게 되는 것입니다.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미움과 분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대적들의 영혼에서 쉬지 않고 솟구쳐 나옵니다.

그 미움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솟구쳐 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신앙으로부터 낙오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같이 분내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며,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도 없이 살도록 합니다.

미워하고 분내고 당 짓고 수군거리고, 술취하고 방탕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이탈되게 하는 것이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원수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람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기자는 큰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이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만 사람들로부터는 오직 주의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본래의 의미는 자비하심을 의지 한다는 말인데 히브리어로는 בְּחַסְדְּךָ֣ (바하스더카) 인데 이는 mercy 은혜, 자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개역개정의 번역이 옳은지는 살펴봐야 하고 성경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연구하여 바른 해석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할 의무를 가집니다.

결론입니다.
영혼의 침체는 통전적 지식의 부재에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성령의 조명하심입니다. 이때 예술적으로 영감을 갖게 되는데 우리의 신앙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항상 함깨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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