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새벽기도

새벽기도14-시편14편

생명있는 신앙 2017. 6. 29. 11:36

시편 14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 노래는 시편 53편의 노래와 동일한 노래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정론에 대한 과제를 주셨습니다.

신정론이란?
헬라어로 Theos 데오스(하나님)DIke 디케(정의)를 합한 말로 theodicy 라고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들고 주 앞에 나아가 씨름하면서 간단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 사람의 지혜로 선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역의 원칙을 선에 두시지 않으셨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선한 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10:18)

그러면 선을 정의할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니십니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질서로우시며, 조화로우신 분이십니다.
악은 질서가 없고 모든 면에서 조화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질서롭고 조화롭게 만드심으로 그것을 이라 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하며 괴로워하다가 이생을 마감하나이다. 라는 오랜 기도 끝에 하나님의 진리의 서고에서 마침내 답을 들어 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드리면 제가 본 것이 신정론의 비밀이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개신교 교리중에 아르메니안과 칼빈주의의 논쟁중하나의 주제인 전적 타락에 관한 주제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피고 있는 진리의 접근 방법에 관한 노래가 여기 한편에 다 숨어 있습니다.
시편 14편 한편으로 성경이 말하는 신정론, 곧 하나님과 선과 악에 관한 모든 답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즉 없다는 정도가 전무하다는 의미로 하나도 없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기독교는 전적 타락을 말하면서도 전적 타락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죄밖에 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별도로 죄를 행하거나 아니면 죄가 아닌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죄가 내안에 들어와 죄를 범했다.
내가 죄를 지었다.
즉 삶속에서 부지중에 행한 어떤 죄 된 행위로 인하여 죄를 범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죄 된 행위를 하기 이전에 선한 행위로 있었단 말인가?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를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행위에서 죄밖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죄에서 나와 죄를 행하고 우리의 이런 죄된 삶 때문에 우리의 비참한 형벌을 피할 수 없으며 결국은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가 아닌 행위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아닌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전적 타락은 죄가 아닌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살펴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셨습니다.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도다.

하나님을 부르지 않은 자!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 무지한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부릅니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도다.

이방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왜 핍박합니까?
악이 선을 향하여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서 무수히 많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이방인이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야 하는 원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가 이방인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자세가 자신이 이방인으로 있었을 때를 회상하고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는 자비를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비록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들을 원수로 여기고 공격할 지라도 인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방인이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분노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5,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왜 이런 광포의 세상이 전개됩니까?
20세기 초반부터 21세기가 되어 거의 150여 년간 세계의 기독교는 전례 없이 쇠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순결한 신앙의 열정들이 수많은 전쟁과 인류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의 사고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이 매우 인간중심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1750년대부터 방적기계 계량으로 인한 산업혁명, 석유와 중화학공업의 2차 산업으로, 현대 원자력이용의 3차 산업혁명으로 발전해오면서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누리면서 사람의 생각은 절대자 신을 의지하는 사고 체계에서 인간 이성을 의지하는 사고체계로 전환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지가 현저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고 무용론의 확산으로 급기야 신은 없다는 무신론들이 확산되어 교회는 급격하게 침체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대뿐만 아니라 피조세계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방인들이 기독교의 침체에 빠져드는 것은 산업혁명과 맞물린 인쇄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지식의 사유화로 인한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은 무신론자들의 무차별적인 기독교의 비판으로 인한 자극적인 강의들의 영향을 입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입니다. 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를 다니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신에 대한 부정적인 강의로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끌어냈습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대, 곧 하나님이 안 계시는 세대에서의 인류의 운명은 비참하기 이를 대 없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산상수훈의 첫 말씀의 선포와 같이 하나님은 가난한자, 핍박을 받은 자. 인생을 자기의 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에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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