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1, 복음주의 로잔언약과 개혁주의 비교

생명있는 신앙 2025. 4. 9. 14:30

복음주의 로잔언약과 개혁주의 비교 1,

 

들어가는 말

 

2024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4차 로잔대회는 이 운동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200개국 이상에서 5,000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모여 지도력, 정의, 세대 간 제자도, 기후 변화, 기독교 박해 등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했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보여주자였으며, 교회 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복음 전파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여기에 성 정체성과 차별에 관한 논의가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다뤄졌다.” 특히, 대회에서 발표된 서울 선언문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었으며, 교회의 역할과 대응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동성애와 관련된 논의에서 복음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사랑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기조가 유지되었다. 영국의 목사인 보한 로버츠(Vaughan Roberts)는 본인이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임을 밝히면서, 교회가 이러한 이슈를 다룰 때 진리와 은혜를 모두 포함해야 하며, 도덕적 비판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 문제제기

 

로잔언약은 복음주의가 현대 세계에서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응답으로서 등장했다. 1974년 로잔대회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Jhon Stott를 주축으로 하고, 전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강조하며 세계화, 사회적 불의, 기독교 박해, 빈곤 등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재정립하려는 복음주의적 책임을 논의한 자리였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복음주의의 태동과 역사적 진행 방향과 그 정체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과 관계성에 대하여 매우 큰 혼란 속에 빠져 있다. 이로 인하여 복음주의를 종교개혁의 이념들과 일치한 사상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마치 개혁주의가 복음주의 울안에 속해 있는 지엽적인 이념을 가진 분파로 보고 있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다. 복음주의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같이 변화해 가고 WEA, Lausenne Covernent, 대륙과 지역 혹은 국가 내에서 NEF 단체들로 진보해 오고 있다. 종교개혁 507주년 맞이한 즈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관계를 살펴보고, 각각의 정체성을 비교하여 로잔언약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1)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2) 로잔언약과 복음주의 3)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복음주의 이해로 3회에 걸쳐 살펴보려고 한다.

 

2.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오늘날 신학자들은 복음주의를 정의하기 매우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 목회자들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실지로 복음주의“Evangelicalism”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곧 개신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이는 종교개혁에 앞서서 가톨릭교회의 조직 내에서 정화를 도모하여 신앙을 쇄신하려고 시도한 운동을 시초로 한다. 그 첫 번째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와 바울서신에서 발견한 점, 두 번째는 당연한 귀결로서 신앙생활의 근본을 복음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각 개인과의 직접적ㆍ내면적인 접촉에서 구하고, 신앙의 내면화와 일상생활의 정황을 지향하는 점, 세 번째로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전승이나 전례를 이의적(二義的)으로 보고, 교의의 간소화를 주장하고, 1520년대 루터파의 교회분리, 특히 1540년대 이후 칼빈파의 성립과 함께 가톨릭측과 종교 개혁파에서도 이단으로 위험시된, 양파의 일부에 저류로서 계승되었으며, 또한 성경의 권위를 특징으로 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여러 파의 생각을 통합하여 적극적인 선교와 사회참여 운동 정신복음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 대해서 한 목소리로 정리되지 않아서, 다양하게 평가하여 혼동을 유발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1953)’는 복음주의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16~17세기에 일어난 세 가지 원천에서 제기한다. 그 원천은, “마르틴 루터와 쯔빙글리를 통한 교회 중심의 사고에서 성경중심의 사고로 바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보는 종교개혁, 영국의 성공회가 정치적으로만 개혁을 했으나 신학적으로는 진정한 개혁에 이르지 못한 반동에서 일어난 Puritan 혹은 청교도, 독일에서 일어난 모라비안 형제들에 의하여 루터파의 신앙이 형식화에 이르게 되자 원래의 종교개혁을 복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루터파 갱신 운동으로 경건주의이다. 이들은 각각의 교리와 사상의 노선을 가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계열들로서, 청교도는 경건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경건주의는 청교도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모두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포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 가지를 모두 물려받은 복음주의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적 흐름과 그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깊이 연구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배빙턴(David Bebbington, 1949,)은 그의 저서 영국의 복음주의 역사 1730~1980에서, 1730년대에는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를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라 하고, 복음주의(Evangelism)1) 성경주의, 2) 십자가중심주의, 3) 회심주의, 4) 활동주의의 네 가지 핵심 요소로 설명한 "베빙턴 사변"(Bebbington Quadrilateral)을 제시했다.

성경주의(Biblicism)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며, 신앙과 삶의 모든 기준으로 삼는 신념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문자 그대로 믿으려는 경향이고,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대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념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믿으며, 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전개하며,

회심주의(Conversionism) 개인이 거듭나는 경험을 중시하는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인격적인 변화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하고,

활동주의(Activism) 복음을 전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선교, 전도, 사회적 참여 등 다양한 형태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 예를 들어 성공회 사제가 된 존 웨슬리(John Wesley)1735, 미국 조지아주로 전도여행을 떠나던 중 대서양을 건너며 큰 풍랑을 만났다. 이때 웨슬리는 격렬한 폭풍우 속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모라비안들은 폭풍 속에서도 두려움 이란 조금도 없이 아주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들의 강한 믿음과 신뢰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은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깨우치게 된다. 이 경험은 웨슬리의 신앙 여정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후 이후 모라비안들과 교류하였고, 1738년에 경건주의 지도자인 피터 뵈흘러(Peter Böhler)와 만나 경건의 삶에 대한 교훈을 듣다가 확고한 구원의 확신과 강력한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알더스게이트 회심’(Aldersgate Experience)이다. 웨슬레의 회심 체험은 곧 바로 행동하는 신앙의 양태를 드러냈다. 당시는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으로 구성된 농경사회에서 인클로져 운동(공공토지의 사유화)과 농업기술의 발전(시드 드릴 같은 농기계 사용)으로 많은 농업 노동자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산업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고, 초기 산업 사회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과 긴 노동 시간, 저 임금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곧 교회로부터 소외된 노동자 계층과 빈민들이 형성되었고, 회심 체험을 한 웨슬레는 이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신앙적 위로와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설교는 기존 교회의 형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난 개인적인 구원과 회심, 그리고 거룩한 삶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감리교 운동을 일으켰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장시간 투입된 노동현장에 머물며 심신이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거나 성도들 간의 교제의 시간을 대부분 산업 현장에 빼앗기게 되었다. 자연히 주님을 향한 마음이 적어진 만큼 신앙의 양태 또한 나락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생산에 몰두하고 있는 산업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낮은 임금으로 인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삶에 지쳐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웨슬리의 사회적 지원은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게 했다. 웅장하고 높은 천장 아래에서 사제들이 집례하는 성만찬과 예배형식에 갇혀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느낄 수 없는 생동감 있는 현장의 메시지는 마치 주님 땅 이스라엘 이곳 저곳, 가난하고 병든 자를 찾아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흡사했을 것이다. 고전 정통적 양식을 깨뜨리고 어떤 예배 의식도 없는 산업현장에서 선포된 복음은 온전하지 못한 신앙으로 얼룩진 더러워진 마음과 원치 않은 죄의 행위들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죄책감, 거의 아사상태로 피폐해진 영혼에 찾아온 단비 같은 복음이었기에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는 은혜를 누리에게 충분한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그렇듯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대비 되는 또 하나의 운동을 복음주의에 포함시킨다. 그것은 웨슬리보다 약 10년 먼저 일어난 청교도 회중파 장로교회의 조나단 에드워즈로 말미암아 일어난 미국의 영적 대 각성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복음주의의 또 하나의 운동으로 기술하기를 좋아하지만, 미국의 메샤츄세스는 당시의 영국의 산업구조와 별 차이가 없었고 기후차이로 인해 대규모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상업, 수공업, 어업, 조선업, 해운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으나, 최초 영적 대각성이 일어난 조나단 에드워즈 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등지는 대부분 자급 자족의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그릅별 성경 공부와 풍부한 교제를 겸하여 제공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게 했고, 대중이 함께 모이는 예배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쏟아지는 설교에서 회중들은 회심으로 각성이 폭발했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대각성은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도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하나로 묶어 복음주의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베빙턴의 정의는 복음주의 운동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지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의 정의가 신학적 정체성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종교개혁의 전통이 계몽주의 사회의 변화 물결에 적용하지 못하여 나타난 기독교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곧 산업사회 구조가 변화되고 있는 인류 삶의 형태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기독교적인 사유를 통한 부흥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왜곡된 시각으로 복음주의 운동을 평가하기 때문에 복음주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복음주의를 정의하자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엄격한 의미에서 18세기 초 영국의 웨슬레의 영향으로 일어난 감리교 운동을 기점으로 하고, 이전의 복음주의를 마르틴 루터의 탈 카톨릭 복음주의, 이후를 회심 체험과 산업화 영향을 받아 사회참여 운동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으로 시작된 복음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웨슬리는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의 디릭 코른 헤르트(Dirck Volckertszoon Coornhert 1522-1590)의 영향을 받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신앙적 선택의 자유와, 회심을 통한 성화를 강조한 웨슬리안 복음주의 운동의 중요한 요소로부터 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 포괄적으로는 이 운동은 18세기 초부터 일어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 종교개혁의 전통과 영국의 성공회, 모라비안 경건주의, 재 세레파, 심지어는 로만 카톨릭의 신학적 영향까지 조정하고 통합하려는 중심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 개인의 신앙 경험, 성경에 대한 강조, 이를 통한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사고에서 출발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주의 사상을 옷 입은 교회운동의 변화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