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누가가 말하는 방언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16

2. 누가가 말하는 방언.

 

1). 어원 연구

 

방언 Υλωδσαιδη, (tongue, 언어 말, language, 혀의 의미로, 7:33, 35, 1;64, 16:24, 2:3, 3:13, 14:11, 고전 14:9, 1:26, 3:5, 6:8, 벧전 3:10, 요일 3:18, 16:10, 방언의 의미, 16;17, 2:4, 11, 10:46, 19:6, 고전 12;10, 28, 30, 13:1,8, 14:2,4,5,6,13, 14, 18,19, 22,23,26,27,39, 5:9, 7:9, 10:11, 13:7, 14:6, 17:15 입술의 의미로, 2:26 입의 의미로, 2:11,) 에서 성경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누가가 사용하는 사도행전 2:5-13절 사이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언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표현된 διαλέκτω (언어), 다음은 신비한 언어로 표현되는 2:4; 10:46; 19:6δ에서 동일하게 사용된 γλώσσαις, 2:5-13에서 구분하여 사용하므로 두 단어의 의미를 엄격히 구분 짓지 않았다(한글 개역 성경은 두 단어를 동일하게 방언으로 번역하였음). 그렇다면 당시에 이 두 단어는 어떤 개념으로 이용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당시의 문헌들을 찾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γλώσσαις는 혀로 번역하고, 언어, 혹은 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반면 διαλέκτω는 사도행전에서 누가만이 사용한 언어(1:19, 2:6,8, 21:40. 22:2, 26:14)로 분명하게 지방 사투리를 언급한 곳에서 사용되었다. 사실상 성경에서는 누가를 제외하고는 요한과 바울, 그리고 마가가 γλώσσαις를 사용하였는데 그 언어의 의미는 혀, 언어, , 등을 의미할 때 사용된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전형적인 헬라 교육을 받고 헬라의 사상을 가진 누가와 유대인이면서 헬라 언어 일반적으로 사용한 요한과 바울이나 마가에 의해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한다.

 

2). 성령 강림의 표징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회개의 효과는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고(고후5:17) 그 사람으로 새로운 문화를 세상에 만들어내게 한다.1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변화를 전제하고 시작된다.

왜냐하면 변화 되어야만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으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렸으며, 전적으로 죄밖에 행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죄의 노예에서 의의 노예로 변화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진리에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하셨다(3:5).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들이 교회 내에 존재해 왔다. 성령 강림과 역사 하심에 따라서 경건주의로, 지나친 신비주의로, 지나친 편견으로 치우치는 여러 형태들의 교회가 나타났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라는 이름하에 각자가 성령 강림의 체험을 주장하고 있지만 어느 단체가 참으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인지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함부로 확인하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역사와 인간의 변화는 교회 안에서 항상 깊은 관심거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변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2:41). 그 변화의 요인은 곧 성령 강림하심으로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이며(3:5-6), 성령께서 사람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하고(8:9), 하나님이 아들이 되게했다(로마서 8:16). 아담 이후 죄인으로 태어난 어두움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한 그 표징은 가시적인 현상인, 불의 혀같이 그들에게 임함으로부터였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이전의 삶과 의식으로부터 철저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이전에 약속하신 대로 주어진 권능에 의해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의식,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하는 대담성은 성령 강림의 표징으로 구별되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 또 하나의 기적적인 능력의 표적들이 그들을 따랐다. 베드로는 이런 질적인 변화 현상들이 요엘서에 약속된 대로 자기들에게 나타났음을 외쳤다(2:16-17).

 

3) 오순절 성령 기대와 강림

이방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던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의 전통과 율법의 가르침대로 삼대 명절을 지키려고 이방의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다. 그들이 정신의 중심이요.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은 그들에게 소원이었다. 그들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먼 거리를 피곤한 줄 모르고 달려왔던 사람들이다. 정신적인 고향을 발을 디딘 순례자들은 조상들이 해왔던 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성전 주위와 조상들의 숨결이 있는 신의 도성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감격하고 있다.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죽은지 50일째가 되는 날이었고 전통적으로 오순절, 혹은 맥추 절기를 지내려는 기쁨으로 술렁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안에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부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으며,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여기저기를 다니기도 하였고, 제자들이 있는 곳이면 항상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가 바람처럼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와 함께 했던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이 날마다 다락방에 모인다는 소문도 예루살렘 안에 가득하였다. 많은 이방에서 살던 순례 객들은 이 이야기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죽음 사람의 부활과 제자들이 함께 모이는 다락방의 소문이 확산 될수록 평민층 유대인들이나 이방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깊은 관심이 되었다. 그들이 속죄의 제사와 맥추 감사 제사를 드리고 성전의 이곳 저 곳을 살피던 가운데 다락방에서 일어난 소란스러운 일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 달려온 순례자들이 다락방에서 일어난 소란을 구경하기 모여들자 다락방은 그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회당 예배를 통하여 토라 와 미쉬나 등을 외우며 신앙을 성장하였고,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신의 강림하여 사람들을 능력 있게 하고 예언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한 다락방에서의 성령 역사는 전체 관심 자들을 운동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신의 강림 사건을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순례자들이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의 강림을 확실히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막연한 추측으로나 혹은 전승, 그리고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해 구약의 교육에서 하나님의 신이 강림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대로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 강림을 이해하려했을 것이며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모여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여든 유대인들은 자기들 앞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하심이 예언의 성취와 관계있다고 말하는 베드로의 말을 쉽사리 동의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지도 못한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소수의 무리들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려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한 제120문도들은 일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심을 외치며,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광과 재림의 약속을 외쳐 댔다. 거기에다 베드로의 요엘서 적용은 그들을 약간 당혹케 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에게서 놀랄 만한 행동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방언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방언의 역사는 참으로 독특한 역사였으며, 신기한 일이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행동을 놀라운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현대 교회에서도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들의 언어는 통역하는 자가 없어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이방언어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음이 통하였고 그들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눈과 눈으로 말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확실히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가깝게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120문도들이나 사도들이 분명히 사도들이 갈릴리 사투리로 말하는데 그들의 귀에는 자기들이 살았던 이방 지역의 언어로 분명히 이해되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는 오순절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문도들에게만 역사 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한 타국에서 온 사람들과 여러 유대인들에게 임재 하셨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확실히 열어 주셨던 것이다1). 바로 이것이 방언의 역사였던 것이다(2:11). 더군다나 베드로가 일어서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선지자 요엘이 이미 예언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외친 것에 대해서 순례자들은 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고, 결국은 베드로의 외침에 굴복 당하여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것이다. 순례자들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2:41), 이후에 각 처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자신 속에서조차 사그라질 정도였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었던 것은 성경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오순절 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강조하여 성령의 임재의 표징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불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성령 강림의 결정적인 계기의 확신을 방언의 은사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누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1901년 아주사 거리의 감동 방언 역사를 제2의 오순절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초대교회 때 강림하신 오순절 성령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강림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방언이 성령 받은 중요한 표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정통적인 주장과 너무도 차이가 있었고 급기야 개신 교회를 양분시켜 놓고 말았다1).

성령 강림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과 동일하다고 믿는 오순절 주의자들과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처하던 수많은 정통주의자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의 주장을 새로운 발견이나 혹은 성령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기존 교회와 신학에서 성령에 관한 관심이 미약했다고 판단하고 오순절주의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은 오늘도 자기에게 임하여 역사함은 물론 그때 나타난 성령의 은사, 성령 강림의 증거가 그들에게도 나타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성령의 증거는 초대교회에서나 지금이나 방언으로 나타난다는 적극적인 주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교회에 팽배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령 강림의 표징은 그것이 실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든, 성경에서 주장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현상이든지 관계없이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전혀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을지라도 성경에서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역사를 참된 역사라고 말할 것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성경을 존중 할 것인가? 아니면 나타난 현상을 성경 이상의 권위에 둘 것인가? 를 선택해야 하는 귀로에 놓인 것이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현상은 그것이 비록 성령의 역사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한다. 성령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방법을 자의로 취하시지 않을 것을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다2).

 

그러나 제2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경을 해석 적용해야만 하는데, 오순절 주의자들과 이를 동조하는 일부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적용을 하는데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성령 강림의 표징이 왜 방언이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를 확인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적용했다. 그래서 오순절 주의자들에게는 방언이 성령 강림의 표징이라고 말하고 방언이 아닌 다른 은사와 신유 그리고 예언, 이런 은사 등으로 성령 충만을 나타내지 않았고, 당시 다락방의 120문도들에게 반드시 방언이 나타나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체, 방언과 성령 강림을 도식화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게된 것이다.

 

다락방의 120문도들은 주님이 약속한 성령이 강림하기를 기대하고 기도하였다.3)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이전에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기다린 제자들과 120문도들은 성령이 강림하신 표징으로 방언 하기를 기대하였던가?

그렇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방언 은사라는 것이 유대교와 120문도들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의 지식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강림한다는 구약적 배경의 예언자적인 강림과, 그들의 눈으로 지켜본 주님께 임하신 능력의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할 것이라고 기대했었을 것이다.

주님께 임한 하나님의 영은 이적과 능력을 행하였고, 죽음 위에서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하나님의 신이 임한 주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능력을 행하셨으며, 죽음 가운데에서도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임한 성령은 그들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하여야 한다

필자가 확인하바에 의하면, 누가는 성령께서 강림하시던 때에 제자들과 120문도들은 자기들이 방언을 말한다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방언은 청자 입장에서 방언이었지 화자 편에서는 방언을 전혀 언급할 방법조차 난감했었다.

그것은 청자가 너무도 뜻밖의 반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의 표징은 뜻밖의 반응이 아니었고 당시 환경에 가장 필요한 은사였다.

가령 성령께서 그들에게 예언을 하도록 하게 하는 은사가 필요했거나, 가장 시급하게 치료의 은사를 드러내야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런 능력을 우선적으로 나타내셨을 것이다.1)

그런데 오순절 다락방에서 120문도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방언이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셔서 복음 전도의 일을 시행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10일만에 성취되었고 120문도들은 증거 자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처음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가 기록한 성령 강림의 사건과 오순절 주의자들의 주장은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너무도 판이하게 달랐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의 표징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계시의 객관적 적용과 주관적 적용을 확실히 판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한 문자적 의미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그 위에 분명히 임하였으며, 구원의 확신된 증거들이 자신의 삶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나타난 구원을 불신하고 새로 나타난 불확실한 현상을 확실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들은 은혜의 교리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고 믿음에 관해서 문외한이다. 그들은 어떻게 믿고있으며 무엇을 믿으며 또한 자기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조차 무지하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거듭남을 누리기보다는 자기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을 그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마저 마음속에서 히미 해지자 히브리인들처럼 표적을 쫓아가다가 오류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고전 1:22, 12:39)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자신 위에 임하기를 밤 낮 없이 부르짖는 것이다. 그들은 열정적인 부르짖음이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진동이나, 황홀경의 현상이나, 이상한 혀의 반응이 나타나면 순식간에 방언의 현상으로 몰입한다. 이 현상을 성령 체험이라고 주장하고 성령을 받았다는 기쁨에 몰입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현상이 성령 강림의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자신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언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을 의미하는 뜻을 마음대로 삽입하여 마치 능숙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같이 유창하게 입을 놀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일인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뜻을 자신도 모르고 또한 듣는 사람도 이해 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성령께서 지금 역사 하셔서 자기들의 영의 소원을 기도로 하나님께 직접 교통한다고 한다. 그들은 마음의 저주를 하나님께 기도했는지 또는 축복을 기도했는지 전혀 모른다. 다만 자기의 마음의 생각대로 이런 기도를 한다고 추측만 할뿐이다. 또한 그것이 성령의 충만한 현상임을 너무도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4:2이하에서 언급한 바울의 주장과 동일시하면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성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너무도 굳게 확신하고 있다. 성령 은사에 심취된 어떤 신자라 자처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은사적 행위를 천사의 언어와 동일시하는 놀라운 헤프닝이 연속되고 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그런 방법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받을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인지,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런 행위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가?

보수주의 노선이나 자유주의 노선이나 심지어 카톨릭 교회까지 방언은 경쟁을 하듯이 확산되고, 심지어 이방 종교까지 거의 종교적 보편성에 몰입되어 가고 있는 이런 현상을 동일하게 성령의 역사 하심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들은 심지어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은 자들이 기독교를 흉내내는 것은 영적으로 사단의 조작이라고 판단하고 이교들의 행위를 정죄 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확산되어가고, 정통 보수주의를 수구하던 교회 마저 하나씩 문들을 열어졎혀 방언 현상을 거의 신앙의 규범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4) 현대 교회에서의 성령 강림 이해와 사도행전 2

이제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열심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신앙이 견고하고, 열심히 있어 보이는 신자들에게서는 의례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살필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빠질 수 없는 한 단계가 되었다.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성령 강림(성령을 받아야 되고)과 방언의 은사가 응답의 표현처럼 인식하고 있고, 방언의 은사는 곧 기도의 응답으로 연결된다. 더 나아가서 은사를 받은 방언으로 기도할 경우 응답의 속도 또한 고속 적이라고까지 믿고 있다. 심지어는 이런 기도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까지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더군다나 방언으로 기도한 것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선지자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까지 한다. 이처럼 방언이 신자의 생활 속에 깊속히 파고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심지어 구원과 아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까지 인식되어,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지 않은 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자부심도 잃어버릴 정도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가면서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신앙 생활의 한 단면이 되었다. 이것은 신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메말라 있는가 살필 수 있는 근거다. 실지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해 있는 실정이다. 거기에다가 신자들의 신앙욕구를 해소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극단적인 형태에 치우치게된 것이다1).

성경은 누가가 말하는 방언의 현상이 누구에게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관계 있다2).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의식되고 있는 성령 강림의 은사는 신자의 주관적 의사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원하시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열심만 있으면 방언은 얼마든지 나타나고 누구든지 열심을 가지고 방언을 위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방언은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정말로 오늘날 신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방언이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방언은 어떤 현상인가3)?

그리고 그 방언은 다른 성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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