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사도행전에서의 방언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18

3. 사도행전에서의 방언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주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도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주님의 혈족과 동일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다. 만약 누가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유대의 지식인들에게 밝혀지고, 그들에게 누가의 글이 전달되었다거나, 읽혀졌다면, 이방인의 손으로 교회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님은 더욱 배척을 받게 되었을 것은 뻔한 사실이다. 다행히 교회가 왕성해진 후에 기록되었거나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유대인들에게 읽혀졌거나 데오빌로에게 전한 글이기에 천만 다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사도들의 증언과 동등하게 여김을 받고 있는 것은 누가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였고, 또한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이적과 기적을 기록했으며, 교회의 확장되는 모습을 기록했다는 점과 성령의 역사 하심을 생생하게 역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인정을 받고 있다. 아마도 성령께서는 누가로 하여금 자신을 분명히 증거 하게 했고, 그리고 후에 누가의 기록을 인정받도록 역사 하셨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이유가 사도적 증언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성령께서 누가에게 말하도록 그의 입에 말을 담아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령께서 누가로 말미암아 직접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말씀하시는 분명한 인격적 증언에 있어서 사도적이며 성령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방인인 누가의 전 인격을 빌려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지고 있는 증언을 듣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누가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로 말미암아 기록하게 한 말씀을 읽지 못하느냐”

“어찌 너희가 마음의 죄악에 따라 헛된 것을 쫓느냐” 라고 책망하신다1).


성령께서 “누가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가의 인격을 전혀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누가를 빌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오히려 누가의 사상, 지식, 인격, 성품을 통하여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뜻을 전달하게 하신다. 그렇다고 누가의 의도가 성령의 의도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성령의 의도는 전체 성경이 의미하는 또 다른 의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주경 함에  있어서 성경의 의도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객관적인 계시 적용의 본문과 주관적인 계시 적용의 본문을 엄격히 구분하여 해석하여야 할 것도 겸하여 주의해야만 한다.  

 

1) 누가의 방언 언급


(1) 오순절 성령 강림과 방언

 

첫째 , 오순절 다락방에 나타난 성령세례와 방언이 누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제 우리는 누가에게 증거한 성령의 간섭을 살펴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만큼 누가의 사상과 배경 그리고 그의 환경이 기록에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 하시는 성령의 의도가 실려 있음을 충분히 말했기 때문이다. 누가가 사도행전 2:4에서 처음으로 방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함이라”)

물론 누가의 기록 순서에 따른 계시사적인 연구는 필연적이다1). 계시사적인 연구란?2) 성육신, 부활, 속죄와 같은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사건이 어떻게 개인에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3).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의 주제가 실지로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성령의 계시 행위로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에게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적용되었는가? 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에 다시 한번 접근함에 있어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에게 적용된 환경과 실제적인 사실과 깊은 관계를 통하여 기록으로 남겨진 자료를 면밀히 검토함으로 가장 바람직한 성경의 견해에 우리를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기록의 내용이 적용을 받았던 때가 개인적인 환경일지라도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적용된 환경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객관적인 경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본서의 연구를 부추겨 왔을지 모른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사건들과 간접경험을 가지므로 누구에게나 분명한 확신을 주고 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지식으로 판단해서 성경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기보다는 해석해서 적용하려 하기 때문에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건들을 해석해서 확신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여러 면에 있어서 부족하지만 연구 문제에 대한 적절한 답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누가의 회심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이방인이며 의사라는 점을 들어 바울이 첫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두 번째 사역을4) 시작한 안디옥에서 회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디옥에서 회심한 누가는 곧 바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고, 바울이 질환으로 인해 누가가 그를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목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방언을 기록한 누가는 어디에서 성령 강림과 방언의 은사 현장을 체험하게 되었는가? 그는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 사건(행 19:6) 때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바울이 여러 여행을 하는 동안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령 강림 사건이었다. 그가 바울에게 나타난 여러 가지 이적과 표적들을 보았으나 방언 현상은 경험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세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오순절이나 베드로에게 나타난 고넬료의 집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어떤 증언자에게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확신하게 되었을 뿐,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행 1:1-5:41), 가이샤랴의 빌립 다수(행 5:42-12:25), 그리고 바울과 누가(13:1-28:31) 중심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의 기록의 중심은 오순절 성령 강림2:4, 고넬료집 에서 성령 강림 10:44-46, 에베소 성령 강림19:6이 중심이 되는 내용이 된다. 이 세 사건 사이에는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누가의 의도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 누가에게는 방언에 관해서 상당한 의중을 실려 있었으며, 독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것으로 무엇인가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독자들은 누가의 글을 읽고 자기들의 의심을 말끔히 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성령 행전이라고 말하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는 왜 독자인 데오빌로에게는 이와 같은 내용의 중심을 증거하고 있는가? 데오빌로에 대해서는 분명한 신분의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가 그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아시아에 있는 여러 성도인지, 아니면 누가의 친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데오빌로는 누가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회의에 깊이 빠져 있다. 그러나 누가의 입장에서 보면 데오빌로 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도한 전 지역에서 여러 사람들이 동일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도 충분히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의 사도권 문제에서 온 것이다. 이 문제는 바울 자신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가 교회에 서신마다 주장하고 있는 것과 특히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 누가와 함께 있으면서 경험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배타한 사건 등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바울의 사도성을 가장 확실히 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데 그 중에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의 성령 강림과 에베소에서 바울의 성령 강림 사건이 분명히 일치하게 연결하여 베드로와 바울은 사도로서 동등하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도록 증거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 하심과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변증하려는 강력한 누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들(데올빌로나 여러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현혹되고 있는 상황에 누가가 글을 보낸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는 데오빌로가 고민하고 있는 신앙에서 회의에 빠진 문제를 해소해주려고 백방으로 뛰면서 조사 한 후 사건들의 진실을 확인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바울의 사도성을 증명해야하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과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 현상을 주목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성령 강림과 방언은 일치한 사건가운데 하나였음을 발견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변증의 자료로 사용한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자신이 경험한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이 오순절,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서의 방언에 대한 동일한 현상임을 연결하고 있다.1)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 나타난 방언의 역사는 사도들과 같은 것이었고, 여러분이 사도가 아닌가 해서 회의에 빠져 고민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사도성은 진실한 것입니다.(고후 12: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고넬료 집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에베소와 동일하게 연결하고자 할 때, 그 사건의 명확성을 조사하지 않고, 개인적인 사사로운 견해나 주관적인 경험이 증거를 바탕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증거들을 들었을 때, 명확성에 대한 조사도 없이 에베소와 동일한 사건으로 취급하려 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기록자는 단순히 확인 가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해서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는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았음이 그의 글 서두에 분명히 드러난다(눅 1“3-4).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누가의 증거가 분명한 것으로 인정하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배경을 포함해서 증거 하게 하셨고 확실한 증거 가운데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록된 성경의 증거가 얼마나 명확하며 또한 진리인지 우리는 곧 알게 된다.

 

두 번째, 누가가 사도행전 2:4 이하의 방언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누가는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 것과 사람들이 새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 나라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을 기록하고 있다. 자기가 모시던 바울은 이런 나라들을 선포하고 다녔다.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라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새 나라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던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의가 제기되고 바울의 환경이 극히 인간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혀 누가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에서 바울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그 원인으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2년 동안 로마의 감옥에 갇힌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일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불행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이 일은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어도 곧 풀려나서 복음을 전하게 된 반면 바울은 옥에 갇히게 되자 풀려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는 함께 하시나 바울은 인정하지 않았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자신의 복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로마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과 자신의 사도권의 문제로 인해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바울의 관계는 미미하게나마 적대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이유들과 계속되는 바울의 투옥 생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개종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데오빌로도 이 병에 감염되었고, 결국은 신앙마져 흔들리고 있었다.

 

(2) 사도의 조건과 바울


누가는 데오빌로와 성도들에게 바울의 사도권 문제에 대해서 확신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바울이 진정으로 사도들과 동등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바울의 사도권에 관하여 제기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누가는 나름대로 문제점들을 파해쳐 보았다.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는가?

누가는 사도의 조건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도행전 제 1장 21절~26에서 적고 있다.

이 자료는 누가가 직접 경험한 자료가 아니다.  누가는 사도의 조건에 합당한 자를 선택하는 자리와  맛디아가 가롯유다를 대신해서 12사도 중 한사람으로 선택된 그자리에 있지 않았다. 당시 누가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

누가는 이 자료를 누구로 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로 기록하면서  이 자료의 내용이 사도의 조건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이 자료는 12사도들 가운데 인식되고 있었으며, 교회의 공동체에는 이미 널리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자료는 사도의 조건으로 “주님과 3년 동안 동행하였고, 그의 죽으심과 승천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고, 사십일 동안 주님과 함께 한 자" 로서 규정하고 있다.(행 1:21-22)고 말했다. 그것은 가룟 유다가 제자 중에서 탈락되어 사도가 되지 못함으로 부득이 사도의 수에 가입할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조건이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사도의 수에 가입할 제자를 선택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자주 12 제자를 언급하셨고 지금 그들의 수는 11사람 뿐이므로 부득이 12사도의 수를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은 제자들은 제자의 조건에 합당한 두 사람을 찾아 그 중에 제비뽑아 맛디아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음을 보고 당황하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말을 할 필요가 있어서 사도행전의 서두에 기록함으로써 바울사도의 사도권에 관한 변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이것을 중점으로 변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도행전의 내용은 온전히 성령께서 기록되게하심을 증명하게 된다.누가가 이점을 기록함에 있어서 교회에 해를 끼치는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누가가 단순히 성령 강림만을 기록하려 한다면 사도의 선택에 관한 것은 무시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누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바울의 사도권을 변증하려 했기 때문에 사도로 선택을 받은 것은 맛디아 보다는 바울을 더 언급하려고 주장하려 했던 것이다1). 누가의 주장은 주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도 바울과 같이 사도를 부르시지는 않았다. 혹 교회에서 어떤 유능한 전도자가 있어 바울과 같이 뜨거운 사도적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일군으로 선택받았을지라도 바울에게 나타난 것과 같이 부르시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하게 된 의도에는 성령께서 직접 부르신 바울의 선택을 다른 사도들의 선택과 구분하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맛디아와 바울은 사도로 선택받음에 있어서 어떻게 다른가? 두 사람에게는 사도로서의 조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맛디아는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으나 바울은 전혀 조건에 해당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바울의 사도권이 얼마나 인정받지 못했는지 확실히 인정되는 샘이다.


누가는 주님으로부터 사도의 사명을 직접 받았다는 증거를 기억하고 다시 몇 가지를 조사하였다.

첫째는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사역과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서의 차이점을 조사한 것이다. 만약 바울의 사도성이 온전히 주장하려면,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가르침이 다른 사도들과 일치하여야 한다. 그런데 유난히 독특하게 나타난 오순절의 방언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할 만한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게만 나타난 독특한 능력이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사도들을 포함하여 여러 능력자들이 있었으나 실지로 사도들에게 나타난 독특한 사역은 확실히 구분되어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나타난 사건과 같은 역사는 사도들에게만 나타난 독특한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집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는 이것을 확실히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증거로 바울의 사도성을 부각하려 했던 것은 분명한 누가의 의도였다.

실지로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바울에게는 객관적인 사도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바울에게 나타난 능력이나, 성령 강림을 위한 기도는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난 능력과 동등하게 나타난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을 목격하거나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난 능력과 성령의 역사와 같이 바울에게도 동일하게 역사 하셨다. 게다가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공격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확실히 주장했고, 바울이 서신을 보내는 곳마다 자신의 사도성을 그리스도의 권위로 확실히 강조하였다. 실지로 바울에게 나타나는 성령 강림의 현상들은 사도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이방인에게 전할 때마다 많은 능력들이 나타났었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누가는 바울의 사도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으려 가는 길은 험난하고, 또한 비난받는 길이었다. 바울의 갇혀 있는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 하심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했다.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저가 하나님의 종이며 사도라면 어떻게 자유를 얻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하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이 지적인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바울을 사도의 자격에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오해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확장되었고, 결국에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는 해를 가져온 것이다.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서 등을 돌렸다. 누가가 로마에서 바울을 두고 안디옥에 돌아왔을 때 안디옥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가의 기록은 바울을 변증하기 위해서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의 부활 후 사십일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약속으로 시작하고 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이전에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분부한대로 기도하고 있을 때 약속대로 성령은 그들 위에 강림하였다. 성령이 강림하자 사도들의 인격과 행동에 큰 변화가 왔다. 사도들의 본래의 성품이 사라지고 담대해졌으며, 권세를 가진 사람으로 변했다. 그의 입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과감히 선포했고,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마다 이적과 기적이 예수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약속한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성취되어졌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약속의 내용 통해서 바울의 사도권을 증거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누가가 곁에서 지켜 볼때 바울에게는 1장 8절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바울의 사도권을 증거하기에 더 없이 적합한 내용이었고, 이런 역사들이 성령께서 함께 하시므로 일어났었다고 말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이 없었다. 이런 이유들이 사도행전을 기록하려는 누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바울 사도가 항상 강조한 새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에게만 임하였고(사도행전 2:41; 28:25) 그 종말이 영원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세 번째, 에베소 교회에서의 성령 강림 경험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누가뿐만 아니라 바울도 마찬가지다. 누가와 바울이 성령 강림을 경험한 것은 에베소에서였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고린도에서 건너온 협력자들과 함께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2) 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을 지나 북부 갈라디아를 다녀서 에베소로 돌아오고 있을때다3). 그때 에베소에는 요한의 세례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파하면서 유난히 유대인을 이기는 아볼로 일행이 있었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이들을 만나게 되어 관계를 가졌고, 이들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참석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들은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자기의 집으로 초청하여 그리스도의 도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일러주고 추천하여 고린도로 보냈다.4)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건너간 아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인정을 받아 새로운 그룹을 형성할 수 있었고, 교회중에 얼마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였고 브리스길라와 다른 일행들의 안내로 아볼로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몇마디로 묻고나서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말하자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때 바울은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고 이어서 안수하자 성령이 강림하는 역사가 나타났다(사도행전 19:6). 누가는 여러해를 바울과 함께 다녔지만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처음 경험한 것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바울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성령 강림의 역사가 바로 이때 나타난 것이다. 이곳에서 나타난 성령 강림의 사건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난 것5)과 같은 동일한 사건이었지만 누가의 의식으로 이것이 오순절과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의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다. 이것은 필자가 자주 강조하는 성경에서 말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누가는 에베소에서 바울로 말미암아 목격한 성령 강림이 오순절이나 주의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라고 판단하게된 것은 아마도 오순절 성령 강림과 사도들로 말미암은 성령 강림에 관한 이야기를 구전으로 듣게 되었을때든지, 아니면 오순절때 성령 강림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를 들으며 바울의 성령 강림과 비교할 때였다. 만약 이런 과정이 없이 누가가 오순절 성령 강림과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을 동일하게 연결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2) 사도행전 2장 자료와 누가의 판단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은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 매대인과, 엘람인과,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대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8-11).


  이 본문에서는 방언에 관한 언급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에 관한 분명한 정의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 본문을 해석한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이 가지 각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속에서는 방언에 관하여 자세한 자료들이 제시되고 어떤 독자라도 쉽게 방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사건의 당사자들인 이방의 여러지역에서 순례를 위해 모여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다.

이 본문은 유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아니면 유대인들의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사도행전 2장 전체의 자료를 누가에게 전달해준 사람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이것을 계시사를 중심으로 연구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는 성령께서 강림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성령 강림의 객관적 계시이다. 이 계시를 수납한 사람들은 사건의 당사자들이고 이 계시는 객관적인 계시가 된다. 그러나 이 객관적인 계시를 제 이차로 전달되어 동일한 결과를 얻게하는 것을 주관적 계시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계시는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도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누가나 바울은 이 계시에 대해서는 주관적 적용자가 되어야 한다. 객관적 계시는 이미 역사를 마쳤다. 이제는 이 계시가 적용자에게 다시 동일한 효과를 얻기위해서는 객관적 계시의 적용자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바울이나 누가는 이 계시의 사건을 객관적 계시의 적용자에게 전달을 받아야만 한다.

두 번째 객관적 계시의 적용자로부터 전승 되어야만 한다. 누가는 계시의 정확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사건의 직접적인 적용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분명하고 확실한 자료를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므로 독자가 의혹을 품고있는 문제를 해소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상당히 진지하게 대화를 주고 받는다. 상황 설명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방대하다. 누가는 자기에게 오순절의 성령 강림 당시를 상황을 증거하는 사람에게 몇가지 중요한 사항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역역히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증언자가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해서 말하는 동안 자신이 에베소의 경험을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증거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질문한다.

방언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무슨 말을 했습니까?

성령 강림의 현상은 어떠했습니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소상한 답변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진지한 표정들이 상상되곤 한다.


본문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1백20문도 앞에 있던 순례자들에게도 성령은 강림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에게 강림한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제자들로부터 듣는 언어가 자기들의 귀에는 자기들이 살던 지방의 언어로 들려왔다. 그러므로 두 언어를 동시에 해석하고 들을 수 있었는데 제자들의 입에서는 갈릴리 사투리가, 자기들의 귀에는 자기들의 지방언어가 들려 온 것이다. 이 언어는 마음으로 이해되는 언어였다. 제자들의 갈릴리 사투리가 자기들의 귀에 들어올 때 마음에서 울리는 음성으로 감동있게 들려온 것이다. 누가에게 이 사실을 증거하는 사람은 사도들이 말한 방언을 듣고 있는 청자(순례자)입장에서 누가에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증거자의 증거 내용을 사실대로 전혀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믿으면서 이 글의 독자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마치 누가 자신이 오순절의 사건을 경험하는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말대로 성령께서는 16개국 청자들의 귀에 역사 하셨고, 120문도들의 입에 역사 하셨다. 듣는 자나 말하는 자에게 동시에 역사 하셨다. 객관적인 계시는 하나님께서 필요로하고 선택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1)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객관적인 계시가 적용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120문도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을 비난하고 그들의 현상을 술취한 사람들의 소란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증거자는 누가에게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말했다.2) 그렇다면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성령 충만의 현상은 1백20문도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한 선택된 사람들의 귀에도 분명히 역사했을 뿐, 어떤이들에게는 역사 하지 않았다고 증거하는 샘이다. 사도들과 120문도들이 갈릴리 사투리로 말했고 순례자들이 자기들의 난곳의 말로 들었다면, 이것은 분명히 성령께서 사람의 입을 사용하여 음성으로 말한 것이 분명하다. 증거자는 이것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행2:4)”라고 말했다. 이 언어는 말그대로 신비했기 때문에 언어가 상이한 사람들끼리 아무런 장벽이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입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시고 듣는자에게 이해시켜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몰랐던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증거하는 기적적인 역사였다.3)

그러면 성령께서는 왜 이 장벽을 허물어야 하셨는가?

인간의 교만과 타락으로 높은 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인간들의 언어 혼잡 심판이 이루어졌다. 한 민족과 한조상을 가진 인간은 서로 해어지고 떨어져 살았다. 그들은 같이 있으면서도 언어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불편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임을 선포해야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인 다락방에는 언어문제로 의사가 통용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이 긴박한 상황을 기적적으로 해소해야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선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 하셔서 막혔던 언어가 해소 되어지게 하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이다4).

이런 역사적인 사건의 객관적 계시가 바울과 누가는 경험하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게 되었고 오해를 받았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에베소에서 바울이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나타난 성령 강림과 일치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점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바울의 사도성 증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에베소와 오순절의 두 사건이 일치점을 찾지못하고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면 바울의 사도성을 변증하려는 누가의 의도는 불만족스런 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바울에게 나타난 에베소의 성령 강림을 사도적인 것이라고 말하기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고 바울의 사도성 마져 심각하게 도전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증거자의 증거를 들으면서 에베소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떠올린다. 성령이 강림했을 때 나타난 가시적인 현상, 성령을 받은 아볼로의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현상, 그리고 누가 자신이 그 방언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마음에 역사한 성령의 이해하심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비교해 보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에베소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방언의 종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현상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가 증거자로부터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현상에대해서 증거를 받았을 때 그 증거는 자기가 에베소에서 경험한 사건과 일치한 성령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행 10:45-46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았던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


누가는 행 10:44 이하에서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방언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방언에 대한 언급은 특이하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에게 임한 성령 강림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록에는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종류의 현상과 일치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모두 네곳에서 성령 강림을 기록하는데 예루살렘, 사마리아, 가이샤라, 에베소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께서 직접 강림하신 것을 증거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에서는 사도들의 역할을 이용한 간접 강림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의 의도로는 이 성령 강림의  간접 강림은 사도에게만 나타났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의도가 있었거나 아니면 독자들이나 보편적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들에 의해서만 간접 강림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스데반 집사나 혹은 빌립 집사들을 이용해서는 성령이 강림했다는 이야기가 인정되지 않았거나 전혀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증거로 보아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 외에는 성령이 가시적으로 강림하였다는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오직 바울에게 사도들에게 나타난 간접 강림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증거하는 누가의 의도를 살필수 있는 것이다. 이런점으로 보아 누가의 기록 의도에는 바울의 사도권 변증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고넬료는 이방인의 백부장이었다. 누가는 이방인인 고넬료 가족에게 나타난 방언 언어도 어느 지역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가의 표현 방식에 따르면 증거자가 오순절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성령 강림의 역사가 고넬료의 집에서 나타났다고 증거하는 베드로의 말을 삽입하고 있다(11:15).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로마 군인(“이달리야대” 10:1)이였고 백부장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헬라언어는 능통할지 모르나 히브리언어는 능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팔레스틴지역에서는 히브리언어가 로마인들에게 통용되지 않았고 헬라어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베드로는 히브리인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특유의 갈릴리 사투리가 섞인 히브리언어를 구사하였거나 아니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공통어인 서투른 헬라어를 구사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언어적인 장벽이 있었다. 언어의 장벽이 있는 동안에 복음이 전달된다는 것은 극히 어려움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을 전달받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얻기위해 다른 언어의 장벽을 해소하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성령께서 개입하셨으므로 언어의 장벽은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 전하니 이 말씀 가운데 성령께서 가시적으로 그들 위에 내려오셨고 청자인 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여 베드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닫힌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때에 그들에게서 언어 장벽을 허물어졌다. 이것은 처음 오순절 때 있었던 것과 동일하게 역사했다. 확실한 것은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의 역사는 처음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제 고넬료의 집에 있는 다른 이방인들과 베드로와 함께한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언어적인 장벽이 사라졌다. 그것은 증거자가 보고 느낀대로 증거한 바와 같이 불의 혀5)같은 것이 그들 가운대 임재한 다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고넬료와 그의 가정 사람들은 이달리야 사람들이였거나 혹은 다른 지역의 이방인이였다. 그렇다면 이방인이 베드로와 대화 하기에는 언어적인 장벽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고 듣는데 상당히 지장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말끔히 해소해 주셨다. 이것이 곧 방언의 필요성인 것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6-7)


  에베소에서 바울로 말미암아 역사 하신 성령 강림을 기록한 누가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에게 변증하던 11:15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는 말을 삽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와 바울이 처음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가는 에베소의 성령 강림을 오순절과 고넬료의 집에서 강림한 역사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누가의 판단이 확실하게 성령 강림의 현상이 에베소에서와 고넬료의 집, 그리고 오순절과 사마리아에서 나타난 것이 일치하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3) 성령 강림과 “선 중생, 후 세례”


  성령 강림을 이해하는데 구속사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의 때가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언급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신학자들은 편견에 치우치거나 교리 중심으로 지나친 변증적인 입장으로 성경을 적용하려했기1)때문에 오히려 분명하고 일관적인 해석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다양한 관점을 하나로 모아서 거대한 논증과 해석의 열매를 찾아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관점은 결국 택스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열매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된 여러 해석들 가운데 취사 선택하는 기현상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때, 구속사에서 이루어진 진실한 사건에서 사건의 형태를 찾아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속사의 중심은 우선 성경 전체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의도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으나, 우선 성경의 저자가 기록 하려는 중심된 의도를 먼저 고려해서 해석하는 일이 바람직한 순서일 것이다.

최 갑종 교수는 ‘성령 강림에 관한 구속사의 중심’을 바람직하게 서두를 잡아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개혁신학의 변증자적인 입장으로 돌아가 구속사의 중심 위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논리로 일관된 편협한 주장으로 일관하고 말았다.2) 그러나 필자 말하고자 하는 성경 신학적인 접근, 곧 계시 의존적 사고나 구속사적인 해석도 엄격히 말하자면 편견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성경으로 변증하려는 사람은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있는 다양성의 결과일 것이다. 이 다양성은 사람의 편에 취한 관점이 있는가 하면, 진실로 성경입장에선 관점도 있다. 필자는 이와같이 여러 편견들 가운데 진실로 성경 입장에선 관점만이 모든 변증들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다.


가. 성경 입장에선 관점으로 누가의 성령 강림을 접근하고 성경이 말하는 해석으로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얻도록 하자.


우선적으로 우리가 알고자한 방언이 성령 강림의 사건중에 구속사의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느냐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누가는 방언의 능력이 나타나는 곧 마다 성령 강림에 대해서 말한다. 다시말하자면 성령 강림이 있는 곳에서 방언의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구속사적으로 에베소에서 누가에게 적용된 방언은 오순절과 베드로에게 나타난 고넬료 집에서의 방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누가의 관심은 그것들이 자기에게 적용되었던 성령 강림과 방언이 서로 일치한가에만 괌심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된 성령 강림과 방언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다. 누가는 자기의 기록,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그 어디에서도 자신이 사도들의 오순절과 고넬료의 가정, 사마리아 사람들,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임한 것과 같은 성령 강림을 체험하지 않았던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거듭 말하여 누가는 성령 강림의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서 믿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누가의 마음에 이미 계셔서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었던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이다.  


나. 성령 강림의 “선 중생”, “후 세례”라는 문제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저자에게 성령 강림이 어떻게 적용(주관적 계시의 적용)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은 경험하지 않은 객관적인 사실을 자신의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었으며, 확신하였다면 어느때에 확신하였는가?

필자는 창세기를 연구하면서 모세가 전승된 천지 창조 이야기를 내적으로 확신을 얻은 때가 언제인가 조사한적이 있었다3). 그가 자료들을 듣고 지식으로 확신을 가진 시점과 지식이 믿음으로 변화된 시점을 찾으려 성경을 여러번 뒤적거렸다. 그결과 모세와 천지 창조라는 관계를 직접 체험이 아닌 간접 체험 시점을 구체적으로 찾았을 때, 전승을 통한 지식과 믿음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처셔 전승을 얻었던 진리의 지식들을 믿음으로 승화 시키는 것이 성경에 자주 등장함을 보았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창세기 저자 모세는 시내산에서 창세기 전승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증거하시던 체험을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전승 이외의 불확실한 자료들과 확실한 자료들을 선택하도록 해 주셨다. 다시말한다면 모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듣기 이전까지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사람의 6일 창조에 대해서 수 없이 듣고 알았다. 그것은 아담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구전으로 구전으로 모세에게 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자의 증거가 있어서 마음에 확신을 가지기 이전에는 그져 불확실한 지식에 불과하였다. 그 지식은 모세에게 절대적인 능력을 갖도록 역사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나가서 하나님께서 6일 창조에 대해서 직접 증거하신 말씀을 들을 때,4)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5) 이 확신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누가는 바울을 따라 전도 여행을 하기전에 성령의 역사 하심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였다6). 그 지식들은 불확실한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는 정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성령 강림을 진실하게 확신한 때는 곧 성령 강림이 그에게 권위와 능력으로 적용된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가 성경을 기록하기 이전에 성령 강림을 어떻게 확신하였는지를 신학자들이 이해하지 않거나 조사 연구하지 않고서 성경의 저자와 성경이 가르치는 의도를 밝히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의 기록에는 자신이 성령 강림하시는 그 현장속에서 성령을 직접 경험하였던 그 장소와 시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사도들이나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에서 조차도 누가는 직접 적용받지 않았고, 심지어 에베소에서 조차도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이 자신에게 적용된 성령 강림의 역사가 아닌 객관적인 증거자로서의 체험뿐이었다7). 엄격히 말한다면 성령은 누가에게 직접 강림하신 계시적 사건은 없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어찌하여 성령 강림 사실을 직접 기록할 누가에게 직접적인 체험을 주시지 않았는가? 또 성령 강림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 누가가 어떻게 성령 강림 사실을 경험 사람과 같이 기록 할 수 있는가? 게다가 이와 같은 자료들이 어떻게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진리이며 계시의 책에 포함되어 있는가? 이것은 성령님만 아시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다. 누가에게는 객관적인 성령 강림을 신뢰하고 있는 믿음이 있었다.

누가는 이미 성령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성령은 이미 역사 하고 있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이 자신에게는 직접 적용을 받지 않아도 아볼로 제자들 보다 나은 확신을 가지고 오늘날 신학자들이 뜨겁게 불 필요한 논쟁에 휘말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선 중생”, “후 세례”에 휘말려야 하는 고충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누가에게 성령 강림은 믿음으로 직접 적용되었다”. 이것을 “계시가 믿음으로 신자에게 적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8). 이러한 사실은 오순절 성령이 임한 이후에 나타난 보편적인 증거들 중에 하나이고 오늘날 개혁교회의 신자들에게 나타난 현상이다. 또한 사도행전에 등장한 거듭난 사람들은 상당수가 성령 강림의 체험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믿음”이라는 불가사의한 계시를 통해서 체험보다 더 확실한 적용을 덧입은 것은 교회사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에게는 “선 중생” “후 세례”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가에게는 “선 중생”, “후 세례”라는 개념으로 성경을 기록하려는 의도는 전혀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은 그에게 문제의 초점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은 저자가 의도하지 아니한 전혀 엉뚱한 논쟁들을 끄집어내서 교회사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페이지를 매우고 있음을 보고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존경하는 신학자들이 저자인 누가를 통해서 문제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은 점을 지적하려 한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누가에게 성령이 강림하시는 객관적 계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도 성령은 누가와 함께계셨다. 그것은 바울이 누누히 말하는 성령께서 역사 하신 [믿음]9)이 성령 강림이라는 계시를 적용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사실들을 바울과 같이 동일하게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말들을 해왔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게 적용된 구속사의 한 중심인 성령 강림의 계시는 “선 중생”, “후 세례”라는 교리적인 논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이것은 마치 현대에 사는 우리가 1,990년이라는 긴 시간의 벽을 넘어서 육체로 임하신 모습을 보지 않아도 믿음으로 적용을 입은 것처럼, 누가에게도 믿음으로 이미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누가에게는 직접적인 성령 강림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성령은 그에게 이미 강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야 하는 환경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의 기록을 보면, 본질상 타락하여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성령 강림과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과 같다. 누가는 무엇인가 자신 앞에 다가온 문제에 흔들려 있었고, 많은 개종자들이 회의와 낙담에 빠져 있음을 보고 괴로워하고 있다. 만약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려는 목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에 도움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바울의 전기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기록한 것이라면 아무런 목표를 가지지 않은채 소설, 아니면 역사적인 자료중의 하나를 기록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자서전이나, 혹은 전기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 위기에 싸여있는 조국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모든 인생을 투자해버린 유명한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을 잠잠케 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사도성, 성령으로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실하게 알려져야 했다. 이 목적들이 사도행전을 기록해야할 진정한 의도였던 것이다.


4) 누가와 방언


지금까지 우리는 누가와 성령 강림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확인되었다. 이제는 누가와 방언에 관해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내적 활동이나 충만한 능력의 분출에 의해서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 강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하게 나타나는 곳마다 성령 강림과 방언의 능력의 나타남을 말하는 누가에게는 특별한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또한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실이 가시적인가 아니면,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현상이 성령 강림을 표현하는가? 만약 가시적이 아니고, 나타난 어떤 현상 때문에 사도들이 성령 강림이라고 말했다는 것인가? 이런 의미들을 밝혀주려고 방언을 분명히 언급하였다.엄격히 말하자면 오늘날에도 성령 강림을 말하는 주장들이 누가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의미로 계속성을 말하고 있는가? 누가는 성령 강림이 사도들에게만 나타난 독특한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바울이 사도였기때문에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과 동일한 사건이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임한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사적으로 살펴보면, 누가에게 성령 강림이 직접 적용되지 않았고, 간접적인 적용일때, 방언 역시 간접적인 적용임에 분명하다. 누가는 사도들로 말미암은 간접적인 성령 강림을 경험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방언도 직접 경험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객관적으로 체험한 성령 강림과 방언이 어느때 있었던 경험인가?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누가에게 객관적으로 체험된 성령 강림과 방언은 바울로 말미암아 나타난 에베소의 사건이다.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과 방언을 두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다. 그것이 비록 자신에게는 적용 되지는 않았고, 자신이 방언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아볼로 제자들이 말하는 방언을 분명히 들었고, 그 방언의 형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누가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방언을 객관적으로 체험되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

 

   (1) 누가와 사도 요한


     누가에게 객관적인 성령 강림의 체험을 준 사람이 사도행전 1:1-5:42까지를 누가에게 증거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1:1-5:42를 사도행전의 전반부라고 말한다. 1:1-5:42는 특정한 사람에게 자료를 받았는데, 그 자료 안에는 특정한 사람들이 여럿이 등장한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자료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본다. 그 배경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사도행전 1장의 특징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약속이라는 주제이다. 그중에 특히 요한의 세례에 대한 약속, 베드로의 사도 선택에 관한 제의,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 등을 자세하게 기억하여 누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베드로와 아주 가까이 있었던 다른 사도1)일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성령 강림을 확실히 마음에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은 요한복음의 저자일 가능성이 크다2)

둘째로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고 있다. 이 증거는 솔로몬 행각의 사건,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들을 자세하게 누가에게 말하고 있다. 누가는 분명히 두사도 외에 다른 사도들은 언급하지 않는다(3:1; 3:3, 4; 3:11; 4:19;) . 설사 다른 사도나 120문도 중의 몇 사람들이 사도를 따라갔다 하더라도 누가에게 전달된 전승은 두 사도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이 자료를 귀에 듣고 있을 때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핍박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격려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누가는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자는 사도 요한뿐이다. 당시 사도 요한은 안디옥 교회에서 동정녀 마리아와 함께 머물고 있었을 확율이 가장 크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가 누가에게 자료를 제고한 증거자임이 분명하다.

자료 전달자에 관한 주제는 성경의 기록과는 무관하다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누가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체험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과 방언을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방언을 동일한 계시의 사건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여러가지로 문제점들을 묻고 확인하는 검증 작업을 거쳤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방언의 현상을 단순이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증언으로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니 단순하게 “성령은 불의 혀 같이 각 사람 위에 임했고, 그 다음에 방언으로 말했다.”라고 증거한 것을 누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에베소에서 바울로 말미암아 아볼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 강림을 목격했는데, 그 사건과 어떤 점에서 차이점이 있는지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전혀 조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누가의 증거를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그런 자료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신에게 증거하는 증거자에게 질문하였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어떤 형태로 임했습니까?(이 질문은 가시적인가, 불 가시적인가를 묻습니다.)

둘째로,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에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였습니까?(충만한 형태의 모습을 묻고 있다.)

셋째로,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에 말한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그 말은 무슨 말이었으며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진지한 대화의 결과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도록 자료가 선택되어진다. 다시 말한다면 누가는 이와 같은 대화속에서 에베소에서 있었던 성령 강림과 방언의 내용이 일치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 자료들이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과 전혀 상이한 사건의 양상을 보였다면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누가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증거자 사도 요한으로 증거를 받을 때 확실히 에베소와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 종류에 있어서 거의 일치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성에 관한 문제에서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고 바울로부터 구원을 얻은 많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을 심어줄수 있었던 것이다.

 

(2) 성령 강림의 현상은 가시적이다.    


     누가와 사도 요한은 성령 강림의 모습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걱정하면서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 하심이 다른 사도들의 행한 일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음을 밝히려고 했음을 앞에서 충분히 살펴 보았다. 이 과정에서 사도 요한은 누가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주님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오순절날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그날은 요한에게는 너무도 엄청난 변화였기 때문에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고, 그날의 생생한 기억들이 요한을 강하고 담대하게 했다. 언제든지 그 날의 다락방 이야기만 생각하면 가슴은 뜨거웠고, 성령의 음성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을 것이다. 그날의 기억을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이것은 성령 강림은 가시적이었다고 말한다. 성령은 분명히 사도들을 포함하여 120문도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였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불이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할 때 누가는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에 나타난 현상(19:6)을 사도 요한의 증거와 대비하면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오순절과 동일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만약 그 현상들이 서로 상이한 현상이었다면 누가는 상당한 딜레마에 빠지고 말 것이 분명하다. 실지로 상이한 사건이라고 결론지어질 경우 누가에게는 아주 절망적이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가 사도 요한의 증거를 듣는 가운데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은 사도들에게 나타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마치 모세가 전승으로만 듣고 마음에 확신을 경험하지 못했던 천지 창조 이야기를 하나님께 직접 듣고 큰 확신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로 마음에 담은 것처럼 누가에게도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의 실제적인 현상이 사도 요한의 증거로 말미암아 더 큰 확신을 얻게된 것이다.

필자는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현상이 오순절 때 강림 현상과 일치한 불의 혀같은 것이 임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어떤 현상이든지 누가의 입장에서 납득이 될만한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도 에베소에서 나타난 성령 강림의 가시적인 현상을 요한에게 말하고 요한의 긍정적인 동의를 얻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누가의 말을 듣던 요한도 두 사건이 일치한 현상임을 긍정하고 사도 바울에게 함께 역사 하신 성령의 역사를 감사했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누가가 성령 강림 모습이 증거자의 오순절과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강림과 방언의 현상을 억지로 오순절과 동등하게 연결지으려 한다면 불확실한 그의 증거를 성령의 증거가 되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성령은 교회에서 누가의 글을 받으들이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진실하지 않은 증거를 자신의 말씀으로 선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은 가시적이었으며, 사도들과 120문도들이 목격한 것과 동일한 현상처럼 강림의 현상이 나타나 보여야했다. 그러나 오늘날 오순절 주의자들이나 “선 중생”, “후 세례”를 말하는 사람들의 성령 강림은 어떤 현상인가? 그들에게 임한 성령이 분명하게 가시적인가? 터무니 없이도 누가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주장을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사람들 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는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행 2:2)”


기록에 따르면 온집에 가득한 현상은 상상이 아니다. 무엇인가 가득하게 온 집안에 채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증거자의 마음에서 나타난 생각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온집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장관이다. 성령이 강림한 모습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것이다. 이것은 휘황 찬란한 불빛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부 소수에게만 나타나 보이는 그런 현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120문도가 한결 같이 목격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이 증거를 들은 누가는 자기가 목격한 에베소에서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나타난 현상과 오순절의 방언이 일치하다는 확신을 굳게하고 오순절을 경험하지 않는 바울에게 나타난 특별한 역사가 사도들에게 나타난 현상과 일치하다는 감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므로 바울의 사도성을 확실히 인정하는 근거가 된다.

사도행전은 2:4이하, 10:45이하, 19:6에서 성령 강림을 분명히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1). 첫째로 예루살렘에서 120문도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 위에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2:2-3)”라고 언급하므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120문도의 머리 위에 임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현장을 누가가 보았다면 더욱 확실한 증언이 될 수 있으나, 아쉽게도 누가가 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 누가는 이 자료를 증거자를 통해서 듣고 있다가 성령 강림의 가시적인 현상을 확인하려고 물어보았던 것은 분명하다.

누가는 “성령이 강림하시는 현상이 어떻게 보였습니까?”라고 요한에게 질문한다.

사도 요한은 “바람 소리와 함께 불의 혀 같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라고 대답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본문의 기록을 읽고 해석하라고 한다면, ‘불의 혀’라고 표현한 의미는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의 표현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2).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성령 강림은 분명히 가시적이다.

내가 이말을 하므로 발끈할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신학적 식견이라고는 조금도 갗추지 못한 사람이 전혀 엉뚱한 말로 현혹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리고 “성령은 영인대 어떻게 가시적으로 임하느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바울의 말로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령은 바람과 같고, 물과같고, 혹은 이슬과 같가도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부 하나님도 계시고 성령 하나님도 계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신 것을 불의 혀같이 임하여 보인 것은 120문도들과 사도들에게 분명히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을 확실하게 해 주시려고 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확실히 가시적으로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입으로 약속한 것이다.

 

사마리아 성령 강림


누가는 사마리아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자의 증거를 듣는다. 이 자료는 아마도 빌립 집사에게 들었던 것으로 추측케 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던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는 길에 함께 동행하여 욥바를 거쳐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도착하여 빌립집사의 집에 머무른다(행 21:8). 아마도 이때 누가는 빌립 집사로부터 여러 가지의 자료를 확실하게 전달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 6:1부터는 집사들의 선택과 스데반 집사의 순교, 그리고 베드로의 사마리아 전도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집사들의 행적과 가이사랴 빌립보와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전도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누가는 집사들의 행적 가운데 크게 알려진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빌립 집사의 이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사건과 사마리아에서 활동한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빌립 집사에게서 얻었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빌립은 여러 자료 가운데 사마리아에서 성령 강림한 사실 기록이 필자의 눈을 머물게 한다(행 8:16)1).

사마리아는 빌립이 전도를 나가 이적과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였다(8:12). 이 사실이 예루살렘의 교회에 전달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그 사실을 보고하게 했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왔을때, 사마리아 인들에게는 아직 한 사람도 성령 받은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저희에게 안수하매 저희가 성령을 받았다라고 기록한다(8:14-17)2).

사마리아가 성령을 받았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능력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리아에 사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게하는 것을 보고 그런 권능을 돈을 주고 사려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다.

시몬이 보기에 성령을 받은 것이 가시적일까?

시몬은 무엇을 보았기에 사도들에게 돈을 드려서 성령을 받게하는 권능을 사려고 했을까? 이런점으로 본다면 성령 강림은 바람처럼 나타났든지 아니면 구름이 안개처럼 나타났든지, 혹은 오순절 다락방에 가득한 성령 강림이 나타났든지 분명히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감정에 치우쳐 일시적인 현상을 오인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런 부끄러운 일은 깊이 반성 해야할 것이다.

  

고넬료집 성령 강림 


이 자료는 빌립 집사와 혹은 고넬료(?)에게 통하여 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고넬료의 집의 성령 강림은 장소가 가이사랴인 것과 빌립 집사가 가이사랴에서 오랬동안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고넬료와 빌립 집사와의 교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누가는 고넬료 집에서의 성령 강림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10:44-47)”,


누가의 기록은 성령께서 가시적으로 임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약 이 자료가 누가가 고넬료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가운데 증거한 자료라면 성령 강림의 현상을 목격한 베드로의 동행인들의 증거에 따라 분명히 가시적이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게다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을때,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내리신 것을 증거하여 말하기를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하는지라(행 11:15)”라고 증거한 것에 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베드로의 증거를 누가가 기록했다고 가정한다면, 베드로가 오순절때 예루살렘에서 받았던 성령 강림과 같은 현상이 고넬료의 집에서도 있었다는 베드로의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성령 강림은 분명히 가시적이었고 누가가 말하려고 한대로 성령 강림의 사건은 사도들에 의해서만 드러났으며 분명히 가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샘이다.

필자는 누가가 오순절, 고넬료집,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성령 강림에 대해서 분명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사건들의 이야기로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에서는 독자들이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이 자료는 누구에게서 얻은 것인가? 이 자료는 제 삼자의 자료가 아니라 누가의 자료이다. 이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때 에베소에 돌아와 바울에게서 나타난 성령 강림의 자료이다.

누가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전도를 마치고 에베소에서 여려 일행들과 함께 바울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에베소는 바울의 전도 여행 2차의 마지막 착지 현장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고 아볼로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던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이사실은 어떤 신학자라도 부인하지 않는다.

누가는 그 본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하니”(19:6)


본문을 읽은 우리는 실망의 빛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누가가 분명히 말해야 할 그 자리에서 성령 강림의 내용은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에게 고민에 빠뜨리게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록으로는 성령 강림 사실이 가시적인가? 아니면 불가시적인가?에 대해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였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누가는 단순히 ‘임하였다’라고만 기록했다. 그리고 19:6에서 누가가 말하는 “성령이 임하시므로”라고 한 말은 많은 추측을 가진 표현이다. ‘임하셨다’는 말이 가시적인가, 상태로 나타났나고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표현이다. 그러면 누가가 기록한 성경은 우리의 실망을 해소할 어떤 방법이 없는가? 오히려 성령 강림에 관한 것과 성령에 대한 지식들의 해석에 대한 차이를 해소할 수 없는가?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우리에게 성령 강림은 “객관적이고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계시라는 사실을 잊어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저자나 어떤 독특한 사람이 자기 사상이나 불분명한 주장을 하고 있는 내용이라면, 성경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성경을 확증해 주는 또 다른 진리가 외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될 수 밖에 없다. 이런 해석 방법은 비록 그 해석자가 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 자체는 완전한 진리임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는 사실에 절망적이다. 성경은 어디에서든지 성령 강림의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외부적인 증거가 분명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제외하고는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는 성령 강림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한 부분이 있다.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 3:21-22에서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형체’로 임하신 것이 분명히 나타났다. 누가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장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도 이 자료를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그 현장에서 직접 얻지 않았다. 이 자료는 사도들의 증거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누가는 사도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신뢰하듯이 누가가 사도의 말을 신뢰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누가에게 역사 하신 특별한 은총이며 영감이다. 우리가 또한 성경을 신뢰하는 것 또한 성령께서 특별한 은총을 주신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전승에 의한 자료에 의한다면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은 비둘기 같이 강하 하심을 보여줌에 있어서 분명히 가시적이였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누가의 의식 속에 성령은 비둘기 같이 강하 하신다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실때 성령이 형체로 임하신 것이 분명히 세례 요한이라는 증거자의 눈에 비춰진 것처럼, 누가의 성령 강림에 대한 사고는 사도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안수함으로 성경께서 임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사도들의 입에서 증거된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을때 사실과 동일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1). 성령 강림을 경험한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였다면 예루살렘에서도 가시적인 현상이어야 하므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한 가운데 불의 혀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던 것이다. 누가는 요단강에서 강림하시던 현상을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2),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있더니”(행2:2)는 동일한 표현으로 말한다. 이런 상태는 누구라도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믿을 수 있는 가시적인 현상으로 증거된 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가 표현한 ‘임하셨다“라는 말은 눅 3:22, 행 2:2에서의 표현과 일치하다는 것을 말할수 있다.


오늘날 어떤이들은 예루살렘에서와 요단강에서 있었던 성령을 영속적으로 받는다고 말한다. 사도들에게 강림한 성령이 우리에게도 임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불의 혀와 같은 사건이, 아니면 비둘기 같은 성령이 형체로 나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누가의 가르침이다. 만약 누가의 주장과 같은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성경을 도외시하고 사도들의 증거를 무시하는 비 성경적인 주장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그것은 사도적 증언과 전혀 관계 없을뿐만 아니라 무엇인가에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누가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성령 강림의 현상은 분명히 가시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가시적인 현상이 객관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서 머물러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시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누가의 철저한 가르침이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어떤이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성령의 임함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내적으로부터 나타나는 엑스타시스 현상을 성령 강림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가르침에 유혹되어 성경과 다른 성령을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에 가시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시는 성령은 가시적일 필요가 없다한다. 그것은 이미 임하신 것이 다시 형상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누가와 사실을 증거하는 사도 요한, 그리고 빌립집사가 성령 강림이 오순절에만 현상이 가시적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도 역시 가시적으로 나타났음을 너무도 분명히 하였음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다시 가시적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생각은 사단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사도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너무도 분명한 가시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의 혀같은 것이 분명히 그들의 머리 위에 임하여 있었고, 고넬료의 집에서도 분명히 불의 혀 같은 현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으나 베드로가 처음에 우리에게 임한것 같이 임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봐서 오순절과 동일한 가시적인 성령 강림이었다. 만약 120문도들이나 사도들이 미리 알고 있었던 현상과 전혀 상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사도들도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상이한 현상을 성령 강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상이한 현상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사도성 마져도 공신력을 잃고 말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도 미련한 인간들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얼마나 완전하고 지혜로우신가?2) 완전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어떤 현상을 계시하시고 그 현상이 다시 사람들에게 적용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모독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기 이전에 반드시 약속하시고, 그것을 기대하시게 하신다. 또한 그 주신 것이 분명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분명한 지혜를 주신다. 그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성령 강림 현상이 나타났거나, 주님의 세례때(제자들이 인식하고 있지 않는 그 어떤 방식)와 같은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현상들로 주님은 사도와 함께한 사람들을 시험하시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주관적으로 나타난 상태(오늘날 강렬한 엑스타시스 현상이나 최면 상태와 비슷한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흥분된 현상)만을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성령 강림의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조작된 해석임에 분명하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어떤현상(주관적인 형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한 성령이 주님께 강림하시던 것과 같이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이 성령께서 강림한다는 것3)도 그들을 교만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강림한 성령 강림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다만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강림한 성령의 역사는 ‘불의 혀’ 같은 것이 그들 위에 머물러있는 것만으로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믿기에 만족한 상태인 것이다4). 사도들은 성령 강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미 간접적으로 체험하였고,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 세례 받은 사실을 세례 요한으로부터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알고 있었으며, 베드로가 인용하여 증거함과 같이 구약에 충분히 근거 되었다.5) 그러면 누가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미리 알고 있는 요단강에서 성령 강림과 예루살렘에서 성령 강림이 에베소에서 목격한 바울로 나타난 성령 강림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객관자 누가가 목격한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심지어 베드로가 증거한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 강림과 동일하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러므로 누가는 바울의 사도성을 더욱 확신 있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저자 누가에게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성경을 기록한 저자에 관한 지식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기록한 저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될 것이고 저자의 사상이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 말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거나 의미가 아닌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 것이다. 이러므로 저자의 사상을 알지 못하면 모든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전파할 수 없다는 분명한 지식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 없이 많이 성경을 억지로 풀어 왔다6). 그리고 성경의 구절들을 여기 저기에서 마음대로 끌여다가 맞는 말을 맟추기에 급급하였고, 자기의 신학을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패단으로 성경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왜곡되었으며 수많은 다양성이 기독교 안에 존재하였고, 수많은 종류의 교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 가시적으로 임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께서 형체를 가지신 분이라는 표현이 아니다. 성령께서 임하실때 어떤 현상들이 성령 강림하신 증거로 보였다는 것이다. 예수께 강림하시던 성령은 ‘비둘기’ 같이 나타났고, 오순절에 강림하실 때에는 ‘불의 혀’ 같이 임했다. 그러나 고넬료의 집에서도 “우리와 같이 하는지라”라는 말은 분명히 오순절 때 강림한 사건과 같다는 말이다. 에베소에서는 어떤 형체가 나타났는지 말하지 않지만 “임했다”라고 말하고 또 오순절과 동일한 의미로 연결함에 있어서 같은 현상이 있었음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저자 누가의 사고에 긍정적인 주장을 할 수 있도록 가시적인 어떤 표징이 뚜렸하게 누가의 눈에 비춰졌다7).

다음으로 성령 강림의 현상이 계시의 객관적이라 함은 이 사건은 유일 무이한 사건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객관적 계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건들이 아니고 요단강의 세례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성령 강림은 반드시 위에서 내려왔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먼저 받으심으로 뒤를 이을 사도들과 모든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현상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객관적으로 예수께서 성령이 강림한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계시의 적용의 대상이 아니라 계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성령 강림하신 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나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계시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계시가 개인적으로 적용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 강림하신 성령이 분명히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났고 세례 요한도 목격한 사건이라면, 이것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성령 강림이 주님과 일체임을 증명하는 구속의 적용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계시가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사건으로 강림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강림 현상이 위에서부터 분명히 나타났다.

사도행전에는 객관적 계시의 대상은 존재하지만 계시의 주체는 복음서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게시의 주체를 벗어나 계시의 대상에서 어떤 답을 찾으려할 때 반드시 여러 가지의 추측이 무성하게 펼쳐질 것이고 결국은 여러 가지 해석들로 교회가 혼란 스러워질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체에서 답을 찾고 발견하려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성경안에는 성경을 해석하기에 충족한 자료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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