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1. 서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03
 

1. 서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고후 2:7-10


“누구를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심각한 오해와 이단 사설의 가르침에 빠져 바울을 거부하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다가 잘못되어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버림받았다’거나, 혹은 ‘이단’이라는 결정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멀리하고 배타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 자가 분명합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눈으로 보고 어떻게 그들에게 권면 할 것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신앙이 과연 옳은 것인가?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이 편견에 치우친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닌가?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로마서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이런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살펴야합니다. 때가 되면 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진정으로 주님앞에 돌아올 날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는 교회의 교사들을 통하여 반드시 바르게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의 교회의 역활"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는 세삼 깊이 마음으로 세기면서 우리의 신앙을 거울에 비춰 보아 참 진리 안에서 우리가 서야할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1911년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성령 운동은 기독교를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모습이 기존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참된 모습이라고 볼수 없고 현재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성경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성경으로 합리화하고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 운동은 성령 세례와 충만 그리고 은사와 같은 주장들이 1900여년 동안 지켜온 기독교 전통의 틀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기독교내의 성령운동과 성령세례의 충만 그리고 은사로 교회에 다가왔고 마침내 교회는 이를 여과없이 받아들여 기독교라는 같은 형제단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결과로 말미암아 세대에서 세대로 이전되는 가정에서 기독교의 사상이 새로운 변모를 거듭하여 전혀 새롭게 탈바꿈 되어버린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개혁교회는 성령운동과 성령세례에 대하여 다양하게 명퀘한 답변들을 제시하였고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점들은 알고 잇으며 정통교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이라 칭하는 교회에서 조차 정통 신학이 성령 은사 문제에 대해서 소홀히 취급하여 교회를 둔화시키고 경직시켰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고 오히려 적절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설득력있는 의견을 발표하지 못함으로 논쟁에서 페배라는 아쉬운 결과만을 얻고 말았다. 이유는 소위 기독교를 신봉하는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신학 사상 바탕이 연약하여 기독교 사상의 명확한 이해를 가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말하자면 신자들이 성령세례와 방언에 관하여 막연한 지식보다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라든가 본인이 체험할 수 있는 불가시적인 현상을 신앙의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라는 지식에 앞서 신자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을 신비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정통교회가 신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다수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 목회자들 까지도 정통교회의 신학 사상을 오해하고 비판적자세로 이해하고 편협한 자기 주장을 내세워 오히려 교회에 심각한 해를 끼치고 신학적 난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편협한 사상에 잠식당해 있는 교회를 향해 교회가 주장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성경적인 방법을 제시하여도 그 주장은 교회로부터 거부 당할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아마도 이런 주장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난을 받지 않을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방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괜히 교회와 논쟁을 벌여 나 자신의 스스로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마져 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로 하여금 성경적인 신앙생활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무거운 짐을 억지로 걸매고 이 과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고 이 글을 보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교회에 사명을 부여 받은 하나님의 일꿈으로서 성도를 하나님앞에 바르게 세워 그들의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집스럽게 이글을 쓰게 됩니다.  누구라도 이글을 읽고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진리를 향한 기쁨으로 얻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세대가 바뀌면 당연히 정통적인 신앙의 양태가 되어버릴 이 방언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필자는 왜 이다지도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시고 성도들의 왜곡된 신앙을 받아들이신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탠데, 왜! 이 일에 서둘러 매를 맞으려 하는가?

성경에도 신앙의 변천 과정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진실한 신앙의 세대와 이를 왜곡하고 소홀히 하거나 배반한 후 세대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은 실망하고 후회하신 모습을 보이신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 때에는 사람지으심을 한탄하셨고, 유대인들을 부르신 것을 후회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은 세대의 변화에 따라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이 자기 세대 동안 하나님을 잘 섬겨 하나님을 기브게 하였는데 다음 세대에서는 하나님을 왜곡되게 섬기거나 나아가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나 신자들이 성경을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 하나님 백성이 우상을 섬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너무 주관적인 판단으로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배교 현상이 유대인의 신앙으로 묵인되고 받아들여 지다가 결국에는 유대 전체가 세속화로 빠지고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모습들이 성경안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를 거울 삼아 성경이 말씀하신 메시지를 아주 잘 이해하고 배교와 불신앙, 우상숭배를 단호히 배격해야합니다. 

어떤이들은 저에게 이런 말들을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몇년의 세월이 지나간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징계하셔서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탠데 무엇 때문에 어렵고 힘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논쟁을 하려고 합니까?

맞는 말입니다.

이 글은 몇 년전에 S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했고 책으로 편집되지 못한 원고입니다. 그때에는 너무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분에 대해 비판적 감정을 토로했고, 이 글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글이 매끄럽지 못해서 읽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내용입니다.  또한 지식이 부족하여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한 아쉬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이런 실수를 이미 아시고 점고하셨으며 책은 출판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출판되지않은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만약 출판이 되어 신자들의 손에 들려졌더라면 책과 내용은 가치는 묻혀지고 폐지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말씀하신 대로,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이 일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적극 협력하고 헌신해서 교회가 사도들의 터전 위에 경건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들에게 올바른 신앙의 생활과 목표를 제시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이라는 방대한 난제를 조용히 입을 열어보려고 용기를 냈습니다.  


첫째, 성령은 어떻게 강림하시고 현재 크리스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임재하시는가? 

 번째, 성령 강림과 방언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세 번째, 성령 강림의 제 2 축복이 반드시 필요로한 것인가?


이런 몇가지의 문제들을 성경과 성경의 저자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계시사적인 해석방법을 적용하여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교회 내에서 신자들 가운데 흔하게 행해지거나 일부 강단까지 점령한 신비적인 현상의 하나인 방언을 성경이 어떻게말하는지 말하렵니다.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미약하게나마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방언 문제는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괴롭히는 난제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논쟁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성경적인 결론을 찾기는커녕 자기 신학만을 되풀이 강조하는 난상 토론들로 일관되고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북만 두들겨 소리만 높이는 꼴입니다. 그 결과 어느 한 쪽도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가르치고 의지한 신학자의 주장이나 자기의 신학의 일관된 되풀이 주장만 계속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토론을 지켜본 신학자들이나 신자들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 자연히 분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같은 복음주의 입장에서 조차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교회가 말하는 방언에 관한 입장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토론이 없으면 분파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토론이 분파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토론은 분파의 이유를 종결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토론만이 확실히 객관적인 답을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주장에 다수가 치우치게 되면 중대한 해악이 될수 있습니다.  역으로 분파가 없으면 옳다고 인정 받는 신학 또한 없을것입니다. 교회사들을 살펴 보아도 교회에서의 분파는 반드시 신학적 토론과 논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주관적 신학체계를 절대적으로 의지한 나머지 객관적 신학체계를 거부하고,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을 만한 신학이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학은 자체가 객관적진리를 대상으로 연구함에 있어서 엄격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신학1)은 연구의 대상인 진리 자체일뿐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쌍방은 자기가 가진 지식 체계를 객관적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가진 지식을 객관적이라고 믿고 형성된 쌍방의 의견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동기는 염격히 말하면 주관적이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신학은 신학의 대상인 성경 그 자체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비롯된 어떤 신학도 성경의 권위를 닮거나 흡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의 권위를 더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이 주관적으로 연구 되어질 뿐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인해서 분파가 만들어진다면 성경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태도에서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파당으로 나뉘어진 진리에 대한 연구 태도는 서로 다른 매개를 가지고 있으며, 이 매개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객관적 진리를 의지하고 있으면서(마 16:17, 행 15:7-9, 행 16:4,롭 10:17, 엡 2:8) 신자에게서 비롯되기 때문2)에 주관적입니다. 이런 주관적 신앙은 신학의 근본이되고 신학은 신앙에 따라 모습을 갗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객관적 진리를 연구하는데 분파가 나타났다면 이는 엄격히 신앙이 서로 일치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객관적 진리인 성경은 사람들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서 다양한 환경과 다양한 상황,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건들 가운데 사람들에게 일어날 예언적인 모든 일들이 빠짐없이 수록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가설을 실재 진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을 자료로 사용하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구절로 증거를 내세운다면 주장하고자 하는 자료가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실재의 진리로 둔갑하게 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성경이 뒷밭침하는 모든 증거들이 실지로는 증거와 무관한 경우가 허다함에도 진리와 동등하게 여기는 경우, 이런 경우를 "진리로 둔갑하는 경우"라고 말합니다. 한 예로 성경에는 예지와 예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지이고 어떤 면에서는 예정입니다. 어느것이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의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지이든지 예정이든지 이 두 신학은 분명히 성경에서부터 시작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경을 통해서 얻어진 사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가지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절대적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학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연구임에도 신학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진리일 수 없는 내용들이 산적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사람들에게 이해 되기 위해서 신학이라는 수단에의해 이해 되는 것이지 신학에 의해서 진리가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신학을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성경이 뒷밭침해주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굳이 신학과 성경을 구분해서 이해한다면 아무리 신학자라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의미 이상을신학화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주재들의 합리적인 증거를 위해 성경이 자료로 사용되고 교회가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교회안에서의 방언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방언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며,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며, 왜 발생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보려는 노력은 너무 많습니다. 여러 신학자들이 방언에 관한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자기의 주장의 진실성을 성경에서 인정하고 있다고 입증자료로 많은 성경의 구절들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신학이나 주관적인 체험을 성경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고 자기 신학을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슬그머니 붙여 놓는 것입니다. 분명 신비적인 현상을 지나치게 중시하거나 주관적 체험을 개관적인 체험인것처럼 성경의 주장을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자기의 생각을 먼저 확정한 후 성경에서 자기의 신학을 입증하는 자료를 체택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관적 진리를 성경으로 입증하거나 명백히하려는 주장들이 신학 세계에서 불가능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왜곡된 주장들이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교회에서 받아들이게 하는데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성경을 사용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무분별하게 받바들이는 자세를 교정할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으로 정립된 주장을 성경의 지료를 찾아 인용하기만 한다면 그 내용이 비 성경적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안에서 사용하는데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현실적인 교회안에서 교회를 송두리채 타락하게 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내포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재어할 아무런 장치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앞에서 필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방법을 교회에 제시하고자 합니다.


오순절 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언어 의미나 표현, 혹은 문자의 의미에 의존하여, 같은 의미라고 논리적으로 판단되기만 하면, 성경의 저자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기록된 성경구절 일지라도 적당하게 취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명백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며 이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은 신학을 전개하거나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으며, 전혀 복잡하지 않으며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간단하다는점을 들어 신학자들이나 평신도들에게 쉽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신자들에게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고, 상당수의 신자들에게 주관적 체험을 성경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의 객관적 역사’라고 믿도록 조장하고,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적용시키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동일한 의미를 가진 문자나 단어가 다른 성경에 사용되거나 나타나면, 대비되는 다른 상대적인 구절이나 언어를 약화시키거나 무시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주고 있으며, 단어의 사용의 빈도 수에 따라, 빈도 수가 많은 단어의 의미가 강력한 메시지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자기가 주장하는 교리가 성경적이며 가장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논리와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고 정당화 함으로 실질적인 권면이나 신앙을 위한 도움을 전혀 회피하고, 신앙을 자기의 굴래 안으로 국한시키고 다른 교리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속에 갇힌 신앙을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감정 속에서 체험을 조작해 내고, 조작된 체험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독특한 은사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와같은 방법은 분명히 계시에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자세가 아니라 주관적 체험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는 말씀 만능 해석3)임에도 자기들의 주장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자들이 ‘성경이 말하는데’라고 신앙의 독주를 감행하고,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독차지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신학 사상 속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앙에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종의 규범이나 도구로 사용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현혹 되어 있으며 한국 교회는 이에 대해서 전혀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한채 함께 동요되어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인 방언에 관한 문제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고 여러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됨을 밝힐 것인가? 또한 현대 교회안에 팽배해 있는 방언4)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령의 비추임에 따라서 살펴 보도록 할 것입니다. 

 

1) 성경과 독자


성경 해석자가 선택된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다른 성경을 사용할때 마땅히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하며, 그에 합당한 자료로서 성경이 사용되어야 한다. 성경은 독자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바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각 권마다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상황이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일관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한 것처럼 여기저기의 각권의 자료를 동일하게 인용한다는 것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함에 있어서 확실한 독자를 가지고 있었다. 장소와 상황, 사건의 현장과 배경, 환경에 따라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만 가지는 의도를 포함하여 말씀하신 것이다1). 대다수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상당수는 실재적인 자료를 사용하여 증거하신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씀을 듣지는 않았지만 전승된 자료에 의거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포되고 있는 말씀으로 동일한 독자들에게와 미래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제한된 독자들에게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메시지를 선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존 독자들의 상황으로 무제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저자에게는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 혹은 성경의 저자가 말을 하려고할 때-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수많은 자료들이 있을지라도2) 의도되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독자가 있고, 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독자가 있으며3), 독자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저자에 의해 기록된 자료가 사용되었고, 성령께서 저자에 의해서 선택된 자료로 독자들에게 증거로 말씀하신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들을 허공에다 외치시지 않으셨다. 분명히 당시의 독자들에게 선포하시고 증거하셨으며 저자를 사용해서 설득하고 계셨다. 성령은 친히 말씀하시되 저자의 마음이나 독자들의 상황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교리나 논증, 그리고 신앙의 형태, 가설을 이루게 하려는 자료들의 모음이나 백과 사전이 절대 아니다. 황금의 입 크리소스톰은 “성경을 기록한 어떤 저자가 같은 문제를 거론함에 있어서 동일한 의미를 다룰 때도 있지만 동일한 주제를 결코 동일한 방법으로 다룬 것이 아니다. 이런 방법은 시간적 차이에서 오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4).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단어나 문장은 저자가 다른 성경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의도가 전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각 저자는 자기의 사상과 독자의 상황 아래에서 요구되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고, 성령께서는 시기를 초월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하시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당시의 독자를 포함하여 미래의 모든 독자들에게 영원한 메시지를 주시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 독자들의 환경을 무시하면 안된다.

 

 2) 계시의 객관성


총신대 이 한수 교수는 신학 지남에서 한국 교회와 성령 운동의 변천을 역사적 관점에서 기록하면서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의 변천사를 연구할 때 우리는 “신앙”의 두 가지 차원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 첫째는 믿음의 초월적이고 초 문화적인 차원이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공통적인 근거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1). 왜냐하면 믿음이란 특정한 문화나 사회, 역사속에 일어나는 인간의 반응이며, 더욱이 개인, 또는 특정한 문화나 사회 역사속에서 존재하며 형성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대마다 신앙의 색깔이 변하고, 시대적 환경의 요구에 따라 믿음이 어떤 특정한 문화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경의 변화와 요청에 따라 특수하게 변형되어지고 때로는 상당한 정도로 변질, 왜곡 현상을 겪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지고, 문화 속에서 표현되어진 현실적인 믿음은 역사적 비판과 검증을 요구한다.]고 적절하게 말했다. 이런 판단은 역사속에 표현된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을 언급한 것은 효과적인 시도였으며, 믿음이라는 공통된 주장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린 한국 교회를 날카롭게 꼬집은 것으로 본다. 

이 교수의 말대로 한국 교회 내에는 두 신앙 형태가 공존하며 어우러져 있다. 두 신앙의 신학 사상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서로가 완전히 구별되면서 전혀 다른 신앙 양태를 보이고 있다. 마치 신교와 구교처럼 동일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전혀 다른 하나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개신교 안에서의 신앙의 양태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의 내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은 전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지적인 의지나 판단이 감정에 좌우되고 결정되는 [주관적 신앙]과, 하나님 절대 주권에 의지하고 감정에 동요되지 않은 모든 계시가 위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믿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고 판단된다고 믿는 [객관적 신앙]이다.

필자가 언급하려는 성령의 역사 하심에 대해서도 두 양태속에서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의 영속성, 혹은 제2의 축복, 도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후자는 단회성으로 해석한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두 주장들이 인간의 두뇌에서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이기를 원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어느 한 쪽은 분명히 왜곡된 계시를 의존하고 있다. 서로다른 이들은 같은 신앙 고백을 하고 전통적인 예배형식을 취하며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형식과 모양에 있어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드러나 보여도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도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 강림에 관한 신학이 상이하다. 분명한 것은 두 주장들 가운데 어느 한 편은 계시에 의존한 사색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어느편에선가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된 표현이 아니라 자기의 지적인 능력과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모든 독자들도 다른 편에 대한 관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편견에 치우친 나머지 고집스럽게 자기의 주장만을 가지고 비판하게 되고 서로를 비판하고 공격하며 오류를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편견이 상대방 신앙을 지나치게 펌하하여 마치 구원받지 못할 신앙처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랑이 없는 비 신앙인의 처사이다. 그렇다고 오류와 타협하는 일은 온전하지 못하다. 상대방이 분명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이를 납득할 수 있는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납득할만한 이론으로 설명한다면 상대방은 분명히 수긍할 것이고 만약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주님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아래의 도표는 ‘제자들의 하나님나라 경험시점’을 밝히는데 있어서 객관적 관점을 가지고 살폈다. 이 도표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와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요한 복음 3:3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볼 수 없다.” "No one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 of water and the Spirit."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unless he is born again]은  변화의 차원과 전혀 다르다.

완전히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로 지으심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unless he is born again]을 주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니고데모가 그랬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자기가 생각하는 개념대로 받아들이고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주님께서 변화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 하지 않았을 것이다.

unless he is born again은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의 개념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자기가 만난 선생이 터무니 없는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하고 약간 비아냥 거리는 퉁명스러운 말로 반문했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요3:3.5.). 중생즉 ㄷ새롭게 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새롭게 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제자들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제자들이 거듭난 시점이 어느 때인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제자로 있을 때 이미 거듭났는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시간에 거듭나게 되었는가? 도표는 바로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경험 시점을 표현했다.


성경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던 3년 동안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성경과 대립되고 있다. 어떤 이는 제자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않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다고 성경이 말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주장이 옳은것인가?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으로부터 제자들이 부름을 받은 순간을 동일시하는 전자의 주장이 옳은가1), 아니면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2)로 보는 후자의 주장이 옳은가? 오늘의 독자들은 어느것을 취하든지 한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독자의 신학의 근거가 되고3). 여기에서 신학은 서로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필자는 제자들이 어느때에 하나님나라를 경험했느냐?는 지엽적인 것일뿐 근본 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라는 이해 개념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제자들이 성령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식한 시점이 문제 해결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본다. 이것은 계시가 주어진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계시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인식되고 거듭난 지적 능력을 가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인식하는 때를 의미한다. 이럴때에 비로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이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메시아 개념으로 이해하였다4). 반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 때 예수는 유대의 메시야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자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참 메시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그들이 3년동안 지켜보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누군가 이해되어짐으로 그들의 의식은 오나전히 변화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성령 강림의 결과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결정적인 변화의 전기를 통해서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지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전에 가진 율법적인 지식이 아니었고 전혀 다른 배경의 지식이 제자들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입장에 따른다면 성령께서는 오순절 이후에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영원히 계시고, 오순절의 입장에서는 예수와 함께 제자들에게 임하여 있다가 오순절에 충만하게 보충만 더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와 같이 제자들에 대한 이해 개념에 따라 변화 이전과 이후의 모든 경험이 구별되면서 불일치한 모순이 교회 안에 공존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 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 탄생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경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경험 주장은 결코 부정적일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의 것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인식 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의식을 변화하여 개념을 만들어 내거나 발견할 수 없으며, 아직 이 세상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개념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유대인에게 조차 없었기 때문1)에 어느 사람이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경험을 주관적 의식 변화로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 의식속에 내재하는 의식들이 발전하거나 변화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객관적인 계시에 의해 위로부터 임하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경험은 은혜로운 선물로 말미암아 주어질 뿐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신29:5, 이사야 6:9, 요8:43, 행 28:26,27, 롬 11:8, 10). 그러므로 객관적 계시는 주관적으로 해석 되거나 적용될 수 없다. 반드시 객관적 관점2)을 가지지 않고서는 해석 될 수 없으며, 바르게 이해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어느 것을 신뢰할 것인가?

계시의 주관적인가? 아니면 계시의 객관적인가?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 귀로에 서 있지만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예를 들어 계시의 주관적 입장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가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인 모든 성경들은 그 순간 제자들이나 사도들의 사상이나 경험에서 비롯된 창작3)으로서 비역사적인 자료에 불과한다. 그 결과 제자들의 계시 경험은 역사성과 전혀 관계가 없고,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역사하셨던 실제적인 사건 여부에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인간의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계시일 수 없다. 반대로 객관적인 입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인간의 이상을 초월하며, 역사에 개입하셨던 사건이며 시간 속에 개입된 분명한 사건이다. 시간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위해서 자기 자리를 비켜야했고,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으로 자기의 역사를 드러내셨다.4) 이런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 인간 의식이 변화된 것은 인간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계시는 분명히 객관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조차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역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의식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논란이되고 있는 성령 역사의 시점은 개념이 성경적으로 제시되지 못하면서 성경의 자료를 배경으로 논의되고 있다.

성경 신학은 해석의 기준을 객관적 관점에서 시작한다. 계시가 주어지고 역사 하는 그 시기가 지식의 시작이다. 계시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새롭게 알려지고 사람들은 알려진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얻음으로 이 지식은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계시가 없는 지식이 없고 계시가 없이 지식이 있을수 없다. 그러므로 계시는 역사적 사실 위에서 분명히 주어졌고 완성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 계시를 주시지 않으신다. 지금 시점에서 계시는 과거에 이미주어졌고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역사 속에 계시된 계시사적 적용1)의 간접적 체험 방법이다2). 계시가 과거에 있었고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이 계시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의 작용에 의하여 해석되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성경을 관찰, 연구, 해석하려는 의도 자체가 이성 작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계시를 해석하는 것은 해석자의 의식과 사상이 성경 저자의 의지와 사상에 일치하려는 열심이다. 이 열심은 주어진 계시를 통해서 진리들을 발견해 내는 작업이다. 필자는 이런 해석 방법을 계시사적인 연구라고 말 할 뿐이다.

이런 해석 방법을 통해서 밝혀진 성경의 내용들은 기존의 주장들이 얼마나 지적 편견에 치우쳐 있었는지 밝혀주게 된다. 특히 이 지면을 통해서 연구하려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과 그리고 성령 강림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한 방언, 그리고 바울에게 나타난 방언”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었고 어떤 오류 가운데 치우쳐 왔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3) 성령의 영속성


“오순절 성령이 사도들을 포함해서 120명에게 단회적으로 오셔서 함께 계시고, 그 성령은 영원토록 그들을 떠나시지 않으셨고,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동일한 성령이 다시 하늘로부터 오시지 않을 수 없다. 단회적이기 때문에, 영속성을 띠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단회적이 아니면 계속해서 임하실 필요도 없다.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이 다른 성도들에게 옮겨가거나, 창조적으로 성령이 크게 불어나 나누어지지 않는 한, 하늘에서 성령이 계속 오시지 않을 수 없다.1) 라고 말씀하시는 신학자의 말씀을 읽었다. 이분의 주장에 의하면 영속성은 지금도 하늘로부터 성령께서 강림하셔야 하고 오늘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성령 계속해서 강림하신다.

이것이 곧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는 영속성에 대한 견해이다. 그리고 영속성은 단회적이라는 의미에서 더욱 확신된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한번 드리워진 구름은 걷히지 않고 계속해서 비를 내린다, 비는 쉬지않고 계속해서 내려 온 지면을 적시고 나아가서 온 지면에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단회성은 비를 내리기 위해서 한번 드리워진 구름처럼 다시는 걷히지 않는 구름이 온 세상 위에 계속적으로 드리워져 있다. 이 성령은 위에서 계속해서 내리고 있고 오늘도 내려지고 있다. 이런 주장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다시 오시는 것은 결코 그 단회성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고 단회성을 견고하게 한다2)라고 말했다. 그러나 화란의 신학자는 단회성을 강조하면서 성령은 우리에게 단한번으로 내렸다. 그리고 내려진 성령은 지상에 계속 머무시면서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말했다. 이분의 주장은 드리워진 구름이 벗겨지고 빛이 다시드러났으며 비는 저수지에 담겨졌다가 사람들에게 적셔진다는 주장이다.3)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전자의 주장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한번 오신 성령은 계속해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주장이거나 의도인지 명백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성경의 의도가 한번 오신 성령께서 계속 오신다고 말하거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였다면  아주 흡족한 해석이므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이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이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현대 크리스챤들은 ‘성령은 지금도 강림하시고 각 사람 위에 임하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다. 성령강림은 분명히 그들의 의식 가운데 나타났고 있었던 일이며, 자기들에게만 일어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자기들의 의식 가운데 있었으므로 다른 주장이 그들을 공격하면 그들은 공격자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신앙을 멸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분명히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이 수면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그들의 삶 가운데 분명히 경험한다. 그들의 체험은 하나님이 말씀보다 더 강력하게 역사 한다.

하지만 나타난 체험적인 역사가 성령께서 가시적인 현상과 함께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지 객관적인 계시가 아니라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체험이 주관적일지라도 크리스챤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또한 경험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이미 계신 성령께서 친히 증거 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령은 위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미 오신 성령은 항상 신자에게 나타내신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이심을 증거 하시고 새롭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런 사실들 때문에 신자들은 성령은 [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벌써 계셨고, 이미 오셨다]”라고 말한다 해서 영속성을 말하든지 단회성을 주장하려면 반드시 객관적인 성령의 역사 하심에 기준하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칼빈주의 신학에 아주 철저하게 추종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한 신학자는 “기록된 말씀을 밖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아주 필수적인 순환론적인 해석 연구1)를 배제하고 있다. 진실로 기록된 말씀을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의식은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화하려는 경향에 제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가설을 정당화하지 않으려는 자기 비판 의식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아주 필수적인 것이다.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가 “기록된 말씀 안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의 주장을 말한다”는 것은 곧 객관화된 계시가 계시로 역할을 하고, 신학자가 구속의 진행 과정에서의 계시의 역할을 신실하게 밝혀 계시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하면서 주관적 인식의 체험이나 신앙의 열매, 또는 가설을 객관화 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성경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성경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분명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실제 현장에서 기록된 역사 속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고 성령께서 사람의 손을 빌어서 친히 기록하신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성령께 온전히 붙잡혔고,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자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조사하고, 사실을 확인하면서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간섭을 전혀 느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진실만 말하려고 심혈을 기울였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록된 자료들의 그 배경에는 기록한 사람의 의도가 포함하고 있고, 사실적인 배경이 압축되어 있으며, 자료의 신빙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깊이 배여 있어서 저자의 땀내음을 뿜어내고 있다. 기록자는 기록하려는 자료를 통해서 독자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건한 삶을 한결같이 요구하고 존재하시고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글들은 저자가 글을 기록하면서 시대를 깨우며, 후대들을 교육하려는 의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당면된 과제를 해결하려는 책임자 입장에서 서면 전달과 같은 방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경험된 자료들을 통해서 생생하게 증거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려는 의도였다.

성경 말씀에 머무르려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말에 따른다는 것은 기록의 배경, 저자의 사상과 자료 수납, 독자, 또한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들이 성경으로 확인하려는 연구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있지도 않았던 사실들을 단순히 문학적 표현으로 기록하도록 성경의 저자들을 영감하셨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고,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이 성경의 기록을 단순히 어떤 문학 작품과 같이 취급하여 해석하려는 것은 더욱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칭 개혁주의자라고 하거나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관적인 독단에 빠져 자신의 신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전인수격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의 이 구절, 저 구절을 끌어다 붙이고, 문자가 의미하고 있는 같은 내용들을 조직해서 성경의 기자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어떤 교리를 조직하고, 주장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자신의 신앙을 변증하는 자료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오르내린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해 있다고 자부한다. 이런 주장들은 실지로 성경을 신뢰하게 하는 믿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분쟁만을 일으키게 할뿐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시작하던 때부터 1990년 동안 교회사 안에서 지속 되어왔다.

필자가 살펴보려고 하는 방언에 관한 문제나 성령 강림의 영속성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이 주장은 성경과는 아주 먼 관계있는 한 사람의 주장일 수도 있다. 성경은 성령께서 강림하신다고 만 할 뿐이지 영속성을 꼬집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현상도 “영속성을 위해서” 오순절 다락방이나 혹은 사마리아, 고낼료의 집, 그리고 에베소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아니다1). 성령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기간에도 강림하셨는가 하면, 강림하시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요한과 베드로에게도 역시 성령은 항상 강림하시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서 성령은 강림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안에는 성령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주장이 아닐 뿐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 강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와, 혹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신학자의 주관적 해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영속성이라는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가정에서 출발하고 신학자의 사상 가운데에서 이 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의 여기 저기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조직하여 만들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성령 강림의 단회성


이 말은 “오순절 성령은 전무후무한 사건이며 그때 강림하신 성령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계속하여 역사 하신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성령 강림의 단회성을 언급하는 이 주장이야말로 어떤 반박을 가지고도 뒤집을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지극히 편견에 치우쳐 있거나, 아니면 극히 주관적인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나오게된 원인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근거한 체험적인 결과가 자신에게 나타났느냐? 아니면, 나타나지 않았어도 받아 들일수 있는 사건이냐?라는 결론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1) 이것을 계시사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객관적 계시의 주관적 적용’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영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지금도 자신들의 경건한 삶을 지배하고 있다. 사도행전 2:4이하, 10:44, 19:6은 계속성 곧 영속성에 해당하며, 그 영속성은 아직도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시작부터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대표적인 2:4f. 10:44, 19:6의 성령 강림 계시가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 해석자는 먼저 판단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행전 2:4이하(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계시로 볼 것이냐? 아니면 구속사의 한 과정인 주관적인 계시의 적용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문제부터 이해해야 한다. 계시가 객관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과 같이 계시의 중심이 되는 사건으로 반드시 약속에 의해 성취되고 그 성취가 성경의 기록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영속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성경에 너무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계시의 원리적인 적용 절차2)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계시로 인해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한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영속성으로 이해하려는 심각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현상을 재현되어야만 한다는 심각한 주장을 일삼는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번으로 만족한 구속의 객관적인 계시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십자가의 구속이 미래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것은 객관적 계시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주관적 계시절차로 말미암는다. 이 주관적 계시 절차로 인해서 이미 이루어진 구속의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다시 적용되어지고 하나님의 구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성취는 이미 이루어주셨으며 지금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사못 진지한 면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던져주고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교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제2축복을 주장하는 오순절 성령운동고 함께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각종 현상들 가운데 성령 강림의 경향을 우선 뜨겁고, 일종의 엑스타시스와 방언의 은사처럼 혀를 제어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 현상은 오순절에 있었던 것으로 오늘날도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확실히 믿고 있다. 실지로 교회에서 조용히 기도하다 보면 한쪽에서 요란스럽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소리는 보수를 지향하는 교회 안에서든지 복음주의나 신비주의를 주장하는 교회든지 심지어 로마 카톨릭 안에서조차도 들려 오는 보편화된 현상이다. 이 현상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실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성령의 체험을 하지 않은 것인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악령의 영향 아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반드시 성령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체험은 자기 마음에 따른 성령의 체험, 즉 주관적인 체험인 것이다. 주관적 체험은 주관적 계시의 적용과 전혀 다르다. 주관적 계시의 적용은 객관적 계시를 근원으로 한 반면 주관적 체험은 아무런 근원이 없이 자기의 의식이나 혹은 자신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령 강림의 내용에 있어서, 영속성을 주장하는 성령 강림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표적인 세 가지 성령 강림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어떤 방법으로 검증할 수 없다.

  누구든지 선배 신학자가 말한바와 같이 성경이 말한 대로 성경의 길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성경 안에 일어난 수만 가지의 사건들은 분명히 객관적 계시이며, 성령의 인침을 받은 확실한 증거들 가운데 검증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약속하신 이후에 성취하셨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순전히 객관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지 주관적 체험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나 기독교의 역사, 이런 과정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았다. 그러므로 교회사의 대부분이나 혹은 성경의 역사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드러낸 하나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 역사는 계시의 객관적인 사건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적용시키는 일인 것이다. 엄밀히 우리는 객관적인 계시의 사건 가운데 있지 않고, 독특한 사건과 같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구속의 사건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체험되는 것은 완전한 구속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다시 객관적 계시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사실이 성경으로 이루어졌고 성경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계시의 사건이 체험되고 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성령 강림의 영속성의 주장이 얼마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는 것이 주관적인 구속 과정에 속해 있으며, 계시의 직접적인 적용(객관적 계시)의 현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그런 현상을 기대하는 것은 성경과 전혀 일치하지 않은 주장이며, 성경이 말하지도 않은 주장이라는 것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사도 시대 이후 구속 사건들이 옛 사건과 일치한 객관적 계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성경은 계속 더 포함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말과 [종말]이라는 의미의 성경의 주장은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가르침이 된다. 이처럼 성경 안에 기록된 내용을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신자들의 체험을 계시의 주관적이라고 말한다면, 오늘의 신자들에게는 분명히 주관적인 계시의 적용만 허용될 뿐이지 영속성이 말하는 객관적인 계시의 적용과는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하다.


5) “방언, 누가의 증언으로부터인가? 주관적 체험으로부터인가?


  끝으로 인간이 타락한후 지구상에 뿌리박고 있는 종교들이 하늘들에서 내려왔다거나, 실재로 신들이 존재하여 신으로부터 하사되어 종교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마음에 심겨져 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서 시작되었고, 그 경배의 형식이 수세기의 변천 과정을 겪는 동안 점차 변질되어 인간의 마음에서 조직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계를 인간에게 보이심으로 인간으로부터 종교가 된것이다. 기독교는 유일한 종교이고 유일신을 향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순수한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때 사람이 이땅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종교성을 심어 놓으셨다. 종교성이란 의존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새심한 배려로 부터 심어 놓으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종교성을 인간의 마음에 부어 놓으신 것이다.  이 종교성이 사람이 최초에 타락함으로 올바른 방향을 향하지 않고 삐뚤어진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각종 종교들을 지어내는 근원이다. 인간의 타락은 내면에 있는 모든 성향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필요한 생명을 위해서 반드시 향해야할 바른 방향을 지향하지 않고 왜곡된 방향을 지향함으로 인간은 점차 하나님을 벗어나 타락의 성향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에 심겨진 종교성은 다양한 종교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왜곡된 성향은 타락했고 이를 왜곡시킨 사단이 심어놓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불순종은 내면의 본성에서부터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별도의 신을 조직하고 생각하도록 조장한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행하여 적대적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이 가득채워져 있어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고쳐주시지 않는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수 없는 비극에 처해 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계시를 주신 것이다(고후 4:6).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다른 종교적인 형태와 전혀 다른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다룬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에 의해 적용될 때에만 진실한 것이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서 아직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 여러가지 현상들을 목격하게 된다. 위에서 말하기를 기독교가 계시에 의존된 신앙으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주신 것이라면 우리가운데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가운데 무엇이 위에서부터 내려온 신앙인가?1) 신앙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종교의 형태가 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가? 객관적이면 사람의 마음에서 조직되거나 만들어지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가? “영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 강림의 현상이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단회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 강림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과 같이 왜 한 성령 안에서 서로 다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비추인 하나님을 아는 빛이 받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진리라고 볼수 있는 것인가. 위의 재목에서 볼수 있듯이 "방언"은 과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비추인 것으로 부터 시작된 것인가?

필자는 어느 누군가는 자기의 의식에서, 혹은 인간의 이성에서 성경을 판단하여 왜곡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이는 하나님의 빛을 비췸을 받은 종교성이 미성숙 된(하나님으로부터 수정을 받지 않은 종교성이 발달된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둔갑하여 하나님을 왜곡했든지 아니면 미 성숙된 종교성/고침을 받은 종교성이 지식을 겸비하지 아나한 상태에서 판단한 왜곡된 논리들롬7:21-22)것이든지 아니면 교묘한 인간의 이성이 사단의 노예가 되어 왜곡된 종교성으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 경향인지도 알수 없다.

오늘날 전체 교회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은 서로 다르고 하시는 일도 다른가? 어떤 이에게는 오순절 성령이 역사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성령이 역사 하시는가?2) 한 성령께서 이 교회에는 이렇게 역사 하시고, 저 교회 안에서는 저렇게 역사 하시는 상황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현존하고 있다. 두 주장에 따른 형태는 공동체 안에 들어있으며, 자기 주장이 하늘에서 내려온 종교3)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는 계시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조직된 계시를 신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어쩌면 둘다 편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같은 성령을 말하고, 같은 교회를 말하고, 같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 자료들은 각각 다르다. 그들은 자기가 선택한 성경 자료로 자기를 변호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그들은 매사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  스스로 아주 경건한 신앙인이며, 하나님은 자기와 분명히 함께 하신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한다. 이와 같은 목소리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동등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판단하기를 꺼려한다. 오히려 성령 세례의 단회성이나 영속성이나 같은 맥락을 가지고 한 성령 안에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 강림 현상이 나타나는 형태만 다를 뿐’ 성령의 역사 하심은 동일하다고 한다. 실지로 엄청나게 다른 주장이 함께 손을 맞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필자는 본 연구에서 성령의 단회성과 영속성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경험한 바 있고 매일 아침 내 뒤에서 들려오는 어떤 이들의 기도 소리에 궁금증이 증폭되어지기 때문이다. 저들은 알지 못하는 말(방언 기도)로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 높여 기도하고 있다. 심지어 필자 자신도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북한산의 한 정상에 편편한 바위에 서서 멀리 하늘을 우러러 보고 능력을 받아 보겠다고 동일한 방법으로 밤새도록 기도하던 경험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닐을 뒤집어쓰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두터운 옷을 끼어 입고 동녘에서 아침이 밝아 오기까지 기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밤을 지새워도 피곤함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힘들이지 않아도 입으로 나오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었기 때문(흔히들 성령의 역사라고 하지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느날 필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은 성경의 숲속을 산책하는 도중 방언이라는 밀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본 방은이라는 산의 정체는 다양한 길이 있었으나 정상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방언이라는 산에서 사도행전의 길을 보게 되었고 사도행전에서 고민하는 저자 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누가는 필자를 심하게 채찍하고 있었다. 필자가 길이 아닌 곳에서 해매고 있었고 이를 지켜본 누가는 필자가 방언의 산에서 일생을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책망을 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로상에서 누가의 고민스러운 표정은 나만이 가질 주관적 체험 안에서 객관적 계시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방언이라는 산에서 발견한 사도행전의 길에는 많은 막다른 길들이 있었다. 이 길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놀라게한 오순절 다락, 10장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 19장 에베소의 아볼로 제자들과 함게한 막다른 길들이었다. 많은 교회들은 막다른 길에서 정체하고 정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열심을 다해 종교적인 행동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 체험은 나에게 체험된 주관적일 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체험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 가운데 누가의 고민과 방언이라는 주제와 부딪혀 필자가 회의를 느낀 문제들을 밝히게 될수 있는 누가가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어떤 주장이 그의 기록의 배경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 체험은 필자의 것이 아니라  선배 신학자들이 말하는 성경의 인도를 통해서 더욱 깊은 체험을 하게되었고 벙언이라는 산의 정상을 오르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로상에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무엇인가 간절하게 밝히려고 노력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그중에 한가지가 방언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길을 따라가는 나에게 골목마다 들려 상황을 지켜보고 막다른 곳에서 감정에 휩싸여 머물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도록 유도하였고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길을 가도록 채찍하고 권면해 주었다. 

누가는 필자를 자세하게 안내하주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거든 외치기를 머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것은 골목마다 머물러 있는 형제들에게 구약적인 종교적인 의식들이나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곳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계속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국 이때부터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연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진실한 신앙(객관적인 계시만이)이 곧 성경이 가는 곳이라는 답을 필자는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매일 새벽마다 들려 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당신은 누가가 말하는 방언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살펴보지도 아니하고) 당신에게 나타나는 주관적인 체험을 누가의 말과 일치 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쉽게 말하자면 방언의 산에서 정상에 오르는 길을 버리고 막다른 길에 머물러 그곳이 그들의 목적지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 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본서의 부제목을 “방언, 누가의 증언으로부터인가? 주관적 체험으로부터인가?”라고 한 것이다.

 

(1) 누가는 사도행전을 왜 기록했는가?


    누가는 사도들의 배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 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면서 이 객관적인 계시를 데오빌로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거하고 있다.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의 객관적 계시와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객관적 계시(성자 그리스도의 사역과 계시)를 전승자 증거를 통해서 수납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자료보다 더 많은 여러 자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독자에게 의도하는 독특한 자료만을 선택하여 기록의 자료로 삼는다. 이 말은 기록된 성경은 잔여하는 객관적 계시를 제외하고 사람(저자)의 의도에 따라 선택되어 결국은 계시가 사람의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서 영향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성령께서는 누가에게 역사 하셔서 반드시 증거 되어야할 성경으로서의 필요한 자료를 누가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호소하게 했고, 누가에게 호소할 만한 환경과 상황을 조성하셨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누가의 의도를 전적으로 주관하시고 이를 통하여 성경의 기술이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그러면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보냈는가?

누가가 왜 데오빌로에게 기록된 말들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 서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어서 오늘날 크리스챤의 손에 들려 신앙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가? 그의 기록은 세기를 거듭할 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거나 연구되고. 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지 약 1900천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기록을 읽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경배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는가? 그들은 초자연적인 은사인 믿음으로 누가의 증거를 받아들였고, 누가의 증거를 그들의 마음속에서 외쳐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지금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약속과 구속의 비밀임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누가의 기록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사람으로 하여금 담대히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게 한다. 그런 누가의 기록 속에는 누가의 의도와 뜻이 들어있으며, 누가의 의도와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특별한 섭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이정표가 되게 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교회의 구성과 그리스도인의 조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한다. 왜냐하면 누가는 자신의 기록을 순전히 그리스도의 증거와 성령의 역사 하심에 중점을 두었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진실하게 확인한 증거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이 글을 기록한 의도는 무엇이며, 그가 이 글을 기록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고민하며, 독자 데오빌로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그 배후에 누가에게 이 글을 기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신 성령님은 어떤 의도로 누가의 글을 우리에게 읽게 하시며 증거 하시는가?

또한 이 글을 읽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신앙의 문제에서 어떤 해결을 얻었는가?

이런 문제들을 살펴 보는 과정 속에서 본서의 주제이며 오늘날 교회안에서 팽배하게 행해진 이상한 현상중의 하나인 방언에 관한 답을 얻어보려고 한다.


(2) 하나님의 완전하신 구원의 성취(객관적 계시의 종료)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교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도상을 찾으려고 1900년이란 세월을 성경과 씨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구약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는 그 입을 굳게 다무시고 하늘의 문을 열지 않으신다. 그것은 사도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지막 날에 그의 아들로 말씀하시고(히1:2)더 하실 것이 없으시다1)고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 말씀하실 방법을 계획하시지 않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 구원을 위해서 다른 방법을 계획하시지 않으셨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에 만족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 소원했던 모든 관계를 정리했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려는 의도였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변화 받은 후, 구원 계획 속에서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도들의 기록과 선지자들의 기록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딤후 3:16).

성경은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께서 사람과 화목,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배우고 얻기 위한 것이지, 세상에서 새로운 믿음을 창출하고, 또한 믿음의 다양한 형태들이나 신앙을 위한 영성을 개발하며, 신앙의 여러 방법들이 발견되게 하고 새로운 어떤 형태를 조직 하도록한 자료가 아니며, 시대에 따라서 경건의 모습이 조화되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신앙인으로서 세상에서 삶의 규범, 삶의 양식, 삶의 방향을 만족하게 제시할뿐만 아니라, 오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계시를 분명히 포함하고 있는 성령의 음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기록 그 자체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씀하시고 외치신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외치시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한 기록자의 인격과 사상을 제시하고 그들의 진실성을 보증하시는 신비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지시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경험한 구약 시대의 신앙인들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신약 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신앙의 삶에 대한 표준들을 가르쳐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관에 쉽게 유혹되어 오류속으로 휩쓸려 가며, 하나님의 약속을 쉽게 잃어버리며,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두 귀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이처럼 타락의 본성이 우리 몸속에 활기있게 활동하고, 성령의 역사를 억누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성경에서 새로운 믿음들을 발견하려는 고고학 자료로 여기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내고 그 다음에 그 양식을 제도화한 다음, 정통 신앙에 슬그머니 포함 시키려는 악한 습성들이 우리 체내에 돌고 있다. 이런 악한 습성이 습관화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를 송두리째 변질시켜 버린다.


오늘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더욱더 성경의 말씀 안으로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오늘을 섭리하시며, 신앙뿐만 아니라 문화의 역동적인 변화까지도 간섭하시고 있다.  나타난 세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시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린다. 말씀은 기록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천지를 명령하여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며,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다. 이 말씀이 사람들의 영혼에 맞닿으면 생명을 불러일으키며,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낸다. 그 말씀에 전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말씀의 역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1,900년전이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 하고. 그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머리 위에 강림하고 있다. 이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한마디로 외치고 있다. “너희의 죄악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라.” 이런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의도와 함께 기록되었으며, 상황에 따라서 진리가 제시되어야할 필요한 환경과 자료가 선택되어 성령의 음성으로 인정을 받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의 기록은 1,900년전에 데오빌로에게 한 말씀이며, 오늘은 교회에 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사도와 목사와 교사와 복음 전도자와 그리고 선지자들에 의해서 다시 외쳐지고 있다(엡 3:11).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하려면 누가의 의도와 성령의 의도를 각각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3) 누가


   누가는 의사이면서 이방인이다. 그는 자신과 전혀 다른 혈통을 가진 사도들로부터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가 가진 인생의 목표와 모든 꿈을 단숨에 내어 던지고 말았다.  그가 자기의 꿈을 내던지고 하나님의 손길 붙잡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았다. 자신의 의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서와 사도들의 행록을 기록하기 위해서 누가를 택하시고 그를 지적인 능력을 겸비하도록 해 주셨다. 그는 과학적 지식을 소유한 탐구정신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 시키셨다. 그가 하나님의 사도들을 만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이지 자신의 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엡 1:8) 누가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목격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증거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세상의 어떤 직업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기술이 있었다. 그가 사도들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자기의 인생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주위 사람들의 비난섞인 비웃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가시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직업을 선택했다고 굳게 믿었다.

누가의 새 삶은 보통 인간들의 삶이 아니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전신에 임한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능력이 드리워 있었고, 생각과 마음, 새로운 삶을 향한 목표, 목적을 성취하려는 열정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초월적인 것이 드리워 있다는 사실을 느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주 평범한 인간적이었으며 단순한 삶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적이며 현실적이었다. 이런 눈으로 그의 친구의 삶에 뛰어들어 친구를 돕고 있다. 그의 친구 데오빌로는 종교적인 혼란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의 영혼은 혼돈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방황하는 사람처럼 괴로워 하고 있다. 누가는 친구가 고민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답변하려는 자세를 가졌다. 그의 기록은 성도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책상 앞에 앉아서 연구에 몰두하는 신학자들과 강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설교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빼았고 있다. 마음을 빼앗긴 설교자들은 누가의 마음에 자신을 담으려는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옛 누가와 일체가 되는 느낌을 어럼풋이 가지고 강단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토한다. 만약 저자와 마음을 합하지 않고서는 설교자가 아무리 누가의 기록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호소하며, 큰 소리로 외쳐도 성경의 본래의 의도와 전혀 다른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 소리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누가는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됨으로 세기를 거듭할수록 설교자들과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사로잡는 영원한 직업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누가의 개심 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때 함께 동행하여 두 번째 감옥에 투옥될 때까지 동행했던 사람이다. 윌리암-람세이는 누가가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1인칭 대명사를 도입한 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나타내려했다고 의견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6, 20, 27, 28장에서 사용된 1인칭은 누가와 사도 바울이 함께 있었다는 증거임을 보여주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다1). 또한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서 에베소, 골로새, 빌립보, 빌레몬 서신에 누가가 함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2), 디모데후서에서도 누가가 옥중에 있는 바울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3).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를 보면, 하나님 나라가 사도들에 의해서 확장되어 가는 역사적인 과정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성령 강림 사건과 성령의 활동하심, 특히 방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4)

하나님께서는 누가에게 과학적 관찰력을 은사로 주셨다. 그에게 시여된 은사는 후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성경을 기록하려고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받은 은사로서 성령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누가는 사명을 담당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방인이었으며 탁월한 지적 판단력을 가진 그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잘 관찰하도록 정확한 의지력과 판단력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성령께서 역사 하심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을 자신에게 확신으로 인식되기까지 고뇌하고 자세히 조사한 다음,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데오빌로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가 은사로 받은 지적수준(세심한 관찰력과 정확한 판단력)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성령의 의도를 드러내기에 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오늘날까지 사도들에게 역사 하신 성령 역사를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내신다5). 그만큼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생생한 기록이고 살아 있는 성령의 움짐임이다. 특히 본서의 주제인 방언에 관한 내용에서도 자기의 증거를 듣고 믿는 이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단어를 사용하는데 새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4) 방언과 교회문제


성경에 방언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바울, 그리고 마가복음의 기록의 자료가 된 베드로, 세 사람과의 사이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사람들에 의해서 언급된 방언은 일관성 있는 성경 신학적 해석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장하는 종류마다 각기 달라서 분부한 의견들로만 가득차있다. 이때 신학자들의 일관성 있는 해석이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도움을 주게 될 것인지 분명히 알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되므로 사고도 함께 변했다. 사고의 변화는 사람들의 관점까지 변화시켰다. 관점의 변화가 종교의 양식까지도 변화되고, 그 결과 지금은 1900년 전에 살았던 사도들의 중재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1901년 제2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부르는 아주사 거리의 성령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세 장면1)에서 증거된 사실과 일치한 사건이라고 떠들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교회는 고린도교회가 드러냈던 은사운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재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주사 거리에서의 요란스러운 상황은 재연되었고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우리 앞에 펼쳐놓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과 같이 능력을 사려고 교회안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판단한 스데바나 집 사람들은 교회의 상황을 적어서 바울에게 보내고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답변하면서 파벌로 분리된 교회의 성도들을 호통쳤다. 바울의 답변서는 고린도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고 결국은 바울을 환영하지 않았고, 방문조차 꺼렸다.

심각해진 바울은 지금의 고린도전서인 제 2차 서신을 기록해서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 2차 서신은 고린도인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고린도 교회가 앉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세하기 해답을 주었으며 12장-14장의 은사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답을 주었다. 무엇보다 고린도인들이 자신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내용을 조심하고 조심하여 기록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에는 다음과 같은 호통이 담겨져 있다.

“내가 언제 너희에게 은사 가르침을 베풀더냐”

“언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했더냐”

“나는가 너희에게 말을 전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전했다, 나는 온전히 성령의 나타남을 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했다”

“그런데 이제 너희를 누가 요동케 했느냐”

“바울파는 누구며, 베드로 파는 누구냐”

“내가 너희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전한것이 무엇이냐”

“오직 십자가의 도와 예수 그리스로가 아니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나는 너희들에게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전하니............”


[그리스도와 십자가......!]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친 모든 내용이다. 오히려 은사나 기적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고린도인들은 은사들에 대해서 상당히 모르고 있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과 십자가의 도가 바울의 가르침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베드로파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이상한 표적들을 행하고 이적을 나타낸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교회는 혼란스러웠고, 파벌이 나뉘어지고 만 것이다. 바울은 이런 연유 때문에 “너희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한 것이다(고전12:1).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너희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라고 바울의 증거를 성령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교회가 바울의 중재를 원하고 있지만 오늘 당면한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바울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누가와 바울로 말씀해두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미 오늘날 교회가 이런 상황에 빠져 혼탁해질 것을 이미 아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와 바울을 통해서 그 답을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말씀을 읽고 성령이 깨닫게 하는 바에 따라서2) 교회가 무엇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곧 알게 된다. 이것과 저것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분별하여 취해야 한다. 

 

가. 누가의 방언


누가는 사도행전 2:4이하 예루살렘에서의 방언, 사마리아에서의 성령 강림, 고넬료 집의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행 10:44-46)에게 임한 방언(행 8:17), 사도 바울이 안수함으로 강림하게 된 에베소의 제자들(행 19:1, 4-6)에게 나타난 방언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누가의 증언은 오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방언에 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데 명백한 답을 주고 있다1). 그럼에도 방언에 관한 연구서들이 주관적이거나 교리적으로 일관되어 누가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새로운 주장들로 가득체워진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지나친 편견 가운데 언급되고, 적절하지 못한 성경 구절 사용 등으로 인해 성경과는 전혀 다른 방언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신학자들이며 유명인들에 의해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감히 그 주장을 부정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바른 주장을 알고있으면서도 유행처럼 번져버린 신비적인 행동들은 도무지 잠재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대 교회 안에는 이런 편견과 주관적 경험 등의 왜곡된 연구 결과들이 무수한 먼지를 일으켜 교회를 뒤덮어 버렸고, 교회 구석구석마다 깊이 뿌리를 박고 교회 안에서 터전을 확실히 잡았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명쾌하게 해소할만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또한 신학자적인 지식을 겸비하지 못했고, 신앙의 경험이 크게 부족한 편이다. 그렇지만 성경과 전혀 다른 신앙 행동들을 보고만 있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속인 것 같아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필자도 예전에 편견에 사로잡혀서 주관적 체험을 정당화 하려할 때 여러 성경 구절들을 마음대로 적용하여 이들의 주장을 동조했던 날들이 있었다.  다만 성경의 본래 의미가 점차 유행에 따라 왜곡되어져 결국은 세속화되고 성도들이 신앙에 회의를 일으켜 교회를 떠나게될 위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교회와 세상의 이질적인 행위 때문에 결국 교회는 해를 당하게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날 것을 미리 말씀하셨으며, 교회 역사의 시작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살후2:7).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 될 때 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굳굳히 진리의 투쟁을 벌인 개혁자들이 있었고,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휘몰아치던 19세기말에 유럽의 한 구석에서 정통 신학을 보수하기 위해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던 신학자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교회 개혁의 새로운 이정표가 이 땅위에 드리워지도록 하려면, 교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갈 길을 가게 될 양상들이 나타날 것이다(창 15:16). 그리고 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고 그가 성경으로 성경을 바르게 외침으로 교회를 견고히 세울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기 위해서 오늘의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가도록 방치한다거나, 아니면 모르는 체 방관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입이 있어도 벙어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교회의 개혁이 머지않은 날에 분명히 있거나, 아니면 너무도 속히 오실 우리 주님의 영광의 크고 광대한 날이 가까워지더라도 거듭되는 혼돈 속에서 쉬지 않고 정화를 거듭해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가나안의 여섯 부족에게 아직 죄악이 관영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동안이나 이방의 객이 되고 종이 되게 하신 것과 같이 교회의 세속화와 혼돈의 정도가 새로운 시대를 요구할 만한 급박한 시대가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의 교회는 소망이 있고 빛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교회가 정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때까지 항상 개혁을 외쳐야 한다.

누가 오늘의 시대를 절망적이라고 판단할까? 또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에게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졌다고 누가 말하지 아니할 것인가? 필자는 한국 교회에 감히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분별하였고, 지혜 없었으며, 우리 마음의 생각대로 주장하면서 가르쳐왔던 가르침들을 사도적 증언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심판을 받자. 그리고 우리의 가르침이 사도들의 증언과 어떻게 다른지 냉정하게 분석하고, 전지 전능하신 재판관의 판결을 받자. 그래서 실수가 있었다면,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제라도 분별 있는 신앙의 근거를 찾아 사도들의 증거 위에 터를 세운 견고한 교회의 모습을 다시 재건하도록 하자.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혼돈 된 그리스도인들의 정신 사고 속에 파고들었던 “성령 강림의 영속성”, 제2의 축복, 그리고 방언에 관해서 감히 입을 열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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