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강해1

십계명 4계명

생명있는 신앙 2009. 4. 3. 08:26

preach10 십계명강해 제 4계명(1).....................................

1,하나님의 안식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내 모든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내 내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육일째 되는 날에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들에게 복을주시기를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루를 지나 다음날을 맞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날에 안식하시고 이날을 복을 주시므로 이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날의 거룩함은 다른날과 구별되게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십 계명을 연구하면서 아직도 십계명이 우리를 지배하고지켜야 하는 실체로 여기고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두 눈으로보지 않은 결과를 낳고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그림자에 대한 완성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자기와 한 몸으로 함께 연합한자로 여기고 우리안에서 자신을 실행시키시는 분명한 役事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신의 몸으로 역사를 실행시키실 때에 우리는 그의 모든 것을 밝히 보고 알게 될 비밀을 미리 배우게 됩니다(엡1:6).

안식일에 관한 교리에는 많은 잡음들이 우리 귀에 들려 옵니다.

어떤이들은 안식일이 폐기 되었다느니, 아니면 아직도 안식일은지켜져야 한다느니, 의견들이 분부 합니다.

어떤이들의 말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면 돌에 맞아서 죽음을 얻어야 하고 공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으면서도 안식일을 범하는 그들을 성경에 법대로 처벌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한 일들을 볼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더 사랑하고 계명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우습게 여겨도 공회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사랑과 용서로 일축해 버리려고 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는대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합니다. 무슨일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만 급급하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온전하게 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게 범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더한 기쁨이 없읍니다.

창세기 6장5절에서와 같이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계획하고 고안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읍니다. 그들이 하나님앞에서 스스로 사악하고 타락한 것 뿐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않는 한 안식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악한 환경에 젖어있는 인간들에게 사악한 환경으로 부터 격리시켜야 할 중요한 날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안식일은 천지를 만드신 때에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만드셨다는 것에 더 중요한 역점을 두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칠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이날을 복을 주셨습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휴식을 갖는 날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일간의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날동안 휴식을 취하시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갖기를 원하시는 거룩한 구별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거스리는 오염된 것들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거나 혹은 우리 본성에 속한 모든 것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순결되이 경배 할 수 없다는 것을 잘알게 된 것입니다.

창조의 근본 원리로서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그 거룩하심을 피조물에게 더욱 구별하시므로 창조의 법칙에 의해서 스스로 존재에 기여하고 있는 피조물의 그 본성이 하나님께 거스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피조물은 구별되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거룩을 확인하게 될 것이나 죄에 빠진 우리는 그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이 피조물을 거룩하게 하는 징표가 됩니다.

 

두번째로 안식일은 의식을 지킨다는 것으로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사 58:13-14) 우리는 이날을 거룩한 행사에만 급급한 나머지 이날을 의식에 묶어두고 그 의식의 행함을 제일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날의 예배의 모든 행사를 지키므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하루를 지켰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근자에 이르러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눈에 두드러져 있습니다.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속에 깊이 세겨 두기보다는 의식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현상중에 한가지 입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에 올때에 낚시대를 자가용 뒤 트렁크에 싫고 예배가 마치면 낙시터로 갈 준비를 다하고 교회에 나아옵니다. 또 어떤 성도는 등산 갈 준비를 다한 다음 예배를 드리려 교회에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신 증거를 말할까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위일까요?

이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의 개념인가요?

그리스도께서 과연 안식일을 없애시므로 그 안식에 들어가심이 합당합니다.

인간으로서는 그 거룩한 안식에 들어갈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셨습니다.

과연 인간은 거룩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는 버림받은 상태를 스스로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도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임을 각자가 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낚시를 준비해온 의식을 행하는 사람보다 어쩌면 더 더러운 사람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면서 그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분내고 시기하고 욕하며 헐뜯으며 영혼을 사냥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짏밥는 것 외에 더 큰 죄를 짖지 아니한 것은 우리보다 더 죄가 가볍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을 보이지 않게 더럽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우리보다 더 죄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안식의 의미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우리는 찾을 수 없어 눈물이 마를 여유가 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대하는바는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이 고대하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안식일에 관한 의미가 마음깊이 새겨져 있어야만 했으나 그들은 이 안식일을 행위에 국한한 의식의 모든것으로 여기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일을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하 하는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안식일에 관하여 무수히 많은 장로들의 유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변질된 규정을 보고 인간이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에는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지 아니할때에 일어난 일들은 인간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규례와 방법을 조절합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을 향햔 갖가지의 방법으로 의식과 규례를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림자라고 하신 모든 것을 친히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시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만족을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지킨다는 그것으로 아무런 목적도 이루지 않는다는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 율법의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안식일 뿐만아니라 그 어떠한 계명도 범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계명을 만족시키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대신하여 그 계명의만족을 이루시므로 그로 인하여 믿음을 가진 모두에게 그와 같은 부활의 영광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그 모든 날을 하나님게서 원하시는 생각과 하나님의 요구에 능히 순종하시므로 자기를 버리시고 오직 순종의 삶을 사셨을때 타락한 우리들과 같이 전혀 자신의 의지를 격동시키지 않으셨으며 언재든지 하나님께 의문하여 말씀하시기를 “왜 이리 하셨나이까!”라고 원망해 보신 적이 없으시고 오직 순종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그 모든 삶은 요 5:17에 기록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씀 속에 모든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세번째 안식일은 세상으로 부터 구별된 날입니다(레 23:3).

모세는 이날을 성회로 모이는 날로 정하였고 이 말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성회로 삼는 여호와의 절기에 대헤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이 제일먼저 엿새 동안을 일을 할 것이요 제 칠일은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창조주 께서 인간에게 주신 안식

 

시편 95편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안식하시고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기록하여 주셨던 기록의 말씀중에 안식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누가 기록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그 기자는 엄숙한 총회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권면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셔야 할 두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그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교회를 그와의 은혜스러운 교제 안으로 맞아 들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의 계명을 단순하게 계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접근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여러 해설서에서 접하게 된다. 어떤 십계명 해설가는 안식일의 계명을 예배에 국한하여 해석하므로 그 의미에서 본질을 전혀 강의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윤리적인 종교로 전락시키는 것을 볼 때에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라는 조심을 기하게 됩니다. 또한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십계명을 해석한 화란에서 온 고신대학의 고 재수교수는 십계명을 그날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지에 국한하는 극히 미약한 관점에서의 글을 세상에 내 놓으므로 개혁교회의 부끄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그 외에 많은 글들도 있지만 아직 까지 개혁파 입장에서 글을 게재하는 십계명 강해를 살펴 볼 수 없고 다만 우리의 종교 개혁자 Calvin선생의 십계명 강해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좋은 서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 본바에 의하면 십계명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기록하시는 인간의 마음에 가진 근본적인 신 의식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요, 또한 이론도 아니요 오직 신앙이라는 것을 이제 부터 우리가 어떻게 증명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바는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후에 안식하시고 오랬동안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한 안식에 타락한 인간이 참여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도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강퍅한 무리가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노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불행을 얻었습니다.

여기게 등장하는 불행한 이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살펴 보고 오늘 우리가 알고자 하는 안식일의 안식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서 현재 우리가 어떠한 안식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성경으로 분명하게 점검해 보는 시간으로 하갰습니다.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므리바에서와 광야 맛사에서 마음을 강퍅케 한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한 무리들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광야로 나오기 전에 애굽에서의 열재앙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두눈으로 분명하게 보았고 자기들의 두 발로 홍해 바닥을 밟고 건너 왔습니다. 이때 모세는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셨다고 너무도 분명하게 확인 시켰으며 그들은 그 사실을 증언하듯이 모세를 따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것입니다. 또한 광야에서 그들이 가진 모든 음식을 먹어버리고 그들이 굶주리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므로 그들을 먹이셨고 그들은 알지 못하는 그 깟씨를 먹으며 가나안을 향해 가는중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교롭게도 먹을 물이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먹을 물이 풍족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갈하여 있던 이때에 마음이 강퍅하던 이 사람들이(안식을 향한 진정한 소망이 없는 하나님의 도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이들<민14:22-23>) 여호와께서 우리중에 계신가 아닌가하여 시험하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로 말미암아

반석을 쳐 물을 내게 하는 기적을 배푸신 곳이 므리바 입니다. 여러분들도 가끔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생활의 여러움만 닥쳐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중에 계시지 않는가 보다 라고 하나님을 시험하기를 한 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이것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 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10-11)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내가 노하여 맹세 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다시말한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는 그 “목적지”와 “내 안식”(하나님의 안식)에는 상당한 관계가 있었고, 그것이 곳 이스라엘에게 안식이였다는 것입니다.히브리서 4장 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데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이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중에 혹 미치지 못할자가 있을까 함이라.....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 하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 즉 안식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자는 하나님이 자기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일을 쉬느니라”

다시 부언하면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던 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고 시편과 히브리서는 젖과 꿀리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안식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안식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알고, 안식으로 가는 길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가는 길은 선택 받은 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순종함으로서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기 행위가 함께 하지 않으면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실제로 안식하는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신자들이 열망하는 최종적인 안식이라 함은 당시나 우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며 이땅은 참된 안식을 그림자로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것은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나 택함을 받지 않은 이스라엘인이나 모두 동일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간다고 해도 그땅을 볼수 있는 자와 보지 못할 자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분명하게 골라 내시고 반드시 택자들로만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초역사적인 체험을 하였지만 잠시라도 그 초역사가 사라지면 그들은 곧 잘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그들이 여호와를 열번이나 시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 함께 가는 그 가나안 땅의 길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태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죽고 이십세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이 장성하여서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십세 이상의 사람으로는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였습니다.

 

2, 안식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사는 사람만이 가는것입니다.

안식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의식주의 문제가 그들을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바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고 여호와께 범죄하여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우리의 열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해둔 저 안식에 들어가 보려고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배우는 이 안식의 날에 대한 규례도 역시 무수히 많은 이론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우리가 어느것이 진짜 진리에 속하는 것인지 알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는것입니다.

애굽을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안식의 날은 가나안에 입성하는 날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저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의 눈과 귀를 닫아 안식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서 유구 무언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는 사람은 홍해를 건넌 장정은 모두 죽고 이십세가 되지 못한 어린이 들이 장성한 후에 그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의지하여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로 저 가나안 땅을 들어오도록 섭리하시고 계셨고 이를 모르는 저 미련한 백성들은 믿지 아니함으로서 비극에 처하고 만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순종은 저 안식에 들어가게 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순종의 만족이셨습니다.

구약의 안식은 그 그림자이더라도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안식에는 광야의 로정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지 않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안식을 주었으나 순종하지 않으므로 들어가지 못했으나, 신약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그들은 안식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안식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안식을 어떻게 알고 안식일을 지키겠으며,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안식일을 찾아서 지키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세계에 속한 안식일을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날이 저절로 다가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날을 단순히 구별하시므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안식하는 날로 만드셨다는것에 촛점을 맟추어야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안식일의 날이 어찌하면 안식하지 않는 날로 변해 버렸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식이 남아있는 것이고 이 안식은 영원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안식일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안식하기 위해서 가는 안식을 경험해 보지도 못하면서 안식일은 꼬박 꼬박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은 경험되지 못하였고 다만 계명으로서 안식만 지켜 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 4계명을 기록하시면서 말씀 하시기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말씀 하시기를 “제 칠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여호와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그 날은 거룩해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와 께서 만드신 피조물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그 규례를 어기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만드신 그 거룩하신 규례를 변질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 옳으냐 아니면 성경이 옳지 않느냐 라는 비참한 판단이 인간의 이성에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판단하기를 여호와의 만드신 그 안식일이 거룩해지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녀들로 안식을 범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그날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들이 타락함으로서 그들이 거룩한 악식일에 참여 한다 해도 오히려 안식일이 더러워지고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을 것이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히 속죄의 제사와 희생을 허락하시므로 안식일을 지켜지도록 하셨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희생의 제사를 대신하시고 자신으로서 하나님과 화목하시므로 진노를 거두셨으니 우리가 안식에 참여 한다면 참여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 받는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나아가서 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로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날로 복되게 하시니 우리에게는 거룩한 선물이요 또한 참여한 모든이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이 함께하는 결과의 징표인 것입니다.

 

3,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안식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보는 것은 광야의 길을 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안식이 아니였다. 그 땅은 참으로 젖과 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땅에서 그들이 할일을 너무나도 많았으며 그들은 많은 일을 해야만 했고 그곳에 있는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이방객들과 전쟁을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한 단면만 보고도 우리는 안식을 기대하는 인간의 타락상을 면밀하게 살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안식은 가만히 누워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양식을 먹고 살려는 아주 방탕한 생각이 인간의 사고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이 생각하는 안식의 내용은 참으로 비참한 더러운 안식을 추구하고 있다.

신의 통치를 받으며 자기의 모든 욕구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는 그 거룩한 도시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이 영원한 안식임을 그림자로서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안식이란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며 먹고 마시는 그러한 상태를 추구하고 있다.

가나안 땅을 안식으로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것을 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버리고 각종 우상들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결국은 모세의 예언대로 패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은 것은 참된 안식을 소망했던 그에게 절망을 던져 준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결정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안식으로 인도해낸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므로 타락하자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모두 멸망하기로 마음에 계획을 세우셨고 모세에게 이를 알리 셨다(32:10).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 “하나님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 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고 비난하게 하려 하십니까? 하나님 그리하지 마옵시고 뜻을 돌이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라고 부르짖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때 모세는 시내산에서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 오던중이 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두 돌판을 들고 돌아오는 것조차 기억하지 아니하고 제사장 아론을 중심으로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금송아지 신이 애굽에서 자기를 인도해 낸 신이라 하면서 춤을 추고 경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그 거룩한 두 돌판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던져 깨드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숭배하고 춤추는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그 가루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우게하고 “ 지금으로 부터 여호와 편에 설 자들은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그때 모세를 따른 사람들은 모두 레위 족속의 사람들이 모였고 모세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각자가 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게 한다.이 때 모세는 이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하여 여호와 하나님 믿기를 거절하는가를 뼈져리게 느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제하여 버려주시기를 구하였다.

백성들의 믿음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을 뼈저리게 느낀 모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예언을 듣고<(31:14_23)”너는 너희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땅에서 일어나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노래로 지어 백성들에게 외우게 하였으나 참으로 그들은 그 가나안 땅에서 이방신을 수없이 섬겨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백성들이 소망한 안식을 더럽히고 만 것이다.

가나안이 참으로 안식을 나타내는 땅이였다면 왜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범죄 하였는지는 이제야 자세하게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참된 안식은 인간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셔야만 인간이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나안 땅은 참으로 안식을 나타내 주는 땅이였다. 이스라엘이 수없이 많은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 해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호 해 주셨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범죄가 극에 달하였고 더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즐겨하지 않는 백성으로 변하자 가나안 땅은 안식하는 땅이 아니라 저주의 땅이 되고만 것이다.

이렇게 볼때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놀라운 축복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살펴 볼 수 있고 가나안 땅에서 안식의 그림자가 히미하게 발견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시므로 안식의 진정한 모습이 분명하게 이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는 자유를 말하고 그 자유는 죄에서 놓여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참된 삶을 얻는 것이였다.

이제 그 자유의 그림자를 통해서 안식의 의미를 재 발견하고 우리가 안식을 어떻게 지켜 지도록 해야 하는가 살펴 보자.

출애굽기 16:22-30에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지 않는 그 날에는 모든 것이 쉬면서도 평상시와 같이 이루어 지는 것을 말한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식이 떨어졌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모든 것을 광야의 로정에서 모두 사용해 버리고 이제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다. 만나를 먹으면서 광야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것을 명령하시고 그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 그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아가서 만나를 거둘 수 없다. 이 한가지가 안식의 의미를 모두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휴식은 인간에게 휴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께서 창조의 일을 쉬셨고 일을 하시지 않으셨으면 이세상이 일을 하지 않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여서 하나님께서 휴식하시는 것을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다. 그런대 하나님께서 쉬고 계시는대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시느냐 하시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존재에 대해서 의문이 발생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라는 것이다.

창조주의 휴식은 모든 피조물에게도 동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의 이론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초월하시면서도 내재 하시기 때문에 내재적인 사역의 휴식은 그에 따르는 모든 피조가 함께 휴식을 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제 칠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들에 나아가서 만나를 얻을 수가 없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지 않으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만나를 주으려고 밖에 나아가 보았지만 그들은 만나를 줍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만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평상시 이들에게 주어지는 만나의 양은 누구에게나 가족의 분량대로 주어 졌다. 어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많이 줍고 어떤 사람은 가족의 분량만큼 주어서 각기 오멜이라는 되로 제어 보았더니 많이 거둔자도 부족함이 없고 적게 거둔자에게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가족의 분량에 알맞게 거둔 놀라운 일이 였다.

또한 어떤이들은 이것을 다음날에 먹으려고 얼마만큼 남겨 두었다가 아침에 일어나서보니 그것이 벌래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된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분명히 체험하였다. 그런대 제 육일째가 되자 각기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두게 되었고 이것이 하도 신기해서 두목들이 와서 모세에게 묻게 된 것이다.

 

볼찌어다 너희들에게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너희에게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우리는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안식을 주는 것인지 살펴 봐야 한다. 1) 그들은 봉급을 받기 위해서 공장에 나아가지 않으며 2) 그들에게는 농토가 없어서 할일이 없다. 3) 그들이 가는길은 힘들이며 가는 길이 아니다. 4) 그들에게는 대신 양식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계셨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선포하시고 이날을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1)이날을 어긴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출 31:14; 35:2)

2)안식일은 구별된 백성의 징표 입니다(출 31:13-17).

3)안식일은 쉬라 (출 23:12).

4)안식은 복의 근원임 (사 56:2)

5)성회로 모일것 (출 12:16, 무교절 절기간에)

 

4, 안식일 과 주일

십계명이 말하는 내용중에 제 일계명과 제 10 계명까지 어느것 하나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십계명을 완전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해도 된다고 의미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해온 계명들 중에 우리가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없다.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배우게 될 계명들 중에도 우리의 힘으로 지킬수 있었던 계명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일계명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알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하고 무능함을 인하여 영원하시고 무궁하신 사랑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에게 드러내시기를 기뻐 하시고 죄인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 크신 사랑에는 불가능한 것을 친히 이루셔서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삼으 셨으며, 아들로 삼으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 하시지 않으시고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전능하신 은혜를 주심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신 전능하신 사랑을 우리로 알게 한 것이다. 제 2 계명도 역시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전능하신 자신을 알게하시는 거룩하신 마음을 우리에게 심기웠고, 제 3 계명 역시 이름을 주신 전능하신 계시를 발견케 하셨다.

이제 제 4계명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세긴 종교성을 더욱 아름답게 하도록 피조물의 세계에 밝히 드러내 주시려고 또한 계명을 더하신 것을 보게 된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 같이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더욱 빛나게 되도록 우리의 삶의 거룩한 삶을 십계명에서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이라고 말할 때 종교성의 의미를 제외하고는 거룩하다는 것을 이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일부의 사람들을 거룩하다 라고 창하고 있지만 그것이 종교성에 비유 할 수없다. 어느 누구든지 거룩함을 의미하는 언어를 구사할 때에는 종교성을 배제하면서 거룩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거룩함이란 ‘보이지 아니한 존경의 대상에게 주어진 인간의 세계에서 구별된 것을 거룩하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사회에서는 거룩하다 라고 말하거나 불리는 것은 거의 없다 .

그러면 거룩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종교성에 대한 깊은 의미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해석 또한 바르지 않다. 다만 거룩하다 라고 말할때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시므로 거룩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칠일 중에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그러나 거룩에 참여할 백성이 거기에 남아 있다면 아직은 거룩하게 구별 된 것이 아니다(히 4:11). 그것은 저들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써 저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에 피조물인 인간의 참여를 허락하셨다는 놀라운 말씀이다. 이렇게 볼때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안식의 땅이라고 소망한 의미를 밝히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구약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배웠다. 구약의 기간을 4천년으로하고, 그 4천년 동안 칠일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특별히 결정하사 그날을 성별토록 하셨다 . 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주일의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였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주일의 첫날에 변하여 졌고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주의 날인 이 날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와 찬미하는 영광을 돌려 드리며 이날동안 거룩하게 마음으로 영광을 돌리며 행동으로 주의 영광을 빛내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일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 되고 안식일 대신에 주의 날을 기념하여 그날을 예배의 중요한 날로 의미를 바꾼 샘이 된다.

구약의 기간 동안에는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 날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이 날에 영광을 깨닫고 성도간의 교재를 넘치게 하는 것으로 누린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이루지 못할 모든 계명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더이상 인간들에게 이 요구가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참된 자유를 누리며 평안의 떡을 때고 안식하는 것이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안식일은 참으로 폐하여 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5:17-18에 보면 “내가 율법을 폐하려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완전케하려 함이니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볼때 안식이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영광의 안식을 안식일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을 안식하므로써 누린다. 안식일은 더이상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가 되지 못하고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법정으로 끌고갈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계명의 요구에 따라 모든 값을 그리스도께서 치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 말씀 중에 멍에 매여 수고하는 인간의 어깨에서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시는 말씀은 이방인들이 이해 할 수 있었던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에 억매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 하려면 반드시 인간이 율법에 억매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죄인임을 깨닫는 자라야 주님의 말씀 속에서 깊은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안식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만드셨고 지명하여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면 우리에게 분명히 안식되는 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되는 놀라운 역사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명령하시지 아니하셨다. 사람에게 주어진 무거운 멍에가 된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하신 규례로 나타난 것이다.

 

이 날은 성도간의 깊은 교제가 충만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사전에 일상의 일을 준비 하고 처리한 후에 모든일을 마쳐놓고 말과 세상에 관한 오락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한 종교의 거룩한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진력을 다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안식일이 성도에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 할 때에 넘치는 감사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에 진심으로 마음의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이 기쁨에 참여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요 참 신앙의 지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 자칫 오해한다면 방탕에 빠질 위험도 없진 않지만 이러한 위험에 빠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안식을 준 것이 아니라 안식의 의미로서 진정한 지식을 소유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이르렀기에 반드시 사망으로 이르게 되어 이 세상에 있는 우리도 분명히 죽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마땅히 죽어야할 우리를 대신해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께서 율법이 말하는 그 행위의 요구를 완전케 이루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저 안식일 지키지 못하므로 영원히 구별된 저주에 이르게 될 것이다.

대속의 주님께서 이루지 못하는 그 저주를 우리에게 지우지 아니하시고 대속해서 갚으셨다. 인간중에는 그일을 감당하지 못할 그 영광스러운 계명의 완성이라는 영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 복음의 말씀을 듣을 때 우리는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것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내 마음에 있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버림받은 이방인으로 우리가 비록 태어났었으나 사랑이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시고 구원 받은 것을 알게 한 것이다.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 그리스도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어떻게 하라고 주셨습니까? 내게 주신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셨고 내가 가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안식일을 기억하여 주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로 지킨 것이 여러분 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께 맡겨 두셨으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의 첫날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 하여야 할 것입니까?

본래 안식일은 지금의 금요일 저녁에서 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안식일이라는 의미를 가진 주의 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까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우리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안식일의 완성에 대하여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행하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가 제정한 합당한 순서를 다함께 준수 하여야 합니다 . 이것은 다함께 준수할 거룩한 성도의 행할 약속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이날을 거룩한 날로 삼고 거룩한 종교가 우리 가운데 없어지거나 또는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빈번하고도 꾸준하게 거룩한 집회로 모이고 하나님의 예배를 함양할 수 있는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이 것은 교회 안에서 의례, 질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맞도록 다른날을 정하신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미신적인 생각들을 버립시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의미를 미신으로 변질시키고 그리스도를 멀리 한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 것이 아니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안식일에 관한 견해는 지극히 미신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큰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교회의 일원으로 분명하게 서약한 내용을 어긴다는 것은 범죄에 속하겠지요. 그러나 안식일에 관한 문제가 지켜야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다는 개념은 극히 미신적인 의미임으로 이러한 생각은 전혀 마땅치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람니다. 다만 우리가 주일을 기념하려고 약속한 이 날에 안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날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지 아니하였는데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킬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은혜의 풍성함을 드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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