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ch 18 십계명 강해 10 제 3계명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히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히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은 밀란에서 칙령을 반포 합니다. 이 칙령으로 인해서 그동안 많은 고초와 고통을 겪으며 선교 활동을 하며 지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교회는 이제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결국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떠한 무력이나 힘으로도 몰아낼 수 없다는 분명한 진리를 남겼고 하나님의 교회는 악에 의하여 무너질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핍박도 없고 지하교회도 없습니다.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앙을 고백하기에 바빳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핍박을 받는 곳이 또 생겨 났습니다.
그곳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곳은 위험이 있는 이념이 다른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종교가 다른 국가에서도 기독교는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곳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데 그곳은 인간의 마음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쥐고 세상의 왕을 허가하는 권위에 서 있을때 이제 인간의 마음에서 타락하기 시작한 교회는 십계명의 의미를 마음에 세겨두기를 거부하고 계명중에서 제 2계명을 삭제하고 제 10계명을 둘로 나누어 신앙의 방법을 마음대로 변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들은 이 십계명이 하나님께서 친수로 기록하신 것을 전혀 마음에 두기를 거부함으로 성경이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를 우위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하고 신앙의 방향의 제시하는 교회는 그 권위가 교황 개인에게 있었고 교황은 국가와 교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787년에 있었던 니캐아회의의 결의 내용이 교회에 성모 마리아 상이나 성자들의 상을 세워 두는 것을 허용하였고, 숭배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주는 귀중한 십자가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그림으로나 모자이크나 다른 어떤 적당한 재료로서 만들어진 존경할 만한 거룩한 성상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안치 되어야 하며 또 그 성상들은 교회의 성구들과 예복들과 “경배나 숭배에도 가능하다는 결의를 하게 된 것이다.
성상을 허락함으로 제 2계명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우상 숭배의 명령을 배격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 계명을 삭제해 버리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일전에도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지만 강남의 큰 교회가 자기가 경영하는 수도원에 예수의 상을 만들기로 하였고 또 그 공사를 위해서 30억원이 드는 비용을 성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질 것이 교회 신문에 발표 확인하였읍니다. 계명을 어긴 천주교가 성상숭배를 결의한지 700년이 지난 1517년에 교회의 개혁으로 인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고 말았읍니다.
십계명은 거룩한 하나님의 친수로 쓰신 것이며 성경은 이 모든 계명을 설명한 것으로 하나님의 가장 권위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3“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이제 부터는 제 삼 계명에서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펴 봅시다.
모세가 미디안을 자기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방황하듯이 인생을 살고 있을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기의 이름을 반포하셨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들렸던 이름을 설명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행하셨습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진실성을 살필 수 있으며, 모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볼때 우리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자기의 이름을 들려주시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유익이요 많은 교회에 커다란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그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이름의 반포와 중요성을 살펴 보도록 하겠읍니다.
제 1계명과 제2계명에서 충분히 들은 바와 같이 이세상이나 우주에 신이라고 칭함을 받는분은 오직 한분 뿐이십니다.
그 신의 이름은 여호와 입니다.
이 신의 이름 여호와는 창세기 4;26에 보면 아담이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해서 낳은 셋을 낳고 셋이 에노스를 낳고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모세는 기록하였읍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인류의 조상들로 부터 불려오기 시자한 것입니다.
셋으로 부터 노아까지는 1천년간의 간격이 있었고 노아부터 모세까지는 1600년이라는 기간의 간격이 있어, 도합 셋으로 부터 모세까지는 2600년 이라는 엄청난 세월 간격에 시대적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간을 성경이 가르쳐 주는대로 우리가 의지하여 따라감으로 모든 시간을 초월해서 의미를 발견해 봅니다.
2600년동안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오고 있었고 이 여호와의 이름이 아브라함에게 이어지는 기적적인 관계는 비밀에 붙여지지 않을 수 없읍니다.
오랜 세월동안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아 노아와 여덟식구만 남아 있었는데도 그 여호와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이어와 셈족중에서도 여호와를 아주 잊어버렸는가 싶었을대 아브라함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그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나는 장면을 성경을 통해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가시 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 이를 이상히 여긴 나머지 이를 살펴 보려고 되돌아서서 가시 떨기 나무 앞으로 갔다가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은 이렇습니다.(출3;4)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는 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모세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양을 치던 지팡이를 땅에놓고 급히 엎드리어 그 음성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이리저리 살피며 누가 자기를 불렀나 하고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에 “또 이르시되 6절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때 성경을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라고 기록합니다.
모세가 외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했읍니까?
그는 40년 전에 애굽에 있을때에 살인을 함으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자기 족속편에서 자기의 민족의 백성을 위하여 일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는 일단 사람을 죽인 살인자 입니다.
모세는 눈에 보이지 아니한 음성을 듣는 순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일체 모세에게 묻지 않음을 그의 기록에 나타납니다. 모세가 자기의 죄때문에 두려워 할때 하나님께서는 너가 사랑하는 너의 족속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 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모세의 이러한 상황을 보고 또한 자기의 죄의 가리운 상황을 참작하면서 이렇게 시편에 기록한 것을 봅니다 “죄의 가리움을 받고 ....허물의 사함을 받는자는 복이있도다”
모세는 그 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에 꺼내시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겠다는 말씀이 참으로 기다리고자 하는 놀라운 음성이였읍니다.
자기 백성이 40년동안 자기가 없는 동안 괴로움을 생각하면 그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런대 이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말씀을 듣는 모세는 반은 믿겨지고 반은 믿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성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읍니다.
반신 반의하는 모세는 들려오는 음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것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들이겠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모세는 신중하게 그 음성에 질문을 합니다.
내가 지금 이스라엘에게 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가면 저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섬기는 신과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이 서로 같아야 할텐데 내가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합니까?
모세는 신중하게 신을 살펴봅니다.
지금 자기가 만난 이 음성이 참으로 우리 조상이 말하는 여호와인지 마치 베뢰아 사람과 같이 이말이 성경과 동일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 하듯이 자세히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놀랄만한 소식이고 또한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의 응답을 받고 기뻐한다면 모세는 이제 자기 백성에게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되고 자기의 신에게도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대단히 조심하고 있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의 신중한 자세를 살펴 보십시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담대함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더욱 믿음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치 내가 듣고 있는 저 복음의 말씀이 참으로 삼위일체 되시는 성령의 역사인가? 아니면 자기의 신앙의 열심으로 마치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인 것 마냥 선포하는 것인가? 마땅히 성도가 모세와 같은 자세를 갖고 신앙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신앙의 좁은 문을 모세와 같이 겉고 있다고 믿고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는 모세를 심판하시지 않고 그에게 더한 사랑을 배푸신 것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만약 이 일이 모세가 아니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였다면 어려분은 모세처럼 여호와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자기 하나님을 태스트 해 볼수 있읍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모세가 이룬 이 신앙의 놀라운 행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견고하게 지켜 주시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견고한 신앙인은 자기에게 다가온 하나님에 관한 판단을 냉정하게 하는 모세의 자세는 이스라엘에게 더한 믿음을 주고 있읍니다.
요즈음 소위 계시를 받았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읍니다.
이들은 모세「와 같이 자기에게 나타난 신을 태스트해 볼 겨룰이 없이 받아들입니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자기 마음에 나타난 크나큰 확신이 자기를 휩싸일때, 혹은 자기 가 믿고있는 신이 과연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왜 (요계 22:19의 성경을 스스로 파기 하시면서 까지 자기에게 나타났는지를 마땅히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생각하고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셨다고 거짓을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봤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주장을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셨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엉뚱한 사실을 모세가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모세는 참으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났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말것입니다.
모세의 질문에 우리는 신중을 기하여야 합니다.
혹 꿈에라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고 또한 능력을 주실때 우리는 모세와 같이 당신이 하나님이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할줄아는 담대한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나에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탠데 나는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을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 라고 대답하셨읍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있읍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 우리주 께서는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삼위일체 되신 그 모습을 상상하거나 볼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형상으로도 만들수 없으며 오직 이름으로만 이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모든것이 대표되고 하나님께서 그 이름의 권위를 드러내 주시기 대문입니다.
근자에 있어서 한국신학계나 교계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들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것은 “성령운동”이라는 말이요, 또 하나는 성령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족해서 이제는 “성령 폭발” 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을 보고 인간의 악한 것을 교회가 드러내는 구나 라는 탄식을 짓지 않을 수 없읍니다.
물론 성경에는 성령의 이름을 보혜사라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삼위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합니다.
삼위에 각각 자기의 직임에 따라 이름이 붙여져 있읍니다.
성자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라는 이름이 있읍니다.
이 이름도 직임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이요”, “예수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자” 라는 직임을 부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이라고 부를때에는 삼위의 각위에 따라서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직임의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라 할때에는 삼위중의 위격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거룩한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어떠한 경우라도 망령되히 일컬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대 “성령운동” 또는 “성령폭발’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호칭에 먹칠을 가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름으로만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우리 하나님을 우리는 망령되히 일컫는 다는 것은 그분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부터는 우리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그 대표되는 호칭을 말할때에 거짓이있는 농담이나 우스게의 말을 삼가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고, 오직 우리의 혀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하게 하고 그 이름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무릎을 꾾는 것으로 이름을 경배하여야 할 것이며 그 이름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도의 몸가짐을 가지시길 간절히 바라겠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롱하지 말고 비방하지 말고 또한 그의 하신 일에 대하여 진실로 찬양의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