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 일계 명
출애굽기 20:3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모세의 유일신관
1, 나 외에 다른 신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라는 말씀 속에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하나님과 같이 경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는 사실부터 비극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이 존재한 것처럼 들려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감소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께서 모든 것들을 친히 준비하시고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힘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감소되면 그것은 곧 더렵혀지고 부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른 思考로 성경을 접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가능한 한 신비하게 성경을 접근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바르게 접근해 보려고 최대한 신중을 기하려 한다.
1) 발람의 종교
우리는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발람으로 인해서 가리워진 것을 용납치 아니하신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율법과 십계명을 수여한 다음 하세롯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약 30년간을 빙빙돌며 그곳에 있다가 염해 바로 밑에 오봇을 지나 모압 평지에 도달했다. 이때에 모압이라는 나라의 왕은 발락이었다.
발락은 수년전에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죽지도 아니하고 이제 자기 앞에 서있는 것이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랏을 쳤고, 시혼과 옥을 정복하였고, 지금은 자기들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대적을 하느냐, 아니면 이들과 화친을 하고 이들에게 길을 빌려주어 그들의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느냐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가 이제 한가지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 방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신에게 호소함으로써 신의 저주를 받게 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발락이 이러한 방법을 취하게 된 동기는 복술자 발람의 영향이 컷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발람이라는 사람이 신에게 기도하면 그의 복 빔을 받은 자가 복을 받고 저주를 위하여 기도하면 저주를 받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발락은 모압의 왕이다. 그가 왕이였다면 국가의 대사를 개인 혼자서 결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속한 충신들에게 의견을 묻고 가장 옳은 방법을 택한 것일 수 있다(22:15절에 더 높은 귀족을 표현함). 한가지 유의할 것은 당시는 신들이 국가의 흥망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는 시대였으니 신에게 호소하므로 좋은 효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압의 중진 회의는 발람에게 국가의 흥망을 걸게 된 중요한 결정이 발락의 개인의 결정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발람이라는 사람의 공개 되어 있는 그 복술 능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중심에서 성경을 바라 볼 때 다신론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혼동을 초래하고, 또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경배하는 방법이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주는 방법(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 신을 초대 할 수 있다)등이 오해의 여지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신학자들은 22장에서 24장을 해설하기를 발락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해석하고 발람을 하나님께서 세운 이방인의 선지자와 같이 이해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곡해는 그 사고의 저변에서 다신론 사상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들이 소문에서 소문으로 모압 땅에 전해져 발락이 발람을 알 수 있었고 급기야 이스라엘을 저주 하기 위해서 발람의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발락은 모압 장로와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여 발람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라고 발람이 있는 미디안으로 보냈다. 미디안의 장로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종교와 같은 종교를 가졌으나 이들도 여러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의 장로 이드로에게 왔고 이 곳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점에서 미디안의 장로의 종교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임을 발견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이드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미디안의 각종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발람에게 온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의 장로들은 복술에 대한 예물을 발람에게 주면서 모압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 해주기를 부탁했다. 발람은 그들이 가지고온 예물을 받고 발락의 부탁에 따라서 그날 밤에 하나님께 물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줘야 할 것인지를 확인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날밤 발람에게 나타나 모압장로들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이 발람이 섬기는 종교를 잘 알아야 한다. 이사람은 복술자이다(24:1 사술을 쓰는 사람). 발람은 복술을 통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자기가 예물과 제 물을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날 밤도 발람은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시기를 바라고 양과 수양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사실대로 발람에게 나타났고,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발락의 사신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발락의 요구에 응하지 않음을 전해 준 것이다. 우리가 보고 기이한 것은 발락은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多神을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요구에 응하셨다고 모세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발람은 다른 신에게도 기도하였고 그 신이 나타나 자기의 요구에 응답해 주기를 바라는 제사도 행하였을 것이다. 발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필요 할 때 마다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참으로 피곤하다. 복술자와 상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술자가 수양을 가지고 와서 자기를 부를 경우에 그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야 하는 신이시기 때문이다. 발람의 종교가 복술자라고 모세가 표현하면서 발람에게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증거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교육하려는 의도였고,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거짓이든지 참이든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경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렘12: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사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 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에게 맹세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서 세움을 입으려니와)은 모든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간섭하시고 또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셨다. 이로써 여호와는 이 세상의 모든 신중에 신이 아니시고 오직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자연 스럽게 강조되도록 의도 하셨다.
2) 발람의 밤샘 기도
발람은 밤을 세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사건은 주변 국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능력에 대한 소문들이 주변 국가에 충분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나타났던 표적들은 감히 주변 국가가 이스라엘을 얕볼 수 없었던 일임과 또는 각종 불가사의한 일들이 그들의 귀에 들어옴으로 놀라게 되었고 주변세계가 이스라엘을 경계하고 있을 때이다. 당시에 강력한 연합 세력을 구축한 가나안의 부족국가와 바벨론 땅 미디안의 세력과 앗수르지역의 강력한 군대와 애굽의 막강한 세력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국가를 세우고 세력을 강하게 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참으로 기이한 사실임이 역사가 말하고 있고, 성경은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모세의 기록에 의해 증거 되고 있다.
발락의 요구를(11절) 묻는 발람의 물음에 응답하신 여호와께서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민 22:12)라 하셨다. 발람은 밤에 나타난 여호와의 응답을 발락의 귀족들에게 전하였다.
모압왕에게 보냄을 받은 장로들은 돌아갔고 발락은 더 많은 돈과 명예를 가지고 발람에게 더 높은 존귀를 가진 장로들과 귀족들을 보내어 명예로 발람을 유혹을 하였다.발람은 귀가 솔깃해서 그날 밤에도 제단을 쌓고 여호와를 불렀다. 이날도 여호와께서는 발람의 요구에 응답하셔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말씀 하시기를 “그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 찌니라”라 하셨다. 발람은 참으로 분명히 여호와를 만났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부르는 사람에게 나타나 주셨고 오늘날도 이러한 방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들이 어떠한 思考로 종교 생활을 하는지는 그들의 신앙 생활에서 발견되게 된다. 각자가 자기의 생각하는 대로 신을 찾아가고 또한 신에게 나아가기 때문에 신께서 그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발람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어떤 사람은 단순하게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시면서 드러나신 기적적인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상에 적용이 가능한 사건들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서는 복술과 사술을 써야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정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술과 사술을 써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도 나타나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환경을 종합해 볼 때 모세의 주장인 유일신관만이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세의 유일신관이란 앞에서도 말했지만 신은 유일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향한 모든 행동을 신은 자신을 향하는 행동으로 보고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경우 그 행위가 비록 옳지 아니할 지라도 신은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또한 여호와 이름이 더럽혀 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신의 초대 행위가 신의 계시 방법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 비록 인간이 신을 만났다 할지라도 신께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악하게 본다는 것을 모세가 말하고 있다. 모세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유일하신 하나님을 교육하고 있다. 먼저 그의 사고에는 신이란 한분 여호와 밖에 계시지 않다. 그 누가 그에게 다른 신이 있다고 하여도 모세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일 뿐이며 모세에게는 인정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과연 발람은 복술자이다. 여호수아 13:22절에 여호수아의 기록에도 발람을 술사라고 한다. 이 술사가 수송아지와 수양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불렀다. 참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셨고 발람에게 어떻게 할 것을 지도해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신론적인 사고를 가진 자에게나 다신교의 신앙 생활을 하는 자에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교육하는 것은 참으로 신은 한분 뿐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부르는 그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구별하여 관찰하신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우리는 늘 발람의 하나님을 異神的인 하나님이나 혹은 발람의 異神論的인 宗敎 祭儀를 부정하면서 발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한 상태이다. 발람의 宗敎的인 思考가 우리 속에도 깊이 배어 있고 또한 그와 같은 祭儀的인 方法으로 여호와의 마음을 만족케 하려는 수고로운 宗敎性으로 信仰 生活을 하고 있다.
발람의 밤샘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렇다.
발람은 자기 마음에 여호와를 絶對的 宗敎로 보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絶對的 宗敎로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다만 습관처럼 되어버린 祭儀儀式에 따라 애굽의 多神敎的 방법처럼 필요에 따라서 필요한 신과 교제를 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발람은 宗敎的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동안 여러 신을 접하였으나 이제는 발락의 요구에 응하는 여호와 신을 불러 내려고 기도 한 것이다.
2. 다른 神
1) 이방인의 하나님
발람의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이었다. 모세는 우리에게 이방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하여 교육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하고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나님께 구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를 저주하는 일까지 자기의 욕구를 위해서 서슴치 않고 있다. 그들이 비록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상을 섬기는 행위와 참된 신을 섬기는 행위를 구분할 수 있다. 이방인의 하나님은 사람들의 뒷 처리 해주고 전능자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축복해 주는 신이다.
오늘날에 나타난 신앙의 양상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모습이 우상 종교와 흡사하게 퇴색되어 있다.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양상들을 발견하면서도 기독교로서의 바른 현상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지하게 휩쓸려 가고 있다.
우리는 발람의 종교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특별한 기적적인 역사를 살펴 보면서 우리가 발람과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발람의 마음으로 여호와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실들을 ‘십계명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 일 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神"의 槪念을 살펴보자.
먼저 십계명은 모든 내용은 모세의 사고나 혹은 역사적인 전승으로 전해진 내용이 아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 십계명의 내용은 모세의 사고에서 생겨난 놀랄 만한 철학적 깨우침이나 느낌이나 감상 혹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친수로 기록하셨다는 데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였다면 그 근원이 하나님의 思考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생각을 하셨다는 점에서 비평이 필요하다. 감히 인간 주재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평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 외에”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이 말씀의 뜻은 자신 외에 다른 존재를 지칭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나 외에”라는 말의 뜻이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기 위한 단어로 본다면 다음에 따라온 "다른 신"이라는 지칭어는 하나님의 사고에 또 다른 “하나님과 같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신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자 할 때 저자의 사고를 분석하고 해석하므로 저자의 의도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해 보려고 노력 한다.
십계명의 저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살펴 볼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말씀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그 의도에 가깝게 접근해야만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신”이라는 대명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상을 “다른 신”으로 상상하시거나 애굽의 바로 신이나, 가나안의 여러 신들을 “다른 신” 생각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이방신들을 “다른 신들“이라고 격상하여 말씀 하셨다면 그 “다른 신들”이 우리에게 있게 하지 말라는 의미는 우상을 하나님과 버금가는 “다른 神”이라고 인정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思考(사고)도 인간과 같이 思考한다.
그 思考가 “다른 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우리 思考는 추상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아니 어떤 것도 思考하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에 자리할 수 없다. 또한 계시되지 아니한 어떤 것도 인간은 지식으로 사고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에 자리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 것과 같이 思考한다는 것은 思考가 있는 사실을 추상화 하는 것이나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거짓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지어낸 거짓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떠한 것도 존재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홀로 유일하신 분이시고 피조물은 그의 만드신 소유에 속한다. 우리가 神(신)이라 말할 때 하나님과 같은 또 ‘다른 神(신)’을 神(신)이라 칭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우리가 神(신)이라고 말하면 곳 그 神(신)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神(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다른 神(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들의 思考를 비난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들의 思考(사고)는 唯一神(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추방하고 神(신)이 아닌 것을 神(신)이라 칭하는 모습을 보시고 인간들이 섬기는 그 허무한 신들을 “다른 신들”이라고 칭하셨다는 것이다.
이 의견을 동의하면서 또한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타락으로 인하여 잘못된 사고로 神(신)을 고안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神(신)이라 인정하셨다는 점(신성을 부여하셨다는 점)에서 더욱 동의할 수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온전히 자신만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 비상수단을 강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하기 때문이며, 본질상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말씀을 올바로 이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올바른 지식을 주어도 그것을 곡해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 인간의 사고를 동의하셨다는 점에 더욱 분노하실 탠데 오히려 “다른 神들”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思考 속에서 칭하신 “다른 神들”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인가?
타락한 모든 사람들은 神에 대하여 多神論을 주장한다.
3) “너희는 다른 神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神
“너희는 다른 神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神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 시키실까 두려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광야 주변국가의 백성의 신을 “다른 神들” 이라 칭하셨다. 그러나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땅을 선택하여 갔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뒤에 선택하여 서로 분가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들이 소유가 너무 많아서 서로 함께 있으니 아브라함과 롯의 가신들과 서로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롯이 선택한 풀이 우거진 소돔 땅은 죄악의 관영 하심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땅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19:1-38) 이때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로 인해서 롯과 그의 두 딸과 아내가 구출을 받게 되고 롯의 아내는 구출을 받다가 소돔성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뒤를 한번 살펴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롯과 그의 두 딸은 소알성의 동굴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이때 롯의 두 딸들이 자기 아버지를 통해서 롯의 인류가 번식되기를 원하므로 그들의 아버지에게 동침하여 하나는 암몬을 낳고 또 다른 하나는 모압을 나았는데 이 모압이 자식을 번식해서 작은 나라를 건설하고 있었다. 이작은 나라의 백성들은 조상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서 부터 이어졌고 롯의 신앙은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이었다. 이 신앙은 심판의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롯의 두 딸에 의해서 [여호와의 신앙]이 그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인위적으로 이어진 여호와의 신앙은 변질하고 더러워져 버렸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과 전혀 다른 신앙의 양태로 변하고 말았다. 분명하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셨지, 자기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고 해서 암몬이나 미디안의 후예들인 미디안 사람들에게도 여호와를 섬길 수 있는 지식과 눈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 외에 다른 神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서 선포하신 말씀이 아니고, 반대로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오히려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계명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이 말씀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마음속 깊이 세기며 우월한 생각에 잡혀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다면 이스라엘에게 이 계명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만인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택하시고 이방인은 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 있지만 이스라엘을 죄가 없는 사람들과 같이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택하심 뿐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은총을 맛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씻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신다.
말씀은 곧 “사방 이방인들이 미신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볼지라도 너희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데서 떠나지 말라”고 하신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발견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닫혀져 있는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드러내 주시려고 계명이 주어진 것이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우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로 모이는 것과 생활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죄인인 사람들에게 이 계명은 객관적은 계시의 역할만을 나타낼 뿐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지 않는 한에서는 하나님을 여전히 다른 신들보다 월등한 신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나쁜 행실에서 얼마나 열심히 집착하며 그것을 모방하는 경향이 얼마나 짙은지 경험으로 잘 알려진 일이다. 광야의 길을 행하는 도중에서도 우상을 민들어 내는 이스라엘의 벡성들의 배역함, 등에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행위만을 사랑하는가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른 신이라는 말씀이”우리에게 상세히 보여 주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이고 우리는 그들과 전혀 관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복술자, 초혼자, 길흉을 말하는자, 요술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같은 여호와의 길을 행하지 않는 완악한 자들,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또한 여호와를 섬기면서 여호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한 재료로 삼는 발람 같은 복술자, 이러한 사람들을 살펴 볼 때마다 우리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희미한 가운데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밝은 가운데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곁길을 가지 아니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고, 조명해 주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사람의 마음에 직접 새겨주셔서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무지한 가운데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온전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4) 우상을 통한 하나님의 신성의 증거( 신명기13:1-18)
1우리에게 성경을 기록해주신 위대한 선지자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기를 쉬지 아니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매일 성경의 진정성을 조사 연구하고 있다. 당시에는 성경이 기록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모세에게 전해진 성경의 말씀은 귀로 전달된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승들이다. 모세의 생애 동안 그는 가르치고 기록하는 능력은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가 이룩한 놀라운 일들은 성경이 대신해서 충분히 증거해 주고 있읍니다.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다시 말한다면 모세의 생애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성도들을 교육하려고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또한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증거를 돕고 싶어하는 거룩한 마음의 열심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증거된 계명의 내용을 배울 때 마다 모세의 마음속에는 계명이 가득 체워저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 계명을 심어 보라고 모세는 매일 강론을 하였고 고난과 고통도 잊은 체 오직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성경이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성경의 내용을 강론 해주며 또한 성경을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심어 주려고 교육하는 주님의 마음을 살펴 볼때 우리는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죄를 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 마음에 많은 성경의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할 때 이 일이 하나님께 참으로 합당한 일인가 하고 물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하심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참된 증거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마땅히 질문을 해야 할 한가지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성도 들에게는 그러한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골치 아픈 일을 삼가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살펴 볼 수 있다.
아무렇게만 믿으면 되지, 이렇게 믿는다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곳을 주시고, 저렇게 믿는다고 더 나쁜 곳으로 보내시는가? 하면서 예수를 믿는 것을 자기의 마음 내키는 대로 믿으려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다. 아무렇게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할 경우 구태여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줄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 또한 교회를 세울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면 전도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고 또한 교제를 위해서 교회가 필요로 한다고 말을 할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필요성을 뭐라고 할 것인가? 여기에는 도저히 할 말이 없게 된다. 예수를 믿는 다면서 일주일 동한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도 읽지 아니하고 주일날 교회에 나아와서 참회 고백을 한답시고 입으로 떠들면 용서가 되는가?
이러한 것을 충분히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교육을 하게끔 계명과 또한 그를 알 수 있는 지식을 모세의 마음 속에 가르쳐 주셨고 지시하셨다.
마땅히 질문해야 할 한가지는 이렇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며 먹을 것이 풍부한 하나님의 땅 이었다. 이 땅은 지금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이방 백성들이 점령하고 있다. 이 땅으로 가는 길에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에 이르게 되면 그곳에서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또한 입을 옷 등을 걱정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을 탠데 무슨 법률이 필요하느냐고 질문을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저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저 천국은 하나님께서 지혜로 통치하시고 또한 그곳에는 악이 없으며 오직 선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우리가 그곳을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예수를 믿어서 가면돼지 뭣 때문에 계명이 필요하고 또한 율법이 필요하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모세에게 주어진 계명이라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자 십계명은 믿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있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지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율법보다 더한 유전들을 만들어야 했고 이 유전들은 예수를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오늘 우리도 그렇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무조건 받는데, 설사 우리가 실수하여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나아가서 고백만 하면 용서 해 주시니까 한번 구원을 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거짓 교훈을 가슴에 새겨 놓고 스스로 계명을 무시하고 속이는 결과를 행하면서도 전혀 암흑 속에 사는 신자라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이런 기막힌 사실을 통해 볼 때 사도 바울 선생이 종일토록 성도들을 교육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눈에 선하다. 그는 눈물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였으며, 가르치기 위해서 자기를 내어놓았다(행 20:31). 바울과 같은 가르치는 자의 고통을 누가 이해 할 수 있는가? 바울은 자기가 가르친 참된 복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행20:32), 또한 그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명을 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 안에서 견고히 서가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눈물을 흘렸다.
바울의 아침부터 (행20:7-12; 28:23)말씀을 강론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강론하고(신1:3) 이스라엘을 교육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고 있는 것인지 우리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광야에서 행한 모세의 교육은 너희가 ‘그 곳에 도달하거든 이방 신들을 섬기지 말 것’을 교육한다. 게다가 그들이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범죄함을 살펴 볼 때에 모세의 가슴에 찢어지는 고통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지 자못 심각하기만 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과연 오늘의 교회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며 그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요 세상의 왕과 같이 왕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과 저주를 앞에 두고 여호와를 잘 섬길 때에는 복을 주고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할 때에는 저주를 주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을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통해서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의 주위에 각종 우상들이 가득함과 같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내 외에도 각종 우상들이 가득하다. 가나안의 주위에 있었던 우상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가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심판을 얻게 하고 또한 하나님을 더욱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얻는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에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처음에 은혜의 비가 쏟아졌을 때는 교회내의 각종 우상들이 사라졌고 교회는 정결한 가운데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날이 갈 수록 교회는 보편화되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신앙에 양식의 충만한 불만을 다른 사상에서 찾아와서 교회를 희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의 광장에서 살펴본 기독교는 요구되는 인간의 사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교회의 복음으로 채우지 못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기독교의 사상을 변질하게 된다.
바울과 모세가 교회의 셈의 역할을 성경을 통하여 충분히 해 오고 있으나 인간의 사상은 그들의 사상(성경)을 무효케 하고 그 보다 더한 자연적인 사상에서 신에게로의 “진리”를 발견코자 한다. 나아가서는 성경의 권위와 그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는 오류들을 쉽게 범하고 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든지 “바울”이나 “모세”에게로 가면 항상 새로운 교리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과 교훈을 듣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용기를 잃지 않고 진리 안에서 충만한 만족을 얻어 확신된 진리로 무장할 수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신6:4)”의 모세의 외치는 확신 된 자세와 상반된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모세의 외침이 확신을 가지고 외쳐도 백성의 마음은 신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정립할 수 없음과 같이 오늘날도 강단에서 외치는 확신된 메세지도 듣는 청중의 마음은 각종 우상에 감염되어 듣는 귀를 어둡게 하고 있다. 모세의 외침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조금 전에 십계명의 전문을 이스라엘에게 낭독해 주고 이제 이스라엘에게 세상의 신은 무효하고 오직 하나님 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니 신의 계명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마음에 새기게 하고 그의 계명을 따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과 그의 현현을 직접 듣기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또한 그의 음성을 들을 때 본성으로 지은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2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출20:11; 창1:1; 요1:3 히11:3). 또한 하나님은 하나이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출3:14).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다른 신을 신이라고 할 만한 여유가 전혀 없으며 또한 이세상에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거나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신이란 명칭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인간의 사상에 신의 명칭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무수히 많은 신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셔서 거짓 신들에게 그들의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게 하는 것을 하시는 것은 그들의 욕구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그들 자신이 얼마나 거짓되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우상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10:3). 그렇지만 그 마음의 진실에는 인간이 신을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지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인간은 본질상 신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인간으로 순수하게 신만을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본성임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본질상 신을 향한 강렬한 의지 때문에 각자가 신을 주조해 내고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였을 때 인간의 마음에 새겨둔 계명을 잃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계명을 돌비에 새겨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를 지키면 영생하는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지키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더 이상 우리가 짊어지기 힘든 형식적인 규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길을 다를 새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처음 발견한 것중 하나이다. 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에 대항하기에 앞서 그에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마음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은 유일 하심은 마음에 깊이 확신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시다.
인간은 자신들의 사고와 타락된 마음으로 신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렇게 나아가는 인간의 앞길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해 어두움이 그들을 가리고 있다. 일부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능하고, 또한 그러한 인간의 행동은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찬양하고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과연 신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과 그의 은총에 힘입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과 성령을 보내시어 인간의 무지한 눈과 귀를 열러 젖혀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얼마나 기다리시고 계시는지 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새겨 준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바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을 선택하고 선택된 신에게 제의와 경외의 행위를 취한다. 종교성에 의해 나타난 신을 향한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자신을 향한 행위로 보시나 무지한 인간의 행위가 거짓 신에 속아 타락한 본성을 확인하시고 심히 질투하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성경이 말함과 같이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더욱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각종 우상을 섬기는 것은 참된 신이 있다는 것을 인간의 그 마음이 강렬하게 증거하고 있고 인간이 참으로 얼마나 신을 필요한 것인가 더욱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1)너희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시험하심10:3
(2)본래 다른 신이 신이 아님을 모세가 충분히 교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신을 향해 나아감,
(3)오늘 날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께 부르지만 진정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하면 그들은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드러냄.(마 25:11-12; 7:22-23)
5) 인간의 마음으로 주조된 신(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갖 만들어 낸 우상과 비교 대조하신다(신 12:29-32).
‘나는 영원한 하나님이며 이방인들이 어리석게도 스스로 만들어 낸 온갖 우상들과는 분리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마땅히 모든 더러운 것들과 구별하여 깨끗한 자로 만들겠다’.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라고 말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그 어떠한 열심도 용서 하니 않는다. 또한 그러한 방법을 죄 없다 하지 않으셨다. 이방 사람들은 땅이 거짓 신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고 뽐내고 있었는데 자기 백성이 이방인들을 흉내 내지 않고 그 거짓 신들을 경배하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가 엄격히 금지 되어 있다. 모세가 이러한 말씀을 들어 이스라엘을 교육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신들을 멀리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상상해 보건대 인간은 다같이 타락하고 범죄 했다. 이스라엘이라고 특별하고 또한 우리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하는 백성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샘족이요. 또한 노아의 후손이고, 노아의 후손이라면 아담의 후손이다. 그들과 우리와는 손톱 만큼도 차이가 없는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이요, 또한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이다. 다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생각과 사상들을 더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선택함을 입은 이스라엘이지만 그들도 함께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또한 지식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에 관하여는 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인간인 자기의 습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시함을 따른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었다 할지라도 종교성에 대해서는 이방 신들의 습성을 더 즐거워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교육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의 신들이 자기 땅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데는 자기들의 땅도 주지 않는 여호와의 신보다는 더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어울린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방 가나안의 백성들이 땅을 차지할 때에 가나안의 신들이 가나안 백성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견고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과 같이 이방신인 가나안의 신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서 제거해 주기 위해서 이방 신들은 거짓 신이라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교육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이 신이 아니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하신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교육도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리기가 일수 인대 모세가 아무리 당부를 해도 이들은 곳 우상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죄송하게도 이 글을 기록하는 모세는 백성들이 얼마 가지 않아서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이 알려 졌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중에서 믿을 만한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호기심을 갖고 추구 하는 것이 우상 숭배의 시초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신기한 것에 쉽사리 걸려 들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져 온 것을 여러 가지 종류의 누룩으로 더럽히기 때문이다.
0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는 공 예배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자신이 예배를 이끄시고 또한 자신이 예배를 위해서 친히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12:2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 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하시실 때에
30,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3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32,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 하지 말 지니라.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박영옥역, 목회 자료사,서울, 1990,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박영옥역, 목회 자료사,서울, 1990,p105
로마서 8장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인은 도덕을 무시하는 도덕론 패기론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능가하는 것입니다(마 5:20)???
로마서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패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율법이 차지해야 하는 위치
1) ???예수님은 구약의 거룩한 문서들을 패하려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시므로 율법과 예언은 완성 되었습니다(마 5:17) p105-106.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 박영옥 역, 목회 자료사,서울, 1990,p106
바울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성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곧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기 보다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복음을 이해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율법도 오해 하였습니다.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 박영옥역, 목회 자료사,서울, 1990,p108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과 삶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의미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복음서 에서 바리새인들의 개인 생활에 대한 정보를 별로 얻을 수 없지만, 그들이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순종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그 결과 그들의 사역은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부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 23:4)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짐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심 중에 아로 새겼습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는 시편 40:8의 말씀의 완성으로 여겼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히10:27)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를 즐거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 “고기, 요, 음료,”였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요 4:34)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박영옥역, 목회 자료사, 서울, 1990,p110
예수님은 영의 사역을 통해 제자들의 심중에 율법을 기록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렘31:33) 성령을 좇아 행하면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게 된다(갈5:16).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박영옥역, 목회 자료사,서울, 1990,p111,
하나님의 법은 더 이상 우리가 짊어지기 힘든 형식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길을 다를 새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처음 발견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에 대항하기에 앞서 그에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마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Sinclair B. Freguson, The Sermon on The Mount,박영옥역, 목회 자료사,서울, 1990,p111.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명들을 패하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화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
너희도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일2:3)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은 그들 안에 사실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문94 : 제 1계명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 나의 구원이 위태로워 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모든 우상 숭배(고전 6:9,10; 10:5-1 4;요일5:21)와 마술과 미신적인 제사(레 19:31; 신18:9-12)를 피하고 성현들이나 피조물들에 대한 기도를 금하는 것입니다(마4:10; 계19:10; 22:8,9)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진솔하게 인정하고(요 17:3) 신뢰하면서 (렘17:5,7) 겸손 (벧전 5:5,6)과 인내심(골1:11; 히 10:36)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좋은 일을 기대 하며(시 104:27, 28; 약 1:17) 그를 전심으로 사랑하고(마 22:37) 두려워 하며(잠9:10; 벧전 1:17) 존경하는 것입니다.(마 4:10; 신6:13)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라면 결단코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마 5:29, 30; 10:37-39)
문 95: 우상숭배란 무엇입니까?
답: 우상숭배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과 동등하게 그 무엇을 신뢰하거나 만드는 일입니다(대상16:26; 갈4:8,9; 엡5;5; 빌3:19).
PRE4-1 십계명 보충 설명 제 1계명
1). 마태복음 10 :34-39
본문: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려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어미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