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창조목적[1]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1

생명있는 신앙 2010. 4. 2. 08:25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라(시 40:12)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은 하나님을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모든 피조물은 살아 있으니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꺽이고 잘려져 나간 것과 같이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나뭇가지는 임시로 푸른 빛을 띄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에게서 떨어졌으므로 죽은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그 어떤 존재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임시동안 살아 있는 모양을 할지라도 이미 죽음의 질병이 그들을 사로 잡아버린 상태이며 잎은 마르고 생기를 잃고 가지에서부터 쉽게 떨어져 나갈 것이며 불사르기 쉬운 상태로 말라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잠시 동안(인생 120년동안) 푸르름을 유지할지라도 생명이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미 죽어있는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함이 충만하신 상태”이시고 “선하심이 최고조”에 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표현하는 “달하다, 곧 이르렀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여러분에게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심이 나 선하심이 충만하시지 않거나 아니면 부족한 상태에 있었다는 시간적으로 과거적인 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기독교에 관해서 온전한 지식이 없고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성의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하는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상태를 초월하는 사유를 하지 못하는 유한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의 상태를 표현하는 어떠한 방법이나 언어라도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에 담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저 넓은 우주와 자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는 영혼의 깨달음이나 지성의 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언어를 지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언어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하나님 과 같은 이성의 충만함과 시공을 초월한 지식을 인간의 지성에 담아두실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시공간적인 표현으로 충만이라든가 아니면 완전의 충만하심이라는 마치 컵에 잔이 넘치는 표현을 하게 됩니다만, 하나님께서 완전하심이 충만하시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그런 상태에 이르러 마침내 충만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표현이 아니고, 아직 최고조에 달하지 아니하는 어떤 상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상태가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닌 상태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인간 영혼의 지성활동은 시공을 초월하여 생각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으며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이성이 “무”를 상상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충만하신 “완전하심”이나 최고조에 달하는 “선”을 이성이나 지성에 담을 수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이상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 있어서 창세기 3장 5절에서 사람을 죄로 유혹하여 하나님으로 멀어지게 한 사단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유함을 즐기고 하나님의 성소의 “문지기”보다 못한 “청소부”라도 아니 주의 집 신발장의 신발위에 내려앉은 “털어지지 않게 붙여진 먼지”로서라도 주와 함께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여 하나님 뵙기를 사모합니다. 그것이 내 사유를 넓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고 주를 가까이하고 주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말할 수 있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입이 하나님을 말하고,

지으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목적에 지으심을 받았는지 더 확실한 표현으로 저와 우리 모두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언어를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는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창조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어두움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우리의 영혼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모태에서 지으심을 받고 분명한 목적을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것을 깨닫고, 이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지고 태어나야할 것이지만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서 빈손으로 이 땅에 왔으며, 환경에 의해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사명을 인식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생각과 지식들로 가득 체워지고 말았습니다. 그 지식 속에는 정욕을 분출하는 기술이라든가 하나님을 향한 어두움, 죄악의 열매들이 가득 체워진 상태의 지식들이 환경을 통해 얻어진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피조세계에 완전한 관리와 다스림이 필요한 존재로서의 피조세계에 하나님을 대리하는 존재가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으로 피조물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다른 방법으로 지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나 사람은 친히 흙을 빚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구별되게 지으셨습니다. 코에 불어 넣은 생기는 모든 피조물에서 발견할 수 없는 또 다른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동산에 있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에는 피조물에게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와 함께 함으로 모든 피조물을 잘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아담이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짓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은 아담이 붙여 주었는데 그 이름들이 한결같이 의미 없이 간단하게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이름들은 후대에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만  하지만 대부분의 이름들을 아담이 명명한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름을 부여하다는 것은 곧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세 시간 동안 이번 고난주간 동안 묵상한 것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한 죄로부터의 회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은 하나님의 집을 떠난 제사장이 돌아오는 과정을 그렸고 두 번째 시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정욕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나타나는 재앙에 대해서 다음으로는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우러러 볼 수 없는 억압상태에 머물러 버린 영혼의 고통을 오늘은 수많은 죄들과 친구가 된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과 관계를 위해 지으신 목적을 살펴 보는 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목적에서 어덯게 벗어났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죄일 것입니다. 이 죄들을 나열하면 본문이 말하는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은 종류들을 하나하나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2회에 걸쳐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는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지 그것을 알수 없었고 발견할 수 없으므로  의문에 빠져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자연을 살펴보고 꽃들을 들여다보아도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렁거리며 파도치는 드넓은 바닷가에 나가서 바다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이가 말하는 피보나치의 수열을 상상하면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반복되는 파도에 의해 부서지는 수많은 폼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지 귀를 기울려 들어 보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수학에 관하여 아니 자연에 관하여 지식이 무척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피조물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없는 불신앙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모든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거두워 가심으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택하시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생겼고 사단의 저에게 다가와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택하셨겠니” “포기하라”라는 저를 질시하는 소리도 마음속에서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큰 시름에 빠져 고민하고 지속적인 영혼의 어두움에 짓눌러 있었습니다.

재앙이 나를 누르고 수많은 죄들이 나를 고발하여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궁금하여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것과 우리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여 깊은 사유에 빠져야만 했습니다.

다시한번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바다와 파도가 피보나치의 수열에 따라 어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잔잔하던 바다가 소용돌이치는 거센 물결로 큰 배들을 집어 삼키고, 그 배안에 있는 무수한 젊은이들이 수장 되어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상태 있다는 정보들을 들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구분하여 물들이 한곳으로 모이게 한 바다이기 때문에 생명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발견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바다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음흉하고 사악하리만큼 큰 욕구를 감추고서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영혼 까지도 집어 삼켜 존재 자체를 허무하게 만들어 고기들의 밥이 되게 하고 흔적조차 없애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을 노래하는 공중파 방송 속에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들이 질풍같이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연약하고 아름다운 산양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 질질 끌고 와서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강한 이빨로 산양의 몸통을 찢고 얼굴에 피를 발라가며 찢어 삼키고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또 다른 짐승들과 다른 사자들을 으르렁 거리며 쫓아가며 뼈를 으스러뜨리며 아그작아그작 씹는 모습은 마치 지옥을 보는 것 과 같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구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연을 들여다보고 바닷가에 가서 눈을 열고 봐도 그것들에게서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 위대한 설교가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설교는 제 영혼의 창을 열어젖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입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 일하시면서 피조물들의 아픔을 고치시며 일하셨고 그분에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건 사람 앞에 계셨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로 말미암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눈이 진흙을 발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자 소경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낫게 되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을 뜬 소경이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그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소경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데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 가치를 받으셨습니다. 그 받으신 것은 인정하시는 신뢰입니다. 이 신뢰는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약한 자들을 치료하실 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 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삼위가 함께 계서서 인간의 영광을 받으시는데 그 하시는 일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영광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은 부족하고 망가진 것들을 고치시기도 하시고 새로 지으시기도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시며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새로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모든 피조물이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인 자연은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분출하고 있습니다. 조화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아름다운 색, 적당한 크기, 알맞은 모양, 다른 피조물들과의 조화, 분출하는 생명의 정렬,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조물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드러내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영혼의 없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으므로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생명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빛을 비추시고 색을 내게 하시고 질서롭고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주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교통을 나누는 유일한 존재로 영혼을 지으셨고, 이 영혼을 사람에게만 부어 주셨습니다. 영혼의 임무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을 피조물에 전달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모습을 피조물에게서 더욱 빛나도록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없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새들의 노래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는 그냥 노래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곧 음악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으로 우주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드러내는 질서와 조화 아름다움,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것을 하나님께 말할 존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이 더욱 아름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찬양을 다시 하나님께 전달할 수 있는 영혼의 역할을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눈을 열고 영혼으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여 생명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재외한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존재함과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난 것을 감사할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말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조화와 색, 그리고 모양, 크기, 질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나 그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 존재로서의 나타나는 모든 속성들이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결과들에 대한 영광을 인간이 보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의 목적에 따라 피조물들에 생명을 주시고 보존하시며 아름다움과 질서로움, 그리고 존재로서의 조화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그것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해야 하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하나님께 찬송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저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한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높은 찬양을 드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때

하늘에 별 울러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찾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ㅔ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창조를 노래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창조의 위대함과 영광을 입으로 말하라고 영혼을 흙속에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아름답게 말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그냥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도중 성가대의 찬양이 있은후 성도들이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 아멘으로 하나님에 영광의 찬송에 마음을 더하지 않고 박수를 치는지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어떤이는 이 박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런 행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가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받아버리는 결과이므로 성가대의 찬양에 마땅히 [아멘]으로 자기의 마음을 더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의 찬양 이후에 있는박수는 결코 교회에서 공예배에서 합당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찬양이나 성가가 인간의 감정을 만족 시키려는 노래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그 노래로 자기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인간이 입으로 부르는 모든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것을 아름답게 하시고, 일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들을 오직 인간에게만 표현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찬양, 기도, 감사, 봉사, 희생,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의 찬송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말하는 인간의 찬송으로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것은 그분께 물질을 드리고 그분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제사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짐승을 죽이고, 식물의 꽃을 꺾어 생명을 단절시키는 화분들, 아무런 의미 없이 수고롭게 시간을 허비하는 봉사들, 그리고 자랑을 위한 사랑과 희생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창조의 목적에 따른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해야 합니다.


고난주간 냇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