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재앙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 40:12)
지난 시간까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사도는 로마서 8: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개혁신앙의 유산들과 저를 오늘에 있게하신 선배 신앙인들은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고 있는 처참한 환경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처참한 피조 세계의 불행이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았으며 사람이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상태어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시간까지 저의 말씀을 읽는 여러분들은 저의 주장이 성경과 약간 배치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앞의 내용만 보고 오늘의 결론을 읽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과 자연이 영광을 드러내는데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함께 탄식하고 고통을 겪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지으시고 있게 하시는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을 직접 하나님께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영혼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있는 피조물 그 무엇에게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와 드러내는 아름다움, 세상에 있어 다른 피조물들과의 조화로움, 그들의 생명으로 인한 전체 피조세계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드러냄으로 그것들이 표현될 수 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만 영혼을 부어주셨습니다(계 4:11),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천지 만물위에 더하여진 생명이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가장 으뜸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나타난 결과는 피조물들의 고통과 탄식 이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피조세계에 나타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 영혼이 얻는 유익은 무한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행복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취급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창조와 하시는 일 그리고 피조 세계에 나타나는 영광들을 멸시하여 보지 못하는 결과로 어두움에 처해졌고 모든 피조물들이 마땅히 돌려드릴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을 지으시는 목적에 따르지 않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이로써 피조물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의 단절 곧 관계의 단절로 말미암아 슬퍼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밍마아 피조물과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저 들판과 산야와 바다와 우주의 고통을 보십시오.
우주는 서로의 충돌로 파괴되고 부숴지는 별들의 전쟁터와 같습니다.
들판과 산야 속에는 짐승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들려옵니다.
바다는 겉으로 보기에 잔잔하고 평온하여 새들이 자기의 몸을 내어 맡겨도 안전하여 그 속에서 즐겁게 노닐지만
음흉하고 잔악하여 생명을 집어삼키는 잔인함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천지 창조된 피조세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단절 되어버린 것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향하여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언제라도 집어 삼킬듯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호랑이가 앞발을 치켜들고 표효하며
소나무 숲 사이에서 숨어 있는 사자와 곰의 눈동자가 사람의 행동을 노려보고,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을 덮치고 무서운 이빨로 사람의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동태를 면밀히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의 죄를 지은 사람에게 피조물이 사람을 대하는상태를 분명히 알려주셨고,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이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옴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8)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이 의미하는 비밀을 알수 없었습니다(창 3:18). 이미 그의 영혼의 지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삐뚤어졌으며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기억 속에서 지워졌고 잊어버렸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영을 거두워 가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 6:3).
그렇게 사람의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주는 어떠합니까?
낮이면 그렇게 찬란하게 빛을 비추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게 비춰주고 햇빛으로부터 피조물들의 영양분을 공급하거나 자연에 생명을 촉발시키는 협력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되더니 순식간에 어두움으로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게 하며, 온몸에 전율 느끼게 는 칠흙같은 어두움을 드리워 쉼과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위협하여 온몸이 오그라져 자연에 얼굴을 내밀수도 없습니다.
자연과 우주는 사람을 경계하여 대적하고 하나님의 원수라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설 곳이 없습니다.
편안하게 자리를 펴고 누울 곳이 없습니다.
주위 사방에 담을 쌓고 문에 고리를 하여 경계를 정하고 칩입자를 막으려 하나 재앙은 그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넘나들어 사람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창, 활, 살육할 기계로 자신을 보호하려하지만 보이는 것 외에 또 다른 영적인존재들의 위협에는 속수 무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자유를 잃고 괴로워하고 피조물도 이와 동일한 괴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머리 둘 곳이 어디 있습니까?
자연이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우주가 여러분을 품에 안은 듯 안전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자연과 우주가 여러분을 정죄하는 소리를 들으세요.
저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에 분노하여 재앙을 감추고 삼킬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타락과 죄악이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드러나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만상을 거두시고 하늘이 종이쪽과 같이 말려지고 자기자리에서 벗겨지도록 피조물들을 거두실수가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저 우주의 공간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나르는 펼쳐져가는 세계들,
더 많은 세계가,
아니 더 나은 세계가 이 우주에 있어 하나님의 만드심을 보고서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지으신 인간이 다른 공간에 있어서 타락하지 아니한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지라도,
여기에 있는 이 땅 위의 먼지보다 못한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 계획하심에 너무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계심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마음속에 생각하지도 않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순종으로 말미 암은 현주소였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재앙을 이르키고 짐승들을 서로 잡아먹고 피를 흘리며 약육강식의 자연세계가 존재하는 저 아픔을 지켜 보면 사람의 범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회개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왜 하나님께서는 자연에 속한 피조물들의 잔인함을 징계하시지 않으신지애 대해서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물런 정답이야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았으니 사람이 마땅히 그의 댓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땅이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지으신 사람들을집어 삼키고 사자가 음크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사람을 잡아 먹는 일들이 버러 졌어도 그것들을 심판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피조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들을 용서하시는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그들을 맏겨 두셨기 때문에 그 책임을 사람에게 받으시는 것으로 사람의 범죄로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그 고난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의 역사를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는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피조세계에 죄가 들어 왔고 모든 만물의 고통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 절대적인 구원이 필요했었으나,
온 몸과 영혼이 이미 죄로 물들어 어두워졌으므로 지성이 구원의 필요성을 깨우쳐 지지 않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영혼은 아사 상태에서 참 사람이 아닌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으로 있었습니다.
부패한 사람의 지성은 자기를 중심으로 정욕적이었으며,
영혼은 지속적인 욕구를 발산하는 정욕의 노예가 되었고,
사람의 영혼은 정욕이 피조 세계에서 얻을 수 없는 허무를 양산하여 굴복하였다고 사도는 말했습니다(롬 8:20)
정욕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이상과 생각들은 다 헛되며 정욕에 의한 행사까지도 헛되다(사 41:29)라고 선지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영광의 보좌에 참여한 새 나라와 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의 대표 장로들이 올려드린 영광과 존귀의 의미는 천지 장조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는 존재로서 아름다움과 질서로움, 보호하시는 능력에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계시록 4:11)로서 피조세계가 존재로서 나타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마땅히 살펴보고 그것들을피조물로부터 받아서 하나님의 보좌에 드리는 창조의 목적에 대한 임무대로 였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 위에 결코 있지 않은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하는 빛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 불가해한 상징들을 덧붙이거나,
거짓으로 형상화하고,
결코 나타날 수 없는 피조세계가 드러내는 이상적인 신적인 표상들을 추구하며,
그것이 있을 때만 신적인 존재의 임재에 대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미 보여주신 것인데 그것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내신 것(출 3:2)을 타락한 인간이 추구하는 신적 영광의 이상들이나 결코 있을 수 없는 허무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피조물에게서 신적인 이상들을 발견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영광” 이나 “신적인 영광”을 믿지 않습니다. 신자나 불신자의 눈으로 자연과 대지 혹은 들판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해 보려고 하지만 그 존재들에게서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없습니다. 육신의 눈에는 피조세계로 부터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타락함으로써 영혼에 관한 지성과 영안은 철저하게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겱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는 없습니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풀과 나무, 그리고 바다와 들판, 광할한 우주 로만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신비한 환상이나 혹은 주관적인 감성의 작용으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의 대표 24 장로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드리는 존귀와 영광의 내용은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이 그의 뜻대로 있었으며 또 지으심을 받은 것”에 대한 지극히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피조세계를 지으신 것과 삼위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보다 더 나은 새로운 이상으로
우리의 죄악이 이 땅에 죄를 불러 들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자연 환경을 살펴보아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점을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 찾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 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아무런 가치도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로 목적도 없고, 희망도 없고, 단순히 우연하게 생명으로 태어나, 자연을 벗 삼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있다가 죽게 되고,
우리가 낳은 우리의 후손들이 이 땅에 태어나게 되고, 지구상을 숨도 쉴수 없는 환경으로 파괴하고, 계속해서 발전시켜 도시의 세계를 만들다가, 나빠진 환경 때문에 결국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완전히 파멸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며 잠시 동안 생명을 부여 받고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해답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철저한 무능을 봅니다.
또한 사람이 소경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서 사람이 지극히 정욕적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창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수 없는 감성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저는 불신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이해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불신자였을 때가 있었으나 그때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아주 관심도 없었습니다.
지금 보니 저의 영혼은 죽음의 잠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상태였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지식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문제들이었기 때문에 알려고도 하지 않은 지극히 종교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사람이라도 어떤 물건을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창조적인 능력으로 꼭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꼭 필요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시지 않았겠습니까?
앞에서 충분히 살펴본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에 너무도 분명한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를 사람의 관리 아래 둔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행, 불행의 결과가 사람과 관계로 연결지어지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지음을 받은 사람이 타락했고 영혼은 아사상태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고 몰어져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기억할수도 없고 자신과 피조물의 존재의 목적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으심을 받은 이 세상에서 사람은 자기를 위한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자기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던 피조세계가 갑자기 생명의 공급이 차단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되었으며
하나님께 돌려드릴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의 세계는 심각한 고통과 슬픔이 다가왔고 질서는 파괴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신성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뒤틀어져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대로 친히 사람의 옷을 입으시고 높고 높은 영광을 보좌를 버리시고 피조세계에 사람의 모습을 오셨습니다.
만물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행 3:21)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피조물과 같은 모습을 입으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시고 피조물과 같이 낮아지셨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때가 차매”로 표현하고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역사 위에 타락한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소망대로 사람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 구원자로, 오래전부터 이미 여러번 약속하신 대로, 그 약속의 때에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의 옷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피조물들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알고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온 우주가 그 영광을 그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감지할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그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옷을 입으신 것은 피조세계에 사람이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피조물과 그 사이에 있는 사람과 관계를 회복시키고 나아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도 완전히 새롭게 회복하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미 이루어 놓으신 지속적인 창조의 완성을 더욱 완성케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계획하고 준비하신 더 효과적인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피조물로 낮아지시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낮고 낮은곳에 오신 것은 그것도 분명히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의 완성을 위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시간적인 과정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으나 사람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고 멸시하고 천대하며 싫어버린바 되어서 십자가에죽 이기 까지 했습니다.
시인이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미치므로 우러러 볼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니다. 라고 고백한 고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깊은 회개로 내 영혼의 울부 짖음이 일어 났습니다.
진실하게 회개하기 이전 제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행한 행동은 저주스러운 행동들이었습니다.
친한 친구라도 저에게 복음을 전하면 저는 그런 것을 믿느냐고 멸시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성인들과 동일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여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영혼을 사로 잡은 정욕이 나의 감정과 지성을 허무한 정욕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알아볼수 있는 영혼의 안목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으려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보아고 사람일 뿐인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신으로 믿게한다는 믿도록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저에게 왔고 저는 그 복음에 반응하는 영혼의 활동에 따라 제가 영혼의 활동이 일어나도록 복음과 함께 영적인 양식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었습니다.
그때까지 저의 인생은 가난이라는 고난과 함께 역경이 있었으며 세상의 삶에 대한 경쟁에서 밀려 세상 지식을 쌓는 일도 중단되고 일터에 나아가서 일을 했었어야 했습니다.
일터에서는 충격적인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거듭난 친구들에 의해 전해지는 복음의 빛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신 일들이 어렴풋이 기억되었고 그들의 그런 수고가 저의 영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소생하는 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으며 기회가 있으면 저의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부어주시는 완전한 성령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주위의 친구와 또다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끔씩 저의 삶을 중심으로 포진되어 저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저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가까이 가까이 이끌려 갔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집중을 가지고 설교를 듣거나 교회를 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의 전환은 하려면 어떤 계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이것으 영혼에 주어지는 충격일수도 있고 정욕적인 처절한 절망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환경은 사방을 둘러 보아도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의 인생을 위해서 제가 할일이 전무한 상태였고
학업은 중단된 상태 였습니다.
꿈도 사라졌습니다.
회사에 다니지만 희망도 없었고
노동자 신세를 벗어날수 없는 비참한 환경에서 홀로 버림 받은 불쌍한 존재였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계획을 가질수도 없었습니다.
저의 인생은 마치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나는 땅 위에 서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땅 바닥에 굴러 다녀야 하는 영혼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어려운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흔히들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인생에 대한 고민과 깊은 사색, 철학과 그리고 세상과 하늘에 떠있는 우주, 자연에 관한 지식을 탐구, 사회의 정의와 나라에 대한 봉사, 이웃을 사랑하는 희생과 사랑의 실천 이런 것들은 행복한 사람에게 주어진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하루 하루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삶의 전투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투쟁만이 있었으며 제 마음은 완전히 빼았겨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혼의 거듭남 혹은 중생과 세례와 믿음과 또한 회개를 위한 사유, 혹은 의지 이런 것들은 저에게 있어서 아주 먼 거리에 있었고 절망속에서 방에 틀어 박혀 오락을 벗삼아 삶을 비관하고 있던 저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 표지가 없고 낡고 달아버렸으며 손때묻은 찢어진 성경의 말씀을 저에게 보이며 기적과 병고침의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때 제가 그 찢어진 성경을 읽고 있었으며, 그것을 만지작하며 찢기도 했었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던 친구의 한숨을 쉬며 기도하는 모습이 지금도 저의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그는 저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었지만 제가 듣는 이야기들은 신적인 기적이나 혹은 병고치는 이상적인 기적에 불과한 흔히 들을 수 있거나 책들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기적의 이야기와 어떤 신앙인의 간증이였습니다. 하지만 그이야기도 너무 재미가 없는 이야기 였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일을 지금도 약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제 영혼의 거듭남의 시간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듣지 않았고 그저 신비적인 이야기로 듣고 흘러 버렸으며 그가 가진 별다른 세상에 관한 이야기로 접했었고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었습니다.
저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던 정욕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얼마나 완고하게 진을 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제가 회개를 위한 저의 삶과 영혼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욕이 저를 사로잡고 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구축한 진지에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윤리와 도덕이 이 세상속에 관계하고 살아가야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인식 되어 있었고, 살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으로 항상 자신을 벗어나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열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인생의 이런 생을 향한 긴박한 상황과 버림받은 자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관계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립된 세상 보다는 넗은 세상에서 살아갈수 있는 존재로서의 삶이 저에게는 절실히 필요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주의 긍휼과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저는 시인이 부르짖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는 말씀을 읽고 정말 부럽고 부러웠으며 너무 닮고 싶은 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시간을 주시지 않았었는지 많이 아파했었습니다.
왜 저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없었던가요?
왜 제게는 그런 의지가 일어나지 않았던가요?
무수히 많은 복음들이 저에게 다가와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제가 이끌려 가지 않았던 가요?
저의 거듭난 영혼에 의하여 의지가 자유롭게 활동을 할수없었던 것입니까?
이런 것들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과 그 때가 있어야 합니다.
저의 영혼을 싸고 있는 완고한 졍욕이 의지하는 세상으로 인하여 충격을 받거나 정욕의 의지가 활동을 포기하고 의욕을 잃어버리는 결과적인 패배가 아니고는 결코 의지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내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욕적인 의지의 꺽임이었습니다.
죄를 깨닫고 있는 지성이 정욕적인 의지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욕적인 의지는 자기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기를 붙들고 세울 수 없는 두려운 상태로 인식하고 있었던 의지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코 자신을 꺾을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의지가 완전한 꺾임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만나서 회개의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시인의 영혼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는 시인의 영혼을 드디어 점령하셨고, 점령당한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되고 깊은 잠에서 께어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지으신 상태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활동이 그사람으로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정욕적인 의지는 완전히 꺾이고 깨어졌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희미하게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거울과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밝히 볼 때까지는 지성의 사유가 절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성은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양식을 찾는 것과같이 쉬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영적인 양식을 갈급하게 되고 영혼 위해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는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제 영혼은 태어나서 눈을 뜨고 생각하며 활동하며 움직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지성의 사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영혼의 삶이 일어나는 지적인 양식을 충분히 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교회에서의 교육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혼의 본질은 하나님을 항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눈을 열고 육체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게하고 그것을 배척하고 자기 중심적이었던 정욕적인 의지가 하나님을 의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정욕의 의지가 꺽였다 하더라도 쉬지않고 영혼의 활동을 억제하려는 솟구침들이 일어나 거듭나서 회개한 성도로 하여금 죄의 길에 들어서도록 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사람의 영혼에 오셔서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자기를 비추어 보게했습니다. 최초에 범죄한 영혼이 육체의 눈으로 벗은 몸을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이 사람의 마음에 임하셔서 영혼에서 일하시는 세미한 손길에 의해 조심스럽게 자기를 버리는 자기의 죽음의 활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마다 절대적인 하나님 의존적인 영혼의 활동이 자신의 위기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혼에 의해 타락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온 더러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이런 활동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은 "범사의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전도서3:1)" 라고 말합니다. 저의 회개와 또는 하나님께 이끌리는 모든 것이 "천하 만사"중의 하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저의 의지와 생각과 지성의 펼침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자기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처럼 아니면 지적인 동의나 설득에 의한 굴복, 의지의 즐거운 동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아니라 정욕에 의한 이성의 발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 마음이 완전히 녹아졌고 그 처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많았던 유대의 전통을 지닌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는 것을 볼 때에 지성의 동의에 의한 의지의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많은 사유를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자연에 나타나는 아름답고 질서로운 모습에 하나님의 영광과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보호하시는 사역으로 나타나는 영광스런 모습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세요. 그러면 자연과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여러분을 위협하던 일을 멈추고, 웃음과 교제를 위한 손 내밈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혹시나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릴 영광의 광체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는지 자신을 내어맡겨 수리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관리자가 되게 한 것을 일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이 밀물처럼 몰려와 여러분의 마음에 쌓여 있던 자기중심적인 더러움 마음들이 깨끗이 앃어내는일을 할 것입니다.
고난주간 다섯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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