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창조목적[1]

살아 있으라

생명있는 신앙 2010. 4. 6. 22:01

내가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겔 16:6)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바닷 속 깊은 곳에 갇혀 있어 건져 내지못한지 벌써 여러날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생명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였지만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할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듣는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점점더 미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숨을 쉬고 생명이 있을때에는 희망이 있을태인데 지금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어렵다고 생각하고 인양작업으로 마무리를 한다고 하니 너무너무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그곳에 있는 우리 지체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돌아가는날 다시 만나 기쁨을 나눌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살아 있으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천암함 에 갇혀있는 우리의 젊은 지체들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창조의 완전함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나타나는 모든 영광들은 완전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에는 실수하심이 없으시고 부족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볼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개개의 형상에도 있겠으나 더욱 진지하게 속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하심과 같은 속성에서 더 강렬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영광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창조의 모든 목적이 사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만사를 제정하셨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됩니다. 

자연의 모습과 바다의 경계들과 그 속에서 헤엄쳐 노니는 생명들의 조화와 아름다움들,

천상의 별들의 한치의 벗어남이 없는 궤도의 운행, 정확한 위치의 배열, 서로 어울림, 그것의 운행과 낮과 밤의 조정, 그것들에 의해 변화되는 계절, 등을 볼 때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운행된다는 사실에 더 놀라게 된다.  이것이 더욱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증거하고. 선하신 분이시을 증거하기 때문에 만드신 것들이 완전하고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과우주를 탐구하면할 수록 하나님의 솜씨와 완전하심에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농도만 짙어지고 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매사가 부족하고 채워짐이 없으며 근심을 일으키는 일들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은 완전하지 못하고,

근심이 많고 걱정이 많고,

뭔가 조금 부족한 것들로 가슴 앓이를 하고

더 많이 있어야 하고 더 필요한 것으로 인해 영혼의 갈증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니면 지나친 가난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이 지속되고,

무수힌 질병들의 공격에 육신의 고통이 더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고통스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더 많이 채워졌으면 하는 갈급함과 조급함으로 인해

정욕에 매어 있는 불안정한 영혼의 소용돌이가

안정을 찾지 못하는 불안한 삶을 지속하게 하고

눈을 감아도 마음 편히 쉴곳을 찾지 못하고 온몸을 뒤척이기만 합니다.

행복이 우리에게 있었는지 조차 알수 없고

즐거움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느껴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삶에 지쳐 허덕이는 고달픈 세월들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지으셨으나 지금 사람은 가장 불 완전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사람으로 행복하게 지으셨으나

불행한 삶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일을 하시지 않으시고

관심이 있는 곳에 일을 하시고 계시고,

우리가 처한 불완전한 상황을 돌아 보시지 않으시고 

지극히 일부에게는 만족한 환경에 두셔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는 편애를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눈에 비취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베푸시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노력을 해야만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노력은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것, 교회봉사에 충성을 다하는것, 성실히 이웃을 사랑하는것, 교회에 많은 헌금을 드리는것,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여하는것,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신데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시는 분으로 전락되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불 완전함 때문에 사람이 교회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은 그 무엇때문에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시고 계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색채대로 각종 헌금 봉투의 의미를 부여하여 봉헌하게하고 각종 위원회와 조직을 만들어 봉사와 희생을 강요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에나타난 결과들에 의해 신앙의 척도를 삼고, 봉사하는 자와 헌금을 잘내는 사람, 그리고 각종 예배의 참여도를 따져 신앙의 점수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의 정직성을 세금 납부의 이행과 경제 윤리에 척도를 맞춥니다.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하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직 국민 정서가 선진화 되지 않는 국가에서는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폄하 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신앙의 정직성을 판단하고 있을때 참된 신앙인은 교회안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자꾸만 뒤로 물려나 배척을 당하고 결국은 교회 자체가 사람의 내면에서 거듭남으로 성장하는 영혼의 성장과 성화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는 전혀 관계없는 행위와 실적과 실적에 초점을 맞추어가는 결과가 되어 세상에 불 완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이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습니다.

천지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늘의 삼라 만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만 피조물중에 가장 고귀한 존재인 사람의 모임인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불완점함을 드러내고 있어서 피조물들의 부끄러움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뭔가 불완전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요건을 채워주시려면 조건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충족된 물질이나 봉사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거나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예물을 드린다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육체적인 노력으로 봉사를 한다거나, 많은 경건한 삶을 위한  묵상들과 기도시간을 연장하여 하나님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는 영적인 표증들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혀 인격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견고하게 서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신앙에 매료되고 함께 동요되어 몰려드는 것을 볼때 과연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왜 우리와 이 처럼 다른가 의아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큰 상급을 받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니다. 그 상급은 내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누리려는 욕망으로 가득체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무식한 신앙인들에게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기독교 철학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제가 아무리 성경을 살펴 봐도 이런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교회의 모임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입니다.

제가 아는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라 불리울 수 없습니다.

확신하지만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님 밖에서 서성거리는 많은 형제들을 보고 눈물이 많이 나와 견딜수 없는 아픔을 늘 경험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저의 글을 읽고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면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몇일전 제가 잘아는 그리스도인에게 저의 글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느낌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저의 글을 읽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읽어 보려고 했는데 뭔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가?라고 묻자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정말 마음이 아팟습니다.

"교회?"

"어디 교회를 믿어서 가나?"

"마음이 편하라고 가는거지"

"아니 이사람아 무슨 말이야 교회를 어디 세상의 종교와 같은 거야"하고 정색하고 묻자 그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매주 교회 나가고 수요일도 가끔가고 헌금도 내면 목사님께서 기도를 해 주시잖아, 하나님도 다 용서 하실거야" "그리고 마음도 편해 일도 잘되고 오히려 교회 안나가면 마음이 찝찝하거든 내가 이렇게 교회를잘 나가니까 어려운 일 안생겨 염려할것 없어  다 마음 편하면 되는거 아니겟어? 하나님께서 다 내려다 보고 계시지 않아, 아무려면 헌금까지 하는데 매를 때리시겠어 그러시고는 적당히 믿어야지 깊이 빠지면 복잡해, 자네 처럼 말이야 그게 뭐야 좀 여유있게 살아야지 맨날 궁색해가지고" 라고 대답해서 더이상 어떻게 말할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가 막힐 처지에서 감히 뭐라고 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만드신 피조물이 완전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우리도 선하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수학적이도록 질서롭게 지으셨고,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혼을 부으서셔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신은 전능하여 영혼의 없는 피조물과 충분히 대화를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피조물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람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이성으로 질서와 조화, 그리고 하나님의 선에 있어서 완전함, 규율이나 규칙에 있어서 완전하심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피조물들이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피조믈 스스로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두셨어도 충분히 관리가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피조물을 피조물인 사람이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영혼을 지으셔서 유일하게 사람에게 주셨으므로 피조물을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께 완전하심을 더 뚜렷이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 천사를 재외한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위한 관계를 가지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피조물과의 순서적인 교통하심과 관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고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긴 의무에 침범하지 않으시면서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수도 있고 피조물은 사람에 의해 다스려 짐으로 그들이 드러내는 영광의 빛들도 사람에 의해 하나님께 돌려 지도록 함으로써 더욱더 완전하심을 드러내시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바와 같이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 것은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았다는 이유가 이런 이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사람의 눈에 보이거나 혹은 지성에 사유함에 있어서 아주 만족한 상태로 지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성군들의 도열하는 행렬들과 시간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를 잡는 배열, 피조물들의 연합과 조화, 빛에 의해 반사되는 색, 크기 각종 원근에 맞는 빛들의 변화, 모두가 사람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맞추어져 있는 모양과 크기.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연이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보고 싫어하거나 그것들을 추하게 보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사람의 눈에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가진 아름다움으로 보여집니다. 그것들은 자기의 마음대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에 맞추어 관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 보고 인식하며 사유하는 지성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혼에 의해 인식 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사람 보기에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사람에게 아주 완전하게 보이며, 사람의 눈에 아름다워 보임으로 그것들에 취하여 감탄하게 되지만 타락한 영혼은 그것을 자기가 취하고 하나님께 돌려 드리지 않는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영광의 빛을 발산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거하는 좌소가 영혼에 있고 그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복사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 이루시고 그것들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실때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 하나님께서 인식하시는 것으로 모든 기관들에 의해 만족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가지신 인격적인 완전한 지, 정, 의의 인격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아주 만족하게 인식 되게한 것으로, 사람이 인식하여 아름다우면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인식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에 비췬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사람이 보기에 옳지 않거나 추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일하셔서 즉시 고치시고 회복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사람에게 들어 왔습니다. 피조물은 고통하고 신음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지 않고 사람의 눈에 창조되어진 모든 피조물이 멸시되고 아름답다기 보다는 효용성을 생각하고 가치없는 것은 무시하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생명의 중요성이라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관리하시는 생각을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사유는 전혀 하지 않고 할수도 없음니다. 타락은 정욕에 영혼을 내어주고 영혼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을 상실하게 하고 결국 영혼이 온전히 삐뚤어져 정욕이 사람의 모든 기능을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 자기 중심대로 쫒아 사는 것을 의미함으로 타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의 활동으로 정욕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로 온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온것(요1 1:26)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욕의 노예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자리잡은 정욕이 하는 일을 살펴 봅시다.

가나안의 족속중에 아모리족속중에 한사람이 헷족속의 아내를 맞아들여 동거하여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철없는 청소년들이었거나 아니면 결혼을 할수 없는 노예의 상태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었을때 아들을 낳은 불행한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그들은 서로 사람하면서도 함께 할수 없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인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우린당하는 사회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실지로 가나안의 후예들은 이스라엘의 노예로 있다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이방의 지배를 받고 결국은 무너져 버리고 큰 징계를 받게 될 것을 선포하시는 예언적인 비유의 말씀이지만 말씀의 의미를 살펴 볼때 이들이 딸을 낳은 상태는 지극히 비 정상적인 상태였으며 딸은 불행한 환경에서 버려질수 밖에 없는 그 어떤 환경에 의해 태어나게 되었으므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기야 오늘날은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강제로 제거되는 불행한 사건들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아마도 사회적인 환경이나 혹은 불가피한 환경에서 발생한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영혼이 버림 받은 슬픔을 이로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아무리 죄의 열매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지 않을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현대에도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뉴스를 통해서 얼마든지 접할수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할때 사람을 타락케한 죄의 정욕이 행하는 짖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게하는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의 영혼이 정욕에 매여 상상할수 없는 가공한 일을 벌이는 추악함이 몸서리쳐지도록 소름끼쳐 차마 입으로 올릴 수 없는 정도의 추악함입니다. 

얼마전 공중 화장실 쓰레게통에서 발견된 태를 자르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청소부가 신고하여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사건이 온 지상에 보도되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 자기의 인생속에 나타난 과거의 비도덕적이며 정욕적인 삶으로 인해 미래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평범하게 누려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포기하지 못하여 차마 저지를수 없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한 순간의 실수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사건의 열매였고, 비극을 막아보려는 노력이 허사여서 태에서 자라나는 아이로 말미암은 고통과 괴로움은 사랑의 열매치고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밤마다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조금씩 불러오는 드러나는 생명의 모습, 이것을 감추려고 몸부림치는 한 여인의 피나는 고통이 눈에 비췬듯이 선하게 보여집니다. 그 여인의 극단적인 선택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회는 그 여인을 받아주기에 너무도 높은 벽을 둘러 쳤습니다.

이 여인은 이 높은 벽을 해치며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녀는 자기의 인생을 포기함과 같이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것입니다.

게다가 어린 생명에게는 사회가 받아줄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또한 엄청난 불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사회는 그를 위해서 조그마한 노력과 봉사를 했다는 점에서 조금 덜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아기의 엄마는 결코 씻을수 없는 상처를 마음이 아닌 육체의 심장에 남기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차마 할수 없는 야소보다 못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보자기에 싸여진 것이 아니라 온갖 더러운 배설물을 치우는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했습니다.

너무도 끔찍하고 비극적이며 그 어떤 악독한 전쟁보다 더 우리가 마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야기들이 우리의 주위에서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던 때에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 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말하기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리 라고 했습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속에 감추어진 더럽고 추한 것을 보실수있습니다.

어린리를 길거리에 버리고 사람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며 온갖 죄가 만무한 그 더러운 세상이 아무리 겉에서 보기에 영광스런 모습을 한다한들 그것이 하나님을 속이려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써 생각과 지식에 까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시고 낮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무죄하신 분이시므로 아담이 타락하기이전의 상태와 같은 순전히 완전한 사람의 상태이므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때에 순수한 하나님의아들이시며 순수한 인성을 가지신 첫사람 아담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볼수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의 완전하심을 볼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갓 태어난 어이의 비극을 그냥 지나치실수 없습니다.

이 슬픈 비극에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시는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아모리 족속 사람과 헷 족속 사람이라는 말은 저주받은 족속으로서 성적인 문란함과 사교의 음란한 의식 행위들을 살펴 볼때 아주 흔한 사건으로 이해가 될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종종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자연속에 나타난 슬픈 이야기들로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들로 슬퍼하는 일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부터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땅의 피조물이 두려워 할 일입니다.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서 땅이 사람의 피를 받고 사람에게 저주를 쏟아냅니다. 만약 이 부모들이나 혹은 여인이 이것을 알고 있다면 결코 있을수 없는 사건이고 이런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딸을 버린 여인의 죄악이 상상할수 없을 만큼 더러운 것이지만 다른 환경도 생각해 볼수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인 아모리 족속과 헷족속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의 더러움과 추악함을 보시고 그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 입니다. 그들의 조상 가나안이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비웃고 아버지에 관해 불경건한 일을 함으로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그곳에 있는 모든 가나안의 후예들을 멸하라 하셨으나 여호수가 이들 가운데 몇사람과 언약을 함으로 이스라엘의 종으로 살도록 살려준 것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노예로 사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의 불행을 자기의 자손들에게 이어 받는 것이 어려웠거나 아니면 독한 노예생활로 인해 그들의 사랑을 보호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과를 감당할수 없는 극한 환경에 있었든지 딸을 버린 이여인의 비극적인 환경은 저주에서 비롯 된 것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자연이 받은 한 생명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마땅히 강보에 싸여 보호를 받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하나라도 그가 누려야 할 마땅한 보호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사람은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생명을 이을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한 것 같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벌거벗은 수치를 감추지 못하고 핏덩이인 채로 자연에 노줄되어 있습니다.

이 아이는 도저히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할수도 없고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생명을 보호할 아무런 능력도없습니다.

아직 한번도 뜨겁게 내리쬐이는 태양에 빛을 받아보지 않았던 그의 피부는 구름에 가리워진 태양의 빛만 받아도 익어 생명을 위협할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게다가 먹을 것을 찾아 들을 배회하는 각종 들짐승들의 위협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까요.

피 냄세를 맡고 달려와서 집어 삼키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아주 위험하고 극한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계시는 것을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읽습니다.

그 말씀은 천지를 지으시던 말씀이시고, 자연을 섭리하시는 보존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천지 만물이 말씀으로 일어났으며 무로부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뜨거운 태양이라도 가던길을 멈추고 새차게 부는 폭풍이라도 잠잠하며 하얀이를 드러내며 먹을 집어 삼킬듯이 덤벼 들다가도 온순해집니다. 대지 위의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게 되면 아무리 연약한 존재라도 더 다른 극한 상황으로 환경이 바뀌는 재앙을 만날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재앙을 만나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거하지 않을때 우리느 결코 우리의 재앙을 비켜 나갈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시면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도 아주 안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불어오는 풍랑을 만나 배다 뒤집힐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워 호소합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바다와 풍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순간 바다와 풍랑은 고요해졌습니다.

벌거벗은 핏덩이인 어린이가 어떻게 다시 생명을 유지할수 있을까요?

지나가는 행인이 그를 데려다가 살렸습니다.

그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그 부자는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머리게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고운 옷을 입혔고 최고로 좋은 의복으로 꾸며 아름답게 했습니다.

결국은 왕후의 지위에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아모리족속과 헷족속의 딸인 이 딸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아름답게 성장했고 결국은 왕후의 지위에 오르는 영예까지 오른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입힌 영화로 그녀의 화려함과 온전함이라(겔 16:14) 말씀하셧습니다.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이나 버림을받았던 핏덩이인 이 아이가 마땅히 할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지난날을 기억하고 자기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의 찬양을 드릴 지음을 받은 목적에 합당한 것을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있는 그자리에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면 하나님꼐서는 얼굴을 돌리시고 즉시 영혼의 유익을 선물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과 함께 거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비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여 자기의 아름다움으로 형편없는 타락으로 빠져 갔습니다.

마치 자기의 신분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세상에 가장 더러운 향기를 뿜어내 모든 사람으로 행음하여 많은 사람을 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녀의 근본이 아모리이며 헸사람이라는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고 더 크게 드러내 아주 부끄러운 판단이 온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그렇게 했다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는 타락한 우리의 모습을 분명하게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이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다시 회복시키고 거듭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이후로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10 고난주간을 마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