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범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게 하는 유혹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뱀입니다.
실지 뱀은 하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화를 했고 하와를 무너뜨렸습니다.
어떻게?
문자주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단이 뱀에게 들어가 뱀을 이용하였습니다.
뱀에게 들어가 자기의 역할을 했고 말을 했으며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유도하는 교모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단은 뱀에게 나올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에게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과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는 뱀도 말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진화되었다.
아니면 성경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도록 설명하며 그 내용은 우화나 설화를 가져와 성경에 삽입한 것이지 실재일 수 없다.
개혁주의 신앙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지로 뱀은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 뱀이 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사람이 애완견과 대화하는 것과 같이 뱀과 대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의 주장들이 있으며 이 사건에 대한 성경적 입장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러면 실지로 뱀은 아무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았습니다.
뱀은 너무 억울한 것이아닙니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런 저주를 내리셨다는 것은 분명 뱀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공평한 것입니다.
하지만 뱀은 자기존재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억울함과 불평등을 주장할 원인과 이유등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재외한 모든 짐승들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창조세계에서 의식하거나 기억하고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한순간 이 땅 위에 삶을 드러낸 존재로서 살다가 사라지면 그가 존재하였다는 흔적을 기억해주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존재에게 영원한 기억을 하심으로 존재의 행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뱀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자기의 존재의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부담이나 가혹한 행위가 있을 지라도 그것으로 해서 자기에게 부여된 처분으로 인하여 불평등을 주장하고나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은 자기 행위의 선악에 대한 판단을 가지지 않고 자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나 지식으로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객관적으로 자기의 존재의 사실을 숨기고 없는 무의 상태의 존재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지 사람에게는 존재의 사실이 자기의 의식에 남겨져 그 의식이 자기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로 인하여 행불의 감정을 가지며,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책임을 지게되는 요소는 삶에 대한 기록이고 그 기록은 자기가 사용한 지식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얼마간이라도 지식을 사용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말라 카말라처럼 지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의 존재를 결코 짐승이라고 핑계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입니다.
현재까지 지구상에는 여성의 성 해방으로 인하여 늘어나는 것은 낙태수술입니다.
정욕으로 잉태한 자식들을 강재로 낙태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낙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낙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 숫자는 지금까지 인류가 태어난 사람의 숫자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일단 남녀간의 욕정에 의해 잉태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핵분열을 시작한 그때부터 그는 분명히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밥 먹듯이 해치웠습니다.
어쩌면 식인종보다 더 잔인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들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감수분열이 일어납니다.
이 순간 부터 이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방법이 사람을 지으실 때 가장 타당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습니다.
자연적인 방법이든지 아니면 어떤 도구를 사용하셨든지 짐승들은 지음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음을 받았지만 자기존재의 의식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존재에 대한 자기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존재들을 관리할 존재를 지으셔야 하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왜 당신은 직접 통치하시지 않고 간접 통치를 하시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특성 때문에 피조물로 간접 통치를 하도록 하시는 것이 좋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관리자를 지으실 때 도구로 어떤 피조물을 사용하셨고, 그 도구는 사단이 뱀을 사용하여 하와를 유혹함과 같이 어떤 짐승 가운데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기를 원하셨고, 그 짐승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보내어 짐승으로 지식에 의해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짐승에게 들어갔으나 짐승은 지식을 담을 수 있는 담지체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지식이 피조물을 사용하여 흙을 떠내어 사람의 형상을 빗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피조물은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 사람의 형상을 빗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지식이 피조물로 활동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심으로 피조물은 지식대로 움직여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 후 빗어진 사람의 코에 하나님께서 직접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된 것입니다.
뱀입니다.
실지 뱀은 하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화를 했고 하와를 무너뜨렸습니다.
어떻게?
문자주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단이 뱀에게 들어가 뱀을 이용하였습니다.
뱀에게 들어가 자기의 역할을 했고 말을 했으며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유도하는 교모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단은 뱀에게 나올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에게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과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는 뱀도 말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진화되었다.
아니면 성경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도록 설명하며 그 내용은 우화나 설화를 가져와 성경에 삽입한 것이지 실재일 수 없다.
개혁주의 신앙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지로 뱀은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 뱀이 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사람이 애완견과 대화하는 것과 같이 뱀과 대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의 주장들이 있으며 이 사건에 대한 성경적 입장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러면 실지로 뱀은 아무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았습니다.
뱀은 너무 억울한 것이아닙니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런 저주를 내리셨다는 것은 분명 뱀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공평한 것입니다.
하지만 뱀은 자기존재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억울함과 불평등을 주장할 원인과 이유등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재외한 모든 짐승들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창조세계에서 의식하거나 기억하고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한순간 이 땅 위에 삶을 드러낸 존재로서 살다가 사라지면 그가 존재하였다는 흔적을 기억해주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존재에게 영원한 기억을 하심으로 존재의 행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뱀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자기의 존재의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부담이나 가혹한 행위가 있을 지라도 그것으로 해서 자기에게 부여된 처분으로 인하여 불평등을 주장하고나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은 자기 행위의 선악에 대한 판단을 가지지 않고 자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나 지식으로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객관적으로 자기의 존재의 사실을 숨기고 없는 무의 상태의 존재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지 사람에게는 존재의 사실이 자기의 의식에 남겨져 그 의식이 자기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로 인하여 행불의 감정을 가지며,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책임을 지게되는 요소는 삶에 대한 기록이고 그 기록은 자기가 사용한 지식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얼마간이라도 지식을 사용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말라 카말라처럼 지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의 존재를 결코 짐승이라고 핑계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입니다.
현재까지 지구상에는 여성의 성 해방으로 인하여 늘어나는 것은 낙태수술입니다.
정욕으로 잉태한 자식들을 강재로 낙태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낙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낙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 숫자는 지금까지 인류가 태어난 사람의 숫자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일단 남녀간의 욕정에 의해 잉태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핵분열을 시작한 그때부터 그는 분명히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밥 먹듯이 해치웠습니다.
어쩌면 식인종보다 더 잔인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들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감수분열이 일어납니다.
이 순간 부터 이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방법이 사람을 지으실 때 가장 타당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습니다.
자연적인 방법이든지 아니면 어떤 도구를 사용하셨든지 짐승들은 지음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음을 받았지만 자기존재의 의식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존재에 대한 자기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존재들을 관리할 존재를 지으셔야 하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왜 당신은 직접 통치하시지 않고 간접 통치를 하시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특성 때문에 피조물로 간접 통치를 하도록 하시는 것이 좋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관리자를 지으실 때 도구로 어떤 피조물을 사용하셨고, 그 도구는 사단이 뱀을 사용하여 하와를 유혹함과 같이 어떤 짐승 가운데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기를 원하셨고, 그 짐승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보내어 짐승으로 지식에 의해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짐승에게 들어갔으나 짐승은 지식을 담을 수 있는 담지체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지식이 피조물을 사용하여 흙을 떠내어 사람의 형상을 빗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피조물은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 사람의 형상을 빗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지식이 피조물로 활동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심으로 피조물은 지식대로 움직여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 후 빗어진 사람의 코에 하나님께서 직접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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