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설교

예배 (요 4:21)

생명있는 신앙 2010. 7. 19. 07:33

 

예배란? (요 4:21(20~24))

구약에서 드리는 제사 와 예배

제사 : 죄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 조건으로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대속의 행위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때마다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나님을 만날수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성하신 제사는 모든 제사보다 더 완벽한 제사였습니다. 결국 제사는 하나님을 만나는 조건인 것입니다.

예배 : 회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배는 제사와 같은 의무를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이름과 함께 베푸시는 만남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하신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는 조건이 바꿔진 것입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하는데 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회개한 자만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회개한자들이 참여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된 의미입니다만 이 말은 몸과 마음을 신령하게 해서 목욕을 제게 하고 신령한 마음으로 진실로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라는 의미의 말씀인데, 영이란 말은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로 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과 만남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배의 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예배의 행위 : 식탁에서 음식을 나눔(잔치)

한 가족이 모여서 음식을 나눔

어떤 선교사의 후기를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영국의 선교사가 중국 선교에 가서 경험한 일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주 끔직한 이야기였고 중국인들의 배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예배”를 알고 난 이후에 그 선교사의 실수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선교가 결코 성공할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선교사가 중국에 당도해서는 한마을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곳에 살려 왔다고 말하자 그 마을 사람들은 선교사의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허락되자 마을 사람들은 회관으로 몰려가 음식을 장만했고 선교사가 초청이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회관에 도착 했을 때 두 번 놀랐습니다.

첫 번째는 상위에 차려진 음식을 량을 보고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상위에 차려진 음식들이 모두 이상함 짐승들을 재료로 보고 놀랐습니다. 그 재료들은 선교사의 고향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혐오스런 짐승들을 재료로 한 것입니다.

원숭이를 살아있는 체 머리의 뚜껑을 도려 머릿속을 파먹을 수 있도록 한 것과 아직 죽지도 않은 꿈틀거리는 뱀들을 접시위에 놓여 졌고 비둘기를 튀겨 올려놓은 접시 등이며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는 재료들을 식탁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선교사로서는 도저히 멋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자리를 뛰쳐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자 동내사람들이 나와서 그를 붙잡고 몽둥이를 들고 둘러서 있는 것입니다. ‘

말이 통하지 않은 선교사에게 한사람씩 그를 내리쳤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함께한 선교사가 도망쳐 간신히 살아 이 사실을 글로 남겨 놓았으나 그 자리에 붙잡힌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동내 사람들이 때리는 몽둥이에 생명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당한 이런 비극적인 일들의 내면을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선교사는 언어에 능숙하지 못한 상태로 중국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를 분명히 말 할 수도 없어서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그들 마을의 가족이 될 것을 몸 짖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들과 함께 살겠다고 한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음식을 장만했고 최고의 음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음식은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가족으로 들어온 것을 환영하는 답례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는 혐오스런 짐승들이었고 도저히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가족이 되겠다고 동의하고 그 마을에서 살수있게 허락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실수였던 것입니다.

선교사는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그들에게 간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중국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보내어졌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는 중국인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중국인들과 함께 살겠다는 의사표시로 동의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높고 고귀한 뜻을 알지 못한채 그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한가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쳐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채 파견되어 마을에 당도한 선교사에게는 우선 그들과 한가족이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가족이 되겠다는 의미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 마을의 전통과 그 마을의 관습을 인정하고 그들과 같이 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환영을 할수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게는 참으로 인간적인 진심이었으나 선교사의 마음에는 단한가지 그들과 대화할수 있는 언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우선 그들의 가족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전통과 생을 살아온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선교사는 영혼의 빈 잔을 가지고 중국의 한마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빈잔에는 중국의 한 마을의 관습과 전통을 담아야 합니다. 중국의 옷을 입고 중국의 예의와 도덕을 배우고 중국의 냄새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는 서양 사람이지만 몸에서 풍기는 향기와 말 그리고 지식과 도덕이 중국인의 모습으로 뒤바꿔야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부어지는 임무가 될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서양인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한 가족이 되겠다고 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환영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으나 자기들에게 와서 자기들과 함께 살겠다고 한 사람을 거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한 것입니다.

이제 선교사는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중국인들과 함께하는 밥상을 받고 중국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는 그 상에서 중국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의 혐오스러움을 미개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고 그 식탁을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인은 그들의 베푼 잔치와 성대한 대접을 외면하고 그들과 함께 살겠다고 한 선교사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식탁에 앉아서 한 음식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을 진정한 그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해롭게 하려는 스파이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내리치는 몽둥이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선교사는 반드시 언어를 습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러나 이시간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예화를 들려 드리는 것은 식탁입니다.

한국 말로 말하면 밥상이라고 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누가 한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까?

중국인들이 선교사를 대접하여 함께 한 식탁을 내어 놓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족은 형제요 자매이며 혹은 손자이며 며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죄로 말미암아 함께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찾아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예수께서 세관에 있는 마태를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태는 죄인인 자신을 부르심에 감사해서 자기 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고 예수님과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태가 예수님께 드린 식탁은 가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은총을 받은 자가 드리는 보답입니다.

이때 바리세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너희 선생은(예수님은) 죄인들과 한 가족이다. 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너무 치욕적인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오점이 된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의 비난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대 없고 병든 자에게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 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인 즉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란 자기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의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자기행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자기의 완전함과 자기의 경건함 때문에 하나님이 결코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 부르러 오신 사람들은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 예배하러 올 자들은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부르십니다. 자기의 백성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의 교리라고 말합니다만 이 교리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지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교리가 얼마나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교리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소경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하게 명시한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은 영혼의 지성에 까지 미쳐서 영혼 스스로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택하심이 아니고서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없습니다. 이 교리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차분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 예배하러 올 자들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예배하러 올 자들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예배하러 올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한 이 시간에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리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과 한 가족임을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진리이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예배관과 비교하여 수정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지성에 알려지지 않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가족이 하나님 앞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을 만나것이다. 

너희들은 예배를 통해 나와만나고 있으며 지금 너희는 나와 함께 있으며 나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내 앞에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만나는 것 조차 의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의무는 있으나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과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오래전에 신학을 시작하면서 예배관에 관하여 종교적인 의식의 예배관을 배워 왔습니다.

예배는 일종의 제의에 속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 예배관의 핵심은 제의의 형식과 의식에 있습니다.

얼마나 신령하고 진정으로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가지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옳바로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시간을 드리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의무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핵심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인데 실지로 이말의 번역은 영과 진리로 라는 말이 더 적합니다.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By Holy Spirit and The Truth 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의하면 의무를 의미하는 의미는 조금도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씻으라는 정결의 의미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Holy spirit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 영은 강림으로 밖에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오셔야만 합니다. 예배에 성령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유일한 띠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결코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알수 없습니다.

창세가 6:3에서 하나님의 신이 거두워 가신 이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었고 하나님과 결정적인 교제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으며 왕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지식입니다.

 

저는 자유교회가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과 영광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지성이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영혼의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공생에 시작하실 처음에 말씀을 선포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할수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한 사람이라면 회개란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

변화하는 것,

궁극적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최초에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은 사람으로 돌이켜 모든 죄성을 버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에 인간의 특수성에 까지 말한다는 것은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함으로 말씀을 다 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의 주제에 맞도록 만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9:13)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한 밥상에 앉아 식사 할 수 없는 것을 보십시오.

마땅히 하나님과 함께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나눠야 하며 한 가족임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한 결과 참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회심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한 밥상을 받들어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식탁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진리는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자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고 단호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 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중요한 말씀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스승인 바울이 로마서 10장 1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들음-그리스도의 말씀을 귀납법적으로 연결하여 믿음의 열매가 맺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역순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소리가 되어 사람들의 귀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와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성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지식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들어와 사람의 영혼을 일깨워 사람으로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예배는 창세기 6장 3절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신을 거두워 가신 이후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던 하나님과의 교재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회복되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대속의 희생을 드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백성들을 불러 그의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시는 것입니다. 이 식탁에 앉을 사람들로서 합당한 자격 조건이 있으니 그 사람들은 본성으로부터 회심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조건은 주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서서 주님과 교재를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하는 조건으로 본성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이키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오늘 주님 앞에 돌이켜 이 시간 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만난 증거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한마음으로 회개하고 변화되는 새사람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