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이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번성할때에 사람들의 딸들이 나니" 라고 말씀하셨고 ,
"하나님의 아들들이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들을 아내로 삼는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사람에게서 거두워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에 대해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신을 거두시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때 하나님의 신이 사람에게 거하여 계셨으나 사람은 육체였으며 정욕이 가득한 사람이었던 점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는 것이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사람들의 행위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켜 볼때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이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영혼의 활동에 관하여 무지한 상태에 있었을때 사람들은 인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여러면에서 어두운 부분이 너무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혼의 본질과 활동에 관한 도전은 영혼이 자신이 공개되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함으로 살펴 볼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결코 자신의 영혼 세계에 들어가 영혼을 살펴 본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 그리고 AD 419년 말쯤 기록한 4권으로된 어거스틴의 영혼과 그 기원에 관하여 (은총론제2권 필립샤프) 에 소개된것 외에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영혼이 사람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기 위해 굳게 잠긴 자물쇠에 키를 꽂아 넣었을 때 그 두려움과 떨림이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의 내부를 살피자 중앙에 있는 또하나의 문은 아무라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 가려진 곳으로부터 수많은 지식들이 마음으로 흐르고 있었고 영혼을 살피려는 지식도 영혼으로부터 홍수처럼 쏟아져 흐르고 있어서 마음에 상을 맺히고 의지를 견고하게 하여 나 자신으로 영혼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집중된 의지를 가지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영혼의 문에 발을 디디고 영혼과 대면하였을때 사람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혼에는 그야말로 그 어느것보다 더 어두움 자체였습니다.
아무것도 살필 수 없는 어두움에는 수없이 많은 어두움 조각들이 어두움을 무한정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 났습니다. 영혼에 빛이 비취나 영혼안에 있는 어두움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세상은 빛이 이르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자리를 차지하는데 반하여 영혼에 드리운 어두움은 빛으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두움이 쏟아져 나와 빛을 이기도 있었던 것입니다.
콧김으로 홍해를 가르실때 물이 벽을 이룬 것처럼 어두움이 벽을 이루고 빛과 대치하고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 안에는 밝은 빛이 소용이 없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얼굴 빛만이 어두움을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계시22:5)
빛을 버티고 서 있는 어두움은 어두움이 아니라 어두운 색을 가진 그 무엇같이 보였습니다.
이것들은 일반 적인 빛으로 살펴 볼 수 없으며 빛이 그것들을 밝혀 정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두움 자체였고 그 어두운 것들은 서로 엉키고 합하고 또 다른 어두움을 만들고 조합되고 있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어두움들이 쉬지 않고 활동하고 부딪히고 깨어지며 새로운 것 들로 풀어졌다 조합 되었다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며 반복된 일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두움으로 덮인 그 무엇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내부를 살펴 본 사람은 영혼으로부터 밝은 희망을 얻으려는 기대를 깡그리 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가진 모든 일들이 사람에게 결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 주지 않았고 밝은 일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두움은 끝이 없는 심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빛을 주시기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이 안계신 원수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 심연에는 여러 갈래의 보이지 않은 뿌리들이 영혼을 산책하는 사람으로 걸려 넘어지게 했으니 그것이 있는지 조차 볼 수 없는 영혼 곳곳에 뻗혀 있는 뿌리들이었습니다.
이 뿌리들은 마치 사람의 뇌속에 혈관들처럼 엉키어 그 무엇인가에 박혀 있고 여러갈래에서 모아진 줄기의 갈래는 외벽을 향하여 곧게 뻗어져 있엇습니다.
그것들에게서는 쉬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 처럼 흘러 나가는 것들이 감지 되었고 그 뿌리줄기는 세상의 중심부를 향하여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세속이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기를 세속은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힘있는 자의 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철학자의 세계,
이상주의자 세계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세계,
혹은 독재자의 세계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을 주관하는자,
하나님으로부터 내 쫓김을 받고 이 세상을 정복한자가 놀랍게도 세상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뿌리를 박고 그 뿌리에서 공급되는 자양분으로 세상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세상이 그 뿌리를 사람의 영혼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두움이 뿌리를 내린 영혼을 변화시킬수 없다는 사실을 아신 하나님은 기어코 하나님의 신을 사람에게서 거두시고 사람을 육체가 되게하신 그 깊고 깊은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로 남아 있는 불순종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기울어진 마음을 가지거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찬란한 빛을 영혼에 비추어 세상빛이 그 영혼에 비추이면 세상 빛이 어두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세상에 드러나 세상을 밝게 비취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찬란한 빛은 하나님 형상에서 비취고 있었고 태양빛 아래에서도 육체의 빛이 드러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영혼에서 사라지고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실때 영혼을 넣으셨으며 그 영혼에 하나님 형상이 있었습니다.
이 형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찬란한 빛을 발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상태애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천지 창조와 사람에 관한 모든 지식이 육체에 반응 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에 지식을 새겨 두신 것입니다.
영혼은 이 지식으로 활동하고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영혼에 들어온 모든 지식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그 결과들을 마음으로 내보내는 활동을 할때 하나님 형상에 있는 지식이 표준이 되었습니다.
영혼은 이 지적인 자료 곧 지식이 없으면 결코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지식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영혼에는 지식이 없게 됩니다.
최초 아담과 하와에게는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심판을 받고 에덴 동산을 쫓겨났어도 영혼에 지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최초의 본유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나 에덴 동산에서 살태 육체의 오감으로 얻었던 지식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판단을 받아 새롭게 새겨진 지식들은 남겨진체로 본유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지식만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본유적 지식에 의해 판단된 지식과 육체의오감에 의해 얻은 지식만 영혼에 남겨져 있는상태로 에덴 동산에서 쫒겨났으므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나 본유적인 지식이 아니었고 이 지식은 후손 들에게 유전되는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후손들은 이지식을 유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 탄생된 사람들은 육체의 오감으로 습득한 지식을 영혼에 새겨두게 되고 그 지식으로 영혼의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지식은 후천적 지식이고 육체의 오감으로 습득하여 얻게 됩니다. 육체의 오감은 지식들을 영혼으로 들여 보낼 수 있게 되는데 이 지식들이 채워지면 지적인 활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 지적인 활동이 영혼의 활동이며 곧 이성활동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지적인 활동을 하는 그 시기에 이르러 영혼은 지성에 새겨진 지식을 활발하게 이용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은 완고할 수 밖에 없음,
사람의 영혼은 활동응 위해 반드시 지식을 필요하기 때문에 최초에 하나님꼐서는 하나니님의 형상에 지식을 새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지식을 잃어 버렸고 영혼은 지식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의 영혼은 활동할 수 없게 되었고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최초에 지음을 받을때부터 육체에 오감으로 지식을 얻도록 지음을 받았고 그 지식을 영혼의 지성에 새겨 세상을 살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부어진 것이지만 육체의 오감으로 인해 습득한 지식은 순수하게 사람이 지식을 얻어 영혼을 활동 하게 합니다.
이처럼 영혼이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은 지식으로 활동 하게된 것을 지식의 활동이라고 하고, 지식간의 판단, 추론, 산술 능력을 더하여 이성 활동이라 하고 이성활동에 의해 새로운 지식과 종교, 우상, 세계, 도시, 철학, 갖가지 학문들이 만들어지고 육체를 활동하게 합니다. 이성활동은 영혼과 육체의 활동 영역이고 사람은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지식의 범위내에서 활동할 수 있고 이성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을 활동하려는 영혼의 활동은 이상의 지식을 반드시 습득하여 영혼의 지성에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그때 비로써 추론이 가능하고 그 판단 지식의 정 부에 관한 제약이 없이 확실히 확인되어 정으로 인정되면 정으로 부로 확인 되면 부로 영혼의 지성에 기록하여 판단의 자료로 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식은 지식간의 판단과 새로운 오감의 습득에 의해 수정과 교정의 절차를 거처 확실히 바로잡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영이 지식들간의 활동을 통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간다면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어진 지식들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게 됩니다.
영혼은 지식의 표준이 되는 정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먼저 육체의 오감으로 인해 습득한 자료를 통해 판단하고 분석하며, 먼저 들어온 지식들간의 생성된 지식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세상을 상대하며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판단하는 지식의 차이에 다른 차등들이 서로 부딪히고 갈등을 갖고 오해를 하고 문제를 일으키며 싸움을 하게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분이 이 문제가 사람들의 삶속에서 나타날 것을 예견하시지 못했다면 사람을 지으신 그분은 결코 완전하시다고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전혀 차등이 없이 각자 자기의 의견과 생각을 가지면서도 지으심을 받은 특징대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도덕 규칙과 질서가 필요하고 지식의 기준이 절대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그 지식에 의해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여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지식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 지식의 판단을 받게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오직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한 지식만으로 살아가야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은 지식들은 지극히 편견을 지니고 있어서 지식으로서 완전하기에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편견밖에 드러내지 못합니다.
판단을 받지 아니한 순수한 오감에 의한 지식들을 재외한 지식들간의 조합, 산술, 또는 상호 의존으로 생성된 지식들은 결코 옳은 지식이 될수 없습니다. 다만 순수한 오감에 의한 지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오히려 순수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 조차도 편견으로 드러나는 우를 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육체의 오감으로 습득된 지식마져 판단을 필요성이 제기되고 순수지식들이 판단을 받을 기준도 없고 판단 되지고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데 이와같은 지식의 대부분은 거짓된 지식에 불과합니다. 특히 철학이나 종교등에서 그 문제는 삼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우상을 만드는 지식등은 도저히 사람이 아닌 수준으로 추락한 지식들을 의지하는 영혼으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지식을 근거로 활동하므로 그 지식이 없는 범위에 대해서는 영혼도 쉽게 인정할수 없으며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외에 전혀 새로운 지식의 접근을 경계하게 됩니다. 지식은 경계를 형성하고 경계 밖의 지식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학업을 위하여 지식을 습득한 이성 작용이나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지식들은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이게 되지만 이미 구축된 사고의 체계를 와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를 하며 자신을 보호하게 됩니다. 그중에 종교에 관하여는 강력한 경계의 각을 세우는데 설득을 당하는 반복적인 지식과의 접촉을 통해서 지성이 문을 열고 받아 들이기 시작하면 다른 종교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 경계선을 긋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지식은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되어진 지식 체계와는 전혀 다른 DNA 구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지닌 지식인 반면 육체의 오감은 육체의 관점으로 이루어진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은 아름답고 선하고 창조적미여 빛인 반면 사람의 영혼에 있는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어진 지식은 불완전하며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이 전혀 없으며 일정한 규칙이 부여되지 않은 지식입니다.
그러면 완고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저는 모든 사람이 완고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를 말씀을 드리려고 영혼을 여행하였고 그 내부를 진술해 드렸습니다.
영혼안에는 육체의 오감으로 습득한 어둡고 칙칙한 지식들로 가득채워져 있었고 쉴세 없이 움직이며 사람의 생각에 따라 수많은 지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영혼이 지식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보여 드렸으며 영혼에 없는 지식으로는 결코 활동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영혼은 어두움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모든 지식들이 빛을 내지 않고 오히려 빛을 대적하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어두운 지식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어두운 지식들은 끊임이 없는 불완전한 지식을 생산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적인 활동을 하면 영혼에 있는 지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지적인 활동을 멈추면 지식 활동도 도열하고 활동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그 모든 지식들이 육체의 오감으로 습득한 지식이었으며 어두운 지식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지식들이 빛을 내를 밝은 지식이 되려면 본유적인 하나님 형상에 있는 지식의 판단을 거쳐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본유적 지식을 상실한 상태로 오직 육체의 오감으로 얻은 지식으로 영혼이 활동할 때 그 지식은 편견적인 지식이며 불완전한 지식입니다. 이 모든 지식들은 본유적 지식이 오면 새롭게 씻겨질 세상에 오염된 지식이었습니다. 게다가 순수한 지식은 정렬되지 않은 상태로 세겨져 있었고 그 상태로 작용을 함으로 더욱 불오나전한 지식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오감으로 습득한 지식에 의한 자기 중심의 영혼 활동 곧 모든 이성 활동은 비록 그 지식이 순수한 것일지라도 완고함을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게다가 편견적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지식이 결여된 상태입니다.
완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차르"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밀다, 강요하다," 이며, 의지를 가지고 변할 수 없는 지식으로 밀어 붙여 결과를 이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을 일으키도록 하는 근원은 영혼의 활동에 있고 영혼의 활동은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지식에 있습니다. '파차르'는 영혼이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한 지식 작용으로 마음에 의지를 일으켜 사람으로 활동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영혼의 활동에 의해 의지 활동으로 육체를 움직입니다.
이와 같이 '파차르'라는 말은 의지를 가지고 힘을 가하여 밀어붙이는 행위를 의미하므로 그 의지가 완전하지 않은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결과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낭떨어지에 서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떨어지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그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잡아 당기면 됩니다.
그런데 '파차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다시 말하자면 곁에 있는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었자고 가정하겠습니다.
사람의 판단은 영혼의 지식 작용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의 지식이 장난으로 그를 밀어 보려고 하는 행동을 했는데 실수가 있었다는 가정과 낭떨어지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만한 높이가 아니라고 판단한다거나 아니면 악의를 품고 한 행동이라면 "밀다" "강요 하는"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수레를 끌고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뒤에서 힘을 가하여 밀어줍니다. 그런데 좌우 도로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밀어준다면 그것이 돕고자 한것이 아니라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지식 작용에 의해 판단을 받는 행위가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행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완고한 것은 더이상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경계의 벽을 높이 세우고 새로운 지식의 유입을 거부하며, 영혼의 활동이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한 지식으로만 활동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조금도 없는 것이며 이 지식으로 영혼이 활동하는 모든 '이성'작용입니다.
완고함은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한 지식 작용에 의해 행하는 의지 활동으로 불 완전한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므로 모든 이성 활동을 완고 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성 활동은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한 지식 작용에 의해 영혼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성활동은 완고 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완고한 이성활동에 복음의 판단을 받고 지식을 새롭게함으로 새로운 개념들을 영혼의 지성에 하나씩 채워가며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유로 완고할 수 없습니다.
2011,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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