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The Creation of Knowledge, 지식의 발생

생명있는 신앙 2011. 1. 28. 12:51

 지식의 발생

 

사람 안에 영혼이 있고 영혼 안에는 지성이 있으며 지성은 지식을 담는 방입니다

지식은 영혼을 활동하게 하고, 실제로 사람의 활동 원인으로 활동의 내용이며  활동자체의 영이이다. 지식이 없이는 활동드러나지 않고 혹 활동이 나타나는 경우는 순전히 육체의 감각에 의한 반응입니다.
사람이 육체로 태어나면 성장하면서 그 영혼의 지성에 지식을 새겨담게 됩니다.
본래 지식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생득하게 됩니다. 

사람이 생득하게될 지식은 진리와 거짓, 두 가지로 사람의 조건에 의해 적용되어지는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 지식대로 활동하고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으며 형상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 담긴 '본유지식'을 주셨습니다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하나님의 지식에 속하여 사람의 영혼에서는 행동하는 지식으로 직접 작용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존재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지식의 적용에 있어서도 사람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지식을 내실 수 있으나,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 하지 못하며 존재에 있어서 의존적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구별은 자존 여부가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에서든지 외부의 조력을 받지 않으시고 자기 안에서 지식을 내시어 반응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조건들이든지 조명을 받지 않고는 지식을 생성 할 수 없고,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반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안에 있는 지식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지식의 한계내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을 지으실때 반드시 지식을 주셔야 했고, 그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이므로 사람에게 직접 적용이 불가능하지만, 사람이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조명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에 담겨있는 본유지식 입니다. 

 

태어났거나 존재함으로 영혼에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지적인 열림을 갖지못한 태어난 영아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영아들은 움직임이 감각적이며 극히 제한된 행동을 하며 자기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식이 없으므로 자기의 뜻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말을 하지 못하고, 감각적인 자기표현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런 표현은 생물체인 육체가 자기 생존을 위한 감각적인 반응입니다. 이런 행동은 배고프면 울고, 입에 젖을 물리면 빨아 삼키는 일 외에 그다지 뚜렷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영아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한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부모들로부터 말을 듣고 감각적으로 언어를 체득하는 것이며,이렇게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언어나 표현된 다양한 지적 행동을 감각으로 받고 이를 자기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나 표현
감각한 것을 지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일을 배우지만 그렇게 배우는 것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한 두살 기간 동안 자라면서 옹알이를 하며 자신을 표현하며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 지식을 가지며사물의 움직임 등을 살피면서 주변 환경에 따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전 상태를 살피고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공간 능력을 익히는 감각을 습득합니다영아의 영혼은 주위로 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부모의 언어를 구분하여 듣고 판단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런 환경으로부터 오감에 감각된 것들을 감성작용에 의해 표상을 형성하여 지성에 반영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표상을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여 새겨두게 됩니다. 또한 지성은 연산과 조합을 통해  많은 지식을 채워가고  지식들로  많은 지식을 생성하여 가집니다. 이런 작용은 어린 영아가 자신의 의지로 지식을 증가하는 지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쉬지 않고 일하는 영혼의 지성작용입니다. 이런 지성의 작용이 계속됨으로 아이의 성장과 함께 지성이 성장하여 오감을 통한 감각과 표상 반영 조명 지식 생성이 익숙해지면서 전인에서 지적 열림을 갖게 되고 비로서 사람으로서 자기 존재를 인식할  있는 상태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 학습이 가능한 때가 되고 사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자기지식을 가질  있는 상태가 되어, 지식이 함유된 언어를 자유스럽게 표현하며 자기 독립적 결정이 가능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란?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John Lock 는 그의 책 인간 오성론에서 "아는 것 곧 지식이란? 관념들이 서로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명확한 의미로 볼 때 John Lock 관념은 인간의 사고 속에 있는 지식이 있기 이전에 드러낸 마음속에 있는 표상이나 혹은 상념을 의미하고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경험에 의해 마음에 주어지고 마음은 이것들을 파악하여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 το γαρ φρονημα της σαρκοσ θανατος, το δε φροναμα του πνυματος ζωη και ειρηνη.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φρονημα, way of thinking, though, 라는 말은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만 4회에 걸쳐 사용하는 말입니다. 모두 8장에서 7, 27, 62회 로 사용한 단어이며 70인역에서는 2회 걸쳐 사용하는데 외경에서만 나타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영혼의 작용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었고 육신의 생각을 일컬어 영의 생각이 결여된 생각으로 프로네마를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영혼이 지식으로 활동을 하는데 하나는 "토스 가르 프로네마 사르코스" ‘육신의 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토 데 프로네마 수 퓨뉴마토" ‘영의 생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육신의 생각이라고 말할  어떤 정의는 없지만 자연적으로 사고하는 어떤 사유를 육신의 생각이라고 대충 인식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지 명확한 개념으로부터 사고를 이끌어내지 않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리고 영의 생각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여 사고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그것은 우리의 의식은 육신보다는  나은 영에 대하여 관심이 높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사고는 영의 생각 등장 시켜 생각을 두부류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처럼 사람의 생각에 관하여  가지로 대비하게  동기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율법과 관계하면서 언급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인 율법을 문자와 언어로 받았습니다. 그 문자와 언어에 새겨진 지식을 사람의 육체의 생각에 두려고 하지만 결코 육체는 그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 들였다 하더라도 의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왜곡하여 육체의 생각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은 육체의 생각으로는 결코 온전하게 해석 할 수 없습니다8:7). 이스라엘이라도 그들이 직접 받은 율법을 왜곡시키고 잘못 해석하여 결코 율법이 주는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유대교에 있을 때 매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지켜 행하였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율법은 자기가 지켜 행할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왜냐 율법은 선한 것인데7:12) 비해 자기는 매우 악하고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 같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해석하여야 바르게 해석할  있고,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두 가지로 구분 하는데 하나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지식과 또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육신의 지식인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육신의 지식은 하나님의 영의 조명을 받지 않은 자기 자신의 지식으로 지성에 기록되어 있는 지식을 말하고, 영의 지식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에 의해 생성한 자기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직관

 

개혁자 Calvin  “sensus deita-tis (sense of divinity)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자연적 직관Natural instinct) 의한  의식 (an awareness of divinity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Inst 1,3,1)

우리는 개혁자의  통찰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런 통찰에서 부터 우리의 사유를 더욱 넓힐  있었고, 개혁자가 제공하는  발판에 의해 지식이 형성되는 근원적 사실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생이 자연적 직관(Natural instinct)을 언급함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과 다른 개념으로 언급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서 그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을 자의식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인간 존재의 탁월성을 근거로부터 온 사상임에 분명하지만, 피조물이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언제나 신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탁월함 속에 숨겨져 있는 능력으로 직관을 설명하려는 것이지, 이 직관이 반드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해 버린 인간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왜곡된 신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Calvin 은 신 의식, 신 관념을 언급하면서 기독교 강요 1,4,1에서 종교의 씨앗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신 의식, 곧 신 관념은 인간 안에 심겨져 있는 의식인 반면, 또 다른 종교의 씨앗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져 있으나 이를 비교 관점으로 신 의식은 성장할 수 있으나, ‘종교의 씨앗은 자기의 의지로 성장시키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Calvin은 두 의식을 명확하게 구별하여 가르쳐 주고 있는데 신 관념은 인간의 자연적인 존재가 드러내는 의식을, 명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개념으로 배워서 얻은 지식으로 말미암은 의식이고, 종교의 씨앗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 심주신 하나님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심겨진 종교적 관념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아 나아가려는 기본적인 것이며  관념에 의해 허왕된 종교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만 실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심겨준 참된 종교의 씨앗을 소중히 키우고 성장시키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연적 직관이라는 의미는 인식의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개념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식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지식의 발생에 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소위 말하자면 직관이라는 의미는 현대 현상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E, Husserl , 직관의 외부에서 논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 자체로 논리적 구조의 성립을 찾으려 것으로부터 인간 자체가 자기 스스로 직관에 의해 지식을 발생하는 것이라는 주장하는데서 시작되었고,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는 인간의 지성에서 파악된다"고 합니다. 

앞에서 Jhon Lock 말하는 관념이 경험에 의해 지식을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든지, 플라톤의 IDEA 사상등으로 볼 때 지식은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점은 아무런 의의가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자연 발생적인 개념으로부터 진보된 모든 직관은 어떤 외부적인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주장은 지식의 통일성, 인식의 획일화, 동일한 코드의 언어 사용 등 많은 의문점들이 미해결 상태로 인정되고 있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관념에 일치되는 생각을 가지고 지식이 관념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더라도 사람이 지식을 발출함에 있어서 그 지식이 통일성을 가지고 상대방과 인식을 같이 한다는 점을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전혀 답을 말할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다양한 사람이 각자 지식을 발출함에 있어서 A 사람이 생성하여 발생한 지식과 B 사람이 발생한 지식이 동일한 코드를 직관으로부터 발출한다는 것을 어떤 생물학적인 호르몬인자가 동일한 지식의 코드를 발출하고 영혼의 지성이 그 코드에 지식을 부여한다는 증거나, 혹은 지적인 동물이 아닌 야수에게도 동일한 지식이 발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등을 증명할 어떤 기술도 발견할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시와 근대의 세대 간의 간격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생물학적인 원인에 의해 발출되는 지식코드는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과학적 증명으로 결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사람이 수많은 지식을 언어로 발출하여도  모든 지식  하나라도 이해가 불가능한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 지역적인 방언이 문제가 되지 않고, 지식의 진보가 방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지식이라도 지식이 언어로 발출되어지고 특별히 이를 문자로 표시함에 있어서 해석을 위해 다소간의 시간이 필할  언어라는 코드는 결코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피조물의 세계에서 이종異種간의 소통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의아할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동일한 코드를 통하여 지식이 언어로 표출되고,  지식은 사람에게만 소통이 가능한 코드라는 것이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있어서 자연적 직관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고 관념에 의한 지식의 발생은 더더욱 희망 사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 관념이 아니라 지식은 외부에서 사람에게 부어져야만 하고 사람이 지식을 발출하기 위해서 생성할  반드시 어떤 통일된 지식으로부터 조명을 받아 자기의 영혼의 지성이 모사되지 않으면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피조물이라는 한계를 넘어 스스로 위대함을 극대화하여 자존적 존재로부터 사고의 출발점으로 하여 모든 지식을 관념에서 비롯되어 생성한다는 사상을 가진 상태에서는 어떤 문제이든지 진리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고, Calvin 이 말한바 우리가 피조물이라 할 때 -의존적(God dependent fact)’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

 

영혼은 지성이 있고 그 지성에는 지식을 담은 그릇이 있습니다. 이 그릇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담아 주었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도록 조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이 형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 사람에게서 직접 작용하여 사람으로 활동하게 한다면 그 모든 행위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창조주의 지식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의 지식행위를 할 수 없을 분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지식이 직접 자기 안에서 작용되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에 온 세상과 사람을 지으실 것을 작정하실 때 지음을 받은 사람이 어떠한지 진지한 능력으로 이미 아셨고, 사람을 만들면 그 사람의 탁월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요구되게 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삼위 하나님의 한분이신 아들 하나님을  사람으로 보내시기로 작정하셨고,  아들을 통해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완전한 창조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지만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시간을 지으셨고,  시간 안에 피조물들을 두셨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창조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 일련의 과정이 창조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시간은 당신에게 적용되지 아니한 피조세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하루 이틀이라는 역사의 시간을 2천년 혹은 3천년으로 보내고 세대를 거처 진행되고 있으나 천년이  경점 같은 하나님에게는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지금 보시고 기뻐하시는 영단번의 세계의 지식으로 사유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와 같은 하나님의 지식을 영혼의 지성에 담을  없고 그것을 우리의 지성에 있는 다른 지식과 연산하거나 혹은 대입하여 사고할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가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은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신 지식과 코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이 사람의 전인에 감각되어져 표상으로 지성에 반영되고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심으로  지식에 대하여 사람이 인식할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함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이 기독교에는 생활화 되는 말씀으로 주었는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나 성경을 읽을   의미를 진리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있는 책이 아닙니다. 

높은 지식이 있고, 모든 것을 깨우쳐 알만한 식견을 가진 철학자라도, 언어의 통찰을 가진 문학가든지, 과학으로 능통한 실험의 전문가라도 성경의  구절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대로 이해할  있도록 해설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의 감정을 자기의 언어로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의미와 뜻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대로 발견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신 의미를 발견할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을 빌어 말씀하셨을 지라도  의미와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람의 자기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오류를 범할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은 문자와 소리의 내용은 같을 지라도  내포하는 코드가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없는 것입니다. 

 

지식의 발생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은 어떻게 발생하고 하나님의 지식과 구별되는가? 

사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감각된 모든 것을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면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지식이 표상을 반영하여 지성에 비추어 주고지성은 비추어주는 조명에 의해 생긴 상대로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됩니다. 인류의 최초의 사람 아담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진리를 가진 사람이었고 범죄하여 추방당하기 이전 에덴동산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에 의해 지혜를 드러내는 최고의 존재를 뽐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선하였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형상이 사람의 영혼에 있을 사람영혼의 지성에는 밝은조명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인식대상이라도 조명 해주는 지식에 의해 자기지식을 가질 있으므로 무지를 겪을 없었습니다 . 이를 단적으로 표시한 성경은 아담이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대서 확인 되었습니다

이때 이후 상당기간 아담에게는 두려움이 없었고자기의 부끄러움을 없었습니다칼빈은 그가 신적의상을 입고 있었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실지로 그는 벗엇으나 벗음이 그에게 부끄러움이라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지각할 었고그가 벗었다는 점이 그에게 부끄러움이라는 지식을 가진것은 결함을 인식한 왜곡된 지식의 결과인 것입니다아담은 범죄하기 이전 완전한 지식으로는 무지와 결함이 함의한 지식을 생성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그가 타락한 이후 곧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서 사라지고 영혼을 비추는 조명이 사라짐으로 어두움이 임했고 즉모든 인식의 대상에 대해 무지와 결함이 함의되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게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지식에 따라 스스로 행동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이것은 피조물이 반드시 의존되어야 하는 -의존사고를 갖지 않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사고로 행동하는 놀라운 사건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반드시 의존적이어야 할 사고로부터 이탈이고 결과적인 타락입니다.

여기에서 피조물인 사람이 -의존 사고를 가진 상태-의존 사고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지식을 생성하는 두 종류의 다른 지식을 보게 됩니다. 아담의 지성에서 -의존 사고를 의지하고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상기되어,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에 의해 순종해야 한다는 지식을 생성하였으나, -의존 사고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자기지식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생성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지식에 따라 자기지식을 굳건히 가진 반면,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는 지식에 자기를 내어준 결과 불순종의 지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식을 생성함에 있어서 반드시 대상에 대한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이 있어야 하고 이 지식은 먼저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었고, 타락하는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의 지식이 아니라 이미 생성하여 가진 자기지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사도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각각의 결론을 사망과 생명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곧 자기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신앙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던 신약시대에서는 우리의 지식이 기본적으로 타락에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고는 결코 진리를 바르게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가인과 같이 소경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졌지만 그 지식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지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고전 12:3)

결과적으로 사람과 지식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낸다면 그 지식의 근거가 무엇인가?

어거스틴이 말한바와 같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는 낸 지식이 사람으로 활동하게 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사람이 자기의 직관이나 혹은 관념으로부터 경험에 의하거나,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인하여 점차 진보적인 발전에 의해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식 그 자체는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사람에게 심겨져 지성에서 조명하여 사람의 지식으로 생성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물이나 상태 혹은 환경으로 인한 육체의 오감을 통해 감각을 가지면 그 감각을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하고, 반영된 그 지식을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조명해주어 지식을 생성하고, 타락 이후에는 이미 생성한 자기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시므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관념이나 경험, 혹은 자연적인 직관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지식의 조명으로 생성되고,  지식이 이미 생성되었다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영혼에서 사라지고, 이미 생성하여 가진 자기지식으로 인식의 대상들에 관한 지식을 생성함으로 지식은 선재하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생성하여 발생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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