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
지식과 언어
철학자들이나 인류학자, 다윈론자들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언어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 것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 이상으로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지각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에 언어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철학자들은 언어가 아니면 다른 그 어떤 것으로든지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자기의 의사를 의사전달을 하며 도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이 언어의 기능을 가진것은 생물체로서 최선의 선택적 작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삶의 환경이 다른 양태를 가진다면 언어가 아닌 전혀 다른 기능적 작용에 의해 필연적으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탁월성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완전한 존재로 생각하는 자만입니다.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자연적이나 스스로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자기 스스로 자연적인 생태에서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는데 있어서는 지식에 의존하는 기능적인 작용에 의해 자기 활동을 하는 생물체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실지로 사람은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완전함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 자기안에서 자기가 활동할 수 있도록 자기 판단을 가진다는 점에서 완전합니다. 그럼에도 자기안에 가진 지식의 한계 안에서만 가능한 완전한 존재입니다. 만약 높은 차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높은 판단으로 활동할 수 있고 낮은 차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지식에 맞는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자기안에 있는 지식을 뛰어넘은 차원의 행위는 할 수 없는 지식에 대해서는 재한된 존재입니다.
그럼 사람을 지적인 활동을 하게하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 발생되게하고 그 지식대로 활동할 수 있는가?
사람은 스스로 자기지식을 전혀 생성할 수 없고 의존적입니다.
의존적이라는 말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안에 들어온 지식을 시작으로 자기지식을 가질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지식이 비춰지지 않고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스스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무정하거나 우연한 사고에 의해 발생한 모글리 현상(Feral Chirld)에서 충분히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지식이 부여되지 않으면 사람은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어떤 상태에서든이 부여된 지식을 통해서만 다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구조적 기능에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원시인이든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이든 성경 밖에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지식이라는 것을 벌써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처음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가지게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두말할 것도 없이 지식을 가진 존재가 사람에게 지식을 부여하는것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이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최초 지식은 부여받았고, 그 지식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6)"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부어지자 사람의 영혼은 비로서 지적인 기능작용이 일어나 자기안에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눈을 열고 세상을 보고 일어나 자기안에 감각과 지적인 인식에 의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자기가 생성한 지식에 의해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비로서 완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완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적으로 사회적인 존재가 되도록 자기 안에서 지식과 언어가 생겨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고, 사람의 어떤 부분이 언어 기능을 유발하도록 생겼는지 구체적인 부분을 지목하려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부분은 성대와 입모양입니다.
구조상 성대는 소리를 내는 부분이고 입의 구조는 음식물을 잘게 부숴 삼킬 수 있게 하는 치아와 음식의 맛을 느끼는 감각이 있는 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구조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 공명을 이루게 하고 소리에 따라 이와 혀 혹은 입술의 움직임으로 성대의 소리를 조절하고 발음을 구사함으로 언어를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체는 완벽하게 소리를 내는 기능을 가진 부분에서 잘 조절함으로 언어를 구사합니다. 하지만 지식을 함의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만을 발하는 것은 앵무새처럼 의미 없이 소리만 내는 기능입니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면서 언어를 구사하는데 그 소리가 뜻을 전달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만 소리를 발하는 것 뿐 앵무새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짐승들도 같은 종끼리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고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며 그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언어를 구사합니다. 위험을 감지하면 동료들에게 위험이라는 지식을 알리고 신속하게 몸을 숨기며, 먹을 것을 찾으면 함께 나눠 먹기 위해 의사를 전달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사람과 같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구조적으로 다른 의사소통을 위한 감각적인 표시로 전달하는 것이지 사람과 같이 영혼을 가지고 지식활동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언어는 지식을 포함한 의사전달의 기능이 있고, 상대방과 지식을 함께 공유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진화론자들과 사람
다윈론자들은 사람과 짐승이 생물체로서 동일하고 지식활동을 하고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지식으로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사람과 구별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생물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면서 환경에 따라 지식능력과 언어 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 되었으며, 집단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합리적으로 계층을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며,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자연히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언어를 사용하면서 후손들에게 언어를 가르쳐 습득할 수 있게하며, 문화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화의 과정은 수천년에 이르러 조금씩 변화되어 동물에서 사람으로 진화하고, 사회적인 환경을 통해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각 종의 짐승들은 자기 종들과의 환경에서 사회적인 구성을 이루고 살며 변화하고, 또 다른 사람과 같은 종이 되었다는 증거들 있거나, 사람과 같은 동일한 언어로 발전된 또 다른 지적 형태의 언어를 구사해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였다고 한다면, 각종의 짐승들은 다른 존재의 중간적인 상태의 진화 과정에 있는 어떤 존재가 탄생 되어야 하고, 지적 능력에 있어서도 중간적인 상태와 완전한 상태가 동시적으로 제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과 같이 생활한 개와 소, 양 돼지 같은 짐승들의 지적인 변화는 물론이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짐승들에게서 지적 형태의 진화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짐승들이 약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식활동을 한다고 인정한다면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지식들을 습득할 수 도 있어야 하며, 그로 말미암은 진보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언어와 지식이 어떻게 사람에게만 생성될 수 있을까? 하는 점도 의문입니다.
짐승도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두개골, 소리를 발할 수 있는 성대가 있으며, 앵무새는 불과 몇 마디의 사람 언어를 정확하게 따라할 수 있고 충분히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것과 약간의 지적 능력을 가졌으나, 의미를 함의한 언어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한 설명들의 근거들이 부족합니다.
왜 동일한 짐승으로 시작한 사람에게만 환경의 영향으로 지적인 지능을 가진 반면 다른 짐승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다윈론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돌고래 같은 종들의 지적인 능력을 예를 들면서 이들도 수 억년이 지나면 반드시 사람과 같은 지적인 지능을 가지게 될 것이며 머지않아 앵무새도 사람과 같은 문화 활동을 하고, 뜻을 지닌 말을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물론 이종간의 의사 소통은 불가능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질수 있을 것이라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미래는 매우 염려스럽고 암담하며 두려운 날입니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투쟁이 있어 왔는지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수십억년 전에 다른 짐승의 종이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그들을 전멸시키고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각종의 동물들이 나름대로 진화하여 새로운 종의 지적능력을 소유한 사회적 존재가 될 것이며 나아가 새로운 종과의 끊임없는 생존경쟁의 투쟁이 일어나고 수 없는 종이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더 나은 존재로 진화 하여 어떤 종의 짐승들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적 능력을 지니고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한다고 해도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결코 추월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지 모릅니다. 인간이 정복하지 않은 미지의 땅에서 진화한 새로운 사회는 인류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짐승들이 현재 까지는 낮은 지능지수로 사람을 흉내내는 말을 할 수밖에 없으나 곧 이어 사람과 같은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은 지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정하건데 앵무새가 지금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2억년이 지난 후에도 앵무새는 앵무새 일뿐 사람과 같이 말을 결코 할 수 없으며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가 있어서 앵무새를 교육한다 해도 결코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앵무새에게 영혼을 넣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결코 영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단순한 기능을 하는 것은 짐승들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든 짐승들과 구별되는 것은 언어에 지식을 포함시켜 전달되게 하고 육체로부터 얻은 감성을 영혼이 지성에 새겨두는 등 비 생물적 작용으로 사람의 능력을 향상케 하고, 한 가지 언어를 지식으로 변환, 조합, 덧입힘, 산술, 등으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며 깊은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영혼의 이성과 오성으로 결코 육체가 할 수 없는 영혼의 활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은 자신이 사람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신 영혼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 영혼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이유를 가졌던 불행한 사실이 인류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적시된 논리를 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알고 자란 사람으로서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그가 영혼의 본유적인 지식으로 영혼이 활동하지 못하고 육체의 감성으로만 얻은 지식으로만 영혼이 활동함으로 모든 사람이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이해했더라면 세상 사람들을 진화론에 빠지게 하는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지식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영혼을 활동케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유적인 지식이 상실된 상태, 둘째 그들이 지식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육체의 오감의 감성으로 얻은 지식뿐이라는 것, 셋째 그들의 영혼은 부모로부터 본유적 지식을 상실된 상태로 유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된 영혼이 육체의 오감으로 감성을 얻지 못하면 결코 영혼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들이 움직이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1) 본유적 지식
그러면 여기에서 본유적 지식에 관하여 다시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지으셨습니다.
육체는 생물적인 부분이며 영혼은 생물 범위 이상 실체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실체를 결합하시므로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을 일컬어 “생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체가 생물적 부분이라고 한다면 영혼은 생물적인 감각으로 결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실체로서 천사와 같은 비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이 존재는 실체함으로 생명을 지닐 수 있으며 존재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는데 사람이 육체와 영혼을 결합할 때 비로서 생명으로 존재하게 되고 존재가 시작되었을 때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모든 피조물과 심지어 천사와도 구별되게 지으셨습니다.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에 지성이 있으며, 지성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고, 이 지식을 본유적 지식이라 하고 최초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지식이었고, 사람이 타락 후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짐으로 이 지식을 잃게 되었습니다. 최초 사람의 영혼에 있는 본유적 지식을 상실하게 되자 최초 사람으로부터 탄생한 모든 사람의 영혼에는 본유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타락 후 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은 있으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에 지식이 깡그리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 본유적 지식의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창조 기사를 근거로 살펴보면 1, 하나님에 관한 지식, 2, 하나님에 대하여 관계하는 지식, 3, 창조에 관한 지식, 4, 사람 자신에 관한 지식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본래 사람의 영혼은 지식으로 활동의 동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식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상실함으로 영혼은 활동하지 못하는 죽은 상태와 같이 된 것입니다. 죽은 상태라는 것은 영혼에 생명이 끊겨진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불멸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생명이 끊어져 죽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이 활동하고 영혼이 존재하며 영혼이 육체로 하여금 살도록 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육체가 영혼의 존재하는 활동을 느끼지 못하는, 곧 영혼에 대한 감각을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을 영혼이 죽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본유적 지식과 언어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지으시고 영혼을 부여하셨고 영혼에 하나님 형상이 있으며, 형상 안에 있는 지성에 지식을 부여 된 상태로 사람의 육체와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은 지성에 있는 지식으로 활동하는데, 영혼이 활동함으로 이성이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육체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온 감성은 본유적 지식으로 판단하고 인식합니다. 손으로 만지고 피부에 닿아서 느끼는 감성에 의해 사물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기능도 역시 본유적 지식에 의한 영혼 활동인 이성의 기능입니다. 이처럼 영혼이 활동하여 지식을 지녔을 때 이것을 외부로 표현하는 방법이 언어입니다. 언어가 없다면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지식이 있으나 그것을 사물이라는 표현방법은 육체의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본유적 지식에 의해 영혼의 활동으로 이성으로 판단하고 분석하는 기능을 할지라도 그 지식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인식 표현이 필요합니다. 모든 짐승들이 육체로 감각 기능을 지녔을지라도 영혼이 없기 때문에 이성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느낀 감성을 표현 하는 것이 아주 제한적입니다. 사물에 대한 감성이 육체의 유익에 한할 뿐 그 지식을 표현하는 것이 생존에 한한 극히 적음 부분만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사물에 대해서 자기 밖으로 지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놀라운 기능을 부여 받았는데 그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인식한 사물을 기호화 하고 그 기호를 소리로 표현하며 그 표현을 지식화 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이런 방법은 후대에 이르러 발전한 것이지만 최초 언어는 소리만 있었고 본유적 지식은 소리로 표현이 가능했으며 소리에 의해 영혼과 육체의 활동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유적 지식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감성의 지식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기능이며 영혼이 살아있는 활동하게 하는 동인이고 언어는 영혼활동의 표현입니다.
과일을 보는 것은 감성이고, 과일이라고 아는 것은 본유적 지식의 이성 작용이며 영혼의 활동입니다. 영혼은 과일을 본 육체의 감성을 가지게 되자 본유적 지식은 그 과일의 정체를 분석하고 판단하여 어떤 유익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며 모양과 형태 가치까지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창조의 지식에 따라 인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는 하는데 이 모든 이성 작용에 의해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본유적 지식으로 영혼이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만약 영혼이 없다면 과일에 관한 정보를 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짐승은 사물에 관한 정보를 이용해 어떤 문화적인 창조적인 인식 기능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오직 생존과 생식에 관계된 판단으로 그것을 먹을 것인가 먹지 말 것인가 판단하기 위해 냄새를 맡아 보고 의식적으로 결정을 할 기능이 육체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여된 지식과 일치한 언어를 사람에게 들려주심으로 사람은 그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이는 마치 영아가 엄마로부터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교육을 통하여 언어를 베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런 언어를 가르치실 필요가 없다면 굳이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언어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영혼을 주실 때 본유적 지식 안에 포함해 주심으로 자연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도록 하시고 그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시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1)을 별도로 명하셨고 그 언약에는 심판을 두셨고 그것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사람이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유적 지식과 언어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행위언약이 본유적 지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별도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언어로 사람에게 부여된 지식을 담은 하나님 형상에 새겨 넣은 것이 아닌 육체의 오감 가운데 귀로 듣고 영혼의 지성 활동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본유적 지식에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심과 같은 물질적인 부분을 지으시는 창조과정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심으로 대화하신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피조물 자체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지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사람에게 의견을 주실 수 있고, 말씀으로 뜻을 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communication이 가능하도록 하심으로, 지으심에 속한 틀에 박힌 결과를 도출하도록 프로그램 된 제작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 피조물이 스스로 영혼 활동으로 의지를 일으켜 육체의 행동으로 반응하게 함으로 완전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영혼을 흙집에 불어 넣으셨으나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분여가 아닌 지으심을 분명히 밝히고 사람은 분명히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결코 자만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타나심으로만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일부가 사람에게 분여된 것이 분명할 것임을 부인할 수 없어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까지도 하나님의 아주 작은 한 부분으로 분여 된 것이라고 말하는 망발을 일삼는 미친 생각까지 서슴치 않은 사람이 있으나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분여가 아닌 지음 받은 후 부여된 피조물임을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와 영혼을 결힙하여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완전함과 뛰어난 능력을 보셨을 뿐만 아니라 미리아신바 대로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완전하게 작동을 하였고 에덴동산에 이끌려 와서도 흠이 없이 완전함을 보였습니다. 에덴동산에 이끌린 사람이 지음을 받은 후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을 것이지만, 그 시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성경에 드러난바 없으나 에덴동산에 이끌려서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을 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를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친구와 같이 대하셨습니다. 아랫사람에게 당부하시듯이 명령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 명령에 응하도록 하셨을 때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결과를 보시려고 시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대하신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에 대한 반응은 완전히 사람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떻게 반응 할 것인지 영혼의 활동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의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고귀하게 지음을 받았습니까?
어떤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으며, 말씀을 귀로 듣고 영혼으로 이해하며 뜻을 정하여 순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명령하면 곧바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그램화 되어 감성이 없어 느낌도 없고 반응도 없이 무표정한 로봇 같은 사람이라면 그 존재가 생명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재미없고 단순하며 만든 기쁨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기계처럼 억지로 반응을 하도록 프로그램 된 존재가 아니고 완전히 스스로 감정을 만들고 움직임을 만들어 각각 영혼의 반응에 따라 마음이 의지를 드러내고 육체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 나왔고 존재하였으며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말씀을 내실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아무도 말씀을 낼 수 없고 아담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으로 하나님처럼 말을 할 수 있게 하셨으며 사람과 대화하시며 더욱 즐거워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관계하시고 말씀하심으로 언어를 주셨습니다. 언어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고 하나님의 의지가 있으며 능력이 있고 생명이며 피조물로 살고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원천입니다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의 의미가 피조물에게 생명력이 있게 나타나고 미동도 없는 잔잔한 호수위로 스쳐 물을 흔들거리게 하며, 햇빛을 받아 푸르른 잎으로 아름답게 옷을 감싸 입고 한껏 폼을 잡고 있는 나무 흔들거리게 하며, 따스한 온기나 한기를 바다 위에서 대지위로 나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움직이며 따뜻하고 차가운 감정을 일으키며,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 편안함과 고통스러움 쉬지 않고 느끼게 하는 힘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에 의해 움직이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본유적 지식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며 반응하며, 의지를 발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후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뭐라 말씀하심으로 소리를 발하여 언어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 언어로 인하여 아담의 영혼은 활발하게 작용을 시작하여 육체의 오감으로 들어온 감성에 사로잡힌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사람은 움직임을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다 완성된 완전한 작품에 활력이 넘치는 배터리를 삽입하고 작동하도록 ON 버튼을 누른 상태와 같이 “움직이라”명령하심으로 사람이 활동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일어나라’는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새 생명에게 말씀하심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으니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이었을 것이므로 그에 합당한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성경의 창조 기사에서 찾을 수 없어서 “움직이라”고 하셨을 것으로 생각할 뿐 이 말씀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며, 아무튼 뭐라 말씀을 하셨든지 말씀하심으로 첫 사람이 활동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께서 이미 죽어 무덤에 장사지낸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1). 이 역사를 행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말씀을 하셨으나 그들이 믿지 않으심을 인하여 많이 아파하셨습니다(요11:23-24).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대답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믿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없는 안타까움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쉬지 않으셨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이셨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라고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가히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지만, 마르다와 주위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글을 기록하고 있는 나 자신도 40여년이 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 관한 서적들과 어거스틴, 존오웬, 조나단 에드워드, 칼빈,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카이퍼, 이루 이름을 나열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고, 찰스 스펄젼, 로이든 존스 등의 설교집을 읽었으나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본질과 전혀 다른 지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설교를 들었고 책들을 읽었으며 신앙의 중심이 되는 신경들을 연구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없었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 전혀 몰랐었습니다. 정통 개혁주의 선생님들의 신학이 생명이 없는 말씀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아주 자주 언급되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발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는데 그 음성이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하였고.3) 그 말씀 곧 생명임을 보고 알게 되었으며, 사람을 살아있는 생령으로 움직이게 함으로 모든 사람은 실지로 말씀의 힘으로 질서 있게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4) 그래서 과감하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에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