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본유지식의 상실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지음을 받았고, 각각의 인격적인 기능이 결합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지으심을 받았으므로, 객체에 대한 인식은 각각의 기능이 조화로운 역할에 의합니다. 육체는 감성을 영혼은 지성의 역할을 담담하여 전인의 대표기관인 마음에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전인으로 인식하는 각각의 역할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객체인 말씀에 대하여, 육체는 감각하고 감각한 객체를 표상화하여 지성에 반영하는 감성의 역할을, 영혼은 반영 받은 표상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을 전인의 대표기관인 마음에 반영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개의 실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나 이중 어느 하나에서 인식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하자면 육체가 감각했다거나,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이 생성되어 지각을 가졌다고 해서 인식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육체의 감각이나 영혼의 지성 작용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전인의 작용입다. 이와 같은 각각의 역할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드러나며, 꾸며내거나 조직한 지식 체계가 아니라 사람의 구조와 기능적 역할에 관한 분명한 설명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객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지성의 역할은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갖도록 감성에 반영하고 인식되도록 전인에 반영하는데,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사람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생성하지 못한 사람은 지적인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지적인 행동이란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을 감성에 보내 지각하고 그 지각된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전인에서 인식하여 육체로 행동하는 것을 지적 행동이라고 하고, 이런 지적인 행동이 아닌것을 감각적 행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성을 가지지 않은 짐승들의 행동이고, 사람들을 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이 바로 지적행동을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이정표에서 " 인간은 최근류에서 보자면 동물이로되 다양한 종의 동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성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이성을 종차로 하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이 휴머니즘에 전제된 인간의 가장 보편적 본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영과 육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인 관점으로 자연적 산물로 보는 관점과 일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결코 자동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은 항상 피조물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기 때문에 행동하도록 원인이 제공되어져야만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행동은 피조된 상태와는 다른 창조자와의 관계성으로부터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게하는 지식인데, 이 지식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는 존재이도록 말씀을 보내 사람에게 주십니다.
보냄을 받은 말씀은 지식이 되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비로서 행동하게 되는데, 지성은 보내신 말씀을 받음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첫 말씀을 하심으로 사람에게 보내시고, 육체가 그 말씀을 감각하여 지성에 반영되었을 때 사람은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성은 생명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대한 자기지식을 생성함으로 생존하는 존재로서 삶이 시작된 것이고, 생성된 지식을 감성으로부터 지각하여 영혼이 말씀에 대한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게 되는데 사람과 하나님과의 존재적 차이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식할 수 없고, 피조물로서 사람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말씀을 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성자 하나님으로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과 관계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구별하자면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곧 성자 하나님이 되시고 그 말씀의 말씀이 곧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말씀이고 사람은 이 말씀에 대하여 자기지식을 생성하여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에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그 때 창조시를 말하셨으므로 그 말씀은 이미 영원 전에 말씀하셨고 영원까지 계십니다. 사도는 이를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요한1서 1장1절)”라고 서신을 기록하였고, 그 의미는 “영원 전에 하나님 안에 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1)” 칭한 것입니다.
영원에 계신 말씀이 어느 날 어느 시에 말씀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세계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영원한 세계에 계시던 분이시고, 시간 세계에 보냄을 받으셨으며, 피조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사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깨우침을 얻고서야, 보냄을 받으신 만물을 지으신 말씀께서 지으신 그 목적을 다이루고 만물과 함께 영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간 세계 안에서는 시간에 맞는 개념의 존재 양식을 따라 오늘과 내일, 모래와 과거, 현재, 미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에 적용되는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지식이 언어로 드러내지지만 사람이 말하는 언어는 흘러가는 시간에 붙여 흐르도록 합니다.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이 지각되어 마음에 반영하면 시간의 흐름에 적용되어 한음절 마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말하여 집니다. 앞에 말한 음절은 뒤에 오는 음절과 결코 같은 시간에 말하여 질 수 없습니다. 이 시간이 중단 되면 말하는 도중에 어느 시점에 이르러 말은 더 이상 진행 되어지지 않게 되고, 모든 피조세계가 정지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지 상태에서 활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상태로 시간이 멈춘다면 모든 것이 멈추고 생명활동이 정지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고 과거로 돌이켜 되돌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지되지 않고 끝없이 나아가는 정지되지 않은 시간의 연속상태를 일컬어 영원이라 하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영원과 시간을 구별하여 지으신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활동을 시간이라는 양태에 있게 하셨고, 시간으로 생명을 드러나게 하셨고, 하나님은 영원에 거하면서 모든 피조물이 시간에 매여 있는 것처럼 영원에 매여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2) 그러므로 영원은 이런 정지하거나 흐르는 것도 아니고 시간의 존재양태에 있는 사람의 인식 구조로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개념도 지음을 받은 존재하는 양식이라면, 사람에게 보내어진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말하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과 영원을 초월하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인 사람이 직접 인식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내셨고 그 형상안에 사람에게 필요한 완전한 지식을 가진 본유지식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조명하여 사람이 인식할 수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유지식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영원도 지으셨고 시간도 지으셨습니다.
영원의 양태는 사람의 영혼의 처소이고, 시간의 양태는 사람의 육체가 거하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과 시간의 두 양태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육체와 영혼의 소통이 단절되어 영혼의 존재에 관한 감각을 가지지 못함으로 영원의 감각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사람들은 영원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불멸하는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육체의 죽음에 이를때 그 영혼은 영원의 양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신학은 종종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영원의 세계에 존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양식으로 볼때 영원은 초월적 혹은 초자연적인 양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인식하려고 하는 경향일 뿐,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고 창조주 이시기 때문에, 본채이신 자신을 피조 세계에 들어오시도록 하시는 것은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할지라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채이신 하나님이 시간이나 영원의 피조세계에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이 전지전능성을 훼손하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자신을 넣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간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원하셨고, 지식을 주셔서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거나 인식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존재론적인 구별을 인식한다면 무한한 영광을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시간이라는 피조된 환경에 의지하여 존재함과 같이 영원의 세계에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무엇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존재하시도록 장소와 공간을 제공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시도록 할 수 있는 어떤 양식이나 양태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스스로 자충족적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분이 피조의 세계에 영원과 시간이라는 양태의 세계를 지으시고 존재하는 피조물이 피조의 양태안에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존재에 있어서 완전히 구별됩니다. 영원의 공간에나 시간의 공간에 하나님의 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 지식의 개념으로 존재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고 전인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영원과 시간에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완성된 피조세계에 보내시지만, 창조되지 아니한 영원과 시간이 있게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이고 말씀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사람 인식의 구조는 이것을 하나님을 시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시간의 순서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것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말씀하심으로 영원과 시간을 지으셨고 만물이 존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근원인 말씀도 하나님이시고, 말씀에 함의된 지식도 하나님이며, 존재하게 하도록 하나님의 의식에서 의지로 드러낸 모든 것은 곧 하나님입니다. 다만 이와 같이 하나님이 기능적으로 각기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으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것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내셨다고 말해야만이 인식이 가능한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의 의식으로는 하나님을 마치 사람처럼 시간이나 영원의 공간에 거하셔서 말씀을 내시는 것으로 밖에 인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을 내셔서 영원과 시간의 세계인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민하고 깨달은 것을 말하였습니다.
“시간적 음성이 생겨난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이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 같은 음성은 절대 존재할 수 없나이다. 하오면 시간적 음성이 발하여질 물질세계를 만드시는데 사용하신 당신의 말씀은 대체 어떠한 말씀입니까?, (고백록 11권 6)”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거스틴은 물질세계를 만드시는데 사용하신 말씀을 요한 복음 1장 1절의 말씀에서 깨달았다고 하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하신 말씀은 지으신 말씀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말씀이고 “이 말씀이 곧 영원하신 말씀이며,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영원토록 말하여 질 수 있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3). 그것을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이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 한 소절은 한 음절이 있고 다음 음절이 있으며 다음절 다음은 다음음절이 있어 순서에 따라 울리고 결국은 마지막 음절이 울린 다음 침묵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시간적이나 먼저 들린 음절은 있다가 사라졌고 다음 음절도 또한 있다가 사라진 것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시간은 생성되면 소멸이 있고, 새로운 생성이 있으면 그것도 소멸이 있는 것으로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에 속한 모든 피조물은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세계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 속에 지음을 받은 것이라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스스로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영원에서 보냄을 받으셨고, 받으신 그대로 오셨으니 시간에 속한 분이 아닌 영원에 속하신 분이 시간 속에 계시는 것이고 곧 말씀이셨고 사람의 생명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이때부터 피조물과 함께 거하셨으며 범죄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결국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사도가 깨달은 것과 같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골 1:16), 라고 말함으로 세상의 모든 만물은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음을 받았으며 시간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있는 만물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존재로 지으시고 영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말씀이신 생명을 주셨습니다.
시간세계인 피조세계에는 만물이 시간에 매여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것을 반복하지만 1회로 존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생성 되었다가 소멸되는 시간의 반복상태에 있고 육체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영혼은 불멸하여 죽을 수 없으나 육체는 시간에 매여 있으므로 생성과 소멸의 원칙에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있다가 없어지는 시간 안에 재한 된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특별하게 말씀을 사람에게 보내 말씀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없어지고 하는 반복적인 생성과 소멸이 있는 시간 안에 있는 존재인 사람은 말씀에 의해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상 사람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속성인 허무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속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영원한 속성인 말씀에 지배를 온전히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온전히 지배를 받는 속성은 시간에 속한 속성이 영원에 속한 속성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은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지음을 받은 본유적 속성에 의해 땅에 속한 속성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새롭게 되는 것: “육체의 오감에 의해 습득한 지식이 온전히 본유적 속성에 의해 하늘에 속한 속성으로 이해된 지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을 지으시고 이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생명을 부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생명은 말씀이었, 이 말씀이 사람들의 생명이었으며, 특별히 사람이 영원히 존재하도록 행위언약을 주시고 아담의 본유적 지식에 이해되고 잘 유지 되어 허무로 돌아가는 속성을 씻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것”(엡 4:13), 마침내 육체의 오감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 하나님 형상에 있는 본유적 지식과 말씀에 의해 온전한 지식이 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이 되는 것,(엡4:24)”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행위언약은 말씀에 부여 하셨으나 영혼의 지성에 곧 바로 전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의 감각인 귀를 통해 영혼의 지성으로 반영되어 지성에서 사람 자기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함으로 인식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본유적 지식에 두시지 않고 별도로 육체에 부으시는 것은 말씀을 육체에 두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발전소에서 얻어진 전기의 힘이 전선을 따라 어떤 목적지에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말씀으로부터 말씀되어져 사람의 육체의 귀에 들려지고 귀에서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지성 안에 있는 본유적 지식으로 이해하고 판단된 다음 그 결과를 지식으로 지성에 새기고, 마음에 반영하여 의지를 일으키고 의지는 육체로 하여금 행동 유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잡고 있으면 그 말씀의 내용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 말씀은 붙잡은 동안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있어 말씀에 따른 조건에 이를 때마다 영혼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 안에서는 이와 같이 복잡한 과정이 질서롭게 움직여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만약 이 질서가 어긋나고 삐뚤어진다면 사람은 혼란을 일으키고 올바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혼의 지성에 지식도 두셨고, 영혼의 활동에 의한 결과들이 마음에 반영되고 마음은 의지를 일으키도록 하셨으며, 육체는 감성을 가지고 사람으로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셨으나, 이 모든것이 질서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동인은 바로 생명이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셨기 때문에 사도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고, 밧모섬 환상중 하나님의 성에서 본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요한계시록 19:13절) 요한일서 5: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혼의 지성에 있는 본유적 지식과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 속에 보내신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언어를 통해 사람이 행동하고 움직이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보내신 말씀의 말씀, 사람의 영혼 속에 새겨주신 본유적 지식, 이 지식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활동, 육체의 감성을 느끼는 자존감등은 완전한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에게 사단이 다가와 유혹하였고 그 유혹에 넘어져 당하였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은 일처럼 보여집니다. 완전한 존재가 드러낸 비 질서로운 행동의 결과를 나타낸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단은 사람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했고, 사람은 하나님을 스스로 떠나 범죄 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 함에 이르는 길에 있는 사람을 핸들을 조작하여 바른 길을 가도록 조작하시지 않으셨으며, 그들의 가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여 주시지 않으시고 심판하셔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시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고는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지 지켜보고만 계시다가 그들이 범죄 함에 이르자 마침내 심판하셨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손길이 범죄를 막으셨거나 혹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막으시고 조작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죄에 빠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 하나님 창조에 조금도 불완전하심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이라는 양태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게 되는 한 생성과 소멸이 있습니다.5)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불멸인 영혼과 소멸될 육체가 결합하여 사람이 되고 생령이 되었으므로 영혼은 불멸의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생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흙으로 지은 육체는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에 이르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여 말씀을 육체에 부으셔서 생명을 주셨고, 말씀으로 행위언약을 주셔서 육체의 귀로 듣게 하시고 감각을 얻어 영혼의 지성에 있는 본유의 지식으로 이해되어 마음에 반영하여 말씀대로 의지를 일으키게 하여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이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사도요한이 말한바에 따라 예수님이신 말씀이 사람에게 있으면 생명이 있고, 말씀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고 요한1서 5:12 에 말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행위언약도 포한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언약이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말씀에 따라 지켜 살면 죽음이 결코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단의 미혹을 당하여 행위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육체와 영혼에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서 떠남으로 생명이 사라지고 육체에게 필연적인 소멸만 남게 됨으로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 결과로 인해 영혼에 속한 하나님의 형상과 본유적 지식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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