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아브라함의 믿음2-2 ( 창 22:8)

생명있는 신앙 2012. 12. 31. 15:37

아브라함의 믿음 22, ( 22:8)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지난 주 우리는 본문의 내용에서의 진리의 말씀인 설명을 듣지 못하고 본문을 진리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전제된 교리적 지식에서의 생명과 죽음에 관한 긴 설명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제사와 제물에 관한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으로 
본문을 설명 드렸으면 합니다.
그래서 본문이 의미하는 제사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생식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얻은 백세에 낳은 아들이삭입니다.
사래는 여자로서 생식할 능력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사람의 정욕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노령의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래의 정욕을 이용해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적인 일이나 신비적인 형태의 사건들은 종종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이나 신비적인 종교에 치우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하여사람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가 안되는 기적 사건들을 자기에게 적용시켜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특별한 간섭을 가지시고 관계를 맺으시거나 특별한 계시는 주는 관계라고 꾸며냅니다. 혹자는 이런 사건에서 자기 최면의 상태로 깊이 빠져 순수한 인간적 상태를 초월한 지나친 신과의 직접적인 계시로 까지 적용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단적 사기집단으로 이끌어가고, 성경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여 더욱 사단의 자식들이 되게 하는 혼란을 자초하거나, 마치 자기의 행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계시의 주체자라고 까지 선언하여 결국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며 범죄행위의 집단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삭의 출생이 아브라함과 사래의 정욕을 도구로 하여 탄생하게 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건으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가능한 일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적용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이삭은 탄생이 생리적인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와 같이 메시아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지나친 모형론을 주장하거나, 예표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물론 이삭의 출생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 과 같은 의미들을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삶을 볼 때 메시아적인 삶을 살았거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삶을 살지 않은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표나 상징을 의미하는 해석들은 얼마든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나친 예표나 상징으로의 적용만 주의하여 설명한다면 오히려 진리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순종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2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백세에 낳은 아들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중입니다
.
저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제단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설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사실이 단순히 예표적인 것만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의 열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한 타락의 상태에서 정욕을 일으켜 우리를 낳았고, 그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욕이 우리는 존재하게 하였고, 존재한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욕의 열매,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
우리의 신분은 죄의 열매입니다
.
이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작정과는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국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은 사람이 태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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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날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으나, 우리의 탄생에 관하여 무지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에는 원하지 않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들의 탄생을 허락하셨고 급기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보내어질 또 한가지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고백하시기를 내게 주신자들( 17:9)”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조건을 알 수 있습니다
.
일단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사람이되 우리와 같이 죄의 열매로 태어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죄에 의한 정욕에 의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 후 정욕으로 말미암아 가인을 낳은 것으로 충분히 보여주었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담의 후예가 가인과 아벨과 같이 필연적으로 죄의 열매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되 사람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인 성령에 의해 잉태하도록 하셨고, 이를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오신 것입니다
.
예수님의 모든 인간의 모습과 동일하게 사람으로 오셨으되, 죄의 열매가 아닌 하나님과 성령의 보내심으로 오셨고, 사람과 동일한 성정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불순종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원죄가 없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과 같으면서 우리와 구별되고 사람이시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셨고, 모든 지식에 있어서 사람과 구별되며,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참 아들이셨습니다
.
이것이 보냄을 받은 자의 조건입니다
.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탄생은 어머니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여인의 상태에서 잉태했다는 점에서, 보냄을 받은 자의 조건으로서 상징에 있어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브라함과 사라의 정욕에 의해 이삭이 탄생하였습니다. 사라의 신체적 조건에 의하면 불가능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가 이삭을 잉태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탄생은 기적이 될 수 있으나 예수님의 탄생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은 이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더 큰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심과 자기와의 관계를 견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비롯한 자기의 부족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이끌어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갈대아 우르에 거할 때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그 말씀을 굳게 의지하고, 순종하며 따랐습니다. 그렇게 40여년 동안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았고 약속대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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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을 인도하시고,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계셨으며, 위험에서 건져 주시고, 당신의 계획에 따라 삶을 주관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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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세가 되어 사라의 나이 많아 늙고 아기를 더 이상 생산 할 수 없는데, 기적적으로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게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대로 이어갈 자기의 후손들과 관계를 가지실 한 부족을 심으신 것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
아브라함은 종교적으로 확실한 하나님의 부족이 이 땅 위에 심으시는 그 계획의 선택자가 되었고, 그 하나님은 다른 종교보다 더 확실한 존재를 자신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본문에서 드러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제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이삭은 자기를 태우게 될 나무를 등에 지고 아버지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제단을 준비하시고 친히 제물을 데리고 단으로 나아가시는 장면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서 생명 없는 날들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영혼의 지성에 생생하게 새겨졌고, 그 말씀이 아브라함을 생명 있는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 말씀의 빛에 의해 아브라함의 인생은 달라졌고 생명 없는 사람이 생명 있는 사람이 되어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위기 때나, 필요시 마다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고, 반복된 하나님과의 만남은 새 사람이 점점 더 성장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말씀마다 영혼의 지성에 새겨졌고, 새겨진 말씀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고, 예전에 생명 없는 삶에서 가진 자기지식들은 아브라함의 영혼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속 사람은 각기 다른 두 지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타락으로 말미암은 불순종으로 죽은 사람의 지식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새겨주신 생명의 말씀 지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상태를 사도 바울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로마서 7 22~23)”라고 설명한 것처럼 타락으로 말미암은 죽은 옛 사람과, 생명의 말씀이 심겨져 거듭난 새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의 지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제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단을 만드셔야 했습니까
?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것이지만 이로부터 약 2000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당신께서 지으신 사람이 붙잡아야 할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버렸기 때문에 이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제사의 방법은 하나님보다 더 큰 어떤 존재에게 예를 갖추어 경배를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는 생명을 살리는 단순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단을 만드셔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경배와 제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 제물, 위치, 방법 등의 조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흠이 없어야 했었습니다
.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사장으로 제사를 드리는 이유를 아는 사람 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제물은 흠이 없는 완전한 존재로서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죄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제사를 드리는 위치는 하나님께서 지정한 자리여야 하고, 네 번째로 그 방법은 제물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1.      제사장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최초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 자신이 신적인 의상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었다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부자유스런 활동이 죄 때문이었지만 이를 그대로 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은 짐승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짐승을 잡는 것은 아니라 아담이 자기 옷을 지어 입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야 했습니다
.
아담이 짐승을 잡을 때를 집어 보는 것은 은혜가 됩니다
.
아담의 영혼의 지성에 남겨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한 종교적인 의식은 남아 있기 때문에 짐승을 잡을 때, 이를 자기에게 허락하신 것과, 자기의 죄로 인하여 짐승을 희생시켜야 하는 후회스러움과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마음이 종교심으로 나타났을 것은 분명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짐승을 잡는 방법과 처리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씀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 없이는 아담은 여러 번의 실수를 했을 것이고 더 많은 짐승들이 희생을 당했을 것입니다
.
성경에는 아담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행위를 했을 것은 종교적인 행위였을 것이고 나중에 아들들을 낳았을 때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혔을 때에도 같은 행위들이 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가인이 농산물의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고 아벨이 짐승을 잡아 제물을 드렸던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린 행위를 보고 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 곧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다면 제사장이라는 별도의 직무를 가진 사람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하여라는 지식을 가지거나 아담에 의해 질서롭게 지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조화로운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제물
제물은 "저주를 받은 것(anathema-헬라어)"
, "멸망에로의 바쳐진 것(katathema-헬라어)", 봉헌제물(anathaema)"라는 단어 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은 상태를 감추기 위해 짐승을 죽여 가죽을 취했는데, 사람의 필요를 위해 짐승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바로 대신 저주를 받게하는 것,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은 짐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짐승이 죽으므로 사람의 필요가 채워졌고, 죄를 지은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저주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이 된 짐승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 물론 짐승은 사람과 같은 지성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지식을 가지지 못하지만 이를 유추하여 해석 해보면 제물이 된 짐승을 통해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을 얻는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짐승이 그럴 것입니다
.
"죄는 당신이 짓고서 왜 나를 죽입니까
?"
그렇습니다.
죄를 지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되는데 짐승이 대신 저주를 받고 죽어야 합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최초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뭐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저는 깨닫지 못하였을 때, 저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증오하는 분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지독한 증오로 분노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를 짖지 않았으면, 그들에게 정욕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존재로 나타나는 것은 영광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지의 열매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모르고 우리의 존재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으로 태어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이라는 알게 됨으로, 나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증오가 한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인 심판의 목적을 알게 된 나의 영혼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실지로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보이는 모든 이들을 향하여 미움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왜 우리를 태어나게 해서 비참한 존재가 되게 한 것입니까?” 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우리는 죄와 정욕의 아들로 낳은 것이 아닙니까?아담에게 죽어가는 짐승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왜 당신이 죄를 짓고 나를 죽입니까?”그 짐승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다른 짐승들에게 주는 경고가 무엇입니까?짐승들은 아무 연고 없이 희생당하는 운명을 보고 사람을 공격하지 않겠습니까?진승들은 언제 자신이 사람들에게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하나님의 아들 아담의 마음을 살펴 보십시오.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 짐승을 죽여야 하는 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자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여러분에게 인식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사도가 말 한대로 여러분은 창세전부터 지음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여러분이 태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예전에 여러분은 정욕의 열매였습니다. 영락없이 지옥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찾아와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러분이 정욕을 일으켜 세상의 사람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희생의 재물로 하여 자기들의 삶을 유지해 갈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이 짐승을 잡아 자기 옷을 지어 입듯이 하나님의 아들인 여러분이 죄로 말미암아 낳은 죄의 열매들인 사람들이 여러분을 재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지 않은 짐승이나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제물은 저주를 받을 대상인 범죄한 사람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에 제물은 바로 죄를 지은 장본인인 하나님의 아들인 여러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속의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죄를 범하지도 않은 분이시지요
.
그런데 이 땅에 사람으로 보냄을 받으셨고, 죄를 범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했고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였습니다
.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가 덮여 씌워졌고 제물이 되셔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죄를 자신이 짊어지셨고 우리의 죄를 없이하신 것입니다
.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3.      위치
예루살렘에는 명절만 되면 기드론 시냇가에 흐르는 피의 시내를 보게 됩니다. 짐승이 죽어 쏟아내는 피의 시내는 아무 땅이나 흐르게 할 수 없습니다.
피는 곳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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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생명인 저주를 받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런 현장은 온 세상 어디에나 아무렇게 만들어 지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정한 곳이 있고 그곳을 관할하는 사람을 따로 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구별을 정하여 어디다라고 딱히 정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이 아직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4.      제사의 방법

세상의 모든 일에는 규칙에 따른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모든 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규칙을 주셔서 질서와 조화를 통해 아름답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질서가 있고, 질서를 통해서 조화로운 어울림이 있고, 이것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심지어 사람의 영혼에서도 볼 수 있는 작용입니다. 이것을 모세를 통해 잘 드러내주셨습니다.
제사 방법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사람은 이런 질서와 조화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합니다. 그래서 가인과 같이 아무렇게나 제사를 드리고도 하나님께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의 방법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고 그 제물은 바로 자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왜 이런 규정들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질서로움과 조화로움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규정에 따라 질서들에 의해 조화롭게 시행됨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규정처럼 보이는 일들을 소홀히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이탈되는 죄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지식은 이런 조화와 질서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함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고 적용하여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
이런 조건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세상에 내어주셨습니다
.
내어주심이란?” 마음대로 처분 하도록 방치하여 보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예수님께 물으셔서 저주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
여러분은 이 의미를 이해하시고 들으시는지 궁금해집니다
.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다는 것은 저주의 제물로 제단에 올려놓으시고, 우리더러 칼을 들어 죽여 생명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을 이해하시는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
저는 어떤 교회에서 십자가의 신앙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아픔 그리고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는 그런 장면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감정으로 말씀을 잇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기독교는 진리가 아니어도 사람들을 울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슬픈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제물로 하여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의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미워해서 십자가에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지어 정욕으로 우리를 낳아 지옥에 갈 존재로 태어나게 한 것에 대한 분노를 예수 그리스도께 표출하는 진노입니다. 당신이 죄를 지어 정욕으로 우리를 낳아 지옥으로 보내는 것 아니냐! 우리가 저주를 받고 죄의 열매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이 죄를 범한 것 때문이다.”라고 증오를 붓는 미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잘 예언하였습니다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4)”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질고를 매어 주시고 우리를 가볍게 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
이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라고 분명히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짊어지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져가시려고 내어주심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던 그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죄를 죽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를 죽이는 우리와 내어주신바 된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질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고, 우리는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더 이상 죄가 우리에게서 세력을 잃고 지배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죄가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기반이 남아 있지만 주도권을 상실한 상태이고 우리의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심겨진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라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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