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광으로 태어난 존재가 지옥을 간다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게다가 태어나는 것만으로 지옥에 가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영광이 아니라 매우 슬픈 일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결정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았거나 순전히 부모의 결정으로 비롯된 것이지, 자기의 의지나 결정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존재로 부여받은 사람에게 지옥이라는 비극적인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기쁨이 아니라 분노가 더 폭발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처분을 받고 태어나=난다면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불평등한 일이 우리에게 이미 적용되어졌고,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태어난 비극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을 행하지도 않았고 비참한 운명에 처해지도록 잘못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물려받았고 심판까지 적용되어져 비참한 운명을 덮어쓴 존재이며 매우 불행한 일이고 불평등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는가?
불평등하고 억울한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필요합니다.
천국 시민의 조건
두말할 것도 없이 천국은 사람에게 천국이 원하는 조건을 갖추라고 합니다.
성경은 천국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조건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고 합니다.(요17:3)
천국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지거나 작게 가지거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명확한 어떤 기준을 두고 여기까지 알아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영생은 곧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 영생을 가진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가진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을 아는 자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려면 하나님을 알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싫어하고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 존재조차 부정하는 사람은 지옥이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는 불행한 일일지 모르지만 지옥은 매우 기쁜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알지 않으면 지옥에 갈 자격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여 알게 되면 그 아는 그것 때문에 지옥이 완강하게 싫어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복음 전도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자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겨지고 그 지식으로 신앙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혼에 새겨졌다는 것은 그 지식을 행위로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행위든지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으로 행하기 때문에 참된 지식을 가지면 그 지식대로 참된 행위를 하고, 거짓된 지식을 가지면 그 지식대로 거짓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노라 라고 말하면서 불신자와 같은 행위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불신자의 행위를 하거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곧 그가 아는 믿음의 지식이 잘못된 지식이라는 것을 자기 행위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불신자라는 판단을 받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처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때 그 사람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눅13:26~28)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자기의 거짓된 지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한 것이라는 의미이고, 이로 인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고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는 신자라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만 최종 마지막 날에 버림을 받게 되자 분노하며 원통 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의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 신자와 구별되는 것입니까?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지만 그 지식이 자기 안에서 행위로 드러나도록 한 것이 아니라, 본래 타락한 자기지식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이해하고 배워서 앎으로 타락한 본성으로 거짓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대로 삶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지식이 자기의 영혼에 새겨짐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낳은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지성에 있는 두 지식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기 영혼의 지성에 지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도중에 전도자의 소개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고 그 이전에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동안까지 가진 모든 삶의 지식이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자연 상태의 사람의 지식뿐인데 이 지식은 진리의 지식이 아니라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구조와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결코 서로 혼합되거나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연 상태의 사람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지식을 이해할 수 없고 인식할 수도 없으며 설령 이해하였다 해도 왜곡되게 이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불신자의 행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명확하게 구별되고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내용을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사람이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거짓되고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반드시 지옥 심판을 피할 수 없는데,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겨지게 되었다면 그 영혼은 두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게 됩니다 . 그러면 그는 천국과 지옥 중 어느 쪽으로 가게 됩니까?
심판에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심판은 그 사람이 천국과 지옥,둘 중에 어느 곳으로 가느냐를 판가름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조건을 가졌는지 만 살펴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옥을 가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롬3:28)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영혼에 가진 지식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만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배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라고는 한 점도 없고 모든 지식이 거짓뿐입니다.
그래서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뿐인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여 가졌습니다.
이는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알지 못하는 두 지식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생을 마치고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을 가졌는지, 심판을 받을 때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짐으로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천국에 이른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닌 거짓된 지식은 어떻게 되나요, 그 지식도 같이 천국에 가나요? 아니면 지옥에 갈 영혼과 천국에 갈 영혼이 서로 나뉘어 한 사람이 두 곳으로 나뉘어 가는가? 라는 문제가 되므로 이런 사고 자체가 비 성경적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니(갈2:20)”에서 라고 말한 것처럼 거짓된 지식으로 채워진 죄 된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몸이 죽어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라고 말한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죄된 옛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예수를 영접한 영혼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죄 된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지식이 예수의 죽음으로 죽은 상태가 되어 예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사람의 참 죽음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지식이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그 지식으로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탄생과 자기의지
이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닌데! 지옥 가는 것은 억울한 것이 아니냐? 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 할 차례입니다.
이런 문제는 사람의 근원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은 당연히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 본유지식이 영혼의 지성에서 조명해주지 않은 지성의 어두워진 상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사람과 자기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아직 깨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정욕 곧 부모의 욕정" 의 작용으로 태어납니다.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전 주의 눈이 나를 보셨으며”라고 시편기자가 말합니다.
시편 기자의 통찰력은 이미 사람의 근원을 보고 있었고,지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성령의 지시에 의해 노래하였습니다.여기에서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는 말은 아직 아무런 형체나 모양이 갖추어지지 아니한 상태를 말합니다.이 말의 의미는 사람의 정자나 난자가 서로 만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자와 정자도 개별적인 형질입니다.
이 두 형질이 만났다는 것은 완전히 형질을 갖춘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하고,“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는 말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생물학적인 물질의 형태가 아닌,형태가 이루어지기 이전 이것이 계획되어진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녀가 각각 난자와 정자로 형질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만나도록 하는 어떤 작용이 있는데 그것이 마음의 상태,곧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이 발생되어진 상태입니다.
남녀 두 사람이 이성간에 사랑을 가지고 서로 호감에 의해 욕정이 일어나면 서로 관계를 희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성간에 사랑으로 인한 욕정이 지성의 작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감각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욕망으로 보는 경향이 대부분입니다. 이 이론은 S.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에서 말하는 ‘리비도(성본능)이론’ 입니다. 이 주장은 근세에 대표적인 이론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진리처럼 정설로 왜곡 되어져버렸습니다.
프로이드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신 영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영혼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자기지식으로 인간의 욕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려는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사람의 탄생은 무책임한 성욕구의 결과가 아니라 책임있는 영혼의 지성이 낳은 지식의 결정체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자기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의심하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창6:3) 이로 인하여 “사람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으며,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지식의 결과 물인 것 처럼, 사람도 하나님의 지식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식을 내시고 그 지식으로 지음바 된 피조된 세계이고, 만물이 있기 전에 지식이 먼저 있었고, 그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나오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존재도 지식의 결정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내신 지식에 의해 사람이 지음을 받았고, 그 지음을 받은 사람이 지식을 내어 지식으로 행동함으로 생식의 과정을 갖고 후손을 잉태하여 낳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영혼은 하나님의 선에 입각한 지식을 내고, 그 지식으로 창세전에 아담안에 계획한 사람들만 잉태하여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함으로 욕정이 개입되었고,이 욕정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없는 잉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욕정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가 없는 사람만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된 사람도 이 욕정을 이용하여 잉태하여 사람을 낳게 됩니다. 그것은 본래 선에 입각한 욕정이 타락하여 선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작정된 사람과 작정되지 않은 사람을 잉태하는 구별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정욕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탄생합니다.하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작정된 사람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없는 사람을 잉태하여 탄생하게 합니다.
결국 남녀가 이성간에 사랑의 감정으로 욕정을 가지는 이 신비 속에 이미 잉태될 사람은 배태되었는데 그것이 욕정 속에 감추어진 지식이고 이 지식에 의해 욕정이 실제 관계를 통하여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성간에 정자와 난자가 결함을 함에 있어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야수와 같은 짐승들의 생식기능에 불과하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잉태되어 태어난 사람은 영혼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형체를 가지기 이전에 이미 남녀가 이성간의 사랑의 감정으로 욕정이 일어날 때 지식이 배태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시작은 욕정 안에 감추인 지식으로부터 시작되고 남녀가 사랑함으로 욕정을 가질 때 이미 사람의 영혼은 낳은바 된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는 형질이 생기기 이전에 벌써 태어날 사람을 보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가인의 마음에 엎드려 있는 죄를 보신것과 같이 욕정 안에 배태되어 감추어진 사람의 형질을 이룰 지식을 보신 것이고 이 지식대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게 되고 완전한 사람으로 잉태되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지식은 아무리 뛰어난 사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능히 하나님과 같이 인식하거나 볼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만물을 지식으로 지으신 하나님은 능히 보시는 것입니다.
지식의 발생과 드러남
신약성경 마태복음 5:28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라는 실제 행위가 자행되지 않았어도 그 사람은 이미 범죄를 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지성에서 이미 지식이 생성되어 마음에 반영됨으로 시행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는 벌써 죄가 시행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하나님께서 내시는 지식으로 말미암음 같이, 사람의 모든 행위도 역시 영혼의 지성에서 발생되어 나오는 지식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지식은 실지로 감추어져 있어서 사람이 보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지식이 행위를 드러내게 할 때 마음에는 벌써 그것을 행하기 위해 엎드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에 아벨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마음에 있는 그 소원(지식)대로 행하는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배태된 지식이 선한가? 아닙니다. 이 지식은 타락한 부모의 영혼안에 있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의 결과이지 때문에 이미 죄된 지식의 결정체로 이미 심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될 사람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그러면 여기 이렇게 기록하였을지라도 이글을 읽는 사람의 반응은 각자 달라서 어떤 사람은 이 지식으로 더욱 뜨거운 구원의 열정을 갖는 반면, 다른 사람은 이 지식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무감각하거나 더욱 악한 생각을 드러 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식을 깨달은 후, 구원의 확신이 없는데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고, 아무리 존재하는 것이 영광일지라도 존재함으로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간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운명이기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지옥으로 가게 될 비참한 운명을 가진 사람은 이런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아무런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지옥으로 가도록 정해버린 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결국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항변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이 객관적인 의에 적합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의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나면서 이미 죄로 정죄되고 그 정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의 비참을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행의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결과에 의해 선택할 수 없는 불평등하고 옳지 못한 결정이라고 항변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할 수 없고, 결국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인격에 대한 하나님의 불합리한 심판의 결과이므로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를 주장하거나 아니면 이것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 신학의 오류를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대로 행하여짐으로 그 결과에 따라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공의는 전무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이후 영원히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저주받은 운명 속에 태어납니다.
만약 이미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공의가 비로서 사람을 판단하여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다.왜냐하면 타락한 존재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찾으려는 생각 때문에 지적으로 매우 혼돈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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