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복과 복음(롬 1:11)

생명있는 신앙 2013. 3. 15.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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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보기를 원하는 것은 (1:11) 0315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11)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함께 계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16:15)” 이를 가리켜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역사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관계를 가진 민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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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관계 없는 분으로 이해 되었고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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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셨고 이방인을 자기백성으로 부르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에게 명하신 사명에는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26:19)”라고 하심으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별 없이 관계하심으로 유대에만 계셨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자기백성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사도들에 의해 급속히 이방인 들에게 전파되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 이전까지 복음이라기 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나타나셨고, 검은 세마포를 걸친 유대의 제사장들에게만 전유할 수 있는 히브리 민족의 신이었습니다. 사도가 다메색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대적인 개념으로 볼 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거나 관계하도록 한다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 것이고,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문을 열고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은 마치 자기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인 것을 원인으로 보인 것 같습니다. 사도는 이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11:12)” 이라고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이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롬 11장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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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연합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방인이 결코 근접할 수 없는 세상에서 구별된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가 로마에 보낸 서신에서 얼마나 간절히 그들을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비록 그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들이었으나 다수의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으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예전까지 사도가 가졌던 유대주의 사상이 세계인을 향한 사상으로 완전히 바꿔버렸고 자기의 사명이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의 중심세계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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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로 유대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일 뿐 이방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마음을 여는 것은 혁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인하여 사도에게 이런 혁신적인 사상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 속히 전해져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속히 전하기 위해서 자기가 배우고 익혀 왔던 예전 지식들을 부정했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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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결코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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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도에게는 성령의 임재가 필요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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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는 여러 서신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는 것은 성령의 임재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많이 언급합니다.(
3:2)
사도는 본서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그다지 구별된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구별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절대적인 유대인 우월주의 사상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고 하나님 아래 만민이 평등하며 누구나 복음을 받아야만 구원을 받게 되고, 유대인에게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배척함으로 버림을 받았으나 그 중에 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게 되고( 11:7),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은 오직 은혜로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1:5~6)
그러나 실지 유대인들은 오래전 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는 이점에 있어서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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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사도시대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임재 하시지 않으시면, 그 복음은 효과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진리를 전하여도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는 결코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오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이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19:2)”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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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성령은 언제나 같이 활동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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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는 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는 사람의 영혼을 조명하여 새겨지게 하시고 그 복음으로 믿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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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하시는 것은 사도 시대에나 오늘 우리에게나 언제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는 결코 사람으로 예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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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도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시는 것처럼, 복음을 뿌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오직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 부활을 사람들에게 말함으로 선포하고, 그의 선포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에 조명하셔서 심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들 앞에 설 때에 항상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의 말하고 전도함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게 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전
2:3~4)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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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가 로마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하기 얼마 전,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에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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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에게 있어서 믿음은 사람의 지식이나, 권면, 설득 혹은 권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열려있는 마음에 복음을 선포하여 뿌리면, 성령께서 그 복음을 그 사람의 영혼에 새겨 듣게 하시고 믿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남으로 성령께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심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마음으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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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세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에 관한 지식을 전할 때, 어떤 방법으로든지 설득하여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아십니까
?
이런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리 편이 되게 했는지 한번 보십시오. 저는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주님 앞에 갔을 때, 참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Semi Christian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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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김은 내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3:7~8)”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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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복음이 힘이 없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변질하여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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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라고 믿음으로 인한 삶의 변화와 행복을 제시합니다. 복음이 인생의 만족을 느끼는 모든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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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 믿으면 그런 복은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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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음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누가 자기의 오른 뺨을 돌려대면 왼뺨도 돌려대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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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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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는 게 아니라 복을 발로 차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자신은 순교를 당하고 죽었으며, 결혼도 못하고 자식을 낳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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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 행복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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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나 감한 매를 3번 태장으로 맞고 온갖 비난과 고소를 당하며, 가는 곳 마다 두려움과 위협에서 시달리며 살아야 했으며, 결국은 동족들의 고소를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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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오늘 우리는 삶의 행복과는 다른 복을 누린 사람인 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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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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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고 정욕으로 낳은 죄의 열매인 이방인들
,
태어나는 것이 불행인 하나님도 없는 저들
,
영원히 불태워져야 하는 비참한 저주를 앉고 태어난 저들을 위해
,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짊어지고 죽어주신 그 놀라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복음을 위해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직 복음을 사람의 영혼에 뿌려서 그 복음이 사람의 마음에 심기워 지도록 성령의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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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거리가 먼 인생의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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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좌절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행복의 비결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난과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 것 을 이기고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인내하고 참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삶이 바뀌고 그들에게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 로마인들에게 은혜를 얻을 수 있는 방법과 인종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지 그 방법, 로마 세계에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여, 그들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전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정욕의 아들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원수인 죄의 열매들과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 되었는지를 전하기 위해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들입니까
?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까
?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겠습니까? 아벨처럼, 그리스도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죽임을 당하기 위해 보내어졌습니다
.
여러분이 보내어지지 않았으면, 여러분이 정욕을 일으켜 낳은 죄의 열매인 저들이 여러분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
반드시 찾아 죽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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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러분의 죄의 정욕으로 낳은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놀라운 소식을 속히 전하십시오
.
그들이 그 복음을 듣지 않으면, 그들을 세상에 있게 한 죄의 대가로 그들에게 맞아 죽으십시오
.
포도원의 농장에 보냄을 받은 종들 처럼(
20:9~16)”,   
아멘

2013, 0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