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1:7)

생명있는 신앙 2013. 3. 25. 19:4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그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로마서 3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까? 
사도는 "율법의 행위로 그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3:20~21)"라고 말하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라고 말하고,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는 복음에 나타난 의는 율법의 의와 대비되는 의로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것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말함으로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한바와 같이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말하는 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태어난 본성 자체의 죄를 말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삶속에서 행한 삶과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고, 원수로 사는 이방인의 삶 자체를 죄라고 말하였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사도가 언급한 말의 의미를 너무도 많이 왜곡하거나 잘못 생각한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의 서신의 첫글에 기록하는 것은 복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사도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으니라(롬3:23~24)" 라고 말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열심을 다하지만 결국은 율법을 곡해하여 율법으로 하나님을 죽이는데 사용하였고 , 사람은 어떤 행위로든지 구원을 얻을 의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자신도 역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를 이루어 온전한 삶을 살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고, 지난 날의 삶은 율법의 참 의미를 왜곡함으로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 자신의 확신으로 볼때 의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들고 순종하는 삶이었으나, 그 삶이 결국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는 죄를 더하는 삶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함으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삶이 의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불의를 행하는 왜곡된 삶을 살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결국 사람의 본성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어떤 지식도 있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옳바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한 사랑을 무한정 쏟아부으심으로 지속적으로 의를 이루도록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의를 이루시려는 다른 방법을 행하셨는데,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이미 오래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복음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이 율법의 의를 행하려고 열심을 다 한 것이 아니었고,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복음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며, 그 복음이 성취되도록 어떤 도움을 주거나 이를 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심을 가진 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하셨고 그 것을 믿으라고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롭게하기 위한 또 하나의 다른 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깨달을 수 있는 지식이 자기에게 없으므로 소경이 되었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미래,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우리 자신을 분명히 비춰주는 거울이 됩니다.  
사도는 복음을 "그 아들에 관하여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으니(롬1:3~4)"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에 의하면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하나님, 그리고 죽임을 당함,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심, 여기에 사람이 관여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복음과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는데 있어서 두가지의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이 복음을 만났을 때  영혼안에서 일어나는 지성의 작용에 따라 성령께서 조명되는 상태로 복음을 받는것과 성령의 조명되지 않고 복음을 받을 때 현저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물론 전파되는 복음에도 두가지의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실 수 있는 복음과 조명해 주실 수 없는 복음으로 구별됩니다. 이는 복음의 내용이 분명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요한복음에 기록했습니다(요15:26, 16:13, 요일5:6). 이 기록은 예수께서 강화하시던 말씀 가운데 있는 친히 증언하신 말씀이지만, 요한일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직접 언급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과 진리는 항상 같이 있고,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대로 말하면 복음을 말할 때 성령께서 반드시 같이 계시므로 조명되지만, 진리대로 복음을 말하지 않고 사람의 지혜의 말이나 설득력으로 한다면 성령이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조명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2:1~5).    

오늘의 개혁교회들 조차도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보면 "인생의 행복 서두로 이야기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행복을 찾으십니까?"
"실패의 쓴잔을 받고 괴로워하십니까. 성공을 원하시지요?"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여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행복을 얻는 길, 고통을 벗어나는 길, 인생에서 성공하는 길, 그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접근해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그를 죽여 버렸고, 심지어 자기 백성마져 그를 싫어해서 죽였고, 죽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셨습니다."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매게체로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공과, 행복을 화두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을 끌어준 다음 서서히 복음으로 접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런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면 전세계는 이미 복음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심과 부활하심 만으로 전하고 결과는 성령의 조명하심에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사람의 설득과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고전 2:1~5)  
이 복음에는 많은 배경 설명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설명이 진리대로 말하여졌을 때, 성령께서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조명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켜 새 사람을 만드시는 것입니다(행 3:37).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이방인에 관하여, 그리고 죄에 관하여, 영혼에 관하여 많은 내용들을 조금씩 설명해 왔습니다. 
오늘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 했지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없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죽였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는데, 이 두 마디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을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엄청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사람이 그를 죽여 버렸다". 이 것은 사실이고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 인식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이 아닌 사람의 지혜나 인간의 감정으로 보면 예수께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성인으로서의 경지에 이르는 휼륭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을 향한 위대한 용서와 관용 그리고 절대적인 자아 해탈의 경지에 이른 휼륭한 업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사람은 2천년전의 로마인과 유대인들이지 오늘 대서양과 태평양 건너 다른 지역에 있는 오지의 인디언들에게는 아무관계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판단은 휼륭하고 관용을 베푼 평화의 왕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과 본이 되는 삶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추앙하고 종교적 대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2천년의 시간과는 관계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우리 자신이 그를 죽인 장본인이 되게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데 참여한 생생한 근거로 제시하여 우리를 죄인이 되게합니다. 비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의 직접적 행위와는 구별된 생각에 휩싸여 항상 갈등을 같게 하지만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되면 시간의 장벽을 제거하고 당시 고난 당하시던 그 장소에 우리가 세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로마인으로 세워지면 예수에게 고통을 주는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고, 우리가 예수를 저주하고 욕하고 침밷고 십자가에 매달아 저주받게합니다. 
성령께서는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라고 우리에 조명하고, 이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죽인 그 용감한 범죄에 대해 치를 떨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엄청난 죄악을 느끼게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에 더 큰 죄를 더하고,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에게 임하여도 사람은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을 죽이기 까지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예전에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약속하셔서 구원을 베푸실 은혜를 주셨으나,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마져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로 행하여 하나님을 죽이는대 앞장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에 대한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신의 부당함을 변명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것도 모자라 이제는 하나님을 죽였다" 아무도 하나님을 원수로 행하는 이 범죄에 대해서 용서 받을 사람이 없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보이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이 친히 사람으로 오신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 사랑을 외면하고 미움과 원망과 분노로 일관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지옥으로 내 보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에 변명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것이 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두실 수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에게는 자비와 사랑을 의인에게는 생명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이셨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변명을 잠재웠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죄를 더하여 자기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랑을 미워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이 사건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대로 죽음에 두시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살려야합니다. 그러나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릴수 있는 능력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도 할수 없습니다. 죽음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은 생명이신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으며 모든 권세를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죽였는데, 죽음을 당하신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여러분이 죽였는데, 여러분이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며 배척한 죽임 당한 그 분이 이제는 심판자로 서계십니다. 
그분 앞에 떳떳하게 나서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이 심판을 부당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에 죽임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삶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는 영원한 단절로 결론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용서가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고,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억울함을 호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죽였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영혼은 자기가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했으니 지옥으로 들어가도록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정욕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단의 꼬임에 넘어간 조상의 범죄가 자기에게 유전된 것이니 실지로 자기는 죄를 지은것이 없습니다. 그저 존재한 것이 죄가 된 억울함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기만 한 것으로 인하여 지옥에 가는 것을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으로부터 사람도 의에 대하여 옳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는 사람을 지옥에 두시는 것, 그것은 결코 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억울하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자기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사람에게는 그런 의를 이루기 전에 반드시 자기안에 있는 죄를 죽이지 않으면 결코 의를 이룰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사람들이 죽였으니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 의를 이루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가운데 태어나거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굳이 죄를 따진다면 예수께서 오셨을 그 때에 태어 났더라면 예수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처럼 예수를 따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무죄함을 증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들을 보냈을 때 스스로 나를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제자들?"
"그들은 당신이 고난 당하실 때 피하여 도망갔고 자기 생명을 아까워 예수를 버렸다."
"너희들의 생각이 얼마나 악하고 위선인지 지금 드러내고 있다."
"제자들은 성령을 보내셨을때 비로소 믿었고, 당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보낸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믿은 사람들이다"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그것은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살리셔야 합니다. 이것은 범죄한 사람의 영혼이 강력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영혼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영혼은 자기가 무지에 빠져 있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 생명없는 삶을 삶며,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들 앞에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왔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갈 자신들을 존재하도록 정욕을 일으켜 낳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분노를 쏟아 내 죽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이유와 그 아들로 죄를 담당하시는 이유, 그리고 죽임을 당하시는 그 이유의 모든 비밀이 사도의 영혼에서 성령에 의해 분명히 조명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나타난 의는 이것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시고, 둘째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셋 째 자신을 죽음에 두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정리하면 "너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희가 내 사랑을 받고 나를 믿으면 너희를 다시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살아나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는 이전 것을 새롭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우리에게 심겨지는 것입니다. 

아멘

 

동영상 설명 보기 : 복음의 나타난 의 (youtube)

2013, 0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