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31)

생명있는 신앙 2013. 4. 16. 04:30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31)

 

사도는 지금까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 악을 행하는 존재임을 선언하고. 또한 그들이 그 악을 행함으로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행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형의 규범은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므로 지금 결론을 미루고 앞으로 시간이 있는 대로 이 점을 살펴 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려고 하는 중요한 것은 사도가 사람에게서 나오는 온갖 행위들을 열거 하면서 사람이 이렇게 행하는 행위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므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 제 마음대로 행하되 심지어 악행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여 결국은 나열된 추악한 심판을 받는 일을 행하도록 무관심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이런 추악한 행위들이 어떻게 가능할까? 

본래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부터 이런 일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이런 악행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가?

분명한 어떤 근거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야수들은 사람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적인 환경에서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이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자기의 영역을 침해 당하였거나 필요한 욕구를 채우지 아니하였을때를 재외하고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동물들의 왕들이 야수들이나 연약한 짐승들을 잡아먹었다고 해서 그 동족의 짐승들이 사자나 호랑이에게 분노하여 시위를 한다거나 악 감정을 가지고 덤벼들어 호랑이를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수들은 생각하는 지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닥쳐진 불행하고 억울한 일에 대해 반응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분노와 미움과 같은 이런 감정들은 야수들에게 있으나 지식화 되어 그들의 지성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고 단순히 자기의 보호 본능과 식욕을 채우기 위한 욕구에 재한 된 잔인성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복이란 없습니다. 만약 이들이 보복하는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향하여 덤벼든다면 어떤 성이라도 동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나열한 합당치 못한 일들은 사람에게만 있는 지식의 결과들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영혼의 감성이 지각 하였고, 보편화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으로 누구나 이 지식을 경험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고 자기가 인식하여 자기 스스로 드러내는 악한 행위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막을 수 있는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런 지식들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억제하고 절제하려면 고도의 훈련된 지식이거나 아니면 타고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불의, 추악, 탐욕, 가득한 악,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의 미워하심,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를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한 것이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은 경험하지 않았고, 이런 지식들의 조명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서 나와 온 사람에게 퍼뜨려졌습니다. 한번도 경험하거나 시행해 보지 않은 그런 일들이 지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갖고 인식하여 행하도록 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있고 사람에게서 나와 온 세상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려 하는 것은 이것들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것을 살피고 그리고 그 치유책을 제시하여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을 접근하여 답을 찾으려 할 때 마다 최초 인류의 아들 가인과 아벨을 조명하여 봅니다.

성경은 이들을 우리에게 조명함으로 우리가 어떤 상태이며 누구인지 분명한 정체성을 밝혀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아보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붙잡도록 합니다. 물론 그들 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을 조명하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만 굳이 가인과 아벨로 조명하여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단순성 때문이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으면 답이 없는 것을 알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먼저 그 자신들의 신분을 제사의 결과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이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았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가인은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제사를 드린 반면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구별된 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반면, 아벨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드러난 이구별이 반영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에서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인은 무지와 결함을 가진 왜곡된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조명하여 지식을 가진 반면, 아벨은 성령께서 조명 하셔서 하나님을 감각할 때 이미 그의 영혼에 진리의 지식이 새겨져 그 지식으로 조명을 받아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본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다른 점은 진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아벨과 성령께서 조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지식으로 조명하여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하여 우상을 만들어낸 가인과의 차이점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께서 동일하게 두 사람에게 조명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감각을 가지게 하였으나, 가인의 영혼에는 진리가 심겨지지 않아 자기지식으로 조명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지식을 가지고, 아벨은 진리가 심겨져 진리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본질대로 아는 지식에 의한 인식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한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같이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런 감동도 갖지 않고 졸리기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베푸시는 동일한 은혜의 비는 모두에게 임하고 있고 복음의 빛을 동일하게 비취고 있는데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는 이를 약속의 아들과 종의 자식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족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백세에 낳은 이삭으로 분명히 나타났고, 종의 아들은 동일한 아브라함을 통해 몸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삭의 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이들은 뚜렷한 구별이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반드시 낳아야 하는 아들로 아담 안에서 작정된 아들을 말하고, 종의 아들은 낳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미리 아시고 허락하심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 세계에서 우리는 비집고 들어갈 틈을 발견할 수 없는 소외된 사람이라는 것을 구별된 두 사람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삭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받은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령께서 조명하실 때 진리를 그의 영혼에 심기어 하나님을 진리대로 보게 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성령의 조명이 받을지라도 그의 영혼에 진리가 심겨지지 않으므로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여 제 멋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존재가 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아들과 허락에 의한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정욕을 일으켜 아들을 낳았는데 죄의 열매 곧, 정욕으로 낳지 않아도 되는 자식이 가인이었고,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있어서 진리가 그 영혼에 심겨지지 않음으로 진리의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로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작정한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분명하게 두 부류로 이 세상에 구별되어 태어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고, 이때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태어나야하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죄와 사람과의 관계를 살펴 보십시오.

두 아들들 가운데 누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세상에 가져온 장본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작정된 아들 아담이 죄를 범하여 이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더 나아가 그들이 정욕을 일으켜 죄의 열매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데 그들이 곧 가인과 비 이스라엘인 모든 이방인들이며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아들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죄를 범하여 죄의 열매들인 우리를 낳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반열에 들어 설수 없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는 버림받은 유기된 사람들이라는 분명한 지식 외에 다른 지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죄의 열매들의 영혼이 지옥을 향하여 가는 비참한 운명에서 겪는 아픔과 설음을 보아야 합니다.

최초 사람을 지으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사람의 구조적으로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과의 소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감각하고 느끼고 아는 것을 육체가 느낄 수 있었고 감각할 수 있어서 이것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배가 되어 야수와 같이 육체의 욕구에 매이지 않고 영혼의 지성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하여 욕구를 제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을 우리의 수명을 다하면 육체는 썩어 흙이 되고 영혼은 하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겠지요. 우리는 이 신학적 내세를 현세와 연결하여 성경을 해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아버지 앞에 간 영혼은 인격체이며 육체가 없이도 독립적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육체를 덧입고 영원한 영화의 삶을 살 것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제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바로 이점들에 대해서 많이 소홀해 왔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아담안에서 작정하여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 했다는 것을 아주 잘 압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육체 안에 있을 때 분명히 알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범죄 했을 때 영혼과 육체의 소통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즉 영혼으로 하여금 신비하고 영원한 일들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그것을 육체에 인식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정욕으로 낳은 가인의 영혼을 살펴보십시오. 그가 의식을 가지고 영혼의 감각으로 신비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작정된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자신의 미래는 비참한 지옥을 향하는 유기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실은 실지로 사실입니다만 이를 뒷받침할 강력한 증거를 유추할 수 있는 직접적인 성경의 말씀을 찾을 수 없지만, 실지로 성경이 그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기된 자식들, 가인과 이스마엘, 에서를 계보로 한 모든 이방인들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지옥을 향하여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적대적이고 분노를 쏟아내며 미움의 감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를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골1:21)이라고 말하였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라 하였는데 이때 육신의 생각이 곧 타락한 사람의 생각을 의미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1 3:13,15)" 예수께서는 "나의 택함을 받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7:7)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죄의 열매인 이방인의 영혼들이 자기들의 미래에 처해질 비참한 운명에 대한 분노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구조상 영혼과 육체의 소통이 된절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죄의 열매인 정욕의 자녀들의 영혼이 자기들이 처해질 비참에 대한 분노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를 쏟아낸다면 이 세상은 온전히 존재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타락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소통이 되지 못하여, 육체가 영혼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가 열거한 수많은 죄로 말미암은 악행들은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가인과 같은 영혼들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킨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의 적극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행위로 표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고,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고 그 행위로 버림받은 정욕의 자녀들과 화목하시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요1:11)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욕을 일으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세상 사람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 행위가 너무도 추하고 부끄러운 것도 알게 되므로 그에 대하여 희생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세상과 싸워서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달라고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하셨으며, 오리를 동행하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시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죽기위해 살라고 하신 것이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아멘

 

2013, 04, 16